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전문 격월간 [유심] 2009년 9/10월호 신인추천 작품 - 수상한 바람 외 2편 / 김향미
수상한 바람 / 김향미
컵이 쓰러진다 쏟아진 블랙커피가 책상 위로 미끄러진다 낡은 그림책이 젖는다 잉크가 번진다 산 중턱 구름이 젖는다 마른 억새의 휘어진 줄기가 젖는다 바위를 굴리며 산을 오르는 남자의 근육이 젖는다 허공에 붙박인 새의 정지된 날개
희한한 일이야 룰루, 휴지를 찾아 투스텝 밟으며 뛴다 이 가벼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날개를 퍼덕인다 두둥실 떠오른 몸이 절벽 사이를 난다 어딨지 어딨어 가속도 붙이며 아래로 날다가 다시 차고 오른다 재생되지 않는 멜로디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소(沼)에 갇힌 물거품이 제자리 돌기를 한다 몇 바퀴 돌던 물방울 떠내려간다 동동, 스러진다 휴지는 하얗게 흘러내리는 폭포수, 번진 활자는 일제히 폭포 속으로 빨려든다 맑은 갈색 소동은 얽히지 않는 한 편 날개가 된다 날기를 멈추지 않는 새
닫힌 창문의 격자무늬 틀 위에 먼지 날리는 소리 들린다 손에 닿을 듯 말 듯 한 행운목 이파리가 흔들린다 걷힌 커튼 아래에 조각모음 중인 사선의 빛줄기를 엿본다 맞춰진 퍼즐의 귀퉁이를 커튼 그림자가 갉아먹고 있다, 랄라
우리의 호프 / 김향미
아마 육지를 꿈꾸면서 시작되었을 거야
몸에 찍힌 달무늬가 과녁이 될 줄이야, 내려오는 그물은 더욱 촘촘하게 짜여 있었어 압박 해오는 물의 살에는 빈틈이 보이지 않았지 어둠이 지느러미의 가시를 자라나게 해 심해의 달고기, 바닥을 견디는 힘은 납작한 달무늬에서 나오는 걸까 몸이 납작한 것은 선천성 모습이 아닐지 몰라
도수 높은 빗줄기에 취하고 싶었어 어떻게 한 잔 안 하고 넘길 수 있겠어 구멍 난 기구를 타고 협곡을 건널 수는 없는 일이지 지금 딱, 한 잔이 부족해 쓰디쓴 오늘을 호프에 희석하여 남김없이 마셔버리는 거야 내일은 검고 깊은 동굴 하나 떠오르겠지
어느새 호프가 바닥났잖아 육지 냄새가 퍼지고 있어 싱싱한 취기에 지느러미가 길어졌어 늘어진 지느러미에 힘이 솟고 있어 시야가 넓어지고 있어 점점 가벼워지고 있어 이제, 물속으로 가지 뻗는 저 빌딩 아래 달을 만나러 가야 해 한번, 지느러미 퍼덕이는 연습부터 해볼까 일단, 호프 하나 추가요
바다낚시 / 김향미
사위가 어두워지면 불 밝히는 바다, 사각의 화면 앞을
생쥐 한 마리 바쁘게 움직인다
먹지 않아도 배부른 미끼
제 향기 닮은 떡밥을 찾아 클릭클릭
남의 창고를 뒤지기 시작하는 소리 그치지 않는다
신중하게 골라 훔쳐온 미끼를 안고
그는 밤바다로 나아간다.
고요한 물결 위에 미끼를 내린다. 가만히 떠서 깜빡이는 찌를 팽팽한 시선으로 노려본다. 잘 버무려진 미끼를 달고 물속으로 던져진 미늘, 가시를 감싼 향기가 퍼지면 물 속 깊은 곳을 유영하는 물고기들 몇 마리쯤 그 향기에 끌려 올라올 것이다. 벌써 툭툭 건드리며 지나치기도 하고 한입 베어 먹기도 한다.
