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그대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A Light unto Yourself)
한 사문이 붓다에게 물었다.
무엇이 가장 강한 것이고 무엇이 가장 밝은 것입니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온유함이 가장 강한 것이니 악한 생각을 품지 않으므로 마음이 편안하고 몸이 건강하다. 온유한 사람은 악한 마음이 없으므로 반드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가장 밝은 것은 티끌이 완전히 정화되어 순수함이 변함없고 흠 없음이 지속되는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은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시방(十方)에 있는 모든 것을 보지 못함이 없고 듣지 못함이 없으며, 일체지를 얻었기 때문에 가장 밝은 것이라 한다.
삶을 사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군인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산야신의 길이다. 그대는 삶과 투쟁할 수도 있고, 삶 속에서 휴식할 수도 있다. 그대는 삶을 부정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고, 깊은 내맡김 속에 살 수도 있다.
군인의 길은 잘못된 길이다. 삶을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부분은 전체를 정복할 수 없다. 좌절하고 실패할 것이 너무나 뻔하다. 그대는 이상의 주변에서 얼쩡거리기만 할 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실패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다. 군인은 삶을 정복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가 최후에 알게 되는 것은 자신이 삶에 짓눌렸고, 삶에 패배했으며, 삶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사실이다.
삶은 아무도 파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가 삶과 싸운다면 바로 그대 자신의 폭력성에 의해서 그대는 파괴될 것이다. 삶은 그대를 반대하지 않는다. 삶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삶은 그대의 어머니이다. 그대를 여기에 데려 온 것은 삶이다.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왔다. 그대는 원초적이고 유기적으로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대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대가 자기 에너지의 근원과 싸운다면, 그대는 파괴될 것이다. 바로 싸움이라는 그 관념이 그대에게 독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싸움에 지고 있다고 느낄수록 그대는 더 열심히 싸울 것이다. 열심히 싸우면 싸울수록 그대는 더욱 좌절하게 된다.
군인의 길은 일반적인 길이다. 거의 99.9%의 사람들이 그 길을 따른다. 그러므로 그토록 많은 불행과 그토록 많은 지옥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 의해 곧 삶에 대한 그대의 잘못된 접근 방식에 의해 생긴 것이다. 한번 그것을 이해하게 되면, 그대는 전체와 조율되어 전체와 춤추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싸움을 버리고 협력하기 시작한다.
삶에 협력할 것을 결심하는 순간 그대는 산야신이 된다.
종교적인 사람이란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삶과 분리된다는 것은 결코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않는 사람……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이 없는 사람……삶에 대한 전적인 신뢰 속에서 단순하게 사는 사람이다.
삶을 신뢰할 수 없다면 무엇을 신뢰하겠는가? 만약 삶이 그대를 통해 흐르도록 허용할 수 없다면 그대는 생생하게 살 수 있는 이 엄청난 기회를 놓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걱정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의 마음에 붙들리게 될 것이다. 그때 불행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투쟁은 행복해지는 길이 아니란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이해이다. 협력이 지복으로 가는 길이란 것을 이해하는 것……그러면 그대 영혼의 어두운 밤은 지나가고 아침이 찾아와 태양이 지평선 위로 떠오른다. 그대는 변형될 것이다.
열쇠는 투쟁이 아니라 협력이라는 바로 이 이해가 변형시키는 힘이다. 의심이 열쇠가 아니라 신뢰가 열쇠이다. 폭력은 길이 아니다. 사랑이 길이다. 이것이 기본적인 뼈대이다.
이제 경전으로 들어가자.
한 사문이 붓다에게 물었다.
무엇이 가장 강한 것이고 무엇이 가장 밝은 것입니까?
우리는 오직 이 두 가지만을 묻는다.
첫째, 무엇이 가장 강한 것인가? 우리는 모두 파워 게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강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자신이 무력하다고, 나약하다고, 자신에게 한계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수만 가지의 한계들이 그대를 에워싸고 있다. 도처에서 그대는 벽에 부딪치고 무력함을 느낀다. 그대는 삶의 매순간마다 무력감을 느낀다.
따라서 그 질문은 아주 적절하고 인간적인 질문이다. 무엇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가? 그 사문은 힘을 추구했음에 틀림없다. 지금 그대는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바로 그 노력, 바로 그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힘을 성취하는 데 있어 하나의 장애물이다. 사람들은 강해지려고 노력하지만 결코 강해지지 못한다. 추구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파괴된다. 강해지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그대가 투쟁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싸움을 원한다. 그것이 그대가 강해지기를 바라는 이유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먼저 힘이 필요한가? 그대는 분명히 일종의 공격성, 일종의 폭력성, 일종의 원한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대는 증명하고, 실행하고 싶다. 그대는 강하고 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남들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깊은 속 어딘가에, 아돌프 히틀러는 무의식의 그림자같이, 그대의 의식적인 마음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다. 또는 난다르 샤, 나폴레옹, 알렉산더와 같은……모든 사람은 내면에 알렉산더를 지니고 다닌다.
이 힘에 대한 욕구는 수많은 것들을 세상에 창조해 냈다. 힘에 대한 욕구는 과학을 발전시켰고, 과학은 힘을 창조했다. 그런데 그 힘이 인류를 파괴하고 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같은 사람도 자신들이 인류에게 범죄를 저질렀다고 느끼는 그러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의 임종시에 누가 물었다.
“만약 당신이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그가 대답했다.
“절대로 물리학자나 과학자는 되지 않을 겁니다. 차라리 배관공이 되고 싶소.”
그는 대단히 감수성 있고 이해심 깊은 사라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야 그는 자신이 엄청난 에너지를 풀어놓아서 원자력이라는 그토록 파괴적인 힘을 인류가 알도록 했다는 것을, 만약 인류가 스스로 파멸된다면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과학의 뼈대는 바로 자연을 정복하는 데 있다. 자연의 정복, 그것이 바로 과학 용어이다. 우리는 자연의 힘을 넘어서야 하고, 자연의 모든 신비를 파괴해서, 힘의 모든 열쇠를 찾아내야만 한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지. 그러나 바로 그 생각이 그대를 자연에서 멀어지게 하고, 자연을 적대하며 파괴적이 되도록 한다. 이러한 힘의 추구는 자연의 생태학을 파괴시켰다. 외부에서, 내부에서, 양쪽 모두, 삶의 자연스러운 리듬은 교란되어 버렸다.
들은 얘기다.
프러시아 프리드릭 대왕에게 어느 날 대단히 희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시골에서 참새 몇 마리가 밀알을 먹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마침내 이 조그만 참새들이 그의 왕국에서 해마다 밀 백 가마는 먹어 치울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새들을 잡아 가두든지 완전히 없애야만 했다.
