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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강 걷기 (2차) 후기
지난 주 1차 후기를 올렸더니 재미있다는 평이 몇 개 있기에 그 말을 곧이듣고 up 돼서 계속 써보려 합니다. 괜찮겠지요?
1. 집합 : 완주전통문화체험관 주차장.
완주군 고산면 소향리 전통문화체험관. 지난주보다 한 명 적은 열아홉 명이 모였다. 오랜만에 원현주님, 기경숙님 부부, 정병윤님, 명인건축 대표님도 참석해주셨다. 김진숙님은 오늘 참석해서 내가 썼던 글 ‘확인 들어갈 거’라고 벼르더니 하필 어제 발을 삐어서 걷지 못한다며 돌아갔다.
이곳은 ‘용담’이라는 뜬금없는 이름이 상호나 기관의 명칭에 몇 군데 보인다. 그 이유를 정국장이 이렇게 설명했다.
“용담호 물을 일부 뽑아서 이쪽으로 흘려보내 만경강 물을 보태고, 덤으로 수력발전에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운암산 중턱에 보이는 물탱크 같은 시설은 용담호에서 끌어온 도수관의 부속물인데 아마도 공기구멍일 것.”
2. 「용담댐 제1발전소」 아래
걷는 길 아래로 많은 물이 흘러나가는 것을 내려다보며 지나간다. 바로 머리 위의 발전소에서 나오는 물이다. 우리 일행은 발전소에 들르지 않는다.
사실, 나는 지난 2월 12일에 혼자 들어가 보았었다. 「전북천리길 답사 용역」을 수행하던 기간에 ‘운문골마실길’을 답사했는데 그 종점이 바로 오늘의 집합장소여서 이 발전소에 올라가보았던 것. 물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맨 마지막 저수조밖에 보지 못했으나, 건물 안은 발전소 시설이 가동 중임을 알 수 있었다. 발전터빈이 돌아가는 굉음 때문이다. 아래 사진은 그 때 찍은 것.
(용담 제1발전소 사진)
그런데 왜 용담과 먼(22킬로미터 거리) 이곳 소향리발전소가 ‘제1’발전소일까? 정작 용담호 본댐 아래에 있는 발전소는 ‘제2’발전소다. 그 이유는… 이곳은 낙차(落差)가 훨씬 커서 더 많은 양의 전력을 생산하기 때문이란다. 참고로, 제2발전소의 낙차와 전력생산 규모는 60미터와 1만8천 기가와트(연간)인 데 비하여, 제1발전소는 낙차 200미터 이상, 전력 18만 기가와트로 무려 열 배나 차이가 난단다. 발전소 뒤 운암산의 급경사를 생각해보면 절로 수긍할 만하다.
2. 대아저수지, 대아댐.
강 건너편에 ‘할머니 다듬이 합주단’으로 유명했던 창포마을의 「농어촌인성학교」 한옥건물군(群)이 보인다. 민물고기 시험장 앞을 지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느슨한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길 옆 벚꽃은 이미 만개했고 자목련도 반개(半開)다. 오늘이 벚꽃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내일부터 이틀 정도는 소규모 태풍급의 비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칠 거라는 예고다.
댐 정상에 올라갔다. 일본강점기에 지은 곡선 댐이 수면 아래로 보일는지 자못 궁금했는데 정국장과 나 빼고는 별로 관심 가지는 사람이 없어서 굳이 관찰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단체사진 찍던 곳에서 300미터만 댐 정상을 걸어 관리소 앞에 가면 곡선 댐의 한쪽 끝 정도는 보일 수도 있었는데.
그냥 돌아 나오려니 입이 쑥 나왔다. 못내 아쉽고 심술이 나서.
집에 돌아와서 옛날 사진 몇 장을 뒤져냈다.
(대아댐 옛날 사진, 3장)
맨 아래 사진은 작년 여름 극심한 가뭄 때 수면 위로 드러난 모습.
어떤가요? 요즘은 이런 댐 보기 어렵지요?
