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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치(國恥)길’걷기 (국치길 : 1.7km)
코스 | 현위치 | 관련내용 |
한국통감관저터 | 기억의 터 | 1906년 통감관저로 설치되었으며 1910년~1939년까지는 조선총독관저로 쓰임. 1910년 8월 22일 이곳에서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되었으며 1939년 이후에는 시정기념관으로 쓰였음 |
한국통감부 | 서울애니메이션센터 | 1910년 강제병합 이후 통감부가 폐지되면서 조선총독부가 설치됨. 1926년 경복궁 신청사가 신축됨에 따라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용도 변경. 1950년 한국전쟁 때 소실 |
노기신사터 | 남산원 | 노기 마레스케 - 일본 메이지시대 러일전쟁의 영웅으로 군신으로 추앙받는 인물을 추모하기 위해 신사 건립 |
갑오역기념터 | 숭의여자대학교 | 청일전쟁(1894~1895)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1899년 건립. 기념비에서 일본왕 생일행사인 천장절 행사를 자주 함 |
경성신사터 | 숭의여자대학교 | 일본거류민단이 창건한 신사로 1925년 조선신궁이 완공되기 전까지 식민정권의 국가제사를 대행 |
한양공원비석 | 회현동1가 산1-16 | 한양공원 조성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전면에는 고종황제가 쓴 한양공원이라는 명칭이 새겨져 있다. 한양공원은 1910년 개장되었다. 조선신궁 건설계획에 따라 사라짐 |
조선신궁터 | 회현동1가 100-177 | 일제가 한국에 세운 가장 높은 사격을 가진 신사. 1918년 조성하여 1925년 완공. 식민지 정부의 국가의례를 집전하며 조선인의 신사참배를 강제하는 기능 수행 |
◇ 남산예장공원(南山藝場公園) : 중구 퇴계로 26길 36 (예장동)
- 2021년 남산공원 입구, 지상과 지하에 조성한 역사를 품은 공원.
2021년 6월 9일에 개장한 남산예장공원은 과거와 현재,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공원으로 조선 시대부터 일제강점기, 군사독재 시절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곳이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공원 조성 과정에서 다양한 역사적 유적과 시설물을 복원했다.
남산예장공원 터는 조선 시대에 군사들의 훈련장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통감부가 들어섰으며, 군사독재 시절에는 고문 수사하던 중앙정보부가 있던 자리이다.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고립된 장소가 2021년에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를 품은 공원이 되었다. 또한, 푸른 소나무 숲과 잔디밭, 산책로 등이 조성되어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이 공원은 2만 2,833㎡(약 7,000평) 규모로, 지상과 지하로 나뉘어 있다. 지상에는 전망대를 비롯하여 중앙정보부의 고문실을 재현한 [기억6], 그리고 조선총독부 관사 터를 그대로 보존한 '유구 터' 등의 역사적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지하에는 예장마당과 이회영 기념관이 있다. 이회영 기념관은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과 6형제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공간으로, 이회영 선생의 유품과 기록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공원을 통해 시민들이 역사를 배우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도록 다양한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 총독부 관사 터 : 중구 퇴계로 26길 36 (예장동)
- 한·양·일 절충식으로 건축한 총독부 관리들의 사택
1906년에 통감부의 설치로 국내에 일본인 관리가 대거 등용되면서 이들을 위한 관사가 대량으로 지어졌으며 탁지부(度支部) 건축소의 설립으로 더욱 본격화되었다.
탁지부 건축소의 설치 이후 1910년까지 수행한 공사의 건수를 보면 관사 및 숙소의 비율이 83%로 가장 높았다. 1910년 이후 일본인들의 통치 기구가 정비되면서 관사의 건설은 더욱 급속히 진행되었다. 당시 경성부는 급격한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심각한 주택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관사의 대량 보급은 주택 보급 안정화에도 이바지하였다.
조선총독부 관사는 거주자의 직급과 관등에 따라 규모와 설치되는 실의 종류 등에서 차이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 한·양·일 절충식 공간 구성이다.
일본인들을 위한 일본 전래의 주거 형식(일반 생활 공간)과 근대의 서구에서 도입된 서구적 공간(응접실, 식당, 서재 등의 공적 공간), 그리고 한국의 기후 등에 적응하기 위한 한국 전통적 공간(온돌)의 특징이 한 주택 내에서 모두 사용되었다.
이 자리는 5·16 쿠데타 이후 중앙정보부가 들어섰다.
