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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유배의 역사
-오현단에 모셔진 5인의 현인 중심으로-
* 오현단은 작은 토막돌(조두석) 다섯 개를 한 자(33cm) 간격으로 세워놓은 게 전부다. 돌 하나의 크기가 높이 45cm, 너비 22cm, 두께 15cm니 메줏덩이만 한데 이런 비석을 도마 같다고 해서 도마 조(俎)자를 써서 ‘조석’, 또는 ‘조두석’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오현의 이름 석 자조차 새겨 넣지 않았다.
먼저 오현단에 대한 설명을 하기에 앞서 여기는 오현단 현장이 아니기에 제가 위에 오현단 그림을 준비했습니다. 먼저 제주시에 대한 설명부터 하고요. 과거 저 멀리 삼성시대부터 제주시에는 5도가 있었습니다.
일도, 이도, 삼도, 외도, 별도가 있었다. 1도에는 고을나(양을나), 2도에는 양을나(고을나), 3도에는 부을나, 외도에는 기타성씨(잡씨), 별도는 별도봉에 있는 바다를 삼성이 공유하여 사용했다. 지형적으로 일도는 동문시장을 가로지르는 산지천(가락천) 동쪽으로는 1도, 산지천 서쪽으로 병문천까지 2도, 병문천에서 한천까지 3도, 한천에서 서쪽으로 공항동네까지 외도, 성주고씨가전에 태종16년(1416년)때 고득종(한성판윤)이 정이오(대제학)에게 부탁하여 쓴 고씨 족보에는 순서가 고양부, 고려사 지리지의 삼성신화(양성지: 1454년 고려사 간행 시 수사관으로 참여)에는 양고부 순으로 기록.
1. 언제부터 제주가 유배지로 활용된 것일까?
언제부터 제주도가 유배지로 활용된 것일까? 그것은 고려시대 몽골 지배시기였다. 원제국은 그들이 정복한 타민족의 왕족 170명을 제주로 유배 보냈는데 이것이 시초였다. 그런 데 원이 망하고 명이 들어서자 이번엔 거꾸로 원의 왕족들이 명에 의해 제주에 유배를 오게 되었다. 원의 달달친왕 등 80호가 들어와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원당봉 북쪽) 또 명에 저항한 베트남의 왕족도 이곳에 유배되었다. 재미있는 건 이들 타민족의 왕족들이 그대로 제주에 정착하게 되어 양(梁), 안(安), 강(姜), 대(對)의 성씨를 남겼다는 점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아무래도 연산군 이후 계속된 사화가 유배객을 많이 만들어내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많이 유배객이 몰린 것은 아무래도 조선후기이다. 임진왜란 등 수난시대를 겪고도 조선왕조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퇴행적인 정치행태를 양산하고 있을 때 즉 무의미한 당쟁이 계속되고 있을 때, 제주도는 당쟁에서 밀려난 정객들의 유배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가급적 정적을 제거하든지 차마 거기까지 힘을 쓸 수 없다면 가장 먼 제주도로 날려버리려 했던 게 당시 조선정가의 한심한 현실이었다.
본래 유배형은 사형 바로 전 단계, 즉 사형을 시켜야 했으나 이러저러한 사정 때문에 한 단 계 낮춰 치죄하는 형벌이었다. 교과서에도 나와 있지만 조선시대 형벌은 가는 매 50대 이하를 치는 태형(笞刑), 굵은 매 50대 이상을 치는 장형(杖刑), 감금하여 노역케 하는 도형(徒刑), 먼 곳에 보내 격리시키는 유형(流刑), 목숨을 끊어버리는 사형(死刑)으로 등급이 나눠져 있었다.
* 제주인구는 고려 원종15년(1274년) 10,223명, 조선 세종(1420년)때 6,3474명으로 인구 증가, 성종원년(1470년)~인조2년(1624년) 150년간 굶주림, 난민발생으로 도외 탈출, 급격히 인구 감소로 인조7년(1629년)~순조25년(1825년) 약 200년간 출륙금지로 페쇄된 생활 영위, 조선(1392~1910년) 목사 역임자는 286명이며, 임기는 30개월인데 대부분 1년 6개월 정도하고 제주를 떠났으며 가장 오래 역임한 분은 이경록(6년 5개월) 이종윤, 조희순, 백낙연, 서병엽 등이 임기를 넘겼다. 재임 기간 중 가장 청백리와 선정을 베풀고 왜구를 잘 막아내고 굶주리는 제주백성을 보살피고 제주인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인 분들은 기건, 이약동, 이종윤, 김문수, 노정, 김정, 이원조, 윤시동, 허명, 윤구동 목사님(10명) 들이었다.
