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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시인의 시 세계
흙에서 찾으려는 시대적 사유와 의지
<시인. 문학평론가> 박철영
시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분들의 시가 담고자 했던 시대정신과 문학적 세계관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본다. 그중 관심 있는 시인이 있다면 더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던 중 최근 출간된 『광주의 문학정신과 그 뿌리를 찾아서』(문학들 2019. 1)에 광주 전남 문인들의 과거 기록이 상세하게 고증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침 김준태 시인의 『밭詩』(문학들 2014. 2)를 일별 하던 시기와 맞아 당시 치열하고 긴박했던 80년 5월과 김준태 시인의 문학적 연관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았다. 김준태 시인은 1980년 『전남매일신문』에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발표하여 ‘5월 광주’의 학살과 참혹함을 최초 외부에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한국 문학사에서뿐만 아니라 광주 전남 문학의 좌장으로 후배들의 훌륭한 귀감이 되고 있다. 그런 시인의 시 세계를 일별하면서 다시 한번 시 정신을 함께 새기고자 한다. 죄송한 것은 지금껏 출간된 전 시집을 다 살필 수 없었다는 점과 아쉽지만, 시집 『밭詩』 위주로 한정하였다는 것이다. 시집 표제 명처럼 우선‘밭詩’에 내포한 시적 의미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변주되고 있는가와, 시대 변화 속에서 시인의 시적 지향과 희망이 없는 시대에 희망을 위한 문학을 어떻게 천착해왔는가 살펴보고자 한다.
시집의 첫 시처럼 인간이든 동물이든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하여 생각을 해본다. 그 ‘길’이란 것이 때로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미 세상을 꿰뚫어 보듯 살아온 시인도 길 앞에 서면 “어디로/가야 길이 보일까/우리가 가야하는//길이 어디에서 출렁이고 있을까”라며 망설인다. ‘길’이 갖는 언어적 기호들의 체계 속에서 변별적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길을 보고 그 길이 갖는 위의를 묻는다면 그럴 때는 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어디를 향하던 멈출 수 없는 길은 곧 삶이어서 생의 의미로 묻을 수밖에 없다. 시인은 길을 나서기를 서두르지 않는다. 보이는 길보다 보이지 않는 길을 염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길은 오직 세상에서 딱 한 사람만을 위한 길임을 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간다는 것은 행복하고 경이로운 일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기쁨”과 만난다. “도시의 변두리 밭고랑 그 끝에서”길을 가리키며 반짝이는 눈동자는 생명을 인도하는 길임을 알려준다. 시인은 지금껏 문학을 통해 많은 사회 변화를 위해 노력 해왔다. 그런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지만, 앞으로 우선해야 할 일은 생명에 대한 존중이 곧 인간의 실존과 생존의 문제와 귀결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경시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문학적인 각성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밭詩’ 활동을 통해 생명 문학을 새로운 아젠더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지금껏 시대 변화의 중심을 향한 고단한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었지만, 새로운 문학적 위의를 흙에서 찾고 실천하려 한다. 흙은 인간에 의한 변화보다 본래 그대로 장녀 상태로 유지되길 바랄 것이다. 흙에 인간의 이기심이 개입되면 분쟁이 일어나고, 상생하려는 소통을 심으면 이웃이 화평해진다는 이분법적인 인식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흙은 인간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가 되어선 안 된다며, 흙이 갖는 시인의 인식과 사유思惟를 세계관으로 문학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땅>을 가리키며 “땅 위에/씨앗을 뿌리면/밭이 되지만//땅 위에/씨앗을 뿌리지 않으면/총칼이 쌓인다.”는 아포리즘적 시론은 김준태 시인이 추구해온 민주 평화 그리고 자유 의지와 다르지 않다. 여기서 지시하는 ‘땅’은 우리가 사는 국가 현실을 가리키며 ‘씨앗’은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민중 의지라고 볼 수 있다. 사계절의 순서를 거스를 수 없듯 자연 질서를 거슬러선 안 된다는 자연관도 엿볼 수 있다.
