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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주일학교 교육의 역사,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가?"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회장:조현진 박사/한국성서대 교수)와 한국교회사학회(회장:박경수 박사/장신대 교수)기 지난 3월 26일(토) 한국성서대학교(온라인 ZOOM 병행)에서 공동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주일학교 교육의 역사:한국주일학교 연합회 100년'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과거 한국선교 초기 주일학교 연합활동과 관련된 선교사와 국내 주일학교연합회 등의 사역을 전반적으로 평가하는 시간이 됐다.
이날 주제강연자로 나선 박용규 박사(총신대 명예교수)는 '주일학교운동과 조선주일학교연합회'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와 한국교회사학회가 온오프라인으로 공동학술대회를 진행하고 있다(사진출처:한국교회사학회 홈페이지)
주일학교연합회 창립 100주년
주일학교 중요성 강조했던 선교사들
박 박사는 "1922년 결성된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한국선교가 시작된 이후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라며 "개신교 선교사들은 학교를 중시하는 미국의 신앙전통 속에서 교육을 받은만큼 처음부터 주일학교를 선교사역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중요한 책무로 생각했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한국에 파송된 북장로교선교회와 남장로교선교회는 선교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교부가 개설된 후에는 개척예배와 주일학교를 거의 동시에 가장 먼저 착수했다"라며 "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 여사는 1888년 1월에 '이화학당에서 12명의 소녀와 3명의 부인, 3명의 선교사, 그리고 선교본부의 한 명으로 주일학교를 시작했다'라고 밝혔고, 곽안련에 따르면 1890년에 주일학교가 시작되었고, 1897년에는 평양에만 주일학교가 다섯 개가 되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아펜젤러는 세상을 떠나기 전 1902년 5월 그의 마지막 보고서에도 자신이 47개의 교회와 주일학교를 맡고 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라고 덧붙였다.
한국 주일학교교육의 역사
이날 박 박사는 1884년 9월 20일 알렌이 입국하고 나서 현재까지 한국의 주일학교운동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조선주일학교연합회(1948년 3월 23일 대한기독교교육협회로개칭)를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설명했다.
박 박사는 주일학교운동은 한국교회사적으로 1884년~1905년, 1905년~1938년, 1945년~1960년, 그리고 1960년부터 현재까지 나눠 전반적으로 평가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주일학교
감리교회의 깊은 관심 속 성장
"주일학교가 장래 교회다"
그에 따르면 1890년 처음 네비우스의 방한을 통해서 기초가 놓인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주일학교와 깊이 맞물려 진행됐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주일학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고, 주일학교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가장 큰 실천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
박 박사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채택되던 1890년에 시작된 주일학교 사업은 곧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을 보완하는 질적 성장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아갔고, 그 수도 놀랍게 신장했다"라며 "1897년 평양에만 5개의 주일학교가 운영되었고, 교재를 인쇄하여 공동으로 사용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1934년 한국선교 희년 기념식에서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장 로버츠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훈련을 위해 한국교회가 초기부터 교사훈련, 성경통신과정, 여름성경학교 등을 실시해 네비우스 원리를 주일학교와 교회 전체에 적용하도록 노력을 기울여 왔다"라며 "한국주일학교연합회(The Korea Sunday School Association)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면서 한국교회의 복음화를 위해 협력해 왔다"라고 평가했다.
박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감리교선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주일학교를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감리교는 1893년 평양, 제물포, 서울 등 여러 교회의 주일학교를 망라해서 주일학교연합회를 조직하고 조지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 趙元時)가 위원장을 맡으면서 주일학교가 상당히 발전했다는 설명이다.
박 박사는 미 감리교 연례보고서를 인용하며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다.
"1893년에 5개의 주일학교가, 1895년에는 정동과 이화에 각 1개씩 2개, 상동교회 1개, 동대문교회 1개, 제물포교회 1개 합 6개로 발전했고, 1896년에는 7개, 1897년에는 15개, 그리고 1898년에는 무려 28개로 늘어났다. 학생 수도 1893년에 133명, 1895년에 385명, 1896년에 512명, 1897년에 967명, 그리고 1898년에는 1,402명으로 증가했다."
또한 1900년 주일학교를 처음 시작한 남감리교선교회의 주일학교 사역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했다.