* 조선시대 제주는 5백여 년 동안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으로 구분되어 삼읍 체제로 통치되었다. 각 읍마다 읍성을 쌓았고 읍성 안에 관아시설과 건물들이 들어섰다. 국가교육기관인 향교도 각 읍마다 하나씩 설립됐다. 그리고 왜구 때문에 철저한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제주 전 해안 요소에 둘러쌓아진 환해장성, 오름 정상에 설치한 봉수 해안에 설치한 연대, 방호소에 설치된 진성 등은 조선시대 방어체계를 잘 보여주는 유적들이다. 방호소는 화북진, 조천진, 별방진, 애월진, 명월진, 차귀진, 모슬진, 서귀진, 수산진 등 9개 진이었고, 모든 진에 성이 쌓여졌다. 봉수는 산악을 연결하고 연대는 해안선을 연결하는 통신연락시설이다. 25봉수와 38연대가 있었다. 방어시설 유적들은 제주 곳곳에 제법 많이 남아있다.
* 유배형은 상당히 가혹한 형벌이며 그만큼 원래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만 내려 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제주 3읍에는 죄명이 특히 중한 자 이외에는 유배시켜선 안 된다”라고 법률로 못 박아 있기까지도 했다. 그러나 당쟁이 심화되면서 제주 유배형은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정적 제거용으로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 후기에는 유배 체험이 없는 지식인은 지식인으로서의 경력이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유배형도 죄의 경중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누어진다. 정치적 배려가 많이 가미된 경우로 고향에 낙향시켜 그곳에서 평생을 살게 하는‘본향안치’, 일단 벌을 주어 먼 곳으로 쫓아 보내다가 왕의 배려하여 중도에서 머물러 살게 하는‘중도부처’, 유배인의 활동반경을 유배지 행정구역 안에서는 허용해 준‘주군안치’, 먼 섬에 가둬버리는‘절도안치’, 집의 울타리 안으로 만 행동반경을 제한한‘위리안치’혹은‘가극안치’등이 그것이다. 그중 절도안치와 위리안치 (가극안치)가 가장 혹독한 경우인데, 제주도의 유배는 대부분 이에 해당되었다.
2. 조선시대 제주로 유배 왔던 사람들 중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요?
조선시대에만 국한하더라도 제주도에는 약 261명의 유배인 왔다고 한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오다보니 신분이나 나이도 제각각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사람은 84세의 신임이었고, 소현세자의 3남인 석견은 4세로 최연소의 유배인이었다. 물론 유배인의 대부분은 양반 사대부였다. 하지만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던 승려 보우라든가, 인조반정으로 밀려난 광해군 등 그 신분에 있어서도 다양했다.
* 261명중 6기(1기:태조-예종, 2기:성종-선조, 3기:광해군-경종, 4기:영조-정조, 5기:순조-고종, 6기:고종-순종)로 나누어서, 4기(86명), 3기(73명)에 60%이상으로 붕당정치와 탕평정치로, 다음 조선말 고․순종 때 74명으로 세도정치와 외세칩입으로 제주유배, 지역별(제주목: 69, 대정현: 60, 정의현: 38, 추자도: 43명, 미확인: 51)로 3-4기에 대정현과 정의현에 분산, 후기에는 제주목에 편중은 중앙의 지배권약화 때문, 대정현은 헌종6년(1840) 김정희 유배, 정의현은 헌종 14년(1848) 이승헌 유배가 마지막
** 1기는 왕권강화(민무구/민무질 형제), 태종16년(1416) 제주목사겸 도안무사 오식의 건의로 삼읍 체제.
2기는 4대 사화(무오: 홍유손/이원, 갑자: 홍상/유헌/김양보, 기묘: 김정/이세번, 을사: 유희춘)로 18명중 14명.
3기는 73명중 57명이 붕당정치와 환국으로 김직제옥사(이태경 왕으로 추대/송상인/신희업), 계축옥사(김제남부인 노씨), 인목대비 폐비반대(정온)로, 선조 7남인 인성군(이괄의 난)의 가족 5명 정의현으로, 광해군, 이덕인(왕추대), 인조 소현세자의 3형제(인조의 음식에 독: 석철/석린 사망, 석견 남해로 이배), 경신환국(유혁연), 기사환국(송시열/김예보/김진구): 김진국은 제주 후학양성으로 영향 큼, 갑술환국(우의정 민암, 김덕원/장희재).
4기는 신임옥사(목덕분/목더겅, 김윤홍 제주 이배), 반역사건(홍찬해/홍자해/조완, 김우진/조시위), 탕평정치비판(임징하/윤봉조/조관빈/임명주/이존중/유언호).
5기는 신유사옥(천주교탄압: 홍낙임/이치훈, 황사영사건: 부인 정난주), 관료부패(아편:박희영, 정부미:심이택, 과거시험:구성희/이희당/남정호/박영훈/민영서).