◇ 한국통감부 터 : 중구 예장동 8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 1905년 을사늑약으로 설치한 한국통감부, 경술국치 후의 조선총독부 터
이곳은 일제가 을사늑약에 따라 1906년에 설치한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 터이다. 이토 히로부미 등이 통감으로 부임하여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주권을 탈취하는 공작을 폈다
통감부는 1906년 2월부터 1910년 8까지 일제가 한국을 완전히 병탄(倂呑)할 목적으로 설치한 감독기관이다. 일제는 통감부 설치를 통해 한국 병탄의 예비작업을 수행하였다. 먼저 일본은 한국과 맺은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 박탈을 노골화하였다.
일제는 을사늑약의 내용 중 제3조 - ‘일본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친히 한국 황제폐하를 내 알 하는 권리를 갖는다’라는 조항에 따라, 1906년 1월 31일 자로 일제의 공사관을 폐쇄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2월 1일 임시통감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취임하였다.
조약 내용에 따르면 통감부는 외교업무만을 담당한다고 하였으나, 결국에는 한국의 모든 분야에 마음대로 간섭하고 감독하는 기관이 되었다. 후일 일제는 고문정치와 차관정치를 통해 결국 한국정부에 침투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국통감부 청사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청사가 되었고, 조선총독부는 1926년, 경복궁 안에 청사를 짓고, 이전하였다.
◇ 노기신사[乃木神社] 터 : 중구 소파로 2길 7(예장동) (남산원 내)
-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 사령관 노기(乃木)를 신으로 모셨던 일본 신사(神社)
리라초등학교 정문과 숭의여대 정문 사잇길로 들어서면 사회복지법인 남산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남산원은 노기 신사(乃木神社)가 있던 터인데, 남산원 주변 화단 곳곳에서 노기 신사 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노기 신사는 1904~1905년 러일전쟁 당시에 일본육군을 지휘한 제3군사령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신으로 모셨던 신사(神社)다. 노기는 러일전쟁 당시 제3군 사령관으로서 최대 격전지인 만주의 여순(旅順) 요새 공략전을 지휘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끝내 승리하였다. 노기는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부인과 함께 자결하여 군신(軍神)으로 추대되었다.
일제가 노기의 신사를 경성에 세운 이유는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하면서 러시아가 조선을 포기하고, 일본이 통감정치를 실시하는 사실상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기점에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 경성신사(京城神社) 터 : 중구 소파로 2길 10 (숭의여자대학교 내)
- 일본인 거류민들이 받들던 신사가 세워져 있던 곳
현 숭의여자대학교 본관은 1925년 일제의 조선신궁 건립 이전까지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제의를 지내던 최고의 신사 시설이던 ‘경성신사(京城神社)’ 터이다. 경성신사는 1925년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완공되기 전까지 조선의 신사를 대표했다.
경성신사는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이라는 이름으로 1898년에 왜성대(倭城臺)에 건립되었고, 1936년에 조선총독부가 관리 비용을 부담하는 국폐소사(国幣小社)로 승격되었다. 주신은 아마테라스와 개척3신(開拓三神 : 오오쿠니누시와 스쿠나히코나, 국혼신(国魂神)이었다.
갑신정변(1884년) 이후에 남산 북쪽 기슭은 일본 공사관에 이어 1905년에 통감부가 자리 잡고, 일본군이 주둔하며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된 곳이었다. 일본인 거류민들이 늘어나자 자연스레 신사(神社) 건립 요구가 제기되어, 1897년, 거류지 남쪽에 왜성대공원을 조성하면서 공원 용지 중의 400평에 신사를 짓기로 했다.
1898년 5월, 일본인 거류민 대표가 본국에 건너가 이세 신궁(伊勢神宮)에서 신체(神体)를 받아온 다음, 그해 10월 3일에 진좌제(鎭坐祭)를 거행했다. 이어서 1916년에 남산대신궁을 경성신사로 개칭하였다.
광복 후에 경성 신사가 철거된 자리에는 일시적으로 단군성조묘(檀君聖祖廟)가 세워졌다가 숭의여자대학교가 들어섰다.
서울시는 1910년 경술국치 등 아픈 역사를 담은 서울 남산 예장자락 일대 1.7km에 이르는 구간을 역사 탐방길로 만들고 역사를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한글 자음 “ㄱ”자 모양의 로고를 국치길 보도블록 곳곳에 설치하여 구민들이 발걸음을 옮기며 “ㄱ”자 로고를 보는 것 자체로 치욕스러웠던 시대의 감정을 체험할 수 있도록 재구성하였다.
