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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 20 강 아산UBF 메시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 / 마가복음 12 : 18-44
요절 / 마가복음 12 :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몸으로 세우는 새 성전이 되십니다. 건물로써의 성전은 기능을 다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그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피로 세우는 새로운 예수님 성전공동체에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ᅠ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사두개인들이 와서 아주 기발한 내용을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 하였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19-23) 이 제도를 형사취수 제도라고 합니다. 만일 형이 상속자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아이는 죽은 형의 아들로 족보에 올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집안과 한 남자의 후손이 끊어지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남편 잃어 과부가 된 사회적 약자인 여자의 생활을 보장하여 줄 수 있습니다. 생존이 불안한 사회적 약자를 방치하면 장기적으로 그 국가사회가 불안정성을 갖게 됩니다. 사두개인들은 긍휼의 법을 엉뚱한 곳에 이용하였습니다. 일곱 형제의 순차적 사망이라는 흔치 않은 상황을 지어내어 질문하였습니다. 이 질문을 한 것은 부활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억지주장을 하며 나온 사두개인들의 특징은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24절~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ㄷ)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이 인정하는 모세오경 중 출애굽기 말씀을 기초로 부활을 가르쳐주십니다. 연단 받던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 부분이 출애굽기에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일컬으실 때 하신 말씀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을 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은지 400년이 넘었던 때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이 살아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ᅠ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의 근본문제까지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에 대해서 전 구절을 달달 외웠습니다. 모세오경 모든 말씀을 풀어 메시지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외우고 논하기를 좋아하였지만, 성경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높여주실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 손으로 자기의 영향력을 키워야 한다고 집착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다수파였습니다. 유대사회의 종교, 정치, 경제, 사회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유대 성전 중심의 유대공동체는 부활신앙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부활 없는 사람의 특징은 눈에 보이는 것을 사유화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성장과정에서 자기 것이라 주장을 잘 합니다. 어린 아이 책상에 돈 1만원을 두었다가 아이가 그것을 보게 한 후, 그 1만원을 조용히 다시 가져가보십시오. 아이가 물을 겁니다. ‘엄마 여기 내 돈 만원 누가 가져갔어요?’ 아이들은 부모가 용돈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부모가 준 돈을 내 돈이라 여깁니다. 아이들은 용돈 쓰고 나서 그 돈 어디에 썼는지 왜 썼는지 전혀 부모에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였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사유화 집착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부활신앙 없는 사람의 특징도 좋은 것은 자기 것으로 삼습니다. 돈을 벌면 그 ‘돈’을 주신 하나님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내 돈’입니다. 자식도 ‘내 자식’입니다. 주어진 시간도 ‘내 시간’,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도 ‘내 인생’입니다. ‘내 인생’, ‘내 세상’, ‘내 꺼!’에 집착합니다.
부활을 믿을 때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생의 모든 죄가 힘을 쓰지 못합니다. 반면, 부활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살아계심 다 믿지 못합니다. 참 소망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을 하나도 믿지 못합니다. 부활신앙이 없으므로 사두개인들은 성전도 자기 것, 예루살렘도 자기 것, 유대사회, 유대사람들이 모두 자기 것이라 여겼습니다. 유대에서의 권력을 자기 것으로 견고하게 갖고 있기 원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미워한 것입니다.
성전공동체, 신앙공동체는 반드시 부활신앙을 기초로 세워져야 합니다. 신앙공동체는 부활신앙이 가장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신앙이 없으면 내 것, 내 말, 내 입장을 주장합니다. 이렇게 하면, 분란과 다툼이 끝없이 나타납니다. 각 사람은 평안을 상실합니다. 부활신앙이 없으니 단 한 마디 싫은 소리 들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보상받으려하고 사람들의 보상이 없으면 괴로워합니다.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그 안에서 자기자랑하려 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들어주고 받아주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이 없으면 사람의 영광 구하고 사람이 주인되는 인본주의가 판을 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당시 서기관은 성전에서 활동하는 서기관이 있었고 회당중심으로 활동하는 서기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본문의 서기관은 성전 중심으로 활동하는 서기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에계 지혜 있게 답하신 것을 보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유대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말씀을 받았습니다. 모세오경에 나타난 율법은 316개 된다고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에게서 ‘어느 계명이 가장 우선되는 계명인가?’ 이슈가 나왔습니다. 어떤 계명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까, 유대 지도자들은 이 문제로 오래 논쟁을 벌였습니다. 예수님 찾아온 서기관은 이 문제를 여쭈어본 것입니다.