6기는 친생문사건(이민굉/이충구/전우기/노홍규), 친일행적(서주보/정병조/김경하/이범주/이태황/홍우덕), 독립협회(이원긍/여규형/지석영/안기중)
누구나 알 만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광해군은 인조19년(1641)강화도에서 제주로 이배되어 1644년까지 이 곳 제주목에서 약 4년 동안 살다가 숨을 거뒀는데, 그가 살았던 곳은 ‘망경루 서쪽’ 즉 최근 복원이 이뤄진 제주목 관아지 바로 북서쪽 어느 지점으로 추정되고 있다.
송시열은 제주에서 111일 동안 머물렀던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그가 살았던 곳은 산지골 김환심의 집이라고 한다. 그의 유배형 역시 ‘위리안치’라 가족동반이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아우와 손자가 계속 동행했고, 서울로 불려 올라가는 도중에 정읍에서 사사됨으로써 83세의 삶을 마감.
장희재가 제주로 유배를 오게 되었다. 황사영 백서사건(천주교)으로 그는 처형당했지만, 그의 부인 정난주는 이 곳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 현재 천주교에서는 그의 묘역을 성역화해 놓았는데 역사의 평가가 종교의 힘에 의해 헷갈려버린 경우이다.
김정희는 조선말기의 문신이자 철학자, 서화가, 금석학자, 1835년(헌종 1년) 풍양조씨가 정권을 잡자 복귀 이조판서에 오르고, 5년후 윤상도의 옥에 관련되어 고초를 겪다가 목숨이 위태로워 친구인 우의정 조인영이 추사를 살리기 위해 제주 대정현에 8년 3개월(1840년-1848년) 유배생활중 제주에 실학을 소개하고 제자를 양성, 추사체 완성, 세한도라는 불후의 명작 남김.
* 대정읍 추사 김정희가 유배되어 살았던 집(강도순의 집)은 안타깝게도 4·3때 불타, 지난 1984년 집주인인 강도순의 증손자의 고증에 따라 복원하여 조성하였으며, 유배시절 겨울철 소나무를 그렸는데, 그것이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이다. 이 그림은 추사가 귀양 시절 제자 이상적이 북경에서 귀한 서책을 구해와 유배지까지 찾아와서 갖다 준 것에 감명해 그려준 그림이라고 전한다. 사실 그림을 보면, 원근법도 맞지 않으며, 잘 그렸다고 볼 수는 없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추사 김정희가 문인화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사의(寫意)를 가장 잘 나타내는 그림이기 때문에 유명한데, 사의란, 그림은 그림 자체보다, 그 의미가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세한도는 추사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과 그 감정을 잘 나타냈다는 점에서 유명한 것이다. 제주도 대정읍에 있는 김정희 미술관인 추사관 건물은 이 세한도의 건물을 본 따서 만들었다.
백낙신은 임술민란이 일어났던 1862년에 유배를 오게 되었다. 백낙신이 누구일까? 바로 임술년 진주민란의 원인을 제공하여 탐관오리의 대명사가 된 사람이다.
최익현도 한 때 제주에 유배를 왔었다. 대원군 집권 10년이 되던 해에 대원군을 성토하며 이제 실권을 고종에게 넘기라고 감히(?) 상소를 했다가 벌을 받았지만 대원군은 권력을 고종에게 넘기게 되었으니 최익현의 말발이 먹혀 들어간 셈이고, 제주시 칠성통에서 1년 3개월의 유배시간을 보냈는데 유배가 풀렸을 때 방선문과 죽성마을을 거치는 등산로로 한라산 등반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가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고 방선문에는 최익현과 그 때 길 안내를 했던 제주의 양반 이기온의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김윤식은 민비시해의 음모를 사전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방조했다는 것이고 아관파천으로 권력을 잡은 친러파에 의해 단죄된 것이다. 제주 유배 기간 동안 꾸준히 일기를 썼는데 그 글이 "속음청사"이다. 이 책을 바탕으로 소설가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가 나왔던 것이며 또 현기영의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이재수의 난"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가 머물렀던 집은 제주시의 유명한 자장면집 아주반점 자리로 추정.
박영효는 고종퇴위 반대와 친일내각 암살음모와 연루되어 유배되었고,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철종의 사위로 알려진 인물인데 제주 유배기간 동안 학교 설립과 원예 농업 보급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제주사람들에게는 소설가 고원정의 조부 고자환을 서울로 유학시킨 사람으로도 기억되고, 그가 유배 생활했던 집은 현재 제주시 구남동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유배길은 대개 전라도 해남, 강진, 영암 등지에서 배로 출발한 후 보길도나 소안도, 진도를 거쳐 제주 별도(화북)포에 도착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것은 별도포가 유배인이 제주도에 도착한 후 제주목으로 인계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향과 조류 관계 때문에 도착지가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 강영(康永)은 함덕포로 도착하였고, 김만희(金萬希)는 애월포로, 이세번(李世蕃)은 신도포로, 김춘택(金春澤)은 조천관으로, 조관빈(趙觀彬)이나 김정희(金正喜)는 별도포로, 광해군은 어등포(행원)로 도착하는 등 그 지점이 다양하였다. 일단 포구에 도착하면 적거지로 결정된 제주목이나 정의현 또는 대정현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 가운데서도 대정현이야말로 최악의 유배지였다. 제주도내 유배인의 분포는 고려 말부터 조선조 중기에 이르기까지 제주 삼읍에 골고루 배치되었다가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주로 제주목으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유배될 때는 죄수 압송관으로 의금부 도사(都事) 금오랑(金吾郞)이 동행을 하였고, 해도(海島) 유배의 왕명이 내리면 해당 관아의 아전은 죄수 압송의 왕명을 맞아들이기 위하여 육지까지 나와서 기다렸다가 함께 배를 타고 인도하는 것이 상례였다.