◇ 한양공원비 : 중구 회현동1가 산 1-16 (서울미래유산)
- 1910년에 일본인 거류민들을 위한 한양공원에 세웠던 비석
한양공원비(漢陽公園碑)는 1912년 서울 남산에 한양공원(漢陽公園)이 조성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비석이다.
1900년대 초반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여가와 유흥을 위해 조성된 한양공원은 이후 조선신궁(朝鮮神宮)이 한양공원 자리에 세워지면서 폐쇄되었다.
개항 이후 서울로 이주해오는 일본인들이 급격히 증가하자 일본거류민단은 일본인을 위한 위락시설 조성이 필요하였다. 이에 1897년 남산 북쪽의 현 숭의여자대학교 자리에 왜성대공원(倭城大公園)을 조성하였고, 1910년에는 남산 서북쪽 산비탈 일대에 한양공원을 조성하였다.
한양공원 조성을 위해 일본거류민단은 공원 용지를 한성부(漢城府)로부터 무상으로 대여받았다. 해당 용지는 현재의 남산식물원 자리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넓은 면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공원은 1908년부터 조성을 시작해 이후 각종 시설을 완비하여 1910년 5월 29일에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한양공원 개원일에 고종은 칙사(勅使)를 보내 치하하고, 비석에 새겨진 글씨인 ‘한양공원’을 직접 써서 보냈다고 한다. 한양공원은 1918년 조선총독부가 그곳에 조선신궁 건설을 결정함에 따라 폐쇄되었다.
한양공원 비석은 바닥에 화강암 대석(臺石 110×55.5×45cm)을 놓고 그 위에 비신(碑身 88.5×165×45cm)을 세웠다. 전면에 ‘한양공원’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으며, 후면에는 한양공원 조성에 이바지한 사람들의 명단이 새겨졌던 듯하나 현재 모두 정(釘)으로 쪼아 없어져 알아볼 수가 없었다. 최근에 일본강점기 때 발간한 사진집 『은뢰』에 한양공원 비석 뒷면 사진이 수록되어 대부분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비석 주변에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철선을 두르는 데 사용된 사각 돌기둥 3개가 남아 있다.
한양공원비는 광복 이후 오랫동안 그 존재를 알 수 없다가, 2002년 중구 회현동 케이블카 승강장 인근의 공원 철조망 안쪽 6~7m 지점의 풀숲에서 발견되었다. 이 비석에는 고종의 친필 글씨가 그대로 남아 있고, 또 공원 조성에 도움을 준 기부자의 명단 흔적이 남아 있어 역사적으로 보존 가치를 지닌다.
◇ 한양도성 유적 : 중구 회현동 1가 100-267(남산 분수대 터)
- 2013~14년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성벽 유적
서울시는 2020년 11월 12일, 남산도서관과 안중근의사기념관 근처에 있는 한양도성 유적 전시관을 시범 운영 및 무료 개방했다. 이 유적전시관은 2013~2014년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성벽 유적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이곳은 한양도성 남산 구간의 일부로 그동안 없어진 것으로 알았던 성벽 구간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시민에게 공개하였다.
2009년부터 서울시는 남산의 역사성과 자연성 회복을 위한 ‘남산 회현자락 정비사업’을 추진했다. 힐튼호텔 앞 아동광장 일대 성곽 34m 발굴(1단계)을 시작으로 백범광장 일대 성곽 42.4m 발굴(2단계), 중앙광장 일대 성곽 189.3m 발굴을 끝으로 3단계 사업을 완료했다. 총 길이 약 189m인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내 성곽은 3단계 사업으로 발굴된 구역이다.
이 중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이 있는 남산 구간은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깃든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일제가 우리나라를 점령하면서 남산을 조선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삼았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세운 것이었다. 조선신궁을 설치하기 위해 한양도성을 무참히 허물었고 사잇길을 내버렸다. 현재는 남산 소월길로 불린다.