그중 <봄날 시작詩作>을 알리는 “경칩 날, 詩 한 편 써서 밭고랑에 뿌려 주었더니/저것 봐라, 펄떡펄떡 뛰어오르는 토종 개구리들!”을 본다. 저 흙속에서 바깥의 봄기운을 어찌 알아챘는지 흙의 기운이 시가 되어 경칩을 사방 천지에 알리고 있다. 흙이 알려주는 자연의 질서가 순한 흙을 두드리고 그 소리를 들은 흙 속의 생명들이 하나 둘 옆 지기를 깨우는 듯 만물이 생동한다. 어찌 그뿐인가 시인의 눈빛으로 쏟아낸 봄날을 알아챈 흙이 고스란히 조곤조곤한 시가 되어 싹을 틔우는 씨가 되었다. 때 마침 詩를 받아쓰던 흙에서 신 바람난 된 발음이 바람에 날려 ‘씨 씨’를 외치더니 시가 씨앗처럼 천지사방으로 뿌려졌다. 그 소리에 잠에서 깬 ‘토종 개구리들’이 흙 위로 기어 나와 드디어 생동하는 봄이 완연해졌다. 흙은 생명을 잉태한 모성이라고 할 때 땅 속과 땅 위의 모든 생명체가 온전한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만 살아 있는 흙인 것이다. 조그만 씨앗 하나라도 내치지 않고 정성으로 싹을 키워 내는 것이 흙이 갖는 본성이다. 토종 개구리들이 긴 동면을 들추고 나와 살아갈 흙은 시인의 시적 세계관과 상통한다. 그런 흙이 갖는 가이아의 대지 모성은 우리가 사는 국가이고 인류가 살아가야 할 지구까지이다. 시에서 지시하는 ‘경칩’과 ‘토종 개구리’라는 텍스트 속에 내포한 시적 의미는 억압으로 은유된 동토에서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회복하겠다는 의지까지 함의한다. 그 흙의 생명성과 자유 의지는 결국 詩로써 이뤄가야 할 우리의 새로운 문학을 요구한다는 현실을 말해준다.
시인의 어느 하루 농사 일기를 본다. 일기대로라면 시인은 <햇빛 눈부시던 날> 밭을 찾아가게 되는 것까지가 사실이다. 그런데 “밭이 내게 손 내밀어 가만히 호미를 쥐어준다”는 것의 비약은 시인이 갖고 있는 흙에 대한 친연성에 대한 감정 호응이다. 그런 시인한테 먼저 손을 내민 흙에게 시인은 그동안 유해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선린과 신뢰가 전제된다. 그다음으로 “밭이 고향의 아버지처럼 삽과 괭이를 쥐어 준다”는 친근성은 윤리 규범에 반하지 않았을 때 흙도 보상을 안긴다는 자애심이다. 흙의 지향하는 궁극은 인간이 사는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의 폐해인 가치 우선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유해한 행위가 있어서는 살기 좋은 사회는 요원함을 말해준다. 시구詩句에서 언명되는 ‘김준태 시인’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변화를 추동해갈 수많은 ‘김준태 시인’을 호명하고 있다. 이 땅에는 그토록 더 많은 ‘김준태 시인’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와 평화를 염원하는 씨앗을 천지 사방에 심어 달라는 희망이다.