3. 유배문화 관련 오현단은 어떤 관계일까요?
오현단은 문화재 안내판에 쓰여 있듯이“조선시대에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목사 등 관리로 와 제주 문화와 교학 발전에 공이 있는 다섯 분의 현인(賢人)을 기리기 위해 세운 단”으로 제주도를 다룬 모든 책에 이렇게 설명돼 있다. 굳이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해설도 아니다. 이분들은‘제주의 교화’에 공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들의‘충절과 학문’을 후대인이 크게 존중했기 때문에 오현단에 모셔졌다. 아니,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제자들이 스승과 제자의 돈독한 관계 때문이 아닐까?
오현단 그림을 보겠습니다.
오현단은 제주목관아에서 약 1.1km의 아주 가까운 거리이고, 묵은성(삼도동) 길을 느긋이 걸어 남문로터리까지 가는 데는 10여 분밖에 안 걸리고 남문로터리에서 큰길을 건너 동쪽으로 가면 바로 오현단이 나온다.
여기서 잠깐 조선의 오현은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이면 영남지역에서는 조광조 대신 정구鄭逑를 넣고, 호남지역에서는 김인후, 기대승, 유희춘, 이항, 박광전 등 호남출신 만으로 오현이다. 제주하면 우선 생각나는 관광지는 관덕정·삼성혈·용두암·성읍민속마을·천지연폭포·만장굴 등은 잘 알지만 의외로 육지 사람들은 오현단을 모른다. 하지만 오현고등학교는 비교적 아는 편이다.
선조 11년(1578) 임진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조인준이 가락천 동쪽에 충암 김정을 모시기 위한 충암묘를 세웠고, 현종 1년(1660)에 목사 이괴(李)가 진사(進士) 김진용(金晉鎔)의 조언으로 지금 오현단 북쪽인 고득종(高得宗) 옛터에 학사 10칸의 장수당(藏修堂)*을 지었는데 현종 6년(1665) 판관 최진남이 이 묘를 장수당 남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은 뒤, 숙종 8년(1682)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중종 15년(1520)에 유배된 충암 김정, 중종 29년(1534)에 신임 제주목사 규암 송인수, 선조 34년(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 광해군 6년(1614)에 유배된 동계 정온 등 네 분의 위패를 모시도록 하였으며, 숙종 21년(1695) 송시열 선생도 함께 모시면서 5현을 배향하게 되었으나, 고종 8년(1871) 서원 철폐령이 내려 헐리게 되었으나, 고종 29년(1892) 제주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비를 세우고 제단을 설치.
* 유생 35명의 학생 수용, 환곡의 모곡에서 식량으로 삼고 콩, 밭벼, 보리, 목면 등을 추가지급, 배 한척을 지정하여 육지와 장사를 해서 식량을 대게 하는 한편, 김진용(金晋鎔)의 주관으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게 하고, 이괴 목사가 초하루, 보름에 직접 강열(講閱)하니 삼읍(三邑)의 향교 선비도 참석하게 되어 흥학(興學)의 기운이 전도에 퍼지게 되었음.
** 귤림서원은 조선 시대 초기 및 중기에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했던 오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던 유교 교육기관이었다.
1896년 성안 세병골[洗兵洞]에 있던 사마재(司馬齋)에서 유배인 이세직(李世稙)이 일어강습소를 연 것을 계기로, 1907년 7월 경신재(敬信齋)에서도 제주군수 윤원구(尹元求)에 의해 의신학교(義信學{校)가 설립되어 신학문을 시작하였으나, 1910년 5월 한일 합방과 동시에 폐교되었고, 오현단을 비롯한 장수당터인 경신재(敬信齋)일대를 수용하여 농업학교가 설립되었다. 공립농립학교는 1912년 제주공립농업학교로 제주의 최고 고등교육과 실업교육의 본산으로 교사와 실습지를 갖추고 1939년까지 엘리트 교육을 담당하였다. 제주농업학교가 1939년 여름, 제주시 광양지경으로 이전해버리고 광복을 맞아 오현의 이런 정신을 계승하는 뜻에서 1946년 2월 우공 황순하*(牛公 黃舜河)선생이 오현단(五賢壇) 경내(境內)에 제일중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그해 10월 교명을 오현초급중학교로 개칭하였다.