"남감리교선교회도 설립 당시 서울과 송도에 각 1개씩 전체 2개로 시작한 것이 1903년에는 11개, 1905년에는 34개, 1918년에는 138개, 그리고 1930년에는 359개로 급신장했다. 학생 수도 1900년 80명에서 1903년에 440명, 1905년에 1,770명, 1918년에 5,911명, 그리고 1930년에 13,303명으로 급증했다."
박 박사는 "감리교선교회가 이렇게 주일학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어느 교회나 주일학교를 잘 육성하면 아이들이 많은 한 학교로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주일학교는 곧 '장래 교회'라고 확신했던 것이다"라며 "감리교회는 이와 같은 안목을 갖고 주일학교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1888년 주일학교가 조직된 후에는 바로 배재학당 안에 설치된 인쇄소를 통해 여러 종류의 주일학교 교재를 출판하기 시작했다"라고 피력했다.
특히 평양이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하면서 이 지역 주일학교는 서울의 주일학교 교세를 넘어서기도 했다.
박 박사는 "1897년 연례 모임에서 그래함 리는 주일 오후에 판동교회 (장대현교회 전신)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오전에는 다섯 번의 주일학교를 운영하고 있다고 보고했다"라며 "매 주일 각 예배 처소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쥬일학당'의 경우도 평양이 압도적으로 많아 121개 중 평양은 89곳으로 31개인 서울에 비해 무려 세 배 이상이나 많았다. 주일학교 수만 뚜렷이 차이 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일학교에 재학하는 학생들의 수에서도 평양과 서울이 차이가 분명했다. 1901년을 기준으로 당시 북장로교의 전체 8,668명의 주일학생 중 서울이 1,450명이고, 부산이 52명인 반면 평양은 7,166명으로 주일학교 학생 수가 서울이나 기타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라고 설명했다.
평양대부흥운동과 주일학교운동
본격적인 주일학교 교육 시작
박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에서 주일학교운동이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의 연합운동 성격으로 발전한 것은 한국교회가 놀라운 대부흥운동을 경험하면서부터였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이 일어나고 부흥운동이 한반도 전역으로 점차 확산되면서 주일학교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것.
박 박사는 "1905년 9월 4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가 함께 모여 한국복음주의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Protestant Missions in Korea)를 결성하고, 공의회 안에 주일학교 위원회(a Sunday School Committee)를 두고, 주일학교 교재 출간과 기독교 교육을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으로 추진했다"라고 평가했다.
이후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1905년부터 1911년까지 주일학교는 급속히 성장했다. 박 박사는 " 1907년 4월 전체 주일학교는 북장로교가 596개 49,545명, 북감리교 153개 12,333명, 남장로교 55개 1,784명, 남감리교 33개 1,770명, 캐나다 장로교 58개 3,366명, 호주장로교 5개 204명으로 주일학교는 900개이고 전체 주일학생 수는 69,002명이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와 같은 폭발적인 성장에 힘입어 1907년 한국복음주의연합공의회는 세계주일학교연합회에 한국 주일학교 발전을 위해 사역할 사람을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고, 1908년 세계주일학교연합회 한국지부(the Korean brach of the World’s Sunday School Association)가 결성되었다"라며 "또한 전국 주일학교 공과를 통일하고,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회에서는 주일학교 공과를 출판할 기금 확보에 들어가는 한편 전국 주일학교 사업을 총괄할 총무를 세우기도 했다"라고 피력했다.
이어 "장로교는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한 후 독노회에 주일학당(주일학교)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위원회 산하에 주일학교 공과위원회, 주일학교 공과부, 주일학교부, 주일학교 진흥부를 병설하여 주일학교 교육을 교단적인 차원에서 추진했다"라고 덧붙였다.
세계주일학교연합회와의 교류
주일학교 교육의 체계화
1913년 최초의 주일학교 대회
3.1운동과 주일학교운동
박 박사는 "1905년 복음주의연합공의회가 조직되고 주일학교 교재 통일공과가 보급되면서 주일학교 교육은 이전에 비해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라며 "주일학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윤치호는 1907년 5월 18일부터 23일까지 이탈리아 제 5회 로마 세계주일학교대회에 개인 자격으로 참석해 연설하는 기회를 가졌고 또 실행부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 주일학교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이 점차 높아지면서 1908년 4월에 문동환이 '세계주일학교연합회 특파원'이라고 부른 브라운(Frank L. Brown)과 해밀(H. M. Hamill)이 한국 주일학교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처음으로 내한했다"라고 덧붙였다.