김준태 시인은 복도 많으셔서 한 집에 삼대가 산다. 마침 며느리 야근하는 날 <봄밤, 쌍둥이네집 풍경>은 읽기만 해도 행복한 풍경이다. 일상이겠지만, 그런 날의 집안을 가볍게 스케치한 풍경이다. 아기 둘을 돌보던 할머니가 “젖 하나는/왼쪽 녀석에게 쥐어 주고/젖 하나는 오른쪽 녀석에게 쥐어 주고/봄바다 노를 저어가듯이 나란히 잠”재우는 모습은 평화로운 세상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시인은 세상 사람들이 그런 풍경처럼 행복했으면 하는 심사를 바라고 있다. 아기들이 할머니의 폼에서 행복하게 사랑받으며 살 수 있는 나라, 나라가 화평해서 백성도 사는 것이 즐거운 세상, 그것은 시인이 꿈꾸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세상이고 모두가 꿈꾸는 대동세상大同世上일 것이다. 시인은 시적 변용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세계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김준태 시인은 언어의 내재성을 통해 다양한 시적 의미를 담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할머니는 ‘흙’으로 변용되고 손주 둘은 시인이 추구하는 사랑이자 평화이고 자유의 ‘씨앗’이 된다. 시속에서 흙은 다양한 변주를 통해 문학과 삶의 밀접한 연관성을 반복해 말하고 있다. 흙처럼 순수한 쌍둥이 손주 둘의 손에는 할머니가 쥐어준 사랑이라는 씨앗이 자란다. 잠들어서도 꿈속에서 할머니는 손주 둘에게 사랑의 씨앗을 파종하고 있다. 먼 훗날 ‘밭’이 될 아이들이 그렇게 꿈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행복하게 잠든 밤 할머니와 아이들과는 달리 또 다른 사람 사는 곳 이라크에서 전쟁의 포화에 휩싸여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밭은
폭탄이 떨어지는 날도
밭은
비둘기에게 나눠 먹일
파란콩 노란콩 붉은콩 검은콩 하얀콩 점박이콩의
콩나무가 자라도록 지평선 멀리까지 드러누워 준다
황하에서 갠지스강까지 나일강에서 티그리스강 언덕까지 드러눕는다.
-<티그리스강 언덕까지> 전문
문명의 발상지라는 메소포타미아, 그 강물이 촉촉이 흘러들어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강이 만나 이룬 초승달 지대가 들어선 곳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라고 배웠고, 지금의 이라크라는 국가가 있는 곳이란 것까지 알고 있다. 그토록 아름답다던 <티그리스강 언덕까지> 미군의 미사일이 밤 새 날아가는 장면이 티브를 통해 생생하게 생중계되고 있다. 소중한 사람의 생명이 워 게임처럼 버튼 하나로 다뤄지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 땅으로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찬란했던 문명을 토대로 살아온 사람들이 죽음으로 사라져 간다. 사람이 문명을 이루고 살게 된 이후 성서에도 나온다는 에덴동산을 감싸 흐른다는 티그리스 강, 그곳으로 흘러드는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가 파괴되고 있다. 저 무지막지한 패권주의로 무장한 자국의 이익이 최고인 나라 미국이, 인류 문명지인 그곳을 아작 내고 있다. 포탄이 떨어지는 그 강가에서 사람들은 지금껏 평화를 꿈꾸며 살아왔다. 강가의 밭에서 문명을 태동시켰듯이 그 사람들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비둘기에게 나눠 먹일/파란콩 노란콩 붉은콩 검은콩 하얀콩 점박이콩”을 심었다. 콩을 수확해 사람이 그걸 먹었고 비둘기까지 먹여 살린 그 땅에 흘러들던 티그리스 강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이라크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그들이 살아가야 할 ‘밭’에서 죽임 당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 아파한다. 마치 1980년 5월에 이유 없이 학살당한 광주 시민들이 딱 저랬다. 시인은 우리가 저 “황하에서 갠지스강까지 나일강에서 티그리스강 언덕까지 드러”누워 전쟁 없는 지구촌을 만들자며 호소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티그리스 강가의 밭으로 강물처럼 평화가 흘러들게 해야 한다며, 시인은 지구인 모두가 평화의 결사체가 되어 전쟁 없는 평화를 이루자 한다.
