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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U자걷기] 후기 스크랩 윤종영의 대한민국 U자 걷기 제11구간 참가기(1)
함수곤 추천 0 조회 60 13.06.08 23: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밤의 사진편지    제1938호  (13/6/9/일)    

 

   

   함수곤의 블로그 '한밤의 사진편지'로 가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blog.daum.net/ham60/> 

 

'한사모' 카페 'romantic walking'으로 가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 cafe.daum.net/hansamo9988 >

cafe.daum.net/hansamo9988

 

 

저는 윤종영 고문님의 긍정적이고 후덕한 인품.

끊임없이 조사하고 연구하며 글을 쓰는 학구적인 자세를 존경합니다.

 

윤 고문님은 U자 걷기를 시작한 이래

우리가 걸은 길과 지역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깊이 추적해서 그 길에 괌련된 역사적 사실과 인물의 뿌리를  밝혀

U자 걷기의 또 다른 역사 후기를 남겨주셨습니다.

 

저는 윤 고문님이 남겨주신 이러힌 역사 후기를

가지게 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윤 고문님의 후기는  자신이  걸으면서 직관적으로 보고 느낀 것을

부담없이 가볍게 그린 단순한 여행기가 아닙니다.

 

걷고 난 후, 상당한 기간에 걸쳐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 연구해서 역사적 문헌과 자료를 

  토대로 작성된 방대한 분량의 저술입니다.

 

 연로하신 윤 고문님께서 이러한 작업을 지속해 오신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고 아무나 따라서

할 수도 없는 고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윤 고문님의 역사학자적 자세와

책임감에 대하여 깊은 경의와 감사를 올립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U자 걷기의 의미와 품격을

한 차원 높여주신 윤종영 고문님의

그간의 노고와 기여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것입니다.

 

 

함수곤 드림

 

 

 

 

 

 

대한민국 U자 걷기 제11구간 참가기(1)

 

 

 

 

글 : 윤 종 영(한사모 고문, yooncy1936@hanmail.net)

 

 

 

 

 

201341, 오전 9,

 

인천 송도 해돋이 공원고래상 앞에 한사모회원 66명은

작년 10구간 꼴인 당시에 감격스러운 장면을 떠올리며

함수곤대표의 꿈은 이루어졌다구호를 합창하면서

최종구간인 11구간 출발을 선언하고 버스에 승차,

첫출발지인 영종도의 을왕리 해수욕장으로 향하였다.

 

만나는 회원 모두가 최종구간에 참여하였다는 성취감에 취

해 다른구간에서 보았던 긴장감이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버스안 분위기도 화기애애한 들나들이 차 같고.

나는 인천대교 바다 위를 달리는 버스차창을 통해 멀어져 가는

송도를 뒤돌아보며 이곳과 얽힌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렸다.

 

 송도는 인천지역에서 월미도와 더불어

대표적인 피서지로 각광받았던 곳이다.

 

1930년대 일본 강점기에 만들어진 위락시설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인공백사장으로

협궤열차인 수인선의 개통과 더불어 수도권 관광지로 각광받던 곳이었다.

 

학창시절 소풍지로 많은 추억이 담긴 곳이지만

최근 신도시 개발로 옛 모습이 많이 사라져 아쉬움이 느껴진다.

 

버스 차창을 통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오는

이번 대장정 최종구간의 첫출발지인 영종도는

지금은 국제공항으로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있지만

우리나라 최근세사에는 우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주었던 곳이기도 하다.

 

 19세기 후반, 우리나라 진출에 관심을 가졌던

프랑스, 미국 등이 국내사정으로 지속적인 관심을 갖지 못하자

 개국후에 급속한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은

우리나라에 침략의 마수(魔手)를 뻐쳤다.

 

이것이 유명한 운요호(雲揚號)사건이다.

일본은 우리나라 진출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고종 12(1875) 9, 표면상으로는 청나라 해로답사(海路踏査)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포함(砲艦)운요호를

한국 연안으로 파송하였다.

 

운요호는 우리나라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

강화도의 초지진부근에서 보트를 내려 상륙하려 하자

초지진에서 무단히 침입한 운요호에 포격을 가했고

운요호는 이를 구실로 초지진에 포격을 가하였다.