광복 이후, 조선신궁은 철거됐지만 한번 심하게 훼손된 한양도성은 점점 제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1968년 12월, 박정희 정부는 조선신궁 자리에 남산식물원과 분수대를 건설했다. 둘레 20m 분수대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이 무렵 한양도성은 또 한 번 심하게 훼손된다. 박정희 정권은 1962년에 반공 지도자를 기르고 선전 활동을 펼칠 자유총연맹, 타워호텔(현 반얀트리호텔)을 지었다. 건축 과정에서 기존의 한양도성 성돌 일부가 두 건물의 축대로 쓰였다.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에는 한양도성 남산 구간 수백 년의 역사 현장이 한 곳에 잘 드러나 있다. 우선, 관람 갑판을 따라 길게 이어진 한양도성은 여러 시대에 걸쳐 보수된 흔적들을 관람할 수 있다.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성돌로 사용한 태조(14세기) 때부터 돌을 납작하고 둥근 모양으로 다듬어 성돌로 이용한 세종(15세기), 성돌의 크기를 가로, 세로 40~45cm 내외의 네모난 방형으로 규격화해 만든 숙종(18세기) 때까지 겹겹으로 보수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시기별 축성양식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성벽을 쌓을 때 임시로 나무 기둥을 박았던 구멍의 흔적들도 함께 발굴됐다.
한양도성을 따라 높은 언덕에 올라가면 이름이 새긴 성돌을 확인할 수 있다. 축성과 관련된 글자를 새긴 돌이라는 뜻의 각자성석(刻字城石)은 천자문 순서로 표시된 축성구간 명칭(14세기), 축성 담당 지방(15세기), 공사 관계자 이름(17세기 이후) 등을 새겼다.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내자 육백 척’ 각자성석은 14세기의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벽 중간의 멸실(滅失)된 구간 왼편에는 조선 신궁 배전(拜殿) 터가 자리했다. 이 건물터는 조선신궁 내 배전(방문객들이 절하며 참배하는 곳)의 기초 구조물로 성벽 발굴조사 때 함께 발견됐다. 조선 수도의 상징을 헐고 한반도 최대의 신궁(神宮)을 세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신궁 배전 터 옆에는 분수대가 존재한다. 1960년대 만들어진 분수대는 한양도성 발굴 전까지 광장 형태로 유지됐다. 남산식물원과 함께 옛 서울의 상징물로 불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서울의 아픈 역사를 전하는 증거물이 됐다.
이외에도 2013년과 2014년에 걸쳐 발굴하면서 발견한 돌들도 전시돼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을 조성했을 때 사용된 축댓돌(견치석), 조선시대 성돌 등 생생한 발굴 현장 모습들을 관람할 수 있다.
◇ 조선신궁(朝鮮神宮) 터 : 중구 회현동 1가(남산 분수대 터)
- 1910년에 일본인 거류민들을 위한 한양공원에 세웠던 비석
남산 분수대 터에는 일제가 한국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서울의 남산 중턱에 세운, 신궁(神宮)이라는 가장 높은 사격(社格)을 가진 신사(神社)가 20년간 세워져 있었다.
조선신궁(朝鮮神宮)은 1925년에 일제가 한국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서울의 남산 중턱(남산 분수대 자리)에 일본의 건국 신인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와 한국을 병탄(倂呑)하고, 1912년에 죽은 메이지 왕(明治王)의 위패를 둔 곳이다.
일제는 조선신궁이 한양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남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음으로써 일본이 조선 지배의 정당성을 갖기 위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제는 침략 때문에 식민지를 획득하거나 조차권 ·위임통치권 등을 얻으면 그 지역에 예외 없이 관립 신사를 세우고, 이를 총진수(總鎭守)라 하여 이를 중심으로 정신적 ·종교적 지배를 꾀하였다. 1910년에 한국을 강점하게 된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뒤 신사정책(神社政策)을 수립하여 각 지역에 관립 신사를 세우고, 기존의 일본 거류민들이 건립한 민간 신사도 관 공립화하여 지원하였다.
그들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주입 도구로서 관립신사 설립계획을 추진하던 총독부는 1912년부터 조선신사(朝鮮神社) 설립 예산을 편성하여 이 일을 추진하였다. 설립 위치는 서울 남산의 한양공원(구 남산식물원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도서관 자리)으로 정하고, 여기에 둘 제신(祭神)으로는 그들이 건국신화의 주신인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와 한국을 병탄하고 1912년에 죽은 메이지 왕(明治王)으로 결정하였다. 수년에 걸친 기초조사와 준비를 끝낸 총독부는 1918년 12월 16일 ‘조선신사 창립에 관한 청의(請議)’를 일본 내각에 제출하여 1919년 7월 18일 자 일본 내각 고시 제12호로 조선신사 창립을 확정 ·공포하였다.