<다시, 지평선에서> 하늘과 맞닿은 땅에 그려지는 지평선에서 시인은 한 알의 씨앗이 되려 한다. 그 씨앗이 지평선을 다시 일으켜 하늘을 받치고 땅을 지키는 파수를 자처한다. 멀리 천둥 같은 소리 내리칠 때면 든든한 나무가 되어 천둥을 막고 저 이라크로 날아든 포탄을 막아 평화로운 지평선이 파괴되지 않도록 방패가 되자고 한다. “두손에/흙을 쥐고” 천지 사방에 뿌려 천지사방이 푸른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이 되게 하려 한다. 천지 사방에다 사시사철 푸르거나 사시사철 배불리 먹일 곡식을 키우려 한다. 지평선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흙을 만지며 흙처럼 순수한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 시인은 스스로 진실한 흙이 되는 꿈을 꾸고 있다. 흙에서 자란 씨앗들은 둥글다는 데 정말이지 <아름다운 것들은 왜 둥글까> 묻지도 않았는데 시인은 답하고 있다. “노래의 둥근 씨앗들”과 닮은 “밤엔 달이 둥글고 낮엔 해가 둥글다!”하고 들판에 핀 “하얀 접시꽃은 하얗게 둥글다”라고 말해준다. 그런데 정말 “꽃들의 향기도 둥글까”라고 되묻는다. 시인은 말을 아끼면서 다시 “떠나는 사람들의/둥근 뒷모습”과 “사람들의 둥근 이마와 둥근 앞모습”을 말해주며 그 모습도 둥글다며 꽃에 대한 답은 아직 말이 없다. 그러다 둥글둥글한 사람들의 가슴을 겨누는 “총구멍도 둥글다”고 말해 버린다. 똑같이 둥근 것이지만, 아름다움의 차이는 사람 마음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물질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탐욕한 인간들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도록 한다. 자연의 원형처럼 인간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둥글둥글했고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자연을 이기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인간은 그렇지 않았다는 반성을 의미하고 있다.
우화 같은 시 <동화童畵>는 왜 세계가 폭력적으로 변질되어 전쟁하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미루나무들도 하나둘 어깨를/흔들며 놀러 나온 강변이었습니다/아이 녀석 둘이 싸우고 있었습니다/내가 잘했다 아니야 내가 잘했다/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먹질을 하더니/이윽고는 서로의 콧잔등을 때렸”다는 이야기가 무릇 아이들의 일상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처럼 국가와 국가도 그와 마찬가지로 양보 없는 충돌은 전쟁뿐임을 말해준다. 그런 아이의 싸움처럼 우리 사회와 국가라는 지구적 관점에서 그런 일이 있을 때는 안타깝고 분노하고 함께 가슴 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어느새 80년 광주 5월이 상징하는 민주와 자유의지를 대한민국을 넘어 지구적인 문제로 확장하고 있다.
시인은 아이의 <마음>으로 밭을 바라본다. 그 밭에서 아이의 마음으로 행동하면 밭에 자란 모든 것들도 그대로 화답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딛고 선 땅이 흙이고 그곳이 밭이었다. 그곳은 아이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듯 우리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곳으로 우리가 살아갈 흙에서 일군 밭이다. 그 밭에서 우리는 마음속 평화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웃으면 하하 웃고 우리가 휘파람을 불면 밭은 휘파람을 따라 부르고, 아야어여를 하면 논도 따라 아야어여를 한다. 그뿐인가 하늘을 쳐다보면 논도 따라 하늘을 쳐다보고, 발 동동 굴렀더니 따라서 발을 동동 구른다는 논이 되고, 밭이 된다. 우리가 북한에다 총부리를 겨눈다면 그들도 우리에게 총을 겨눌 것이고, 우리가 평화를 외칠 때 상대방도 평화를 따라 외칠 것이라는 말이다. 시인은 시적 세계에 존재하는 시인만의 ‘밭’이 상징하는 진정한 평화로움을 이미지로 상상하고 있다.