1951년 9월 학제변경에 따라 오현중학교와 오현고등학교가 분리·개편되어 초대교장에 제주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이경수 교장이 취임하여 초창기의 학교발전을 이끌어 냈으며, 1960년대부터 제주시 도심권의 팽창으로 1972년 10월 화북동 별도봉 기슭으로 옮겨가면서 학교부지는 민가에 불하되고 남성 밑의 귤림서원 옛터만 남아, 오늘의 오현단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제주도는 오현단내에 1979년 충암 김선생적려유허비(沖菴金先生謫廬遺墟碑)를 세웠고, 제주시에서는 오현단 성역화 사업을 통감하여 일부 사유지를 흡수하는 한편 예산을 자원하여 오현고등학교 총동창회(회장 金漢柱)는 1998년 12월에 오현선생 오현비(五賢碑)와 오현선생(五賢先生)의 유작 시비(詩碑)를 경내에 세웠으며, 이듬해 3월에 제막식을 가졌다.
** 오현단내에 있는 증주벽립은 철종 7년(1856) 송시열 선생의 글씨로 판관 홍경섭이 바위에 새긴 글씨와 김정 선생과 송시열 선생의 ‘적려유허비’가 남아 있고,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이 있음.
* 황순하(黃舜河) 선생의 일생은 1896년(건양 1)∼1978년. 현대 기업가‧육영사업가‧정치인으로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출신지는 제주도 조천읍(朝天邑) 조천리(朝天里)이며, 다년간 양조업에 종사하였고, 사회사업과 육영사업에 진력하였으며 경력은 제주양조(濟州釀造)(주) 사장, 계림자동차(鷄林自動車)(주)사장, 남성산업(南星産業(株) 사장을 지냈고, 1939년 제주도 어업조합 감사, 1942년 조선해면기업 사장과 제주도 물산(주) 사장, 1943년 주식회사 조일구락부를 설립하여 감사를 지냈으며, 1945년 10월 학도병 출신들의 모임인 로고스(Logos)회를 조직하였으며, 1946년 2월 제주 제일중학원을 설립하고, 1946년에 오현중학교(五賢中學校)로 개칭하여 설립자겸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1951년 오현고등학교를 개설하였다. 전남도평의회(全南道評議會) 의원을 지냄.
오현에 유배온 인물은?
1) 충암 김정 (沖菴 金淨, 1486∼1520) :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충북 보은 출신. 중종2년(1507)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으로 보임되고, 뒤에 부제학, 동부승지, 좌승지, 이조참판, 도승지, 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 뒤 기묘사화* 로 인해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 등의 옹호로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을 썼다.
* 중종14년(1519) 11월 조광조·김정·김식 등 신진사류가 남곤·심정·홍경주 등의 훈구 재상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 충암이 진도에서 제주도로 옮긴 1520년 8월부터 사형당한 1521년 10월까지의 기록으로 지형·기후·동식물·특산물을 다루었다. 주민의 생활상과 관원의 횡포, 귀양살이 하는 자신의 형편과 마음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2) 동계 정온(桐溪 鄭蘊, 1569∼1641): 광해군6년(1614) 3월19일(음력 2월10일)에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보통 갑인봉사(甲寅封事)라고 불리는 정온의 이 상소는 조정 내외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광해군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북파들은 정온의 상소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그들은 ‘영창대군은 난신적자(亂臣賊子)이므로 누구나 죽일 수 있다. 정온은 정인홍에게 배웠지만 정인홍의 도의는 배우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정온을 유배시키라고 촉구했다. 광해군도 분노하여 전반적인 조정의 분위기가 정온을 극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돌아가는 와중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심희수(沈喜壽), 우의정 정창연, 간관인 이언영 강대진, 호남유생 송흥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온을 국문했다. 그나마 이원익 등의 비호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되어 1614년 8월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 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정월 초하루 새벽에 「자경담」을 지었고, 「망북두시(望北斗詩)」와 「망백운가(望白雲歌)」를 통해서는 애군우국(愛君憂國)을 토로하였다.
3)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조선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철학자·정치가이자 시인·평론가로서 주자학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그가 올린 '기축 봉사' 중에서 존주 대의와 복수 설치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김자점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동향을 밀고함으로써, 송시열을 포함한 신당 일파는 모두 조정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숙종15년(1689) 기사환국이 일어나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남인은 그를 한성부로 압송해 국문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남인 정승인 의정부 영의정 권대운(權大運) 등이 ‘굳이 국문할 필요가 없다’면서 ‘성상께서 참작해 처리하라’고 권하자 금부도사가 만나는 곳에서 사사하라고 명한 것이다.