참새들을 전부 잡아들이는 것이 어렵자, 그는 죽은 참새마다 값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모든 프러시아인들이 사냥꾼이 되어, 곧 나라 안에는 더 이상 참새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대승리였다.
프러시나의 프레드릭 대왕은 아주 행복했다. 그는 자연을 능가한 대정복의 성과에 축제를 열었다. 그 이듬해 쐐기벌레와 메뚜기들이 작물을 먹어 치웠다는 보고를 듣기 전까지 대왕은 아주 행복했다. 참새들이 없어지자, 생태계의 리듬이 깨져 버렸기 때문이다. 참새들은 쐐기벌레와 메뚜기를 먹는다. 참새들이 없으므로 온 작물들이 쐐기벌래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래서 외국에서 참새들을 수입해야 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확실히 내가 실수를 했어. 신은 그가 하는 일을 아신다.”
금세기의 위대한 과학적 마음들은 중대한 실수가 저질러졌다는 것을 서서히, 천천히, 마지못해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강해지려는 욕망은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다. 강해지려는 바로 그 욕망이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왜 그대는 강해질 필요가 있는가? 그대는 누구를 파괴하는 견지에서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힘은 파괴하는 데 필요하다. 힘은 지배하는 데 필요하다. 힘은 정복하는 데 필요하다.
그 사문은 이렇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실제의 단어는 분명히 싯디(siddhi)였을 것이다. 그 사문은 이렇게 물었음에 틀림없다.
“무엇이 싯디입니까? 무엇이 힘입니까?”
과학은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해서 자연을 통찰하려고 애쓰고, 또 그대 내면의 가장 깊은 존재를 통찰하는 데도 많은 체계들이 있다. 그러나 목적은 역시 힘을 얻는 것이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강해지든 혹은 정신적인 방법으로 강해지든 차이는 없다. 지금 서양은 정신적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요구하는 것은 동일하다. 더욱 강해지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왜 인간은 처음부터 힘을 추구하는지를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바로 그 욕망이 군인의 것이다. 그대가 힘을 원하는 것은 힘이 없이는 커다란 에고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에고에게 힘은 음식이나 영양분의 기능을 한다. 그대가 힘을 추구하는 것은 오직 힘이 있을 때만 ‘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돈을 가질 때, 더 많은 힘을 가질 때, 그대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더 쉽게 느낀다. 그대는 더욱 사람들을 파괴할 수 있고, 아무도 그대를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사람들은 전쟁에서 죽이고 살해하는 데 흥미를 느낀다고. 사람은 타인을 죽일 때 자신이 아주 강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인을 죽임으로써 자신이 죽음을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불사(不死)의 존재가 되었다고 느낀다. 죽음조차 그들의 손 아래 있는 것이다. 어리석게도 그런 관념이 생겨난다. 살인을 즐기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죽음을 너무도 두려워했다. 밤에는 아무도 그의 방 안에 있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여자 친구조차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그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했다. 누가 아는가? 여자 친구가 스파이로 변신할지. 그녀는 적의 조종 하에 있는 대리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결코 사랑조차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두려움에 줄곧 떨고 있었던……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죽였다. 그것은 두려움과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사람을 죽이면 죽일수록 그는 자신이 더 많은 힘을 가졌다고 느꼈다. 그가 힘을 가졌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좀더 죽음이 자신을 파괴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는 마치 자신이 불사의 존재라도 된 것처럼 느꼈다.
그대는 지켜본 적이 있는가? 전시(戰時)에 사람들은 더욱 빛나 보인다. 전시에는 사람들이 더 신선해 보인다. 보통 때 그들은 굉장히 지루해 보였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 그들의 걸음이 달라지고, 눈빛이 깜박거리고,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그들의 얼굴은 마치 지루함의 먼지가 사라진 듯 더 생기 있어 보인다. 뭔가 굉장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생할 때마다 사람들은 죽음을 넘어선 힘을 느낀다. 그들은 죽일 수 있다. 즉각, 무의식 속의 그림자 안에서 ‘죽음조차도 우리 손안에 있다. 우리는 죽음을 부를 수도 있고 멈추게 할 수도 있다.’라고 그들은 느낀다. 사람들은 단지 죽음에 대항한 안전을 제공하는 척도로써 파괴를 즐긴다.
힘의 추구는 굴복하지 않는 것, 무력감을 느끼거나 자신이 지배당하는 상태에 있지 않는 것에의 추구이다. 종교적인 사람은 정반대로 행동한다. 종교적인 사람은 자신이 지배하지 않고 전체가 지배하는 상태를 추구한다. 그것을 신이라 부르든 절대라 부르든 아니면 그대가 좋아하는 그 무엇으로 부르든.
종교적인 사람은 투쟁의 문제가 없는, 그렇게 깊은 조화 속에 존재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는 사랑을 추구한다. 그는 우주와의 연애를 추구한다. 그는 절대 힘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 하면 분리가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녹아드는지를 묻는다. 그는 묻는다.
“어떻게 해야 전체를 거스르거나 전체에서 떨어지는 길로 가지 않고, 참으로 전적인 포기의 상태로 존재하여 삶의 강과 함께 흘러갈 수 있습니까? 삶의 강이 어디로 흘러가든 나는 그것과 함께 갈 것입니다.”
한 사문이 붓다에게 물었다.
무엇이 가장 강한 것이고 무엇이 가장 밝은 것입니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온유함이 가장 강한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
온유하기 때문에? 이 성명은 어리석어 보인다. 그들은 한 번도 땅을 물려받을 만큼 강했던 적이 없다. 우리는 그들이 땅을 물려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는 아주 진실한 어떤 부분을 말하고 있다. 온유한 자는 복되다.
또 예수가 땅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말할 때, 그는 붓다가 말하는 것과 같은 메시지를 말하는 것이다. 온유함이 가장 강한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말하는, 그들이 땅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온유함은 강하다. 하지만 이때 그 힘은 전적으로 다른 것을 함축하고 있다. 온유함이 강한 것은 거기 아무도 그대를 반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온유함이 강한 것은 그대가 더 이상 전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는 강하다. 온유함이 강한 것은 그대가 더 이상 싸우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그대를 패배시킬 수 없는 까닭이다. 온유함이 강한 것은 그대는 이미 전체에 정복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승리는 전체와 함께 있다. 온유함이 강한 것은 그대가 전체의 파도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의 존재가 패배할 가능성은 결코 없다.
그것은 모순적으로 보인다. 온유한 사람은 정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온유한 사람은 패배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노자는 말한다.
