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창과 마진은 마마라고 불렸다. 마마는 곧 왕과 왕비 등에게 붙이는 극존칭의 언어인데, 그것을 두창의 신에게 붙인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두창이 치사율이 높은 두려운 전염병이기 때문이었다. 마마는 다른 병과 달리 어린 시절 가볍게 앓으면 다시는 크게 앓지 않는 질병이기도 하다. 왕실에서는 왕이나 왕비, 세자의 마마가 나으면 궁궐 뜰에서 신하들을 모아 놓고 축하의식을 거행했다. 백성들은 배송(拜送)굿을 하면서 마마신을 태워 보내기도 했다. 마마신이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의식이었다. 또한 마마신에게 지내는 제사인 여제(厲祭)를 지내기도 했다. 서울 북한산에 여제단이 상설되어 있었고, 일년 중 4월 청명, 7월 보름, 10월 초하루 3번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마마신의 노여움을 풀어줌으로써, 역병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보통은 지방관이 직접 제사를 거행하지만, 심한 경우에는 왕이 직접 제문(祭文-신에게 아뢰는 글)을 짓기도 할 정도였다. 전염병 극복을 위한 노력  전염병 가운데 가장 무서웠던 두창은 18세기 말부터 차츰 치료법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인두(人痘), 우두(牛痘) 따위의 인위적인 종두가 시작된 것이다. 19세기 내내 조선에서 행해진 인두법은 약하게 마마를 앓은 사람으로부터 균을 받아서 가볍게 마마를 앓게 하여, 면역력으로 다시는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인두법은 우두법에 비해 안전성과 효과가 떨어지지만, 종두를 하지 않은 경우에 비해 엄청난 효과를 보였다. 19세기를 거치면서 조선에 인두법이 정착된 것은 두창의 예방이란 면에서 큰 사건이었다.
인두법은 우두법으로 발전했는데, 1796년 영국의 의사 제너(Jenner, 1749〜1823)가 개발했다. 우두법은 19세기 초 조선에도 전파되었지만, 제대로 우두법을 시행한 것은 1879년 이후 지석영이 종두법을 배우고 1885년 [우두신설]을 지어 우두보급에 힘을 기울인 이후였다. 아직도 위협적인 전염병  19세기 말 이후 본격적으로 미생물학과 세균학이 발달하면서, 전염병은 크게 줄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도 1918년 스페인 독감, 1951년 발진티푸스 등이 발생하여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겪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2002년 사스(SARS-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2003년 이후 조류 인플루엔자(Avian Influenza) 등 전염병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다행히도 다양한 백신을 개발하고 검역과 방역에 힘쓰는 등 의학의 발달 및 확산 억제를 위한 사회적인 노력으로 인해 전염병은 차츰 극복되고 있다. 하지만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전염병은 우리 조상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재앙이었다.
참고문헌: 이현숙, [신라의학사 연구], 이화여대 박사논문, 2002; 이현숙, [고려시대 역병에 대한 인식], [한국사상사학] 30집, 2008; 김영환, [조선시대 역병발생기록에 관한 분석연구], [보건과학논집] 27권 2호, 2001;김인락 외 공저, [한국한의학사 재정립], 한국한의학연구소, 1995;정연식,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 청년사, 2001; 한국역사연구회 저,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청년사, 1996;윌리엄 맥닐 저, 허정 역,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 한울, 1991;브린 바너드 저, 김율희 역,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들], 다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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