29-3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인간이 결코 잊지 말아야할 삶의 기준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 사랑과 진실한 이웃사랑이 모든 계명의 근본이며 율법의 기본입니다. 이 원칙을 구체화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사랑,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이웃 사랑입니다.
ᅠ서기관은 대답하였습니다.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서기관은 예수님께 전적인 동의를 나타냈습니다. 그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제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사에 몰입하고 있을 때, 제사와 절차와 각종 이벤트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이벤트와 행사에 마음 빼앗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고 있는 그의 대답을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반대로 하면, 이 서기관 외에는 당시 성전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나 성전을 오가는 사람들이 제사제도와 그에 따르는 부수적인 행사와 절차에 마음이 빼앗겨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계명을 강조하였지만, 어느 계명이 크냐? 교리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에서 벌어지는 절기, 행사, 이벤트, 제사제도 자체에 몰입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나오기 위한 죄 문제 해결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절차에 불과한 것들인데, 하나님보다 제사, 이웃 사랑보다 그 사람들이 들오고는 제물 검증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더 악한 것은 제도를 통하여 자기 영향력을 키우는데 열을 냈고 제사제도를 이용하여 자기영광, 자기유익, 자기 위대성을 확보하고자 애쓰고 있었습니다.
주일예배 참석자 수, 수양회 참석 인원수, 요회별 참석인원, 전체인원대비 신입생 수, 신입생 중에서 요회별 신입생소감강사 이런 것에 마음이 팔려 왔다면, 과연 그럼 마음중심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계시는데,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관심 없고 행사나 이벤트를 이용하여 자기 영광을 구하는 전형적인 모습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35절 부터의 말씀은 대다수 서기관들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35~3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낼 때, 다윗의 후손으로 보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 국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제한함으로써 그리스도도 정치적 왕국을 세워야 한다고 제한하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 인류의 대속 이런 메시야 사역을 추상적으로 만들고 자기욕심을 위한 메시아로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 왕이 시편 110편 1절에서 그리스도를 '내 주'라고 부른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다윗은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하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어떻게 자기 후손에게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후손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시며 우리 모든 인생의 구원자이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에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온 세상을 위한 구주 이십니다.
'서기관'은 포로생활 이후, 신약시대까지 율법에 능한 사람, 율법 교사, 율법 해석자를 의미하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해주고 써 준 성경말씀을 백성들이 잘 이해하도록 풀어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존경받았습니다. 그들은 마을마다 다니며 말씀 토론회를 열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양회를 한 것입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장로들과 함께 하였고 제사장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이들은 유다 백성들과 수시로 만나고 백성들을 영적으로 도와주는 일선 목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일으키기 시작한 가장 큰 문제는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의무를 합법적으로 빠져나가는 방안을 백성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성경말씀을 마치 자기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소재로 삼았습니다. 자기들은 뛰어난 쉐프이고 성경 말씀은 자기의 요리하는데로 다루어지는 식재료쯤 삼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오시는 대망의 메시야에 대해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함으로써 죄에서의 해방이 아닌 로마로부터의 독립과 구원을 행할 것이라 왜곡된 메시야관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니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기는 유익을 취하며 자기들끼리는 의무를 하나도 지지 않는 죄는 일상화 되었습니다. 아산UBF
38-40절을 보십시오. 말씀을 식재료 쯤으로 여기는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아는 빼어난 ‘말씀의 종’이라 자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에 집착하였습니다. ‘긴 옷’이란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특별한 제사를 드리고 봉사할 때 입는 옷이었습니다. 그런 옷을 평소에 입고 다니며 백성들 앞에 자신들이 거룩하고 특별한 사람이라 티 내고 싶어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시장에서 존경받고 인정받고 자기의 영향력을 계속 확인하고 싶어하여서 할 일이 없어도 시장 통에 자주 나타나 얼쩡거렸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는데서 '하나님의 종' '말씀의 종' 존경의 안부를 받으며 1시간, 2시간 길게 인사 받는 것을 즐겼습니다. 회당에서는 늘 상석에 앉고자 했으며 어느 잔치자리에서든 많은 사람들 앞에 자기 말을 하며 영향력 행사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밀하게 드리는 기도조차 거룩해 보이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기도 많이 하는 영적인 사람이라 인정받고자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기도 많이 한다고 알렸습니다. 사람들 듣는 곳에서 한 번 기도하면 멈추지 않고 길게 하였습니다. 그러는 이면에서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짓을 행하였습니다. 유산 상속처리를 해주며 과도한 수수료를 받아챙겼습니다. 서기관에게 맡아달라 공식 기탁해오는 재산을 삼키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십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삶이 타락한 자들을 엄중하게 심판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높임받을지라도 그 중심에 자기가 있고 탐욕이 있는 자의 받는 벌은 엄하고 무겁습니다. UBF