 

이들은 뒤에 식수를 구하려 하였다하나 이는 구실이고

실제는 분쟁을 유발하려는 목적이었다.

 

당시 함상의 일본인들이 초지진의 포격모습을 보고

드디어 쏘는구나하며 기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초진진에서 포격전을 하고 이를 더욱 확대하고자

이곳 영종도에 와 이곳의 영종진(永宗鎭)에 병력을 상륙시켜

우리 군사와 전투를 벌리며 성내에 대대적인 분탕(焚蕩)질을 하여

수많은 인명을 학살하고 마을 전체를 초토화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이를 구실삼아 다음해 군함 6척을 강화도에 파견

무력시위를 하며 협상을 요구, 결국 우리는 일본에 굴복,

굴욕적인 강화도조약(1876)을 체결, 개국하였고

 이후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 되었다.

 

나는 이런 통분의 역사를 떠올려 보며

눈을 감고 잠간 상념에 잠겨 보았다.

 

또 영종도와 나와의 옛일이 생각난다.

!960년대 내가 처음 유적 발굴(고인돌)에 참여하였던

인연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당시 고인돌이

마을 가까이 위치해서인지 이미 도굴되어

별다른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아쉬워 했던 기억 등,

어떻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우리의 오늘 출발지인 을왕리 해수욕장에 도착하였다.

 

이곳도 옛날에는 자주 찾던 곳이지만

오랜만에 찾아보니 낯설고 생소하다.

 

그러나 하얀 백사장에 만조로 잔잔한 아침 바닷물,

이 위를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갈메기 모습은

 서해바다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풍경이기에

더욱 정감이 흐르고 반가웠다.

 

우리는 이곳에서 간단한 체조를 하고 별다른 의식(儀式)없이

지휘부에 선도에 따라 최종구간 첫발걸음을 옮겼다.

 

회원들은 이제는 걷기에 달인의 경지를 넘어선 잘 훈련된

정예군인처럼 대오를 이루어 걷기의 속도를 낸다.

 

오늘 오전 걷기는 5Km, 모든회원들이 여유만만 들 하다.

간혹 맞나는 마음사람들은 인적 드문 오전의 바닷가를 걷는

낯설은 우리집단에 의아한 눈길을 보내며 묻기도 한다.

 “무어 하는 사람들인고”.

리는 전국을 일주하는 한사모 할배 할매들이라구 소리 높혀

대답을 하지만 잘 이해가 않되는 것 같다.

 

약간 선선한 기분 좋은 바닷길을 한참 걷다 보니

길가에 三一獨立萬歲記念碑가 눈에 들어온다.

 

반가워 비의 뒷면을 얼른 찾아보니 이곳에 있었던

삼일운동당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 주민들이 뜻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1983).

 

정말 장한일이다. 당시 삼일운동은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만세운동이지만 뒤에 그 고장 주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뜻을 합쳐 이런 기념물을 만든 것을 별로 보지 못하였기에

이곳(인천시 중구 용유동)주민들에게 마음속으로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구름에 가려져 걷기가 편해 한참 속도를 내어 걷다 보니

오전 종착지인 에덴소머리국밥식당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맛갈스러운 소머리국밥으로 시장기를 달랬다.

 더욱이 첫날 점심식사는 매번 연례행사 처럼 박현자 여사가

제공, 음식 맛을 배가시켜주었다.

 

점심식사후 1230, 버스에 승차하여

오후걷기의 출발기점인 경인 아라뱃길 두리생태공원으로 이동,

오늘의 걷기의 종착지인 정서진(正西津:인천시 서구 오류동)을 향해

오후 115분경, 발걸음을 옮겼다.

 

여러 차례 들어 귀에 익숙한 경인 아라뱃길,

 또는 경인운하이지만 실제로 오늘 처음 보게되니

감개무량(感慨無量)하다. 머릿속에 그려보았던 것 보다

 규모도 크고 운하 양안 뚝에 자전거길이나 보행로가 잘 가꾸어져 있다.

 

 나는 잘 다듬어진 운하 갓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이 뱃길을 만들은 가장 큰 목적은 물량수송을 위한 운하의 기능이고

부수적으로 관광, 홍수예방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여러 가지 이유로 본래목적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며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한강유역이다.