3. 쓸쓸한 농촌지역의 현주소
소향교 다리를 건너 대아댐 여수토류(餘水吐流) 옆을 지나면서 보이는 것은 자그마한 소수력(小水力)발전소 한 군데와 황량한 강변체육공원.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아 망해버린 강변 민물고기 식당. 작지 않은 식당 부지 안에 연못도 몇 개나 파놓았고 용의 조각도 있고 한 옆에 아담한 숙박시설도 갖추었으나 유리창은 다 부서졌고 잡초만 무성하다. 한때는 무척 손님이 많았을 것이다. 용담호에서 물을 끌어오게 된 초기 무렵 이 일대는 환영일색이었던 모양으로 이 업소도 상호는 ‘용담원’이었다.
본격적으로 만경강을 따라 내려가는 걸음을 시작한다. 발원지 밤샘에서 동상면 소재지까지는 소하천 수준이던 강이 용담호의 금강 물을 합한 이곳부터는 물 깊이가 훨씬 깊어졌다. ‘가세기(가새기?)교’ 다리를 건너면서는 아름다운 풍광이 나타난다. 건너편의 산 절벽과 그 아래 시퍼런 강물이 이곳도 큰 강 상류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산의 절벽에 진달래와 벚꽃이 한창이다. 건너편 절벽을 끼고 나 있는 좁은 계곡을 ‘가새기골’이라 한단다. 가위를 뜻하는 방언, 바로 그 「가새기」일까.
풀이 나기 시작하는 흙둑을 잠깐 걸어 다시 신당교를 건너서 강의 남쪽 둑을 따라 걷는다. 이미 좌우는 넓은 들이 펼쳐져 만경평야의 시작임을 알린다.
4. 강의 흐름이 만드는 퇴적평야
왼쪽 신당마을은 오랜 시간의 퇴적으로 만들어진 꽤 넓은 들(신당들)을 터전으로 하고 있다. 이제는 가동하지 않는 민물고기양식장을 지나 눈에 띄는 키 큰 팽나무 숲이 오래된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다. 건너편 안남마을 앞의 벚나무 방제림도 꽤 그럴듯하다.
들에는 주로 마늘을 심었다. 고산면의 마늘이 유명하다더니 과연 그렇다.
깬 돌이 깔린 길바닥이 발바닥을 화끈거리게 하는, 다소 따분한 둑길이 2킬로미터쯤 이어지는데… 강폭은 훨씬 넓어지고 두어 군데 보가 쌓인 곳을 제외하면 수변식물로 거의 뒤덮여 물길은 보기 어렵다.
고산휴양림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삼각형으로 넓은 빈 땅은 「완주 와일드푸드 축제」 때 쓰이는 주차장이란다. ‘닭장 지으면 꼭 좋을 땅을 주차장으로나 쓴다’는 것에 강한 불만을 표하는 정병윤 ‘닭사장’.
짧은 다리 하나를 건너면 왼쪽으로 이어지는 것이 오산마을의 들판이다. 마을 앞 긴 보의 한 옆으로 취수구가 있어 맑고 풍부한 물을 들판으로 공급하고 있는데, 취수구 옆에 심어진 두어 그루 홍매화가 오산들을 누리는 마을의 행복을 상징하는 것 같아 부럽기도 하다.
5. 국가하천, 지방하천
1킬로미터를 더 걸어 오산(五山)들이 끝나는 지점, 건너편 고산교 아래를 흐르는 고산천이 합수하는 넓은 곳에 이르면 한 안내판이 섰으되 “여기서부터는 지방하천 구역이 끝나고 국가하천이 시작된다”는 내용이다. 강을 이용하는 것도 재난을 관리하는 것도 중앙정부가 직접 한다는 뜻이겠다. 그래서인지 둑길도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국가가 관리하면 달라지는 것이 이런 부분인가? 잠시 삐딱한 생각도 해보는데, 물론 농담이다.
6. 오성교 건너 고산면 읍내리
강 건너편은 드디어 고산면의 핵심지역 읍내리. 강폭도 넓거니와 긴 보뚝(세심보)이 물 깊이를 더하여 경치가 아름답다. 고산향교와 세심정 정자, 고산초등학교가 강변에 있고 그 앞 둔치로는 팽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모래밭 놀이터가 사람을 끄는 분위기를 풍긴다. 이 강 연안에서 비로소 만나는 대처(大處)의 ‘있어 보이는’ 풍경이다.
