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와 더위는 이겨도 곡괭이 하나로 밭을 일구는 일은 어려웠다.
나는 스탈린의 악정을 보도하기 위해 8.27-9.2 간 우즈베키스탄을 우선 다녀왔다, 1905년 로일 전쟁이 일어나자 소련을 이긴 일본은 의기양양하여 우리 한반도를 병합하였다. 또한 소련의 스탈린은 지난 1937 년 다시 일본이 처 들어올 경우, 까레스키(고려인)가 어떠한 입장을 취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20만이나 되는 고리 인들이 일본에 붙어, 당시의 소련에 총구룰 겨눌 것이라는 오해 때문에 고려인들을 화물차에 태워 중앙아 즉, 가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 등에 버리다 시피 하고 갔다고 하였다. 이때 화물차에 탄 고려인들이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 그리고 기아에 허덕이다가 죽은 사람만도 8만 가까이 된다고 하였다.
이때는 추후 국제화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 제국주의 외교가 없어질 것이라는 명제를 망각하고 일본이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부 ASEAN 국가를 침탈하는 바람에 외교적으로 지금과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일본으로서는 이 때문에 우경화 하였다. 더구나 소련은 미국과 동등한 파트너로 등장, 머리 나쁜 촉새가 머리 좋은 황새를 쫓아 가다가 지도자 혼자의 결정이 여러 사람의 결정과 비교될 수 없다는 가정을 잊어 버려, 오늘에 와서 어려울 것이라는 인테리 구룹의 생각 속에 새로운 이론으로 등장한 공산주의를 위요하고 사상적인 문제와 전통적으로 얼어붙지 않는 항구를 얻으려는 노력 때문에 남하정책이 한창 심할 때였다.
그래도 열차를 탔던 이 들의 수명은 연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결과론적이긴 하겠지만! 이들보다 말께나 세고 똑똑한 엘리르 구룹은 아무래도 감옥으로 끌려갔는데 추후에 이들을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이들은 감옥에서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총살당한 것으로 보였다.
내가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하였을 때였다.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전통 악기를 연주한다고 하여, 가 봤다. 그곳은 아리랑 요양원으로서 KOFIH(Korean Foudation for International Health)라고도 하였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이곳 원장은 인상이 참 좋았다. 마침 대사관에서 주선한 지난 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에도 살아남은 1 세대 2분이 기다린다고 하여 그곳엘 간 것이다. 그곳에는 기다린다던 2분을 포함하여 우리 고려인 노인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노인들을 위하여 우즈베키스탄의 부총리를 역임하였다는 여자 분이 와 있고 전통 악기의 연주를 지휘하는 음악대학 학장이라는 여자 분이 와 있었다. 그러나 나에겐 처음 보는 악기라 신기하기만 하였다. 원장은 서글서글 하게 자주 부 총리나 학장이 오신다고도 하였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예전의 협동농장에 유황온천이 있어, 다시 이곳에 올 것 같다고 하였으며, 이 마을은 연해주에 대한 추억때문에 한마디로 연해주의 이름을 딴 시옹고 마을 이라고도 하였고 아랍말로는 AHmad Yashai 이라고도 하였다. 사설 TV방송에서 동 연주 장면을 중계하였다, 그래서 나는 직감할 수가 있었다. 왜 그리 바쁜 분들이 자주 이곳에 나오시는지!
“사실 그때는 뭐가 뭔지 몰랐죠. 저는 겨우 7살이거든요” “박순옥 여사“로 알려진 현지 ”류박“씨는 언급하였다.”그럼요. 7살이었다면 모를 수밖에 없죠. 저는 14살 이었거든요. 저도 기억이 안 되고 가끔 스탈린 시대는 최소한 지금과는 달리 먹을 것은 해결되었다“고 역시 현지인인 고려인으로서 현지에서는 Maxim Kim 씨로 알려진 김용학씨가 말하였다. ‘물론 이리로 올 때는 기차간에 죽은 사람들이 널려있어, 너덜너덜한 옷에 입은 채로 기차 밖으로 내던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런 이외에 기억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들은 이들도 스탈린 시대의 망령이 되살아났는지, 스탈린에 대하여 나쁜 말을 안 하였다. 고려인들이 이들을 포함하여 당했다면, 고래로 부도님한테 내려오는 나쁜 이야기들이 있을 것 같았다. 이들의 한국말이 어눌하여 그렇겠지만 독재를 하는 것으로 알려진 카리마코프 대통령이 스탈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른다는 점도 생각되었다. 이는 고려신문으로 알려진 신문의 편집장이던 김 부루토씨가 사전에 부탁하였던 인터뷰를 하기로 부탁한 사람이 지방에 있다고, 서울인 타쉬켄트로 올라오지 않겠다고 한, 언급내용과 연계됨은 너무한 일일까?
김 부루토씨는 오히려 페리가나 주지사로 임명되고 최근 카리마코프 대통령으로부터 페리가나 주 주지사로 임명된 타쉬켄트 로부터 500여 km 나 떨러진 고려인 편대사 (H.E. Vitali V. Fen)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역 제안을 하였었다. 일정이 안 맞아 결국은 편 대사도 불발되었지만, 이를 기억하여 과거 재외공관에서 하던 일을 생각하고는 동 언급에 씁쓸한 추억이 앞섰다. 남의 나라 일에 대하여 쓸데없이 너무 간섭하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로 믿을 것이지 하고는 이들과의 악속 후 밖에 나와서 하늘을 보고 한 마디 하였다.
이들 고려인 2분은 김평화 씨와 허만금씨 덕분에 과거에 한국 사람들이 일을 열심히 창의적으로 하는 민족인 것으로 알려졌었다고 말 하고는 상기 두 분은 죽었으나 별이 컸던 훈장을 받았다고 언급하고 이들이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한민국을 빚낸 인물로 알려 졌으며, 이 분들의 후손에 대하여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언급을 하였다. 그러고는 이들 때문에 많은 고려인들이 살았다고 제보하고는 현지 타쉬켄트 인근의 고려인 마을이 있는 시옹고 마을 근처의 밭과 논들을 곡괭이 하나로 일궜다고 말 하면서 지금은 통일이 되어 귀국 조치된, 독일민족들이 이것을 증명하는바, “한국인들은 정말 질긴 사람들이지”라고 끝을 맺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