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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영세 배경과 광암 이벽의 역할에 대하여
들어가는 말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일부 학자들과 연구소에서는 천진암성지의 한국천주교회의 발상지적 성격과 이에 관련한 이벽 선조의 역할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 이승훈의 영세가 이벽의 권고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은 억측이며 근거가 희박하다. 이승훈은 이벽의 영향을 거의 받지않고 북경에 갔으며 서양 선교사를 찾아간 것도 영세할 목적이 아니라 수학을 배우러 간 것이다. 수학을 배우다가 교리를 배우게 되었고 그것도 교리 성적이 안좋아 겨우 영세를 받을 수 있었다.”
본인은 본인이 보고 연구한 중요하고 객관적인 사료에 의하여 이러한 주장은 전혀 잘못된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본 론
1. 황사영 백서(帛書)에서 근거를 찾음.
백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계묘년(1783)에 (이승훈이)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매 이벽이 그에게 은밀히 부탁하기를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안에는 서양 전교사들이 있으니 찾아보고 신경 한 부를 얻은 후 동시에 성세 받기를 청하면 서양 선비들이 자네를 크게 사랑할 것이니 신기한 물건과 패물을 많이 얻어 가지고 오고 빈 손으로는 돌아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승훈이 그의 말대로 천주당에 가서 성세(聖洗)를 청하매 여러 신부들이 영세하기에 필요한 도리를 모른다고 영세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량신부가 힘써 우겨 성세를 주고 또한 성서도 주었습니다.”1)
이 백서의 증언은 서양 선교사들의 편지의 증언보다 훨씬 가치가 앞선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백서의 저자는 이승훈과 같은 시기의 사람이고 같은 학파와 같은 당파에2) 속해 있으면서 무엇보다도 천주교 신봉자로서 서로 교류하였을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 백서의 증언은 황사영의 개인적인 증언이기보다는 당시 한국 천죽교회의 공식적인 대변기록의 성격을 갖는다고 본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첫 번째 영세자로서 이승훈의 기록을 잘못 기록하였을 리 없다고 본다. 백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승훈 자신은 물론이고 당시 교우들 특히 교회 지도층 인사들이 모두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 김대건 신부의 보고서를 통하여.
김대건 신부는 그의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그 이후로 다른 많은 철학자들도 결국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인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이 이벽(李檗)이라는 분이었는데, 그는 후에 세자 요한이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큰 학자로서 참 하느님의 교리에 대하여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북경에서 하늘의 주님을 섬기는 종교 즉 천주교가 성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보내 천주교 서적을 가져오게 하려고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동안의 기간이 지난 후 (1783년 겨울), 동지사 사절단이 북경을 향하여 출발하게 되었는데, 그 사절단의 제 3 인자인 서장관(書狀官)의 아들 이승훈(李承薰)이라는 사람이 이벽을 찾아가서 자기가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떠나게 되었음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이벽은 좋은 기회를 잡게 된 것입니다.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도착하거든 예수회 회원들이라는 서양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서 그들로부터 천주교라는 종교의 서적을 얻어 오라고 일렀습니다. 그리하여 이승훈은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북경의 주교님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주교님으로부터 큰 환영을 받고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 때에 베드로라는 본명을 받았습니다.”3)
이 김대건 신부의 기록 역시 당시 조선 신자들이 이승훈의 영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본다. 김대건 성인의 생존연대는 이벽 선조의 생존 연대와 거의 60년의 차이가 난다. 4) 김대건 성인은 16살의 나이로 마카오로 신학 공부 유학을 떠나서 갖은 고생을 다하고 10년에 세월이 지난후 조선 입국에 성공하고 26 세의 나이로 순교하신 분이다. 김대건 성인이 마카오 유학을 떠날 때 준비기간 동안 자기 집에 유숙(留宿)을 시키고 국경까지 인도한 사람은 다름아닌 당시 조선 교회의 총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정하상 바오로였다.5) 정하상은 바로 이승훈과 교분하며 함께 천주교를 봉행하였다가 처형된 순교자 정약종의 아들이다. 즉 김대건 성인의 사고와 사상의 근원을 찾아들어가면 이승훈의 최측근의 사람들과 맥락이 닿게 되고 한국 초기 교회 설립자들의 삶에 대한 증언이 그릇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김대건 성인께서 이승훈의 영세가 이벽의 권고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는 증언은 매우 중요하며 가치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이 두 기록만으로 이승훈의 영세가 광암이벽의 권고로 이루어졌음을 믿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두 기록은 모두 당시 조선 천주교인들이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확신을 갖기 위하여 그리고 외국 사람들의 저술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돕기 위하여 조선 사람들의 말을 듣고 선교사들이 작성한 문서를 근거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3. 달레 교회사를 통해 근거를 찾음.
