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에 책 읽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저런 사연이 엿보여 흥미롭다. 먼저 여러 선비가 모여 글을 읽거나 시를 짓는 그림이 있다. 독서는 본디 고독한 행위다. 이런 이들은 품격과 풍류를 뽐내려고 서책을 동원한 셈이다. 그런가 하면 어깨에 땔나무를 지고 걸어가며 책 읽는 사내도 있다. 그에게 독서는 모름지기 고난을 넘어서는 처세의 발판이다. 이름난 문인이 얄밉도록 깔끔한 척하며 책을 치켜드는 장면은 우습다. 그가 결벽증이 심한 사람인 줄 알아야 수긍이 간다.
가엾고 애처로운 독서는 가슴마저 아리다. 가난한 부모 곁에서 헐벗은 아들이 책을 펼쳐놓고 큰소리로 따라 읽는 풍속화가 그것이다. 음독(音讀)하는 이 아이의 구부정한 등짝에 집안의 앞날이 얹혀 있다.
여성이 주인공인 독서 그림은 드문 편이다.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책을 펴든 한 여인은 지그시 눈을 내리깔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는다. 그 모습에는 수학(修學)보다 수신(修身)에 가까운 이미지가 어른거린다.
공재(恭齋) 윤두서가 그린 ‘나무 아래 책읽기’는 어떤가. 참 유난한 독서 장면이다. 등장인물이 맨발에 까까머리 스님 혼자다. 나뭇잎 드리운 산속에서 그는 남 눈치 안 보는 독서삼매에 빠졌다. 바위에 등을 기대고 돌부리에 엉덩이를 걸친 저 스님이 왠지 낯익다.
공재는 스님을 여러 차례 그렸다. 알고 지내는 스님을 앞에 두고 자주 사생했다.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다리쉼을 하거나 긴 지팡이를 들고 걸어가는 스님 등이 그림에 나온 적도 있다. 하나같이 여윈 그들의 얼굴에서 그윽한 선미(禪味)가 풍긴다.
공재는 알다시피 유명한 ‘자화상’으로 얼굴값을 톡톡히 치른 화가다. 그는 남루한 일상에 숨은 풍속의 진정(眞情)과 한눈에도 친숙한 우리 산수의 진경(眞景)을 누구보다 앞서 묘파한 선구자로 우뚝하다. 사람을 그리면 피가 돌고 땀이 흐르는 육신이 느껴질 정도다. 공재는 상상과 관념이 아니라 그럴싸한 실경을 일삼아 끌어들인다. 실감하는 풍정으로 매조지하는 공재의 붓끝은 어김없이 현실과 맞물린다. 그가 두둔하는 사실적 붓놀림은 이 그림에서도 여전하다.
그림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부분은 얼굴 표정이다. 척척 내려 그은 옷자락에 비해 공들인 흔적이 또렷하다. 수척한 얼굴에 수염은 단출한데, 유난히 눈썹이 길게 늘어졌다. 검은 먹으로 그려낸 백미(白眉) 같다. 한일자로 앙다문 입단속은 야무지다. 책 속의 글자 하나하나에 몰두하는 스님의 심중과 퍽 어울린다. 내려다보는 시선은 또 어떤가. 책에 박힐 듯 끈질기다. 인물 묘사에 이골이 난 공재의 기량이 디테일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스님의 손시늉은 요즘 눈으로도 재미있다. 마치 태블릿 PC 화면을 터치해가며 열독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토록 골똘하게 파고드는 독서 장면은 현대 회화에서도 보기 어렵다. 스님의 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책읽기는 어느 때나 괴로운 일이다. 편안한 독서는 입에 발린 아첨에 불과하다. 열성을 기울여야 행간을 헤아리고 문맥을 파악하는 노역이 소득을 얻는다. 독서의 궁극은 책으로 읽을 수 없는 것을 읽어내는 데 있다. 책에서 얻은 ‘앎(知)’이 ‘함(行)’이 되지 못하는 것은 책의 결함이 아니라 책 읽는 자의 폐단이다.
저 노스님이 덧붙인다. ‘배움을 좋아하면 밥 먹는 것도 잊고, 늙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