언젠가 그 밭가에서 <노래>할 꿈을 상상해본다. 시인은 “봄이 오면/먼 산의 바람/먼 산의 구름/먼 산의 꽃/모두 우리 님이어라”를 염원한다. 봄이 오면 그 밭가에서 시인은 혼자가 아닌 우리 모두가 ‘꿈’ 같은 봄이 올 때를 기다리며 노래를 부르자고 한다. 그 봄은 그냥 봄이 아닌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나쁜 국가 권력의 남용과 세계질서라는 패권으로 촉발한 전쟁과 폭력이 사라진 이 땅의 진정한 평화가 있는 날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위해 사랑과 그리움으로 몸부림하듯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뤄가야 할 봄이고 그때 부를 노래는 우리의 가슴에서 우러나온 꿈인 것이다. 시인이 흙을 가까이하면서 사랑과 평화라는 거창한 구호만 외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 말고 가장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해법을 자연의 본성인 흙에서 찾으려 한다. 그런 계기는 분명치 않지만, 우리가 생명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흙이 갖는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흙을 직접 손으로 만지며 흙이 전하는 정직함과 삶의 진리를 끝없이 질문하고 몸으로 깨달아 가자는 것이다. 시인은 그렇다고 가만히 책상에 앉아 찾아올 ‘봄’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봄은 방긋 거리는 아가들이거나, 포탄이 쏟아지는 티그리스 강가의 비둘기의 먹이가 될 ‘점박이 콩’이 자랄 밭을 우리 스스로 지켜냈을 때 찾아오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봄을 꿈꾸는 시인은 기어이 마음속에 간직한 <나의 시詩>를 서랍에서 꺼내 밭으로 나간다. 고추밭에 갔더니 붉은 고추가 매달렸고 , 마늘밭에서는 마늘처럼 뿌리를 내린다. 그 시를 논두렁으로 가져갔더니 벼 모가지처럼 가을을 여물게 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시인은 이제 머리로 쓰는 시가 아닌 손으로 직접 흙을 만지는 농부의 마음으로 시를 쓰고자 한다. 몸으로 부대낀 몸말로 시를 쓰고 싶다 한다. 흙이 갖는 본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생명을 버리지 않는다. 흙은 씨앗 하나라도 허술하게 다룬 적 없고 병들어 죽어가는 여린 싹일지라도 지성으로 보살펴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 풀은 풀대로 콩은 콩대로 벼는 벼대로 사과나무는 사과가 열리도록 보살핀다. 시인은 땅 한 뼘도 없지만, 남의 땅에다 몰래 완두콩을 심어보았단다. 그 땅은 제 것 남의 것 가리지 않듯 <시인과 농사>를 가리지 않는다. 사람은 제 것 남의 것을 철저히 나누지만, 땅은 그토록 정직하여 자기 품에 든 생명을 내치지 않는다. 시인이 남의 땅에 몰래 심어놓은 완두콩은 땅의 희망이자 시인의 소망인 것이다. 푸르게 자라 꽃이 피고 완두콩이 열릴 희망을 꿈꾸는 땅의 소망은 시인의 모습으로 치환되고 평화의 상징으로 변주된다. 시인의 가슴에 자라고 있는 완두콩은 두 알뿐만이 아니다. 시인이 사람들 가슴에 심어놓은 평화라는 완두콩이 어디에선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자지라Aljazeera를 보며> 시인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 터전인 흙을 왜 응시해야 하는가 말한다. “총탄에 쓰러진 아들의 주검을 알라신神처럼 부둥켜 안고/울부짖는 어머니들과 티그리스강 언덕에 모래의 무덤을/세워 올리는 저 메소포타미아 아버지들, 그날 나는 인간과/시인의 이름으로 직립보행을 한다는 사실에 진저리쳤다!”며 같은 인간임을 부끄럽고 비통해한다. ‘직립보행’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 그렇게 우월한 인간의 생명에 살상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그런 부류와 같은 시인이었고 우리라는 인간들이다. 시인은 시집 표제 명을 특이하게 ‘밭詩’로 선정했다. 그 이유가 이제야 명징해졌다. 인간은 다윈의 진화론에 따른다면 처음에는 사지 보행을 했다. 