달레 교회사는 이승훈의 입교 과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李檗은 承薰이 북경 사절단에 자기 아버지를 따라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였다. 즉시 그를 찾아갔는데, 그 시대의 문헌에 의하면 그가 李承薰에게 한 주목할 만한 말은 다음과 같다. “자네가 北京에 가는 것은 참된 교리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회일세. 참 성인들의 교리와 만물의 創造主이신 天主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서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네. 그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들과 백성들의 서로 다른 본분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이 없으면 생활의 기초가 되는 규칙도 없네. 그것이 아니면 天地創造이며 南北極 原理며 天體의 규칙적 운행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그리고 天使와 惡神의 구별이며,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며, 靈魂과 肉身의 결합이며, 죄를 사하기 위한 천주성자의 降生이며, 선인은 천당에서 상을 받고 악인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 등, 이 모든 것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종교서적을 아직 모르고 있던 李承薰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감탄하여, 그 책을 몇 권 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벽이 가지로 있던 책들을 대강 읽어보고 나서 기쁨에 넘쳐, 자기로서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벽은 대답하였다. “ 자네가 北京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 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시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 학자들과 상의하며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그 종교의 모든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 오게. 삶과 즉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있으니, 가서 무엇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李檗의 이 말은 학문의 갈증보다도 종교의 갈증이 그에게 더욱 절실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마음을 준비한 것이니, 그에게는 구령대사가 점점 더 유일한 중대사가 되어 갔던 것이다. 李檗의 말은 李承薰의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어갔다. 이승훈은 그것을 스승의 말처럼 받아들였고, 자기들의 공통된 소원의 실현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 . . . (중략) . . . . 이승훈은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미구에 聖洗를 받을 준비가 다 되었다. 귀국 길에 오르기 전에 聖洗聖事를 받았는데, 그가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리나는 희망으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6)
그런데 샤를르 달레의 교회사에는 이승훈의 영세에 관하여 000신부님께서 인용한 편지와 차이가 나는 중요한 편지를 소개하고 있다. 즉 이승훈이 교리 성적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마지못해 영세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 . . 그에게 聖洗를 주기 전에 그에게 많은 문제를 물어보았는데, 그는 모두 잘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만일 왕이 그의 행동을 못마땅히 생각하여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결심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서슴지 않고, 자기가 “그 진리를 명백히 아는 이 종교를 버리기 보다는 차라리 모든 형벌과 죽음까지도 감수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7)
이러한 달레 교회사의 기록을 보아서도 이승훈이 이벽의 탁월할 지도와 권고에 힘입어 영세를 분명한 목적으로 하고 북경에 갔으며 그 임무를 성실하게 마치고 돌아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 달레 교회사는 그 근본 사료가 조선의 5 대 교구장이신 다블뤼 주교의 비망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8) 다블뤼 주교의 비망록은 아마도 정약용이 저술해놓은 <한국복음전래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볼 때9), 이러한 달레의 기술은 바로 정약용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은 이벽, 이승훈과 함께 수학하며 초기 한국 천주교회 설립 과정에서 모든 것을 나누었던 사람이다. 누구보다도 다산은 이벽과 이승훈의 영세과정과 그 동기 그리고 속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러한 과정을 잘 아는 다산이 이승훈의 영세 과정에 대하여 기록을 남겨놓았기에, 수억만리 떨러진 곳에서 수십년의 공간을 넘어서 달레가 저술한 책에 그 자세한 정황이 기록으로 남을 수 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때 달레의 교회사에서 저술한 이벽이 이승훈을 권고한 내용과 이승훈이 이벽의 말을 스승의 말처럼 알아듣고 명심하여 꼭 그대로 실천하게노라고 약속했다는 말은 충분히 믿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4. 현대의 한국 교회사 연구의 주요한 업적을 남긴 유홍렬 교수의 저서에서 근거를 찾음.
유홍렬 교수의 「한국 천주교회사 上」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승훈의 영세과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승훈은 . . . (중략). . . 가족적으로는 정약용의 누이를 그의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이벽과도 사돈 관계를 맺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익의 종손인 이가환의 누님이며 그 아우 치훈은 권이강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니, 이들 네 사람은 모두 남인 학자이며,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렇게 친한 사이를 이용하여 이벽이 주동(主動)이 되어 동지(同志)들로부터 여비를 모아서 이승훈으로 하여금 북경에 다녀오게 하였다. 이승훈을 찾아가서 다음과 같은 간곡한 부탁을 하였다. . . . (이하 권고 내용은 달레 교회사의 이벽의 권고말과 거의 같다). . . . 이 때까지 아직 교리서에 그리 친하지 못하였던 이승훈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그 때부터 교리 서적을 얻어 읽고 감격하고 기뻐하면서 자기가 맡은 바 구실을 반드시 이룩하고야 말 것을 결심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이벽과 그 동지들은 새로운 지식보다도 오히려 천주교의 교리에 굶주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주의 성총(聖寵)을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은 이미 정비되었고, 오직 구령(救靈)만을 가장 중대한 문제로 여기고 있던 이벽의 열렬한 어조(語調)는 마침내 이승훈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게 하였던 것이다.’10)
이상에서 이승훈의 영세가 이벽의 권고로 이루어졌다는 충분한 논거가 찾아졌다고 본다.