41-4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연보궤에 많은 돈을 넣는 부자들과 가진 것이 없어 적은 헌금을 드리고 가는 가난한 과부를 보셨습니다. 부자들은 보란듯이 연보궤에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사람들은 부자들이 연보하는 금액을 보면서 역시 많은 돈을 넣었으니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가난한 과부는 드리는 금액 적은 것이 부끄러워 사람들 보지 않을 때 얼른 헌금을 넣고 급히 물러갔습니다.
ᅠ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금액은 적었지만, 가진 것의 전부 생활비 전부를 넣은 과부가 더 훌륭한 헌금하였음을 말씀하십니다. 렙돈은 그리스 화폐 최소 단위이고 고드란트는 로마화폐 최소 단위입니다. 또, 고드란트는 4분의 1 앗사리온입니다. 한 고드란트는 참새 한 마리도 살 수 없는 돈입니다. 한 고드란트는 두 렙돈인데, 이것이 하루 생활비였던 가난한 과부는 그것을 연보궤에 넣고 간 것입니다. 과부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 헌금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 과부가 큰 헌신을 하나님께 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유다의 성전공동체는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부활신앙이 없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종교지도자들이 사유화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돌려야할 모든 영광, 하나님의 것, 모두 도둑질하고 가로채고 있었습니다.
유다 성전공동체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없고 성전을 맡은 자나 성전에 나오는 자나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과 만나는 절차와 행사만 따지고 몰입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않고 있었으며, 예수님의 양들 주의 백성들의 괴로움에 무관심하였습니다.
유다 성전공동체는 성경 말씀조차 자기 영광의 도구로 삼는 탐욕과 위선과 자랑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곳이었으며, 억울한 자들, 가난한 자들, 원통한 자들을 희롱하고 놀리고 멸시하는 곳이었습니다.
‘한 세대’를 사회학에서는 ‘여자 아이 하나가 태어나고 자라나서 임신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는 시간’이라 정의 합니다. 어떤 나라 어떤 시대에는 26세인 경우도 있고 어떤 나라는 28세인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유대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도록 철저하게 파괴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외관이 화려한 유다 성전과 그 공동체의 실상이 어떠하였는 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로 새로운 성전을 세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보고 믿는 믿음을 가지면 누구든지 양의 피를 흘려 제물을 드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마음에 영접하고 믿은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 부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얼마나 은혜롭고 감격적인 새로운 길입니까? 옛 제사제도 대신 영원한 제물이 되신 진정한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께서 내어주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은혜로운 새롭고 영원한 성전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루는 공동체는 어떠하여야 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견고하게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참소망으로 가져야 합니다. 부활을 믿고 고난에 처할 줄 알고 인내할 줄 알고 무시와 멸시에 스스로 나갈 줄 알아야 합니다.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오래 참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신을 낮추되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영광을 주실 것을 믿고 바라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끊임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 사랑으로 타올라야 합니다. 행사가 중요하지 않으며 일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형제 사랑에 섬세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산 형제가 외롭지 않은지 괴로움은 없는지 죄악된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떤 절차가 필요할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기도하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보다 먼저 자신이 바뀌고자 힘써 투쟁하여야 합니다. 자랑하고자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미약하고 부족하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주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아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운 그리스도 예수 중심의 올바른 공동체를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공동체에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함께 하심이 뚜렷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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