후일 송시열을 높이 평가한 정조가 친히 편찬한 앙현전심록에서 정조는 송시열을 마침내 주자에 비견될만한 성현의 반열에 올랐다. 또한 송시열을 비난하는 것은 공자와 맹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못박아 그에 대한 비판을 금지했다. 1863년 이전까지 송시열의 주장에 공식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후 송시열의 제자와 문도들은 송시열을 송자(宋子)라 부르며 공식화했지만 영남의 남인들은 이의를 제기하였다.
4) 청음 김상헌(金尙憲·1570~1652): ‘소덕유, 길운절 역모 사건’이 일어나자 뒷수습을 하러 온 어사이다. 그 과정에서 남사록 이라는 기행문을 남기기도 했다.
5) 규암 송인수(宋麟壽·1487~1547): 제주 오현단에 배향된 것은 일종의 코미디다. 그와 제주도의 인연은 대단히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제주도 부임 자체를 꺼려했다.
이들은 모두 충절로 숭앙받을 만한 분임이 틀림없지만 당색이 모두 서인과 노론으로 이어진다. 충암은 당파 이전 인물이지만 조광조와 같은 노선이었고, 동계는 북인에서 갈라선 분이며, 청음·규암·우암은 서인과 노론의 골수였다. 귤림서원의 사액을 건의한 우의정 김석주는 당시 노론의 실세였다.
실제로 오현의 한 분인 규암 송인수는 제주목사로 부임했으나 불과 몇 달 만에 육지로 돌아갔고, 우암 송시열은 83세 되던 해 3월에 귀양지인 제주에 들어와 5월에 국문을 받으러 육지로 떠나 6월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으니 제주에 머문 기간은 3개월도 안 된다.
* 제주목사는 대개 30개월 임기로 부임해오는 목사와 판관 등 행정관리들 때문에 제주의 삶은 점점 육지처럼 변해갔다. 을사늑약이 이루어지는 1905년까지 총 287명의 목사가 제주에 부임해왔다. 여기에다 제주가 유배지로 지목되면서 261여 명의 귀양객이 제주로 들어왔다. 유배객 중에는 특히 정치적 사건으로 귀양 온 문신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이 또한 제주의 문명을 교화하는 데 한몫.
4. 제주의 유배인들의 생활상과 제주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지?
유배인들은 식량·거주·일상생활의 어려움과 함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고독, 정치적 소외·절망감 등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위리안치된 유배인은 혼자 입도하였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다른 유배인보다 더 컸다. 또한 행동반경도 엄격히 제약되면서 실질적으로 배소에서 할 수 있는 건 서책을 읽거나 저술 활동 등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루한 생활의 반복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배인보다도 훨씬 힘든 생활을 하였다. 일반 유배인 역시 가족들을 동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 또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애절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에 대한 충성과 연군의 감정,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관직 복귀에 대한 갈망이 유배 문학의 가장 큰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의 유배인들은 정치범이면서 학자들이었기 때문에 기약 없는 기간 동안 할 수 있었던 일은 독서나 책을 쓰는 일과 가르치는 일이었다. 한양의 이름 있는 정치가나 학자에게 제주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들의 교육을 부탁하게 되었고 그로 인한 학문과 사상을 전수 받기도 하였다 유배기간동안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는 교육과 계몽활동을 통해서 죄인이라기보다 오히려 교육자로서 존경을 받았던 인물도 있었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제주도의 자연환경이나 생활습속에 관련한 책을 저술함으로써 당시의 제주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 당시 제주 사람들의 강인하고 독특한 생활문화가 기록된 책으로는 김정의 「제주풍토록」, 김상헌의 「남사록(南槎錄)」정온의 「동계집」, 김춘택의「북헌집」, 김정희의「완당집」, 김윤식의「속음청사」등이 있다.
한편, 왕족이나 그 당시 상류 사회의 사람들의 언어와 행동, 일상생활을 통해서 의식주의 개선이나 언어와 예절, 습속 등을 유교식으로 순화시키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렇지만 유배인 대부분이 비판적인 양반계층이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로 하여금 저항정신을 자각하게 하는 영향력을 발휘하였을 것이다. 수탈과 박해의 역사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을 지켜왔던 제주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과 함께 반골정신이 강하게 키워졌을 것이다. 수차례의 제주 민란에서 장두였던 사람들이 대부분 유배인의 후손과 관련을 맺고 있었고 가장 혹독한 유배지인 대정 지역이 민란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제주도는 변방인 데다 조선시대 동안 출륙금지령 때문에 교육을 비롯하여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혜택을 받기 어려웠다. 따라서 정치적 실각으로 제주도로 유배 온 인물들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사대부는 정치인이자 교육자였기에 교육적 영향력도 상당했다. 송시열도 향교에 보관된 책을 빌려 적소에서 손자를 비롯한 사람들과 함께 읽으며 토론을 벌였고, 시간적 여유를 활용하여 저술활동을 벌였다. 유배지의 한계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문인들과 학문적 토론을 나눴다. 비록 제주도에 머문 시간이 100여 일에 불과하였지만 교학활동에 이바지한 바가 커서 서원 배향이 금지되던 시기에도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다. 제주오현 배향은 제주교육사상사에서 도통의 계보를 확정 짓는 작업으로서 의의가 크다. 또한 송시열의 문인들이 행정가나 유배인으로 제주도를 찾음으로써 송시열을 기리고 교학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김정희는 송시열의 유배지를 찾아 시를 남겼고, 최익현은 독서, 저술, 교육 활동을 망라하는 다양한 활동으로 제주도 교육계에 기여하였다.