그외에 이에 못지 않은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1779 -1785년 사이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정황에서 이벽의 역할에 관한 것들이다. 이에 관하여는 다산 정약용의 여러 가지 단편적인 글들을 종합하여 알 수 있다.11) 약술하면 다산이 회고하면서 이벽의 출중한 학문과 인품을 거듭 찬탄하고 그리워하는 점들을 볼 때 이벽이 당시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 커다란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승훈이 1779년 천진암 강학회에 참가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도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리 중요한 점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10일간 이루어진 강학회에 한 번 빠졌다고 하여 그이 동료들간의 학문적이고 인격적인 교류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남인 학파의 동료들 안에서 이벽의 학문과 인품 그리고 그의 역할을 생각하여 보았을 때, 이승훈의 북경여행과 그이 영세과정에서 이벽의 역할이 어떠했는지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마무리 글.
약소하게나마 그리고 현재 내가 거하고 있는 방안에서 손에 닿는 책을 찾아서 근거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너무나 확실한 것이다. 필자의 식견과 학문이 짧기도 하겠지만, 필자가 그동안 보아온 한국 초기 교회사를 다룬 자료에서는 모두 한결같이 이벽의 권고를 받아 이승훈이 영세한 것으로 되어있고, 본론에서 인용하였듯이 그 자료들은 너무나 확실한 것들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제쳐두고 다른 것에서 그 근거를 찾으려 한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일부 학자와 연구소 등이 왜 구태여 이승훈의 영세과정에서 이벽의 역할을 축소하고 폄하시키려하시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 손 안에는 가장 확실한 자료들을 놔두고 이후 선교사들의 보고서나 1811년 편지등에서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하여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 타당한 것인가 의심스럽다.
1811년 신미년 편지의 목적은 신유박해로 인한 조선교회의 상황을 알리고 교회의 도움을 요청하는데 있었던 것이지, 초기 강학회나 이벽과 이승훈의 영세 문제 등을 다루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신원에 대하여 말한 것이 정말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그리고 선교사들의 보고서에서 이벽의 역할에 대하여 나오지 않는다고 하여 정말 이승훈의 영세과정에서 이벽의 역할이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수원 가톨릭 대학을 나와서 김남수 주교님으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9 년째 교구 사제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곳에 가서 무슨일을 할 때 내가 수원교구 사제임을 밝히고 일을 하지, 내가 누구 아래서 수학하였고 누구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그곳에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내가 어느 주교로부터 서품받은 사제라고 밝히는 예도 거의 없다. 그러한 것을 밝히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상황에서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 천주교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도 이벽의 역할에 대하여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이벽 선조가 죽은지 6년이 지나서 거의 동시대에 쓰여진 황사영 백서나 이벽 사후 60 년이 지나서 쓰여진 김대건 신부의 보고서도 그것을 동일하게 증언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순교에 버금가는 고통을 겪으며 이승훈과 이벽의 모든 것을 함께 보고 느꼈던 정약용이 이벽 선조의 역할과 위상에 대하여 거듭 말하고 있지 않는가.
이승훈의 영세과정에서 이벽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것은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어리석은 행위나 다름없다고 본다. 한국 천주교회는 분명 광암 이벽의 선구자적 자각에서 태동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선구자적인 자각에 걸출한 천재였던 정약용은 물론이고 이승훈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 그의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았고 감화가 되었던 것이다. 이승훈이 북경의 영세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시험과정과 공부과정을 극복하고 영세를 받고 돌아온 것도 이벽으로부터 이미 조선에서 단단한 정신적 각오를 다짐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논변을 거쳐서 우리의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의 면모가 하나 둘 씩 드러나게 된다면 더할 수 없는 행복이 되겠다. 끝으로 이벽의 죽음에 대하여 다산 정약용이 지은 시를 옮기며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선학이 인간 하계에 내려오니
그 풍체 신처럼 높이 당당하게 보이고
날개깃 백설처럼 휘날리니
닭과 오리가 미움과 시새움에 사네.
우는 소리 온 세상을 진동시키고
맑고 명료하여 세속의 혼미함을 뛰어 넘었네.
가을바람 타고서 홀연히 날아가 버리니
인간의 노력이 슬프고 공허하도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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