 

삼국의 쟁패 과정 중에서도 삼국의 주도권을 잡은 것이

한강유역 점유와 동일하고 신라의 삼국통일도

이에 터전한 것이고 후삼국통일도 유사하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 남북대결에서 우리가

한강유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앞으로의 남북통일에 우리가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강하구가 휴전선에 막혀 있어

한강이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약점이라 한다면

이를 경인운하가 보완해줄 수 있기에

경인운하가 운하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회복하여야 되지 않을가.

 

 나는 이런 나의 생각을 같이 걷는 회원 몇분과 이야기를 주고 받아 보았다.

나는 걸으면서 아라 뱃길에 아라가 무슨 의미를 갖는 말인지,

몇 분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리랑 후렴구라는 등

의견이 분분해 인천시 서구청 문화과에 물어보니

바다라는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걷는 길가에 새로 나무도 많이 심었고

저기 관광명소(경인 아라뱃길 8)라는 인공폭포도 눈길을 끈다.

한참 걷다보니 봉수대 마당이라는 복원된 봉수대가 서있다.

 

이 봉수대는 조선시대 전국에 있는 봉수로 가운데

5()로 전라도 순천에서 한성까지

연결된 코스에 있는 봉수대를 복원한 것이다.

 

또 여기저기 안개 협곡, 바람소리 언덕 등 재미있는 지명이

눈에 들어와 걷기에 피로를 잊게 해준다.

 

우리가 걷는 동안 수송선은 한척도 못보았지만

관광선을 두 척을 볼 수 있어 그래도 한결 마음이 위로가 된다.

 

드디어 오늘 종착지인 정서진 앞에 있는 청운교 앞에

전회원 모두가 무사히 도착 오늘완주의 기쁨을 나누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버스에 승차,

오늘 숙박할 대명항에 있는 약암관광호텔로 이동, 짐을 풀었다.

 

 

저녁식사는 인근에 있는 등나무 횟집에서 별식인

해신탕(토종닭, 전복, 낙지, 한약재)으로 포식을 하고

새로 참여하신 회원들의 신고식 등으로 웃음을 선사 받아

피로를 풀고 첫 밤을 숙면할 수 있었다.

 

 

 

다음날(42일 화)

 

 

어제 일기예보 때문에 새벽에 눈을 뜨면서 날씨가 걱정스럽다.

창밖을 내다보니 어둠속이긴 하지만 비는 오지 않는 것 같다.

 다행스럽다. 최종구간을 멋있게 마무리 할 수 있어야 할텐데.

집에서 걱정했던 몸 상태가 비교적 괜찮은 것 같다. 천만 다행이다.

 

오전 7시경, 호텔 1층 식당에 내려오니

많은 회원들이 벌써 내려와 있다.

 

모두들 원기왕성, 오늘 걷기가 70여리가 넘는데도

걷기를 걱정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흐린 날씨와 관계없이 표정들은 밝고 행복하다.

아침은 시원한 해장국으로 속풀이를 하고

8, 우리는 버스에 승차 대명항을 떠나

강화 초지대교에 올라 강화도로 향하였다.

 

강화도, 조선시대 대표적인 인문지리서인 이중환의

택리지에 보면 “-----강화부는 동북쪽으로 강으로 둘러싸였고

서남부는 바다로 둘러싸인 큰 섬인데, 한강 수구(水口)의 나성(羅星)역할을 한다.

 

----” 조선시대 김정호는 “--강화도는 한양에 인후(咽喉)가 된다이렇게 강화도는 지정학적으로 수도권의 목젖 같은 곳이었기에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가 압축.

투영된 곳이며 수차례에 걸친 외침속에서 나라를 지켜온

호국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곳에는 이와 관련된 많은 역사적 유물. 유적이

남아 있는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보고로.

선사시대 고인돌, 단군의 참성단, 고려. 조선의 역사적 흔적,

현재의 남북분단 모습까지 우리역사 전시대를 담고 있다.

 

또 나와 강화도의 인연은 매우 깊다.

내가처음 강화도를 찾은 것은 1947년 가을,

초등학교 수학여행으로 기억되고

그후 여러 가지 인연으로 강화도를 자주 찾게 되어

이제 강화도는 나에게 제2의 고향처럼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U자걷기 동안 나의 머릿속에 간혹 그려진 완주모습은

강화해엽을 건너 강화도에 발자욱을 남기는 것으로 그려지곤 했다.