그런 인간이 뇌를 활용하면서 두 다리를 손으로 이용하게 된다. 두 다리로 직립 보행을 하며 이동성이 수월해지자 인간은 남은 에너지를 탐욕으로 채운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되찾기 위해 본래의 모습처럼 흙을 가까이하며 잃어버린 네발 보행의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것 말고도 노력을 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강대국이라는 패권국가에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무력한 세계는 비합리적인 침묵을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을 보며 우린 희망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시인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 곳은 멀리 있지 않고, 흙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 속에 있었다. 아이들의 논쟁을 무심코 듣다 깨달음의 화두처럼 다가온 말을 시인은 놓치지 않았다. 세상 난마를 풀어 줄 말이 바로 아이들 입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래, 내 고향 해남 가는 길에서였을 것이다
돌미륵이 두 귀를 길게 늘어뜨리고 서 있는
해남 대흥사 붉은 동백숲 극락교쯤일 것이다.
초등학생 두 녀석이 뭔가를 놓고 다투었는데
여기에 녀석들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한 놈이 왈, “벽도 구멍을 뚫으면 문이 된다”
또 한 놈 왈, “걸어 잠그면 문도 벽이지 뭐야”
다람쥐가 그 소리를 듣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부처님 손바닥에선 벽이나 문은 똑같다는 것!
-<대흥사 입구에서, 듣다!> 전문
햐! 이 아이들의 허무맹랑한 말다툼에 보석같이 귀한 말이 있었다니, 그런 두 아이도 대단하지만, 시인의 귀가 돌미륵의 귀를 닮았나 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며 사람들과 달리 자신만은 벽창호가 아닐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그 사람의 지인 몇 다리만 걸쳐보면 됨됨이와 허물을 금방 알 수 있다. 안타깝게 자신만 모를 뿐이다. 우연찮게 듣게 된 두 아이의 다툼 말이 어른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었다. “걸어 잠그면 문도 벽이지 뭐야”라는 말은 아이답지 않게 세상을 꿰뚫어 보는 도통한 말이 분명하다. 우리는 한 아이의 말마따나 세상 사람들은 꽉 막힌 듯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산다. 마음을 열어야 나와 이웃이 소통하고 우리와 우리가 사회 속에서 그리고 국가와 국가끼리 소통할 수 있다. 그런 연후에야 가능한 위민으로 대동세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세상을 향해 눈과 귀 몸까지 온통 열린 의식으로 살아가자 한다. 그것은 인간의 이기심을 버리고 정성 들여 밭을 일구듯 살아간다면 그런 세상은 꼭 온다는 확신이다. 인간은 악어와 왜 다른가를 묻고 있다. 그 해답을 미리 알려주고 있다. <악어는 입술이 없습니다>라며 그 이유를 악어는 집어삼키는 일만 하면 되기 때문이란다. 사람으로 치면 탐욕으로 가득한 부류일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그렇지 말아야 할 이유를 든다. “우리 사람들에게는/왜 입술까지 주셨는지를/저는 비로소 알 것 같습니다//우리들이 하느님, 장미꽃보다 더 붉은 입술/서로의 키스를 위해서 만들어 주신 거지요?!”라고 되묻는 시인에게 우리는 답을 해야 할 차례다. 입술의 의미를 생각해보며, 새롭지 않은 발견에 흥분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입술이 있는 인간의 재발견은 새로운 신인류 출현이 아니다. 그 소중한 입술로 남에게 함부로 할 말을 삼가야 한다. 말을 삼가고 행동을 삼가며 김준태 시인의 ‘밭詩’의 이미지를 상상해 본다면 언어 이전 태초 인간의 본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