일제는 남산 한양공원 주위에 부지를 확보하여 1920년 5월 27일 지진제(地鎭祭)라는 기공식을 하고, 건립에 착수하였다. 총 부지 127,900여 평 위에 총공사비 156만 4,852엔을 들여 일본의 신사 건축양식에 따라 정전(正殿) ·배전(拜殿) ·신고(神庫) ·참배소(參拜所) 등 15개의 건물을 배치하고, 여기에 오르는 돌계단과 참도(參道)를 조성하였다.
공사가 마무리되어 가던 1925년 6월 27일 일본 내각 고시에 의해 사격(社格)을 높여 신사의 명칭을 종래 조선신사에서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개칭하고, 신사에 비치할 ‘3종 신기(三種神器 : 청동거울, 청동검, 곡옥(曲玉)’라는 상징물들을 일본에서 가져와 그해 10월 15일, 진좌제(鎭座祭) 행사를 마친 뒤에 한국인들에게도 참배하도록 강요하였다.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참배 강요 압력이 증대됨에 따라 참배자도 격증하여 1930년 38만 6,807명에서 1942년에는 264만 8,365명으로 늘어났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조선신궁은 이튿날 오후에 승신식(昇神式)이라는 폐쇄행사를 하고, 9월 7일부터 해체작업에 들어가 10월 6일까지 마무리한 뒤 이튿날 나머지는 일본인들의 손으로 소각하고 철수하였다.
서울시와 서울역사박물관은 2013년 6월부터 남산 회현 자락 중앙광장 일대를 중심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서울한양도성과 조선신궁 건물터 등 역사적 흔적을 대거 발굴했다.
이번 조사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과는 189.3m의 서울한양도성을 발굴한 것이다. 이는 서울시 발굴조사 이래 최대 규모로서 태조, 세종, 숙종의 시대별 축성양식이 확인되었다.
또한, 일제가 식민통치수단으로 건립한 조선신궁의 여러 건물 중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인 ‘배전(拜殿)’ 터를 발견, 당시 입지나 규모 등 실체가 확인됐다.
서울시는 일제가 조선신궁 부지 조성 및 건축 과정에서 성곽을 파괴하고 평지로 만든 것이 서울한양도성이 훼철된 1차적인 원인으로 추정했다.
◇ 남산 단군굴(檀君窟) 터 : 중구 회현동 1가 100-267
- 대종교 신자 박효달이 단군왕검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석굴
한양도성 유적관 뒤쪽에는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방공호를 볼 수 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앞두고 일제는 경성에 수많은 방공호를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이것이다. 현재는 관람객 안전을 위해 내부 관람을 제한하고 있다. 이곳은 1957년~2006년까지 대종교 신자들이 단군왕검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올려 남산 단군굴(檀君窟)이라고 불렸다.
남산 단군굴은 대종교 신자 박효달(朴孝達)과 그의 제자들이 1957년부터 50년 동안 국조(國祖) 단군왕검의 영정(影幀)과 옆에는 환웅상(桓雄像) 및 나라를 위해 희생한 우국지사들의 신위(神位)를 봉안하고, 제사를 올렸다. 남산 단군굴은 남산 단군전(檀君殿) 또는 남산 석굴이라고도 불렸다.
박효달은 일제강점기인 1943년부터 일제의 눈을 피해 자신의 집 벽장 속에다 단군을 모신 것으로 전해진다. 광복 이후에는 일제에 의해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던 옛날을 생각해서라도 단군전(檀君殿)을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군굴은 바위 동굴로 내부는 너비 9척, 높이 12척, 길이 132척으로 10평 정도의 방이 있었다. 석굴 옆은 약수터가 있는 골짜기였다. 대종교 관련 기록에 의하면 이 석굴은 고대에 자연 생성된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세운 후 석굴 안에 일본의 개국신인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와 메이지(明治) 천황의 위패를 안치하고, 참배하는 자리로 조성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일제가 파놓은 방공호라는 주장도 있다.
남산 단군굴은 박효달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제자들에 의해 50년 동안 지켜져 매년 두 차례, 개천절과 어천절(御天節, 음력 3월 15일, 단군이 지상에 내려온 지 216년 만에 다시 하늘로 올라간 일을 기념하는 날)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2006년, 남산공원관리사업소에서 단군굴 주변에 녹지를 조성하면서 국유재산을 불법 점유했다는 이유로 철폐하였다. 오랫동안 단군굴은 돌로 입구를 막아놓았지만, 이곳이 단군굴임을 알리는 표석과 ‘眞 참 삶니’라고 새겨진 바윗돌이 남아 있어서 그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짐작하게 하였다.(*)
첫댓글 교수님 늘 응원합니다 .나도 답사다니게 서울살고 싶은이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