오성교는 지금 우리가 지나온 길의 왼쪽 편 성재(聖才)마을과 오산마을에서 한 자씩 따온 다리 이름이다. 얕은 강을 건너 읍내로 일을 보러 다녔는데 세심보가 생기면서 강 건너 다니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물이 깊어져 위험해졌기 때문에 오산·성재 두 마을은 그만 고립되고 말았다. 느닷없이 오지마을이 된 두 마을이 “강에게 지고만 살 수 없다”며 힘을 합하여 180미터의 이 다리를 놓은 것은 1976년에야 비로소 이루어진 일이란다(오성교기적비).
보를 쌓아 농사짓기 좋아진 것만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이런 그늘도 있는 것이 세상사다.
강 가운데 있다는 거북바위의 ‘洗心亭(세심정)’ 글씨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대신 강기슭에 세운 것이 지금의 정자다.
오성교를 천천히 건너면서 풍광에 푹 빠진다. 건너편 하안은 늙은 느티나무들이 오래된 방제림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다리 건너 직진하면 구시가지 중심부로 바로 통하지만 우리는 왼쪽으로 꺾어 강변자전거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다시 한 번 오른쪽으로 꺾어 마을 외곽을 돌아 들어간다. 「고산미소시장」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긴 보의 한 구석으로 물을 빼내어 마을로 끌어들이는 취수구가 세심정 가는 길목에 있고 세심정은 흔치 않게 보는 바위 위에 커다란 그늘을 던지며 섰다. 강에서 끌어들인 물은 초등학교 옆을 돌아 시가지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물이 매우 맑고 양도 풍부하다. 흐르는 물소리 하며 수로 가에 늘어선 키 큰 은행나무들 하며가 풍요로움을 더한다.
7. 「일본 냄새」와 「중국 그늘」
이런 시멘트 수로 시스템은 1백년 전후의 연륜을 가진 것으로 일본의 도시와 농촌에 널리 보급되어 있다. 메이지[明治]시대부터 유럽 국가들의 근대적 수리(水利)기술을 배워 일찌감치 독자기술화 한 것인데 마을과 농경지를 가로세로로 빈틈없이 누빈다.
관개(灌漑, 물대기)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삐뚤빼뚤하던 농지형태를 바둑판같이 재구성하는 ‘농지개량사업’을 함께 하였음은 물론이다. 중소도시의 집 앞과 길가를 흐르는 물길은 도시경관을 좋게 하고 거리 청소나 화재진압, 온습도조절 등에 쓰이며 심지어 빨래나 염색 등 소규모 가공업에도 이용되고 있어 중수(中水)로서의 활용도가 높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관개 스타일은 대체로 높낮이와 굴곡 등 자연상태를 최대한 그냥 두면서 이용하는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대신 일상적으로 자주 손을 봐야 했다.
고산 읍내리 안길에도 비교적 좁은 수로와 미니 수문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 인공의 직선 수로는 다른 곳과 차별화된 만경강 연안 지역의 특징이 되어, 얼핏 일본 냄새가 많이 난다.
마을 외곽을 돌아 들어가는 입구 한 모퉁이에 한 집안에서 두 명이나 나온 효자를 기리는 정려(旌閭)와, 역시 같은 가문의 열녀비 등이 서 있다. 들여다보니,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가 효행을 칭찬하여 내렸다는 칠언절구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문황제’라면 인조(仁祖)를 무릎 꿇리고 이마를 찧으며 항복하게 한 청(淸)의 태종이 아닌가.
효열(孝烈)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극심한 전화(戰禍)를 입힌 전쟁상대국의 왕이 ‘내린[賜]’ 글을 받들어 모시는 것은...?
8. 고산의 도전, 응원합니다.
‘고산미소시장’은 최근에 조성된 곳이다. 새 시장 뿐 아니라 완주군을 대표하는 여러 기관들이 이 고산면 읍내리에 많이 몰려있다. 용진읍이 ‘로컬푸드’로 각광 받자, 고산면도 질세라 지역재생 사업을 다양하게 벌이면서 새로운 젊은 도시로 일어서려 하고 있는 것.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 있는 희귀한 면이고, 고산향교가 있고, 완주문화원 또한 이곳에 있다.
현대적 감각이 물씬 하는 새 시장 주변은 시민들이 많이 나와 장도 보고 산책도 하는 등 활기가 넘친다.