“나는 이미 졌으므로 아무도 나를 이길 수 없다.”
이민 진 사람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노자는 말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으로 존재하므로 아무도 나를 이길 수 없다. 그대는 나를 더 이상 뒤로 떠밀 수 없다. 거기에 ‘더 이상 뒤’는 없다. 나는 맨 나중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도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마지막의 사람이 내 하느님의 왕국에서는 첫 번째가 될 것이다.”
가장 마지막의 사람이 가장 첫 번째가 된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는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이 세상에서는 공격적인 사람, 폭력적인 사람, 권력 지향적인 사람, 승리 지향적인 사람이 첫 번째가 된다. 그대는 제일 강한 곳에서 가장 미친 사람을 발견할 것이다. 그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 인간은 거의 권력에 미쳐야 하기 때문이다. 경쟁은 그런 것이다. 경쟁은 너무나 폭력적인데, 어떻게 온유한 사람이 그런 힘의 상태에 이르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의미가 아니다.
붓다가 온유함은 가장 강한 것이라고 말할 때의 의미는, 온유한 사람은 정복하려는 욕망이 없으므로 그를 패배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결코 성공하려 하지 않으므로, 억지로 그를 실패하게 할 수 없다. 온유한 사람은 부에 대한 욕망이 없으므로 가난해지도록 강압할 수 없다. 가난이 그의 부유함이다.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 그의 삶의 방식이다.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이 바로 그의 스타일이다.
그에게서 무엇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그는 아무것도 없다. 그는 사기당할 수도, 빼앗길 수도 없다. 사실 그는 파괴될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포기하였기 때문에 더 파괴될 수가 없다. 그는 자아가 없다. 그 자신의 에고가 없다.
알렉산더가 인도에서 떠날 때, 한 산야신을 데려가려 했던 일이 있었다. 그가 인도를 정복하러 올 때, 그의 선생이며 대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돌아올 때는 반드시 내게 선물을 가져와라. 나는 인도의 산야신을 보고 싶다.”
그것은 동양에 존재하는 매우 고유한 어떤 것이다. 그 공헌은 동양에 속해 있다. 서양에는 위대한 무사가 있고, 동양에는 위대한 산야신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그 산야스라는 관념,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흥미가 깊었다.
알렉산더는 돌아가면서 그것을 기억하고는, 그런 사람이 있는지 조사했다. 그가 머물렀던 시골의 사람들이 그에게 말했다.
“예, 한 산야신이 있기는 하지만 당신이 그를 데려갈 수 있을지는 우리도 모르는 일이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누가 알렉산더를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말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히말라야도 가져갈 수 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그가 어디에 있는지만 말하라.”
그들은 그가 있는 곳을 말했다.
그는 나체의 고행승이었다. 한 벌거벗은 사람이 바로 마을 밖 강 옆에 서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그의 이름은 단다미스였다. 그렇게 해서 그는 알렉산더의 전기에 기록되었다. 두 명의 병사들이 산야신에게 다가와 말했다.
“알렉산더 대왕께서 당신이 따라오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왕의 손님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보장되고, 당신은 온갖 안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초대를 수락하시오.”
벌거벗은 사람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모든 방랑을 끝냈다. 나는 더 이상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나는 집에 이르렀다.”
그들이 말했다.
“어리석게 굴지 마시오. 알렉산더 대왕은 강제로라도 당신을 데려갈 것이오. 만약 당신이 손님으로 가지 않는다면 포로로 가게 될 것이오. 선택은 당신이 해야 하지만, 아무튼 가야 할 것이오.”
그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내가 버린 것은 바로 구속될 수 있는 그것이오. 아무도 나를 포로로 만들 수 없소. 나는 자유요.”
알렉산더가 직접 그에게 왔다. 그는 검을 빼들고 산야신에게 말했다.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이 검으로 당신의 머리를 베어 버리겠소.”
산야신이 말했다.
“그렇게 하시오. 실은 나는 이미 그렇게 했소. 나는 내 머리를 스스로 베었소. 그러니 당신이 내 머리를 벤다면, 당신은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볼 것이고, 나 또한 그것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볼 것이오. 나는 주시자가 되었기 때문이오.”
그때 알렉산더는 이 사람을 죽일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 산야신은 그토록 행복하고 두려움이 없었으며 지복으로 넘쳤다. 붓다가 온유함이 가장 강하다고 말할 때, 그는 에고로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온유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에고로서 존재하지 않는 자는 정복될 수 없고, 패배될 수 없으며, 파괴될 수 없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섰다.
에고를 넘어섬으로써 그대는 죽음을 넘어선다. 에고를 넘어섬으로써 그대는 패배를 넘어선다. 에고를 넘어섬으로써 그대는 무력함을 넘어선다. 산야신의 힘은 전적으로 다른 개념의 힘이다.
이 힘은 더 이상 투쟁 속에 있지 않다. 이 힘은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 전기는 마찰에서 생긴다고 말한다. 마찰을 통해 전기를 일으키고 불을 일으킬 수 있다. 양손을 비비면 손은 뜨거워질 것이다. 거기 마찰이나 투쟁에 의해 나오는 힘이 있는 한편, 협력에 의해, 마찰이 아닌 조화에 의해 나오는 힘이 있다. 그것은 붓다가 말한 “도와 하나가 되는 자는 위대하다.”와 같다. 도와 하나가 된 자는 강하다. 하지만 도와 하나가 되려면 온유해져야 한다.
축복받은 자는 온유하다. 확실히 그들은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 역사는 그들에 대해 전혀 모를 것이다. 역사는 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오직 마찰만을 안다. 역사는 오직 불화만을 안다. 역사는 오직 말썽꾸러기들만을 안다. 역사는 오직 미친 사람들만을 안다. 역사는 오직 무엇인가 잘못되어 갈 때만 기록하기 때문이다. 만사가 완전히 조화로울 때 그것은 시간과 역사를 벗어나 있다.
역사는 예수에 대해 별로 기록하지 않았다. 실제로 아무것도 없다. 만약 존재계에 성서가 없었다면 예수에 대한 기록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존재했지만 우리에겐 그들에 대한 어떤 기록도 없다는 것을 그대들에게 말하고 싶다.
역사는 그들을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붓다들은 주변에 한 점의 파문도 일으키지 않을 만큼 참으로 온유했고, 참으로 고요했으며, 깊은 조율과 조화 속에 있었다. 그들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왔다가 갔다.