이와 같은 세계 교회 주일학교연합회와의 교류 속에서 한국의 주일학교 교육은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1911년에는 세계주일학교협의회의 협력과 지원 속에 '한국주일학교협회 실행위원회'가 조직되면서 해외 선교사들로만 구성됐던 주일학교위원회에 한국인들도 위원으로 합류하게 됐고, 주일학교위원회는 1911년 세계주일학교연합회의 원조를 받아 세계주일학교 통일공과를 번역 출판하기도 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1913년 4월 19일 서울 경복궁에서 세계주일학교대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에서 주일학교 교사 14,700명이 모여 처음으로 조선주일학교대회를 열었다"라며 "세계주일학교연합회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것은 한국주일학교를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사적으로 너무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라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3.1운동 이후 주일학교운동이 본격적인 도약의 길을 걷게 됐다는 것이 박 박사의 설명이다.
그는 "3.1운동 이후 아동교육의 중대성과 사명감을 절실히 느껴서 기독교 교육에 힘을 기울인 결과 유년주일학교, 하기아동성경학교, 아동성경구락부 등 유년을 위한 종교교육이 크게 발전되었다"라며 "단순히 복음전파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어린 심령들에게 기독교 정신을 심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 이상을 삶 속에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사회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장로교가 진흥운동을 감리교가 세기운동을 전개하면서 주일학교운동이 사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한국교회와 선교회 차원에서 연합으로 추진되었다"라며 "1910년대와 1920년대 장로교와 감리교의 주일학교연합운동은 한국교회사에 높이 평가 받아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이것은 주일학교 발전의 도약을 가져다 준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래서 기독신보는 1924년 한국교회 발전은 주일학교 발전에 있었다고 증언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 결성과 활동
장로교의 진흥운동과 감리교의 세기운동
동경에서의 주일학교대회
전국주일학교대회
박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1922년 11월 조선주일학교연합회 결성을 전후하여 한국의 주일학교운동을 촉진시킨 3개의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장로교의 전진운동과 감리교의 세기운동이었고, 둘째는 1920년 동경에서 열린 제8회 주일학교대회였으며, 셋째는 1921년에 있었던 전국주일학교대회다.
박 박사는 "미국의 '새시대운동'(New Era Movement)과 유사한 1919년 9월 총회 때 교단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추진한 한국장로교의 '진흥운동'(Presbyterian Forward Movement in Korea)과 감리교의 '세기운동'(the Century Movement)은 삼일운동 이후 한국의 주일학교운동을 저변 확대시키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설명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장로교를 중심으로 주일학교운동과 연계해 전개된 진흥운동은 1919년부터 1926년까지 그리고 1929년부터 1935년까지 두 기간에 걸쳐 실시됐다. 진흥운동의 직접적인 가장 큰 결실은 교회 내의 젊은이를 위한 주일학교였다.
박 박사는 "1920년 11월 블레어의 진흥운동의 보고에 의하면 9개 항목에서 25%에서 100% 증가했다"라며 "교회 출석은 25%, 기도회 참석은 50%, 주일학교 출석은 25%, 사경회 참석은 25%, 해외선교헌금은 100% 증가했다. 남장로교 스윈하트는 1년 후 '주일학교 활동'에서 8,487명의 세례 입교인을 가진 남장로교선교회에서 주일학교 학생 등록자가 입교인의 3배가 넘는 27,168명이라고 보고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박 박사는 "주일학교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기독교 가치관을 심어주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와 같은 주일학교의 놀라운 신장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혹은 퇴폐문화에 물들기 쉬운 젊은이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고, 이들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교회 내의 새로운 일감을 제공하여 교회에 새로운 갱생운동을 일으키는 동력을 제공했다. 그 시대 주일학교에서 훈련받은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20년 후 한국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로 성장했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1920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제8회 세계주일학교대회는 한국교회 주일학교운동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대회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이유에 대해 박 박사는 "제8회 세계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한 각국의 대표 300여 명이 7회에 걸쳐 한국의 주일학교운동을 순회하고 지원하기 위해 대거 한국을 방문했다"라며 "이들은 서울과 평양을 비롯하여 개성과 대구 등 주일학교가 왕성한 지역을 순회 시찰하고 강연을 하면서 한국주일학교운동을 독려했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1921년 전국주일학교대회도 개최될 수 있었다는 것. 박 박사는 "1921년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전국에서 960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승동교회와 YMCA 대강당에서 제1회 조선주일학교대회가 개최되었다. 한국 전역은 물론 서간도와 북간도에서도 참석했다"라며 "이러한 영향에 힘입어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조직하게 됐다"라고 평가했다.