점심을 먹은 후, 체육공원을 누벼 읍내리를 빠져 나가서 다시 강변길로 들어선다.
체육공원에서 뜻하지 않게 신철경님이 환하게 햇볕을 반사하며 나타나 모두가 반가워 하고 한참동안 함께 걸었다.
9. 어우보와 거대 수문
읍내리를 벗어나 곧은 둑길 걷기를 2킬로미터,
드디어 오늘의 ‘눈대목’ 어우보(於牛洑)를 만난다. 어우리 삼거리에 있는 이 보는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지어졌고 당시로는 가장 큰 보로 만경평야의 녹색혁명을 비롯하게 한 경이의 수리시설이었다.
지금도 현역으로 가동 중이며, 이른바 「대간선수로(大幹線水路)」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어우리에 있다 하여 어우보로 부르지만 건설 당시에는 뭐라고 불렀을까. 궁금하여 나무 데크로 덮은 수문 위에서 자세히 내려다보며 몇 가지 사실을 추측했다.
첫째, 수문의 이름은 당초에는 따로 없었다. 아니면 교두(橋頭) 돌이 떨어져 나가고 없어진 탓일까? 다만 당시의 전라북도 지사(왜인)가 자신의 학식을 자랑할 의도를 섞어 멋을 부린 글귀가 새겨진 화강암 석판만이 수문 꼭대기의 한 가운데에 붙어 있다.
「開闔任天時(개합임천시). (이 수문을) 열고 닫는 것은 하늘의 때에 맡기리라」
「大正十年十二月竣工 全羅北道知事 ?角仲藏(타이쇼오 10년(1921년) 12월 준공, 전라북도지사 ?? 나카조오)」
매우 활달한 필체로 흘려 쓴 글씨여서 이름에 쓴 첫 글자는 도저히 해독하지 못한다.
둘째, 수문이 끝나는 곳에 새겨진 대리석 돌판에는 당시 건설을 담당한 기술공무원들의 이름과 시공회사 이름이 각각 적혀 있다. 잠시 읽어보니…
技士長 貴島一 (기사장 타카지마 하지메)
擔任技士 岩戶榮吉 (담임기사 이와토 에이키치)
工事監督 大田武志 (공사감독 오오타 타케시)
工事請負 児玉高(?)太郎 (시공사 대표 코다마 코오타로오)
이 석판 역시 지나치게 달필인 흘림체여서 마지막에 쓴 업체 대표 이름은 판독에 실패했다.
셋째, 그런데 이 석판 바로 옆에 있는 또 하나의 대리석 판은 1984년에 새겨 붙인 것으로 여기에 비로소 「於牛取入水門(어우취입수문)」이라는 이름이 나타난다.
‘어우보, 어우수문’ 등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궁금한 것은, 무슨 공사를 어떻게 했기에 공사비가 2천1백94만9천원, 공사기간은 단 20여일(3월 8일 착공, 3월 31일 준공)에 불과했을까 하는 점이다.
처음 지은 지 60여년 만에 추가공사를 한 것이겠지만 그 내용은 적혀있지 않아 모르겠다.
그렇게 거대한 수문을 통해 한 옆으로 뽑아낸 물길을 따라 잠시 어우리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본다.
물 흘러 들어오는 소리가 자연 개울에서 물방앗간으로 쏟아지는 소리처럼 시원하고, 폭이 10미터는 될 것 같은 넓고 깊은 콘크리트 도수구(導水溝)를 따라 도도하다.
가끔 중간중간에 관리 목적으로 수면 가까이 내려갈 수 있도록 계단을 두었으며,
마을과 논밭을 연결하는 다릿발에는 물깊이를 금방 알 수 있도록 수표(水標)를 설치했다. 대간선수로는 여기서 시작하여 군산 옥구저수지까지 80킬로미터를 달릴 것이다.
어떤 시설물이든 1백년 쯤 묵으면 모두 문화재가 된다.
거무튀튀하게 세월의 때가 끼었으나 여전히 당당하게 역할하고 있는 근대개화기의 농업유산. 최근에는 미래 세대에 물려줄 문화유산을 「미래유산」이라 부르고 있다. 이 보와 수문과 수로시스템 역시 미래유산으로 지정하는 데 손색이 없다.