역사는 붓다들을 기록한 적이 없다. 붓다나 마하비라, 혹은 짜라투스트라에 대해 들을 때면 그들이 역사적이 아닌 신화적인 인물처럼 보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거나 인간의 꿈속에서만 존재하거나, 혹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상적인 사람들의 시에나 존재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희망 사항처럼 보인다. 그들은 인간의 이상형처럼 보인다. 실체가 아닌……. 그들은 실체였다. 그들은 너무도 실체여서 뒤에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았다.
역사에 해를 끼치지 않고서는 서명을 남기지 못할 것이다. 역사가 정치가들만을 기록하는 것은 정치가 불화의 메커니즘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가는 투쟁 속에 산다. 종교적인 사람은 조화 속에 산다. 그는 나무처럼 산다. 누가 나무에 대해서 기록하는가? 그는 강처럼 산다. 누가 강에 대해서 기록하는가? 그는 구름처럼 움직인다. 누가 구름에 대해서 신경쓰는가?
온유한 사람은 조화 속에 존재하는 자이다. 붓다는 그러한 자가 가장 강하다고 말한다. 이 힘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기억할 만한 몇 가지 일이 있다.
일본에는 아름다운 무술인 합기도(akid)란 것이 있다. ‘합기도’란 말은 ‘기(氣)’라는 말에서 나왔다. ‘기’는 힘을 뜻한다. 중국에 치(chi)라는 같은 말이 있다. 그것 역시 힘을 의미한다. 바로 그 ‘기’와 ‘치’는 인도의 ‘프라나(prana)’와 동의어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다른 힘의 개념이다.
합기도에서는 누가 공격할 때, 그와 싸우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들이 공격할 때조차도. 그와 협력하라. 이것은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인간은 그 기술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술을 배웠을 때, 자신이 적과도 협력할 수 있다는 것에 굉장히 놀랄 것이다. 누가 공격할 때, 합기도는 그와 함께 가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누가 그대를 공격하면, 그대는 뻣뻣이 굳고 딱딱해진다. 그대는 투쟁한다. 합기도는 공격에 대응할 때조차도 사랑의 방법으로 하라고 말한다. 그것을 받아들여라. 그것은 적으로부터의 선물이다. 그는 그대에게 커다란 에너지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여라. 그것을 흡수하라. 투쟁하지 말라.
처음에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어떻게? 수세기 동안 우리는 힘은 투쟁이며, 마찰이라고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힘만을 아는데, 그것은 투쟁의 힘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힘만을 아는데, 그것은‘노(No)’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아이가 독립할 나이가 되면 ‘노’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말한다.
“밖에 나가 놀지 말아라.”
아이는 말한다.
“아뇨, 나갈 거예요.”
어머니가 말한다.
“조용히 하거라.”
그는 말한다.
“아뇨, 나는 노래하고 춤추고 싶어요.”
왜 그는 ‘노’라고 말하는가? 그는 힘을 행사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노’는 힘을 준다.
합기도는 ‘예’하라고 말한다. 적이 그대를 공격할 때 그것을 선물로써 수락하라. 받아들이면 통과하게 된다. 뻣뻣하게 굳지 말라. 가능한 한 액체가 되어라. 선물을 받아들이고 흡수하라. 그러면 에너지는 적에게서 빠져나와 그대의 소유가 될 것이다. 에너지는 적에게서 그대에게로 도약할 것이다.
합기도의 대가는 싸우지 않고 정복한다. 그는 전혀 싸우지 않고 정복한다. 그는 굉장히 온유하고 겸손하다. 적은 그 자신의 자세로 인해 파괴된다. 그는 스스로 충분히 독을 만들어 내고 있으므로 그대가 도와줄 필요가 없다. 그는 스스로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상대방을 공격함으로써 스스로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와 싸울 필요가 없다.
가끔 그것을 시도해 보라. 그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와 같은 상황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술꾼이 길을 가다가 하수구에 떨어져도 그는 다치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사무실에서 그를 볼 것이다. 그는 완전히 건재하다. 전날 밤 내내 그는 하수구에 있었다. 떨어지고도 그의 갈빗대나 다른 뼈들은 멀쩡하다. 골절이 없다. 술꾼이 떨어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둥대지 않는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저항할 수 없다.
장자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소가 수레를 끌고 가다가 뒤집혀서 도랑에 떨어졌다. 소몰이는 심하게 다쳤고 주인도 다쳤다. 그는 뼈가 부러졌다. 하지만 같이 있던 술꾼은 전혀 다치지 않았다. 술꾼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다른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그는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장자가 말했다.
“나는 이제야 노자가 ‘내맡겨라.’하는 말을 이해했다.”
어린이는 매일 그러고 있다. 어린이들을 지켜보라. 온종일 그들은 여기저기로 떨어지지만 다치지 않는다. 그대도 똑같이 해보라. 그대에겐 불가능할 것이다. 그대는 입원해야 할 것이다. 하루 내에, 24시간 내에, 그대는 병원 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 어린이는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뻣뻣이 굳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깊은 휴식 상태에서 떨어진다.
합기도, 타이치, 또는 예수가 말하는 온유함, 붓다가 말하는 온유함은 같은 원리, 즉 조화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
생활 속에서 시도해 보라. 바로 작은 일들 가운데서 시도해 보라. 누가 그대의 얼굴을 찰싹 때린다. 그대는 그가 누군지 모르고 돌아본다. 그가 친구이므로 그대는 반가움을 느낀다. 그것은 우호적으로 때린 것이었다. 돌아봐서 그가 적이라면, 그대는 상처받는다.
그 때림의 성격은 즉시 그대의 태도를 바꾸어 놓는다. 친구가 그랬을 때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일이다. 만약 적이 그랬을 때는 사랑스러운 게 아니라 미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때리는 것도 같고 에너지도 같고 에너지의 자극도 같은데 그대의 태도는 바뀐다.
그대는 그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지금 막 비가 내리고 있다. 그대는 곧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는 합기도의 길을 취할 수도 일반적인 길을 취할 수도 있다. 일반적인 길에서는 옷이 젖게 되거나 혹은 감기에 걸릴지도, 이런저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를 때, 비를 싫어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기분이 나빠지고 심기가 불편해져서 집으로 달려갈 것이다.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합기도의 방식으로 해 보라. 마음을 쉬고 얼굴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즐겨 보라.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마음은 가라앉고, 깨끗하고, 신선하다. 옷이 좀 젖는다고 뭐가 나쁜가? 왜 그토록 그것을 걱정하는가? 옷은 곧 마를 것이다. 왜 이런 기회를 놓치는가? 하늘과 땅이 만나고 있는 것이다. 왜 이 기회를 놓치는가? 왜 더불어 춤추지 않는가?