베어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떡밥, 아래쪽에 제 꼬리를 남기고 유유히 멀어지는 익명의 유영, 아무렇게나 끊어놓은 꼬리에 찔려 그는 피를 흘린 적이 있다. 입질이 늘어날수록 더욱 부풀려진 떡밥을 들여다보며,
한 마리 물고기 되기로 한다.
만발한 향기에 끌려 사각의 바다로 뛰어든 그의
살림망, 비어있는 그물 사이로 흐르는 물결에
핏발 선 눈. 헛배가 부르고 때늦은 멀미를 한다.
전원이 꺼지고 사각의 바다 속으로 잠겨가는 파도소리.
김향미 시인
경북 안동 출생
[당선소감]
<첫걸음을 내딛으며>
내 詩의 숲길에 드리워진 새벽빛
'나는 방랑자. 산 타는 사람. 평야를 싫어하지.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있지도 못하는 것 같아. ……확률과 우연이 나를 좌우할 수 있는 시절은 지났지.'※
산을 오른다. 언제나 죽지 않을 만큼 지쳐서 사는 그녀의 고비는 늘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이다. 그 자리에 머물러 앉아 더 나아가지도 못하고 뒷걸음치지도 못하는 고비, 사막 같은 것이다. 이런 투정이나 엄살을 받아주며 위로와 격려가 되어주신 분들의 얼굴이 스친다.
돌부리를 피하며 나뭇가지를 치우며 개울을 만나 손과 땀을 씻으며 오르는 산은 누릴 만한 고비임을 깨닫는다. 중턱에 다다라 내려다보이는 숲은 고비를 건너 출렁이는 바다, 등 뒤로 건너야 할 마루를 바라보는 그녀 앞에 또 하나의 벽, 숲의 詩 속에서 만나는 벽이 그녀를 다시 걷게 한다.
감사를 대신하는 기도를 한다. 더불어 내 詩의 숲길에 새벽빛을 드리워준 심사위원 선생님과 유심에 감사드린다.
※ 니체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중에서.
<추천의 말>
詩는 세상에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을 찾아 나서는 시인들은 어쩌면 고대 짐승의 발자국을 찾는 심정일지 모른다. 그래서 어떤 과정을 거쳐 드디어 詩의 새로운 얼굴을 만들고 거기 숨쉬는 표정까지 불어넣은 詩를 만나면, 무엇이라고 할까, 그 詩 속의 격렬한 호흡이 나에게로 전해져 읽는 사람조차 詩의 위용과 깊은 감동으로 한 발자국 다가서는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김향미와 오승근의 詩가 그랬다. 하나의 주제를 끈질기게 물고 관념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하나의 시적 물줄기를 따라가 긴장을 유지하면서 자기 나름의 확고한 세계를 만들어가는 신선한 창의성은 앞으로의 시작을 크게 신뢰하게 만든다. 특히 애매하고 암호 같은 추상적 개념들을 잘 피해 가면서도 작품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특히 김향미의 <수상한 바람>, <바다낚시> 오승근의 <세한도>, <피카소 그림 감상법> 등은 유머와 위트까지 곁들인 제대로의 재미를 섞어 詩의 매력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무엇보다 조밀하게 짜 나가는 언어의 조직을 먼저 헤아렸으며 이미지를 끌고 가는 저력이 서툴지 않다는 데 시인의 자격을 주는 큰 몫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시인의 이름을 얻는다거나 진정한 시인으로 거듭나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과 성실성에 있을 것이다. 결국은 밤낮을 詩를 부둥켜안고 24시간 의식의 가동을 쉬지 않는 詩와의 동거를 쌓아갈 때 이 시대의 새 시인으로 탄생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많은 시인 중에 하나를 보태는 이름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시인으로 태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두 사람의 詩로 우리가 알고 있는 詩의 폭이 그만큼 넓어질 것을 믿는다.
아쉬운 것은 김종규의 <손>, <주름의 발견>은 심사자를 갈등하게 만들었지만 역시 조금 더 시간의 여유를 준다는 의미에서 뒤로 미루었다. 분발해서 詩의 식탁에 다시 서로 마주앉게 되기를 바란다.
추천위원 : 신달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