결국 1922년 11월 1일에 10개 단체의 대표 27명은 성서공회 회의실에 모여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결성했다. 박 박사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효과적인 운영을 위하여 산하에 실행부위원회, 교육부위원회, 편집부위원회, 재정부위원회, 검열위원회, 통계위원회 등을 두었다. 1922년 창설부터 1938년까지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황금시대'를 보냈다"라고 주장했다.
박 박사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역은 방대하다. 무엇보다 해방 전 주일학교 교육 관련 문헌들을 출판한 일, 세계주일학교대회에 대표들을 파송하여 세계주일학교연합회와 지속적으로 호흡을 같이한 일, 한국에서 전국주일학교대회를 개최한 일은 중요한 사역이었다"라고 평가했다.
특히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장로교와 감리교의 주일학교연합운동은 1928년에 전환점을 맞았다. 이것은 감리교의 신학적 변천과 맞물려서 진행되었다"라며 "감리교는 장로교와는 별도로 주일학교운동을 교단 차원에서 진행했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출판하던 주일학교 공과도 1937년부터 나뉘어 출판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1930년대 접어들어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적 차이가 표면화되면서 더 이상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사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으로 판단된다"라며 "이로써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추진해 오던 주일학교운동의 협력 시대는 종식을 고했다"라고 주장했다.
조신주일학교연합회 강제해산
박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장로교와 감리교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한국교회 주일학교는 꾸준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1938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일본 군국주의 압력으로 세계연합회에서 탈퇴하게 됐다.
박 박사는 "일제가 국내연합기구를 해산시키거나 일본연합회에 강제 가입시킨 것은 쉽게 정부통제 산하기관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라며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해체 이후 주일학교운동은 면려청년회나 조선기독교청년회처럼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일제의 압박으로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해산됨으로 말미암아 각 지방의 주일학교연합회도 존속이 위협받기 시작해 주일학교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해방 이후의 주일학교운동 재건
하지만 해방과 더불어 주일학교운동은 재건되기 시작했다. 박 박사는 "1947년 1월 14일 오전 11시 새문안교회에서 김관식 목사의 사회로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재건운동이 시작되었다"라며 "당시 장로교 대표 15명, 감리교 대표 10명, 성결교 대표 5명, 북장로교선교회, 남장로교선교회, 캐나다선교회, 호주선교회 각 1인과 감리교선교회 2명으로 조직되었다"라고 설명했다.
박 박사는 "과거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주일학교연합회를 구성했지만 성결교가 참여하면서 3개 교단이 함께하는 연합회로 재건된 것이다"라며 "1947년 1월 14일 31명의 회원 중에 27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의장 김관식 목사 사회로 열린 해방 후 첫 총회에서는 1938년 해체되었던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다시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한경직 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했다"라고 덧붙였다.
결국 해방 이후 조선주일학교연합회의 주일학교 교육운동이 본격화됐다. 1947년 2월 세계주일학교연합회에서 보내준 주일 공과책 6만권은 전국주일학교연합회를 통해 전국으로 보급됐고, 국내 주일통일공과가 여러 필진들에 의해 집필되면서 보급됐다.
박 박사는 "1948년 3월 23일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제2회 총회를 개최하면서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대한기독교교육협회로 명칭을 바꾸었고, 세계기독교교육협회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라며 1950년대 이후 대한기독교교육협회가 한 일을 전반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첫째, KNCC와 상호 긴밀한 유대관계를 갖기 위해 KNCC에 가입했다.
둘째, 주일학교에만 집중했던 것에서 기독교학교(중고등학교 및 대학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셋째, 발전된 형태의 부별 계단공과(유치부 1~2권/유년부 1~3권/초등부 1~3권/중등부 1~3권 등 총 11권)를 편찬했다.
넷째, 수많은 기독교 관련 도서를 출판했다.
다섯째, 세계기독교교육협회와의 교류 등 국제기구와의 교류를 지속했다.
여섯째, 전국 학생들의 종교인구 실태조시를 실시했다.
일곱째, 기독교교육의 저변확대를 위해 기독교교육관련 방송을 시도했다.
여덟번째, 1957년 3월 28일-4월 2일까지 대한기독교서회 회의실에서 주일학교 용품 전시회를 가졌다.