서둘지 말고 뛰지 말라. 천천히, 차분해져라. 눈을 감고 그대의 눈꺼풀 위로 떨어지는, 얼굴 위로 움직이는 빗방울을 느껴라. 그것의 감촉을 느껴라. 하늘로부터의 선물……그것을 받아들여라. 그러면 그대는 문득 볼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그대는 그런 식으로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을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도록 애쓰라. 그대는 언제나 투쟁 속에 있었다. 이제 조화되도록 애쓰라. 그러면 문득 그대는 볼 것이다. 모든 것의 의미가 바뀌는 것을. 그때 그대는 더 이상 자연과 대립하지 않는다. 문득 태양은 떠오르고, 구름을 사라졌다. 그리고 엄청난 빛이 그대의 얼굴 위로 쏟아진다. 태양을 사랑의 선물로써 편안하게 받아들여라. 눈을 감고 그것을 흡수하라. 그 빛을 흠뻑 마셔라. 기쁨과 축복을 느껴라. 그러면 그대는 볼 것이다. 전적으로 다른 에너지를.
안 그러면 그대는 땀을 흘릴 것이다. 더운 건 더운 거니까.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의미가 바뀌었다. 지금 그대는 땀을 흘리지만 기분이 좋다. 땀을 흘리는 것에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 그것은 그대를 정화시키고, 몸 안에 있는 독소를 바깥으로 내보내며, 몸에 있는 해로운 것을 제거할 것이다. 그것은 정화(淨化)의 불이다. 단지 태도의 변화만으로…….
온유함이 가장 강하다.
그리고 온유함은 비저항, 비투쟁의 태도……조화의 태도를 의미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이 존재한다.” 이것이 온유하다.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전체가 존재한다.” 이것이 온유함의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에고와 괴로움을 통해 산다. 에고는 줄곧 잘못 해석한다.
지난밤 나는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읽었다.
몇 년 전에 내무위원회의 한 상원의원이 애리조나에 있는 인디언 보호 구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정치가들이 늘 하는 식으로, 수많은 것들을 개선하겠다는 약속을 늘어놓는 멋진 연설을 했다.
“여러분들은 곧 보게 될 것입니다. 인디언이 기회를 잡는 새 시대를!”
이 말에 인디언들을 “호야! 호야!”를 외쳤다.
힘을 얻은 상원의원은 계속했다.
“우리는 더 좋은 학교와 기술 연수를 약속합니다.”
“호야! 호야!”
청중들이 열광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더 좋은 병원과 의료진들을 약속합니다.”
“호야! 호야!”
인디언들이 외쳤다.
상원의원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끝으로 그는 말했다.
“우리는 여러분들을 동등한 형제로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믿으십시오.”
사람들의 길고 강력한 “호야!” 소리가 공중을 흔들었다.
그들의 반응에 대단히 기분이 좋아진 상원의원이 다음 보호 구역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곳에 훌륭한 식용 소의 사육장이 있다고 알고 있소. 그들을 점검해 봐도 좋겠습니까?”
“그럼요, 이리로 오십시오.”
관리인이 말했다.
“하지만 호야(덩굴풀) 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알아들었는가? 에고는 단지 호야, 오해일 뿐이다. 그것은 비존재적이다. 이제껏 이보다 추한 일은 불가능하다. ‘나는 존재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그 생각은 추하다. ‘나는 나의 에너지의 원천과 싸워야 한다.’는 그 생각은 어리석고 바보스럽다.
그런데 이따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는 정복자처럼 보인다. 그것은 오해이다. 그대의 에고가 정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정복하고 있는 것은 에고가 아니다. 사실 그것은 우연의 일치일 따름이다. 때때로 그대가 왼쪽으로 갈 때 전체도 왼쪽으로 간다. 그대는 일치한다. 그래서 그대는 자기가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대는 생각한다. ‘나는 힘을 얻고 있다.’ 그러면 조만간 그대는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항상 일이 그런 식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항시 그대가 온유할 때만 일어날 수 있다.
온유한 사람은 너무나 민감해서 결코 전체를 거스르지 않는다. 그는 전체의 흐름에 대해 항상 민감하게 느낀다. 그는 말을 타고 말과 함께 간다. 그는 말에게 방향을 지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말을 신뢰한다.
들은 얘기다.
한 순경이 브레이크가 삐걱거리는 오토바이를 세우고, 광장에서 놀고 있는 꼬마에게 소리쳤다.
“이봐, 꼬마야, 이 근처에 추락한 비행기를 본 적이 있니?”
“아니오, 아저씨!”
꼬마가 대답하며 고무줄 새총을 뒤로 감췄다.
“저는 울타리 위의 병에다만 쏘았을 뿐이에요.”
어린이는 용서받을 수 있다. 그는 자기의 고무줄 새총 때문에 비행기가 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겁낸다. 새총을 숨기면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소위 훌륭한 인물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이것은 모든 에고이스트들이 하는 짓이다. 그들은 줄곧 자기들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이 있었다.
시골 마을에 가뭄이 들자 그곳 교회의 목사가 비를 내려 달라는 기도를 했다. 그러자 곧 억수같은 비가 내려 마을에 홍수가 났다. 보트 안에 있던 구조대원이, 자기네 집의 지붕 위에서 그 소용돌이치는 급류를 지켜보고 있는 목사를 보았다.
“당신 기도가 확실한 응답을 받았군요.”
구조대원이 소리쳤다.
“그래요.”
난처해진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 교회처럼 작은 교회에는 해를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그대의 기도는 실현되지만 그것은 기도 때문이 아니다. 다만 우연의 일치로 전체 또는 그 길로, 그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의 기도는 우연히 일치했다. 때때로 그대가 애쓰는 것이 실현되는 것은 그들이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에고는 우연적이다. 그대는 다만 우연의 일치 속에서 에고를 수집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매번 그럴 수는 없다. 그 때문에 인간은 불행을 느낀다. 어느 날엔 성공하지만, 또 어느 날엔 실패한다. 그대는 어떻게 될지 어림잡을 수 없다. 그렇게 대단한 지성이, 그렇게 이해가 깊은 사람이, 권력이나 힘, 논리나 이성이―실패하다니? 무슨 일인가? 지금 막 성공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는 그것을 믿지 못한다.
항시 우연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므로 에고는 늘 어려움에 봉착한다. 그대는 간혹 무의식 중에 전체와 함께 있기도 하고, 전체와 함께 있지 못하기도 한다. 전체와 함께 할 때 그대는 성공한다. 전체는 항상 성공하지만, 그대는 결코 항상 그렇지 않다.
붓다는 이것이 진정한 힘이라고 말한다.
온유함이 가장 강한 것이니 악한 생각을 품지 않으므로 마음이 편안하고 몸이 건강하다.
