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천선(安千善) |
경여慶餘 신암愼庵 良定公 |
순성군(順城君)양정공
政堂文學 寶文閣大提學 |
2派6世-안문개(安文凱)4 |
안천선(安千善):1311(충선왕 3, 신해)~?.
본관 順興. 자는 경여(慶餘). 호는 신암(愼庵). 문개(文凱)의 第四子.
충숙왕때 문과 급제.
정당문학 寶文閣大提學 역임.
第三子 天保의 貴로 順城君에 封해짐.
시호:良定.
▣참고:世宗實錄
안천선(安千善)
1311(충선왕 3, 신해)~?.
자는 경여(慶餘). 호는 신암(愼庵)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안문개(安文凱)의 4째이며. 충숙왕때 문과 급제하였다.
정당문학 寶文閣大提學 역임.
셋째아들 안천보(安天保)의 貴賢으로 순성군(順城君)에 封해짐.
부(父) 안문개(安文凱)-문의공
조부(祖父) 안성철(安成哲)-상호군
증조부(曾祖父) 안정준(安貞俊)
[참고문헌]
고려사
世宗實錄--세종 7년 을사(1425,홍희 1) 2월16일 (병진)
영돈녕부사로 치사한 안천보의 졸기
子
2派7世
안손주(安孫柱)
순성군(順城君) 경혜공(景惠公)
1333(충숙왕 2, 계유)~?.
본관 順興. 千善의 長子.
공민왕때 문과(文科) 급제.
中郞將을 거쳐 贊成을 지내고 順成君에 封해짐.
시호:경혜(景惠).
▣참고:문중자료(安哲鎬)
子
2派7世
안천보(安天保)
소의공(昭懿公)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영돈녕부사로 치사한 안천보의 졸기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치사(致仕)한 안천보(安天保)가 졸하였다.
천보의 본관은 순흥(順興)이니, 순성군(順城君) 안천선(安千善)의 아들이었다. 지정(至正) 계묘년에 비로소 벼슬하여 별장(別將)이 되고, 전객 부령(典客副令)·군기 윤(軍器尹)·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의덕부 좌사윤(懿德府左司尹)·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역임하고, 공조 전서(工曹典書)에 승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해면되자 거문고와 서적으로 혼자 소일하였다. 벼슬길이 막힌 지 16년 만인 영락(永樂) 무자년에 태종(太宗)이 불러 검교 한성 윤(檢校漢城尹)에 임명하니, 대개 그의 순진(純眞)함을 가상하게 여긴 까닭이었다. 〈지금의〉 우리 중궁(中宮)은 천보의 외손녀(外孫女)로 천보의 집에서 자랐는데, 임금이 잠저(潛邸)에 계셨을 때에, 태종이 선택하여 배필로 삼은 것이다. 기축년에 천보를 검교 참찬(檢校參贊)에 승진 임명하고 바로 검교 찬성(檢校贊成)으로 다시 승진시켰다. 임금이 즉위하매, 좌의정에 임명되었는데, 치사하고 영돈녕부사로 옮겼다가 연로함으로 말미암아 치사하게 한 것이었다. 이에 이르러 병으로 졸하니, 나이 87세였다. 마음 가짐이 본래 충직(忠直)하였고, 왕실의 지친(至親)이 됨에 미쳐서는 더욱 근신하여 교만한 빛이 없었다. 병이 위급하매, 아들 안수산(安壽山)이 약을 올리니, 천보가 말하기를,
“인생 80이 세상에 흔히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약을 먹어 무엇하겠느냐.”
하고, 소연(翛然)히 죽었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시호를 소의(昭懿)라 하니, 용모와 의표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이르고,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현명하고 착한 것을 의(懿)라 이르렀다. 아들은 수산이었다.
세종 27권,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2월 16일(병진) 5번째기사
○領敦寧府事致仕安天保卒。 天保, 順興郡人, 順城君千善之子。 至正癸卯, 始仕爲別將, 歷典客副令、軍器尹、判司僕寺事、懿德府左司尹、判宗簿事, 陞工曹典書, 未幾免, 以琴書自娛, 閑廢者十六年。 永樂戊子, 太宗召拜檢校漢城尹, 蓋嘉其眞純也。 我中宮, 天保之外孫, 養于天保家。 上之在潛邸也, 太宗選爲媲。 己丑, 進拜天保檢校參贊, 俄陞檢校贊成。 上卽位, 特拜左議政, 致仕, 遷領敦寧府事, 以老仍令致仕, 至是以病卒, 享年八十七。 秉心忠直, 及爲懿親, 尤謹愼無驕色。 病亟, 子壽山進藥, 天保曰: “人生八十, 世不多有, 我何必飮藥?” 翛然而逝。 訃聞, 輟朝三日。 諡昭懿, 容儀恭美昭, 溫柔賢善懿。 子壽山。
世宗 27卷, 7年(1425 乙巳 / 명 홍희(洪熙) 1年) 2月 16日(丙辰) 5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