1960년대 이후의 주일학교운동
한국교회 분열 속 연합정신 퇴색
교파주의의 강화
기독교 교육, 신학 이데올로기로 변질
박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박 박사는 "기독교교육을 전공한 전문 인력이 강화됐고, 각 교단의 기독교교육의 강화와 단독 공과의 발행, 대한기독교교육협회 기관지인 <기독교교육>의 창간과 보급 등의 다양한 변화가 있었지만 WCC 에큐메니칼운동 문제로 한국교회가 양분되면서 다양한 위기를 경험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59년 WCC 에큐메니칼운동은 교단분열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국교회는 WCC에 대한 입장과 견해로 둘로 나뉘어졌다. 기성은 WCC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교단 안에 일어나면서 교단의 자체의 화목을 위하여 WCC와 관계 있는 연합기관에 대표를 파송하지 않기로 했다.
특히 1962년부터 기성은 대한기독교교육협회에 대표를 파송하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대한기독교육협회는 1959년부터 기장에도 예장통합과 나란히 회원 자격을 부여했다.
박 박사는 "1959년 예장합동과 통합의 분열, 이어 감리교와 성결교가 분열되면서 연합운동으로서의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위기와 변화를 맞게 되었다"라며 "그 결과 1960년 이후 한국주일학교운동과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맞았다. WCC 에큐메니칼운동과 이를 반대하는 NAE측의 분열이 주일학교운동 특별히 전국적인 주일학교연합체인 한국기독교교육협회가 여전히 연합운동의 기구로 존속했지만 WCC-WCCE 노선에 따라 '하나님의 선교' 방향에서 기독교학교운동을 전개했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주일학교교육의 연합정신은 현저하게 퇴색됐고, 전체 한국교회를 하나로 엮을 수 있는 교육철학이나 목적을 찾기 힘들어지게 됐다는 것이 박 박사의 전반적인 평가다.
그는 "결국 교파주의가 강하게 발흥했고, 기독교교육이 신학적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전락했으며, 신학과 이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도 1960년대 이후 통일된 기독교교육을 실시하지 못한 중요한 요인이었다"라며 "3.1운동 당시 민족의 자주독립이라는 시대적 요청이 강하게 제기되었고, 따라서 다음세대를 양성하여 한국의 미래를 밝게 하자는 사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주일학교가 활성화되었지만 1960년대 이후는 그런 강력한 동력을 찾을 수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각 교단의 교육지도자들도 시대에 교회가 해야 할 선교사명과 교육방안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고, 교단의 교육활동에만 급급하면서 연합기관의 활동도 교파의 이권, 인사의 교단 안배 등으로 좁혀지게 됐다. 결국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활동은 기독교교육을 통합하는 연합기관으로 활동과 사역반경이 상당히 축소됐다.
박 박사는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1969년 <기독교교육>을 월간지로 전환한 후, 40년이 지난 2009년에도 계속 발행했고, 통일공과 및 계단공과를 만들어 전국대회와 세미나도 개최하는 등의 연합활동을 해왔지만 결국 교단의 독자적인 교육 실시 및 주일학교가 줄어들면서 2014년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하게 됐고, 2015년 부도가 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 기독교교육의 흐름과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역사를 통해 급변하는 시대의 변천을 읽어내지 못하고 시대와 동떨어진 기독교 교육을 실시하려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라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진보적인 교단에서는 기독교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성경적 가치 정립을 강화할 필요가 있고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성경을 중시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읽어내며 그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를 끊임없이 제시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지난 한국의 기독교교육의 역사는 교파주의 벽을 넘어서면서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라는 성경관의 토대 위에 성경적 가치 정립과 그것의 적용과 실천을 통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의 성장이라는 두 가지 책무 중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교훈해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한편,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와 한국교회사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일립 강태국의 교육사상이 기독교 학교 교육에 주는 적용점 연구(김웅기 박사/한국성서대 교수) ▲초기 한국교회 주일학교 연합활동의 발전과 장로교 사례(이영식 박사/총신대 교수) ▲아르굴라 폰 그룸바흐의 저항과 항변(박경수 박사/장신대 교수) ▲천국에서의 영광을 바라보며(배정훈 박사/고신대 교수) ▲개혁신학자들 사이의 명백한 불일치?(전광수 박사/국제신대 교수) 20세기 초 팬데믹 시대에 움튼 여성들의 우정(김은하 박사/장신대 교수) 등의 연구논문도 함께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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