싸울 때 에너지는 흩어진다. 싸울 때 에너지는 소실된다. 붓다는 말한다.
“싸우지 말라, 에너지를 보존하라, 그러면 그대는 강해질 것이다.”
자신의 에너지를 잘 보존해 나가는 사람은 엄청난 에너지의 바다가 되어 바로 그의 존재 자체에서 힘이 넘친다. 바로 그의 현존 자체가 힘이 넘치고, 그의 현존이 마술적이고 기적적이다. 그에게 다가가면, 그대의 존재가 바뀌고 변형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에게 다가가면, 그대는 침묵이 전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단지 그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그대는 존재의 다른 날개에, 존재의 다른 높이에, 존재의 다른 차원에 들어올려진 존재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어떻게 하면 진정한 스승을 찾을 수 있는지 묻는다.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저 가까이 다가가 침묵하고 조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화와 침묵 속에서 그대가 더욱더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면, 그 사람이 그대의 스승이다. 그때 그 사람은 궁극을 위한 그대의 문이 될 것이다. 그때 그대의 에너지는 그의 에너지와 맞춰진다. 그때 그대와 그 사이에 무언가가 조율된다. 그때 그대와 그 사이에 일어나는 것은 견고한 힘이 된다.
그대의 지성으로는 누가 스승인지 알 수 없다. 그대의 논리나 편견으로는 알 수 없다. 그대는 스승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라는 수많은 정의를 들었다. 이러한 정의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그 모든 정의를 충족시키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대와는 맞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의 에너지와 그의 에너지는 상보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대의 에너지가 보완되고 보충되며, 서로 완전하게 해 주고 원을 이루지 못하는 한, 그대는 그 사람과 함께 상승할 수 없다. 상승하는 것이 느껴져야 한다.
온유함은 강하며 악한 생각을 품지 않는다.
그대가 악한 생각을 품고 있을 때 에너지는 탕진된다. 악한 생각이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생각, 공격적이고 이기적인 생각, 에고 중심적인 생각들을 뜻한다. 이 생각들은 그대 안의 에너지를 죄다 소진시킨다. 그것들은 도무지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자갈밭 위에다 씨를 뿌리고 있다. 그것들은 절대로 발아하지 못한다. 그대의 모든 에너지가 소모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편안하고 몸이 건강하다.
휴식이 힘의 평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강한 사람은 완전한 휴식 속에 있으면서 안절부절못하는 일이 없다.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에너지의 소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안절부절못할 때 에너지는 흩어진다.
그래서 동양에서 명상가는 힘의 상징이 되었다. 명상할 때는 모든 불안함이 없어진다. 생각이 멎고, 몸 동작이 멎고, 대리석 조각처럼 완전히 고요해지고 움직임이 없어진다. 그 순간 그 에너지의 호수이다. 그는 말할 수 없이 강하다.
만일 명상하고 있는 사람을 보거든, 그의 곁에 가 앉아라. 그대에게 유익할 것이다. 명상적 분위기 안에 있는 사람 곁에 앉음으로 해서 그대도 명상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의 에너지는 그대를 혼란 상태에서 끌어내 줄 것이다. 명상은 절대적인 휴식 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전적인 휴식을 가져오기 위대 그대는 수많은 방법에 의존한다. 거기 휴식을 위한 수천 가지의 방법이 만들어졌다. 나의 방법들은, 먼저 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불안하게 만들어, 그대 안에 아무것도 붙어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불안정한 것들을 밖으로 떨쳐버리고 난 뒤, 그때 휴식에 들어가라. 장애물이 없어지므로 그것은 쉬워질 것이다.
붓다의 시대에는 그렇게 격렬한 방법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때의 사람들은 훨씬 단순했고 훨씬 진솔했다. 그들은 훨씬 진솔한 삶을 살았다. 지금의 사람들은 굉장히 억압된 삶, 굉장히 진솔하지 못한 삶을 사다. 그들은 웃고 깊지 않을 때도 웃는다. 그들은 화를 내고 싶을 때도 자비를 나타내 보인다. 사람들은 허구적이다. 삶 전체의 패턴이 허구적이다. 문화 전체가 거대한 허구이다. 사람들은 그저 움직일 뿐 진정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수많은 잔존물, 수많은 불완전한 경험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쌓인다.
따라서 곧바로 고요히 앉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고요히 앉으려고 하는 순간 그대는 온갖 잡다한 것들이 그대 안을 떠돌아다니는 것을 볼 것이다. 그대는 침묵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자각할 것이다. 먼저 그것들을 밖으로 털어내야만 자연스럽게 휴식의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짜 명상은 휴식할 때 시작된다.
격렬한 명상가들은 진짜 명상을 위한 예비 과정이다. 그것들은 명상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인 필요조건이다. 그것들을 명상으로 간주하지 말라. 그것들은 단지 소개말, 서문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명상은 모든 활동, 육체의 활동과 마음의 활동이 멎었을 때 일어난다.
마음이 편안하고 몸이 건강하다.
기억하라. 힘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일반적인 힘의 정의와는 다르다. 일반적인 힘의 정의는 비교에 의한 것이다. 그대는 동료보다 더 강하다. 그대는 이 남자, 혹은 저 여자보다 강하다. 그대는 남과 비교해서 강한 것이다. 붓다가 말하는 힘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 힘은 다른 사람과는 관련이 없다.
힘은 그대 자신의 상태이다. 에너지로 흘러넘칠 때 그대는 강하다. 에너지가 새 나갈 때 그대는 무력해진다. 악한 생각은 에너지가 새 나가는 구멍과 같다. 불안함은 에너지가 새 나가는 것, 끊이지 않고 새 나가는 것과 같다.
그대는 날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헛되게 소모한다.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성욕으로, 때로는 탐욕으로, 때로는 경쟁으로, 때로는 아무 이유도 없이……그저 에너지가 있으니까, 그걸로 무엇을 할 것인가?
예수에 관한 유명한 수피 우화가 있다.
예수가 어떤 마을에 이르렀을 때, 술에 취해서 소리 지르며 거리에 누워 있는 남자를 보았다. 예수는 그에게 다가가 흔들며 말했다.
“뭘 하고 있는가? 왜 그런 식으로 삶을 낭비하는가?”
남자가 눈을 뜨더니 말했다.
“오, 주여! 내가 병들었을 때 당신이 고쳐 주었습니다. 이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나는 건강합니다. 나는 늘 아팠었고 침대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당신이 내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 나는 힘이 있지만 그것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는 이 남자를 도와 준 것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책임을 예수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예수는 몹시 슬펐다.