5. 마무리
제주의 서글픈 유배역사를 보셨습니다.
그래도 제주 유배문화는 제주도의 성씨를 다채롭게 하는 등의 기능적 가치 외에 교학활동, 예술활동은 물론 제주도 특유의 저항활동 등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어 더욱 주목됩니다.
유배인들은 불행했지만 제주는 행복했다’제주대 양진건 교수, 제주 유배문화는 폐쇄, 감금, 고독의 의미가 아니라 힐링, 휴식, 창조라는 새로운 생명적 화두를 갖게 돼 그 의미가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호주는 교도소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 노퍽 섬 등 11개 교도소를 2010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면서 매년 컨퍼런스를 열고 관광산업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제주의 주요 유배지를 관광자원화 및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역사문화공원, 도심문화관광공원, 유배문화관광공원으로 기능을 설정해 유배문화 산실로서의 오현단 정비, 제주읍성 복원정비, 귤림서원 복원, 귤림조성, 제주유배역사문화관(가칭), 오현춘추제 복원과 제주도교육문화 축제 육성, 신산공원∼오현단∼목관아지∼산지천에 이르는 역사문화 거리 조성 등 역사문화다큐공간으로 연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제주도는 세계자연유산(2007.6), 세계지질공원(2010.10), 생물권보전지역(2002.12) 등 3개 인증되었고, 제주해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하려는 노력과 유배문화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노력도 있음을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주요 제주목사의 치적】
1. 오식(吳湜) : 태종때 제주목사. 자는 위숙(渭叔), 호는 임계이며 본관은 울산이다.
재임당시 지역의 수조법(收組法)을 정하였고, 땅이 척박하고 백성이 가난한데다 전세법(田稅法)도 없어 백성이 괴로우니 토지의 등급에 따라 시행토록 함.
1416년에는 한라산 남쪽 땅을 동서로 나누어 동쪽을 정의, 서쪽을 대정현을 둘 것을 건의해서 설치함.
2. 최해산(崔海山) : 세종때 제주목사. 고려말 화약를 발명한 최무선의 아들로 본관은 영주이다.
부친으로부터 전수받은 화약수련법과 타고난 재능으로 화약병기를 비롯한 군장비 보강과 발전에 힘썼다. 1434년 부임하여 선정을 폈으나 관부(官簿)가 화재로 소실되자 그 후 곧 정각(政閣)을 건립해 홍화각(弘化閣)이라고 편액하고, 우정당, 찬정당, 영고, 종루 등 200여칸을 새로 건축했다.
그리고 제주향교를 중건하고 예조참의 고득종으로 하여금 홍화각기를 짓게 하고 편액을 쓰니 모두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재임중에 교육, 농사, 마정, 군정 등 온갖 분야를 정비하고 확립시켜 명성높은 목민관으로 알려져 있다.
3. 기건(奇虔) : 세종때 제주목사. 해녀들이 전복을 따는 모습이 너무 애처롭게 느껴 목사로 부임해 있는 동안 전복을 먹지 않을 정도로 백성을 위했다고 전한다.
4. 이약동(李約東) : 성종때 제주목사. 자는 춘보(春甫 ), 호는 노촌(老村)이며 본관은 성주이다.
재직할 때 관아 아속들이 부정부패와 민폐를 단속시키고 공물의 수량을 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또한 한라산신묘를 건립, 이전에는 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거행하면서 동사자(凍死者)가 속출하는 등 많은 주민피해가 나자 1470년 삼의양봉 밑에 묘단을 개설하니 그로부터 산천단(山川檀)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임기가 끝나 떠날 때 의복, 마필, 제구(諸具) 등 관에서 얻은 것은 모두 관부에 저장하고 말채찍까지도 관루에 걸어두고 떠나니 뒷날 도민들은 청백리라고 칭송했다 전한다.
5. 이종윤(李從允) : 성종때 제주목사. 일체의 선물금지와 공물 및 부역의 감소 등의 조치를 취하여 도민들이 칭송했고, 임기가 다해 교체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정에 재임용을 간청하여 허락을 받아 모두 4년4개월 동안 제주목사로 재임했다. 이는 고종때 부임했던 백낙연 목사와 함께 조선시대 최장수 재임기록이다.