 

그래서인지 강화도로 향한 오늘 걸음이 남다른 의미가 느껴진다.

 

우리일행은 버스로 황산도 선착장에 도착,

드디어 강화 땅에 첫 발걸음을 내려놓았다.

 

하늘에 구름이 많이 끼였지만 날씨와 관계없이

회원들 표정은 밝다.

 

오늘 오전 걷기는 ,강화나들길 8코스로 분오리돈대까지 40여리 길,

그렇게 만만한 거리가 아니지만 회원들 모두 희희낙락(喜喜樂樂)하다.

 

우리 일행은 지휘부의 코스안내와 간단한 주의사항을 듣고

조별로 대오를 이루어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 나들길 8코스도 잘 정리 정비되어 있다.

특히 바닷가 갯벌 바위에 나무기둥을 박고 세워진

 목제(텍크)은 아직까지 별로 보지 못한 자랑스러운 걷기 길이다.

 

나무길 위를 열심히 걷고 있는 우리에게 강화입성을

환영하는 듯한 촉촉한 봄비가 뿌린다.

 

 

 

회원들 모두가 예견했던 비였기에 준비한 우산 비옷을

 챙기면서 별다른 대오의 흐트러짐 없이

엷은 비줄기 속을 잘들 걷는다.

 

마침 만조 때였기에 내륙의 호수가를 걷는 분위기이다.

나무길을 벗어나 좁은 시멘트 뚝방길을 1열로 대오를 이루어 걷기도 하고

가천의대 앞에 넓은 아스팔트길의 인도를 열심히 걸었다.

 

걷는 동안 길가주변에 풍요해 보이는 농어촌 풍경에

가슴 뿌뜻하면서 자주 눈에 띄는 서구풍의 팬숀이 이곳에

고유한 모습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듯해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길 위를 천막천으로 덮은 해안 간척지 뚝길을 한참 걸어서

 연이은 분오리 저수지 뚝길을 걷다 보니

드디어 오전 꼴인지점에 도착하였다.

 

나는 분오리 저수지 뚝길을 걸으며

이곳에서 가까운 화도면 사기리에 있는

 명미당 이건창(明美堂 李建昌:1852-1898) 생가가 눈에 얼른 거린다.

 

내가 강화에 올 때마다 자주 찾던 곳으로

이번 걷기 코스에 들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었다.

 

이곳은 강화학파의 주류를 이룬 전주 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

강화와 처음 인연을 맺게 한 이광명(李匡明:1701-1778)이 터를 잡은 곳이다.

 

이 마을은 6대에 걸쳐 250여 년 동안 대대로 이어온

이씨 가문의 세거지로 강화학파의 요람으로 생가가 있는

주변 산에 누대에 걸친 선대의 묘소가 있다.

 

이 생가는 이건창을 비롯해서 그의 조부되는

이시원(李是遠 1790-1866)등 선대들이 누대에 걸쳐 살았던 곳이다.

 

이 집은 1996년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 면목을 일신하였고

생가 안채에는 이건창과 세교가 두터웠던

매천 황현(梅泉 黃玹:1855-1910: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자 음독순국)

쓴 명미당(明美堂)이라는 당호가 걸려 있다.

 

강화학파는 강화도라는 특별한 지역정체성을 가진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 학파로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1649-1736)가 강화로 이주하면서 비롯된 학문으로

양란(왜란. 호란) 이후 국가통치이념으로

자정능력(自淨能力)을 상실한 성리학을 대신할 새로운 학문으로

양명학을 수용하고 이를 그의 아들 정후일, 손서 이광명에게

잇도록하여 250여년 동안 이시원, 이건창 등 후손들의

가학(家學)으로 전승, 발전하여 독특한 학맥을 이루었다.

 

강화학은 조선후기 실학형성에도 다양한 영향을 미쳤으며,

한말 항일독립운동의 추축이 되어

민족주의 사관을 확립, 민족의식의 정신적지주가 되고

애국교육운동을 전개하며 국민계몽에도 앞장 섰다.

 

망국 후에는 대부분의 인물이 망명, 순국하는 길을 택하였다.