그는 그 도시의 시장에 갔지만 여전히 슬펐다. 거기에서는 한 젊은이가 탐욕으로 가득 찬 눈을 한 채 세상 모르고 창녀를 쫓아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는 그 젊은이를 막으며 말했다.
“무슨 짓이냐? 눈은 이런 짓을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눈은 하느님을 보라고 있는 것이다. 무슨 짓이냐? 왜 시간을 낭비하느냐?”
젊은이가 예수를 보고 발을 만지더니 말했다.
“주여, 저는 장님이었고 당신이 저를 고쳐 주었습니다. 이제 이 눈을 갖고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나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예수는 몹시 슬퍼져서 도시를 떠났다. 그가 도시에서 나왔을 때 나무에 목을 매달고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을 발견했다. 예수가 말했다.
“잠깐, 이게 무슨 짓이냐? 그렇게 소중한 하느님의 선물인 목숨을 망가뜨리려 하다니! 미쳤느냐?”
그 남자가 예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주님, 저는 죽었었는데, 당신이 저를 되살려 냈습니다. 왜 되살렸나요? 지금 저는 곤경에 처했습니다. 저는 조금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그대는 에너지가 있지만 그것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 시간을 낭비할 따름이다. ‘시간 죽이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간 죽이기란 자라나고, 성숙하고, 집에 도달할 기회를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붓다가 말하는 힘이란, 에너지를 어디에도 쓰지 않고 그 현존 속에서 단순히 기뻐하는 것이다. 에너지로 가득 찬 존재 안에서의 순수한 기쁨……젊음과 푸르른 나무의 순수한 기쁨……연꽃의 순수한 기쁨……구름을 뚫고 태양이 나올 때의 그 순수한 기쁨……그토록 에너지로 충만한 존재의 순수한 기쁨……그 울림, 생동감, 굽이침……. 그대가 에너지를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면, 에너지 자체는 수직선으로 움지기기 시작할 것이다.
에너지를 일이나 어떤 행동에 사용한다면, 그것은 수평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면 그대는 큰 집을 지을 수 있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더 많은 명예, 이런저런 것들을 가질 수 있다. 에너지를 일하는 데 사용할 때, 에너지는 수평적으로 움직인다. 에너지를 일하는 데 사용하지 않을 때, 그대는 단순히 그 현존 속에서 환희롭고, 그것이 거기에 있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때 그것은 수직선으로 움직인다. 나는 일을 죄다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잠시라도 수직적 움직임을 찾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평적 움직임도 좋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삶을 위해서는 그것이 필요하지만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는 없다.
그대느 수평적인 일을 통해 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랑, 명상, 신, 니르바나는 수직선상에 존재한다. 그러니 가끔씩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 고요히 앉으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 그러면 무엇인가 그대 안에서 자라날 것이다. 그대는 저장고가 된다. 그리고 그대는 알 수 없는 환희로 전율한다. 그대가 에너지로 가득 찰 대, 그대는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와 연결되어 있을 때, 그대는 에너지로 흘러 넘친다.
악한 마음이 없으므로 반드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사문이 붓다에게 물었다.
무엇이 가장 강한 것이고 무엇이 가장 밝은 것입니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가장 밝은 것은 티끌이 완전히 정화되어 순수함이 변함없고 흠 없음이 지속되는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은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부터 오늘날까기 시방에 있는 모든 것을 보지 못함이 없고 듣지 못함이 없으며, 일체지를 얻었기 때문에 가장 밝은 것이라 한다.
가장 밝은 것은 티끌이 완전히 정화되어…….
사념은 마음의 거울에 달라붙어 있는 티끌과 같다. 사념, 욕망, 상상, 기억들은 죄다 티끌의 형태이다. 그것들로 인해 마음의 순수함은 사라진다. 그것들로 인해 반사하는 능력, 거울과 같은 마음의 성질은 사라진다. 끊임없는 정화가 필요하다.
따라서 명상은 한 번 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먼지는 삶의 매순간 계속 쌓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여행중인 여행자와 같다. 날마다 그의 옷과 몸에는 먼지가 쌓인다. 날마다 그는 몸을 닦기 위해 목욕을 해야 한다. 다시 다음날이 되면 먼지가 수북이 쌓일 것이다.
명상은 날마다 하는 목욕과 같다. 그것은 한 번 하고 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런 일과(日課), 일상적인 일이 되어야 한다. 마치 음식을 먹듯이, 잠을 자듯이, 목욕을 하듯이 명상은 생활의 자연스런 일부가 되어야 한다. 최소한 하루에 두 번은 그대의 마음을 씻어야 한다.
명상을 위한 가장 좋은 시간은 아침이다. 일상 세계의 하루를 준비할 때, 마음을 씻어서 맑음을 가져라. 투명성을 가져라. 그리하여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 그리하여 어떤 악한 생각도 품지 말라. 그리하여 어떤 이기적인 생각도 갖지 말라. 더욱 순수하게 세상을 맞이하라. 타락의 씨를 뿌리지 말라.
다음으로 좋은 시간은 잠들기 직전이다. 다시 명상하라. 온종일 먼지가 쌓인 마음을 다시 씻고 잠들어라……. 정말로 그것을 씻어 낸다면, 그대는 굉장한 변화를 느낄 것이다. 잠자기 직전에 씻어 낸다면 잠이 사라질 것이다. 꿈은 하루 종일 쌓였던 먼지가 내부로 들어가서 공상과 환영들이 창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명상을 올바로 한다면 꿈은 얼마 안 있어 사라질 것이다. 그대의 밤은 꿈이 없는 평화로운 잠이 될 것이다. 꿈을 꾸지 않는다면 아침에 그대는 아주 신선하게, 아주 젊고 순결하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다시 명상하라. 왜냐하면 꿈을 꾸지 않았을지라도 시간의 경과와 함께 먼지가 쌓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대가 먼지가 낀 도로를 돌아다니지 않았다고 해도, 단지 집에만 앉아 있었다고 해도 먼지는 쌓인다.
아침에 다시 명상하라. 바르게 명상한다면 그대는 고요한 에너지의 바다가 될 것이다. 그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투쟁이 없이, 폭력이 없이, 조화 속에서 세상을 살 것이다. 설혹 남이 그대를 미워한다 해도 그대는 그 에너지를 사랑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그때 그대는 대단히 숙련된 솜씨로, 합기도의 자세로 세상을 살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대는 깊은 사랑과 감사함 속에서 그것을 흡수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설혹 누가 그대를 욕한다 해도, 그대는 깊은 사랑 속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면 욕은 더 이상 욕이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대에게 영양분이 될 것이다. 욕을 함으로써 그는 일정량의 에너지를 버린 것이다. 그는 그만큼 잃고, 그대는 그만큼 얻는다. 단순히 그것을 받아들여라. 그것을 환영하라.