다만, 조금 전에 본 어우리마을 안 수로 옆에도 쓰레기를 잔뜩 버려 태운 흔적이 심한데, 아래쪽에서는 식수로도 쓰는 물에 농약 등이 섞이는 일을 방지하려고 “대간선수로 위를 덮자[복개]”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한다.
하지만 물길을 덮었을 때의 부작용이 훨씬 더 크므로 그러지 않기로 했다던가.
아무튼 농약병이나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우리 농촌인들이 제발 이제 그만 두어야 할 나쁜 버릇인 것은 분명하다.
조금 더(130 미터) 걸으면 새로 지은 어우보가 나타나고, 타워 옆에 ‘於牛洑’라 한자로 새긴 표지석이 서있다. 표지석 뒷면에는 사업경과를 밝히는 안내문이 새겨져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우보 준공에 즈음하여
만경강 하천 개수계획에 따라 1922년에 설치한 보를 이곳 골재원을 재원으로 삼아 새로운 시설로 다시 설치하여 2만3천 정보(町步)의 몽리혜택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어 이 뜻을 길이 새긴다.
공사기간 1987년 3월 – 12월 30일
조합장 김영배
기술이사 이용희
기? 조찬석
??? 황윤철
공사감독 권?상
시공 및 ?? 대한토건주 사장 전기섭, 소장 임홍광
이런 비교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앞서 본 것과 그보다 60년이 더 지난 1987년에 만든 안내판... 이미 판독조차 어렵게 마모되었다. 글씨가 조악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0. 율소 지나 봉동까지 - 신기습지
어우보를 지나면 다시 광활한 평야다. 폭 넓은 강을 왼쪽에 두고 곧고 그늘이 별로 없는 둑길을 걷는다. 봉동읍 입구 용봉교까지의 3.4킬로미터는 계속 이렇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의 숫자가 늘었다.
신기교를 지날 무렵부터는 어우보에 한 번 막힌 다음이라 강의 물이 줄어든다. 이곳 일대를 ‘신기습지’라 부른단다. 물이 적어 강 속에 드러난 모래톱과 무성한 갈대밭이 온갖 어류와 조류의 서식지가 되고 있다는 것.
크게 바라볼 경치가 없을 때는 깊은 생각에 몰입하거나 음악을 듣기 좋다.
오른쪽 율소마을도 충적평야를 터로 한 매우 넓고 큰 마을이다. 어우리에서 시작한 대간선수로는 이 마을도 통과하고 있어, 우리가 걷는 강둑길에서 불과 250미터만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면 현장을 볼 수 있었다.
강 건너편 양화리(양야리?)로 연결되는 양화교는 먼발치에서 보아도 꽤 낡아 보인다. 거무스레하게 때가 끼고 난간도 나지막한 옛 다리에서 묘한 매력을 느끼곤 한다.
양화교를 지난 한 곳의 둑길 옆에 주저앉아 벚나무의 꽃비를 맞으며 점심 후의 나른함을 잠시 달랜다.
11. 봉동읍의 저력 – 장기면의 방제치수사업
용봉교 아래를 지나 둑길에 올라서면 별천지다. 거대한 느티나무의 노목들이 강둑을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아까 지나온 고산면 소재지 앞을 방불케 하지만 규모는 훨씬 크다.
옛 이름 장기면(場基面)을 살려 「상(上)장기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최근에 치장을 했다.
이곳의 방제림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이 공원에 열일곱 개나 있는 지방수령들의 선정비를 읽어보면 대강 알 수 있다.
왼쪽 첫 번째에 있는 판관 신사영(申思永)의 선정비는 ‘양정(良井, 맑은 우물)’·‘포제(浦堤, 강둑)’ 두 단어가 비석의 양 옆면에 새겨져 있어 치수(治水)사업이 그의 주요 관심사였고 행정 키워드였음을 알 수 있다.
비석의 뒷면에는 공사영역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구역별 책임자 이름을 새겼다. 이른바 공사실명제라 할까.
비석의 원문을 좀 더 읽어보자.