 이들의 역사적 학맥은 위당 정인보 선생으로 이어져

민족의 주체성과 민족정신을 추구하고

민족주의 이념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강화학파의 고고한 행적과 꺾이지 않는 민족정신은

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심어주어

국권회복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나는 몇몇 회원들과 별로 알려지지 않은 강화학파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강화를 걷는 동안 강화학파 관련 유적지를 한곳이라도 찾을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보았다.

 

우리일행은 버스로 점심식사 식당인 동막돌솔촌으로 이동,

청국장정식으로 비속을 걸은 한기를 풀었다.

음식점 주인이 집사람과 옛날 교직에 같이 있던 분(김순례)이어서

반가운 해우를 하였다.

고맙게도 점심은 진풍길 소정자 부부회원이 제공,

우리들의 마음속에 따뜻한 훈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오후걷기는 동막리에서 강화나들길 7-1, 7 코스를 걷는 길로 40여리길,

그러나 회원들은 걷기의 어려움보다 흐린 날씨에 관심이 더 있는 것 같다.

 

다행이 오후 날씨는 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우리들은 지휘부의 선도에 따라 해안 뚝길을 따라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걸으며 보니 강화나들길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착상을 한 것이 눈에 띈다.

 

고무타이어에 흰페인트칠을 한 계단식 언덕길이 나온다.

어떻든 재미있는 길이다.

 

또 걷기가 어질어질한 해안뚝길을 걷기도 하고

 바닷가에 별로 정리되지 않은 자갈 모래 바위길을 걷기도 하고

 또 밧줄로 얽은 산길 계단을 밧줄을 따라 걷기도 하였다.

 

걷는 길 주변에 풍광이 아름다웠으나

별로 살펴볼 겨를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언덕산길을 오르다 보니 오던길 도로표지판에서 보았던

 북일곶돈대(北一串墩臺)”가 나타났다.

 

돈대는 바닷가 높은 벼랑위나 해안 돌출부에

흙이나 돌을 쌓아 그 위에 바다를 감시하는 조망대(眺望臺)

포대를 설치하여 해안선을 지키는 첨병(尖兵)

구실을 한 요새(要塞)이다.

 

원래 강화도는 한양으로 통하는 갑곶(甲串)

개성으로 이어지는 승천포(昇天浦) 포구이외는

해안선이 돌벼랑과 진흙 갯벌과 수렁으로 되어 있어

이 두 곳 포구만 지키면 적의 침입으로부터 강화를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고려 시대 몽고와의 오랜 항쟁 속에서

이곳에 도읍을 옮기고 27년간 좁은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런데 병자호란때 이곳을 지키던 강도검찰사(江都檢察使) 김경징(金慶徵)

교만 방자하여 수비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해

적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성이 함락되어 강화가 가졌던

천험의 요새라는 명예에 먹칠을 하였다.

 

그래서 그후 효종과 숙종년대 강화도의 수비를 대폭 강화해서

해안에 성을 쌓고 강화 해안선에 돈대 54, 포대 9곳을 설치하고

이 돈대를 관할하는 6곳의 진()7곳의 보()를 설치하여

강화성 전체를 요새화하였다.

 

최근 이런 유적들이 많이 복원되여 옛 모습을 보여주어

고맙고 반가운 일이지만 간혹 원래의 모습보다

과장한 곳이 보여 기분이 좀 씁쓸 할 때도 있다.

 

역사란 사실대로 보여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우리일행은 북일곶돈대에서 바다를 내려다 보며

옛일을 떠올려보다 이곳을 떠나 고무타이어길인 산길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한참 걷다보니 오늘 꼴인지점인

 장하리 낙조마을(해넘이 마을)일몰전망대에 도착하는 감격의 순간을 맛보았다.

 

이곳에서 우리일행은 버스에 승차 오늘숙소인 세인관광호텔로 이동

방 배정을 받고 버스로 저녁식사할 동막돌솔촌으로 이동

생선회정식으로 오랜만에 즐거운 저녁식사를 만끽(滿喫) 할 수 있었다.

식사후 여흥, 정인자회원, 심상석회원의 달콤한 노래와 양정옥회원, 이영균위원장의 재미있는 만담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저녁잠자리까지 숙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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