그리고 군인의 길이 아닌, 산야신의 길이 자연스러운 생활방식이 된다면 매순간 모든 것이 새로운 빛 속으로 성장하고, 그대의 마음이 더욱더 밝아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가장 밝은 것은 티끌이 완전히 정화되어 순수함이 변함없고 흠 없음이 지속되는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은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시방에 있는 모든 것을 보지 못함이 없고 듣지 못함이 없으며, 일체지를 얻었기 때문에 가장 밝은 것이라 한다.
마음이 순수하고 비어 있고 맑을 때, 마음속에 한 생각도 없을 때, 마음 주변에 안개가 끼지 않았을 때, 마음이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같을 때, 그대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붓다는 말한다. 그대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의 감수성은 무한할 것이다. 태초부터 존재했던 모든 것이 그대에게 열리게 될 것이다. 그대의 앎은 완벽해질 것이다.
일체지를 얻었기 때문에 가장 밝은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 밝음은, 이 광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의 폭발이다. 그대는 겹겹의 어두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서 빛을 발할 수 없는 등불과 같다. 그대는 한 겹 한 겹 커튼을 걷어낸다. 그러면 서서히 빛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선명치 않으나 빛은 있다. 커튼을 걷어 내면 낼수록 빛은 더욱 강하게, 더욱 선명하게 된다. 좀더 커튼을 걷어내면……. 어느 날 모든 커튼을 벗겨 버리면, 그대는 문득 그대가 그대 자신의 등불임을 본다.
붓다가 죽었을 때, 이것이 그이 마지막 메시지가 되었다. 그의 수제자인 아난다가 흐느끼며 슬퍼하자 붓다가 말했다.
“그쳐라! 뭘 하고 있느냐? 왜 울고 슬퍼하느냐?”
아난다가 말했다.
“당신은 우리를 떠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40년을 지냈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걸어다녔고, 당신과 함께 잠들었으며, 당신과 함께 음식을 먹었고, 당신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는 마치 그림자처럼 당신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아직껏 나는……당신은 열어 놓았지만 나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가고, 당신이 떠나시므로 우는 것입니다. 당신 없이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당신과 함께 했으면서도 나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는 다시없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당신 없이는……이제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 내가 우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당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우는 것은 이제 나에게는 아무 희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의 죽음과 함께, 내 영혼의 어두운 밤도 시작되었습니다. 영겁의 시간 동안 나는 어둠 속에서 떨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 우는 것입니다.”
붓다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 그대의 빛은 그대 안에 있다. 나는 그대의 빛을 앗아가지 않는다. 나는 그대의 빛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를 깨닫게 하는 것이 내 손안에 있었다면, 그대는 깨달았을 것이다. 깨달음은 그대 내면 깊은 곳의 능력이다. 그러니 용기를 내라. 아난다, 그리고 그대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아파 디포 브하바(appa deepo bhav)……그대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붓다가 죽고 나서 꼭 24시간 후에 아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것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40년 동안 그는 붓다와 함께 살았다. 그런데 그는 붓다가 죽은 지 꼭 24시간만에 깨닫게 되었다. 바로 그 죽음이 굉장한 충격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 마지막 메시지는 매우 깊게 파고들었다.
붓다가 살아 있었을 때 아난다는 붓다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 마치 그대들이 내 얘기를 들을 때처럼. 그대들은 듣고 있으면서도 듣고 있지 않다. 그대는 말한다.
“괜찮아, 오늘 놓친다면 내일 다시 듣지. 그러니 왜 서두르는가? 오늘 아침에 놓친다 해도 아쉬울 게 없어. 또 내일 아침이 올 테니까.”
따라서 그는 반은 졸고 반은 깨어서 들었다. 아마 그는 피곤했을 것이다. 잠을 충분히 못 잤거나 밤에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여행이 너무 길어서 기진맥진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붓다는 똑같은 것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얼마나 오랫동안 들어 왔겠는가? 그러면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이 느낀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래, 나는 전에도 들었다. 그러니 또 듣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잠이나 좀더 자는 게 낫지. 낮잠이나 자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붓다가 죽어갈 때, 아난다는 철저히 깨어 있었던 게 틀림없다. 수만 년 동안 다시 어둠 속에서 비틀거려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정말로 떨었다. 그리고 붓다는 말한다.
“걱정하지 말라. 그대의 빛은 그대 안에 있다.”
아마 그는 처음으로 그 말을 제대로 들었을 것이다. 그 40년 동안 그는 그것을 놓쳤음에 틀림없다. 그가 귀머거리가 아니었던 때는 그때가 처음일 것이다. 그는 명료해졌다. 바로 그 상황이 그를 뿌리에서부터 떨게 했고, 바로 그의 근본을 흔들었다. 붓다는 떠나고 있었고……붓다와 같은 사람과 40년 동안 함께 살았다면, 그것은 어렵다. 붓다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아난다는 자살을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불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틀림없이 자살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분명히 그런 생각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인간적이다. 붓다와 40년 동안이나 함께 살았고 붓다는 죽어 가는데 그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처럼 보였다. 그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의 눈은 분명히 맑아졌을 것이다. 붓다의 죽음은 그를 관통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예민하게 깨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말했다.
“그대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그리고 그는 죽었다. 그는 곧 죽었다. 그대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이것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그의 말이 되었다.
이것이 집을 관통했고, 이것이 아난다의 가슴을 꿰뚫어 24시간만에 그는 깨닫게 되었다.
그 광명의 근원은 그대 안에 있다. 그것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밖에서 구한다면, 그대는 헛되이 구하는 것이다. 두 눈을 감고 내면으로 들어가라. 그것은 그곳에서……무한정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그대의 가장 내면에 있는 본성이다. 그대는 광명이고, 그대의 존재는 빛을 발한다. 이 광휘는 빌려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가장 깊은 속 안의 중심이다. 그것은 그대이다.
그대는 빛이다. 그대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시방에 있는 모든 것을 보지 못함이 없고 듣지 못함이 없으며, 일체지를 얻었기 때문에 가장 밝은 것이라 한다.
온유함은 힘이고 명상은 광명이다. 둘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한쪽 면은 온유함, 무아(無我)이고, 다른 한쪽 면은 순수한 마음, 광명이다. 그들 둘은 함께 간다.
그대는 이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더욱더 무아(無我)가 되라. 더욱더 명상적이 되라. 그러면 가장 위대한 힘이 그대의 것이 될 것이고, 가장 위대한 앎이 그대의 것이 될 것이고, 가장 위대한 빛이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