事蹟碑(사적비)
都執事 李夏亨(공사집행 총책임자 이하형)
一所都監 金中五(제1구역 책임자 김중오)
二所都監 李夏馝(제2구역 책임자 이하필) (이하형과 이하필은 형제간인 듯)
三所都監 崔斗平(제3구역 책임자 최두평) (이상은 기술책임자)
監官 都二成, 申秀漢(감독관 도이성, 신수한)
都邑吏 李??(지방공무원 총책임자 이??)
邑吏 鄭萬? (지방공무원 정만?)
우리가 얼마 전에 가 본 고창읍성, 그 성을 축조할 때 인근 성읍(城邑)이 모두 합심하여 구역을 나누어 맡았고 성읍이름을 밝혀 공사실명제를 했던 사실이 상기되지 않는가?
이 선정비가 세워진 해가 병유년(1717년)이니 신사영이 전주판관으로 치수사업을 한 시기는 1710년대 중후기로 짐작할 수 있다. 방천의 느티나무 나이와 비교해 보아도.
하나 더, 일곱 번째 비석 「도순찰사 윤영신(尹榮信)의 공적비」는 더욱 상세한데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공(公)이 우리 장기면(場基面)에 둑쌓기 공사를 함에 있어 궁핍한 백성의 사정을 걱정하여 7백민(緡, 돈꾸러미)을 내놓았으며, 부[全州府]가 또한 3백민을 보조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재정이 모자라 보 가까이에 농토를 가진 수혜답은 두락 당 5전씩 총 5백조(條)를 거두고, 일반수혜답은 두락 당 4전씩을 거두어 합계액이 3,622냥, 거기에 전주부의 추가지원금을 합한 총 4,622냥으로 공사를 시행하였다. 집행 잔액 150냥은 면계(面稧)에도 기록해두었으니 모두가 명명백백 소상히 알기 바란다.” (‘민’과 ‘조’는 모두 화폐의 단위로 보이나 상세하게는 모르겠음)
민관이 합심하여 공사비와 노역을 분담하였고 수리시설로 이익을 보는 주민들도 공사비를 부담하였다는 것, 관은 광역단체(전주부)와 기초지자체(장기면)가 재원을 분담했다는 것, 예산의 조달과 사용, 잔액에 대한 정보도 공개하였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이때는 1823년이었다.
우리 조상들도 물을 관리하려고 애를 많이 썼으면 썼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20세기 들어서 일본의 앞선 기술과 막강한 자본력과 수탈의 강한 야심 때문에 훨씬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농지개량과 수리시설사업에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말이다.
그러니 “일본이 와서 해주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자조(自嘲)는 이제 그만 두어도 되지 않을까?
사실 둑을 쌓고 나무를 심는 방제림은 우리나라가 앞서 있었다.
담양의 관방제림은 1600년대부터 조성되었고, 어느 시골마을에나 방천의 숲은 다 있었을 정도다. 근래에 들어 방제림의 효과가 입증되고 있다 하고, 오히려 과거의 지혜를 되살리려 하고 있다고도 한다.
상장기공원은 그 당시 심었던 많은 느티나무 방제림으로 대단한 숲을 이루고 있고 그 중 당산목으로 보호받는 나무 앞에는 제단까지 만들어져 있다.
시원한 그늘에서 오늘 걷기를 마감한다.
사족 :
하나, 수리시설로 혜택을 보는 것을 ‘몽리(蒙利)’라 하는데 예전에는 ‘목리(牧利)’라 썼던 사실을 알 수 있다(윤영신 공적비에서).
둘, ‘道光(도광), 崇禎(숭정)’ 등, 명(明) 또는 청(淸)의 연호를 그대로 쓰던 사대주의 시절의 유물에서는 왜 그 연호를 갉아내 버리지 않는 것일까? 대한제국으로 독립국가가 된 지 120년이나 지났는데? 비하면, 해방되자마자 일본의 연호는 죄다 쪼아냈다.
셋, ‘취입(取入)’ ‘취입보(取入洑)’ ‘취입구(取入口)’라는 단어들은 원래 우리말이 아니라 일본말 단어다. ‘취수-(取水-)’로 바로잡아야 한다.
긴글 끝까지 읽어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는 더 수고 많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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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과 사진 감사합니다.
글 중에서 해독하지 못했던
어우보 머리의 휘호를 쓴 사람 이름은 亥角仲藏(Isumi Chuhzoh)로 확인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