6. 이수동(李壽童) : 중종때 제주목사. 자는 대수(大樹),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감귤재배를 장려하였고, 도내 5개 방호소에 과수원을 설치하여 군졸로 하여금 수호케 하였다. 성안에 구급용수가 없음을 알고 홍화각 남쪽에 우련당지(友蓮堂池)를 파서 물을 저장하고 연꽃을 길러 그 위에 우련당을 건립했다.
7. 곽흘(郭屹) : 명종때 제주목사. 을묘왜변이 일어났을 때 미비한 방호상태를 정비하고 성곽과 무기를 보수하면서 국방에 대비했다.
또 가락천이 성밖에 있어 주성이 포위되면 물공급이 어려울 것으로 보아 주성을 동쪽으로 넓혀 음료를 확보하였고, 과감한 억불숭유 정책을 폈다.
8. 이경록(李慶祿) : 선조때 제주목사로 본관은 전주이다.
중종때 장림목사가 쌓은 명월성을 다시 둘레 3,020척, 높이 8척으로 튼튼하게 개축했다.
1597년(선조 30) 부친상을 당하고서도 정유재란으로 귀향조차 못하고 방위에 전력을 쏟았다.
9. 이원진(李元鎭) : 효종때 제주목사. 본관은 여주이고 자는 승경(昇卿), 호는 태호(太湖)이며 실학자 반계 유형원이 외삼촌이다.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읍지인 탐라지를 편찬하고 제주의 독특한 환경과 풍물을 기록했다. 차귀진을 개설해 군사를 주둔시키고 대정향교를 지금의 단산 밑으로 이전했다.
10. 이익태(李益泰) : 숙종때 제주목사. 자는 대유(大裕)이고, 본관은 연안이다. 재임중에 지영록을 지었고 연무정을 중수했으며 송시열을 귤림서원에 배향하니 지금의 제주오현이 갖춰졌다.
11. 이형상(李衡祥) : 숙종때 제주목사.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 본관은 전주이다.
1703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무속을 개혁하여 유속(儒俗)을 따르게 하였다. 고을나(高乙那), 양을나(梁乙那), 부을나(夫乙那)의 삼성(三性) 사당을 세우고 동성혼의 풍속을 금지했다. 신당 129개를 없앴으며 유고중 ‘남환박물’과 ‘탐라순력도’를 저술했다. 나중에 제주의 영혜사(永惠祠)와 귤림사(橘林祠)에 배향된다.
12. 김정(金정) : 영조때 제주목사. 자는 사달이며 호는 노봉(蘆峯), 본관은 안동이다.
학문을 일으키려고 1736년 삼천서당을 창건, 문화 교육진흥에 힘썼으며, 화북포가 비좁아 익사자가 자주 발생하자 군인을 동원해 방죽을 쌓아 수백보를 넓히고 높이도 6보나 높여 뱃길을 잘 통하게 했는데 목사가 직접 돌을 등으로 지어서 날랐다고 한다. 또한 우련당을 중건하고 소석대(小石坮)를 못 안에 축조, 화죽(花竹)을 심어 향의실이라 개명하고 향의실기(享儀室記)라는 명문을 지었는데 오늘날까지 전한다. 재임중 화북관에서 병사했다.
13. 허명(許冥) : 순조때 제주목사. 백성들에게 수세(水稅) 폐지를 약속했으나 이행하지 않아 이후부터 제주에는 공약(空約)이나 거짓약속을 하면 ‘허명(실제 발음은 허맹)의 문서로구나 하는 말이 생겨 지금까지 쓰인다고 전한다.
14. 구재룡(具載龍) : 헌종때 제주목사. 1840년 영국선박이 가파도에 와서 소와 말을 약탈하자 남은 소를 모동장(毛洞場)으로 방출하는 등 노력했으나 평소 경계를 소홀히 했다고 해서 파직됐다.
요역과 세금을 번거롭지 하지 않고 감면하는 등 선정을 펼쳐 비록 파직됐으나 백성들은 애석하게 생각하여 엄장면(嚴莊面면.지금의 애월읍)에 ‘사상구공재룡휼민선정비를 세워 그를 기렸다. 비(碑는) 지금 자연사박물관 구내에 있다.
15. 이원조(李源祚) : 헌종때 구재룡 후임의 제주목사. 자는 주현, 호은 응와,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1841년 화북포구에 있던 해신사(海神祠)를 중수하고, 본래 게액(揭額)이 없던 주성의 사당을 상현사(象賢祠)라고 이름지었다. 이 상현사는 1848년 장인식 목사때 영혜사(永惠祠)로 개명된다.
탐라지를 편저했는데, 이원진 목사가 200여년전 지은 탐라지를 ‘구탐라지’라고 하고, 이원조 목사가 지은 것을 ‘신탐라지’라고 한다. 응와문집은 명문장가로 탐라지를 비롯해 ‘효자 박계곤 행적기’, ‘한라산 유산가’, ‘연희각기’, ‘정온적려유허비문’, ‘홍화각중수기’, ‘삼천서당중수기’ 등을 남겼는데 동계 정온의 외손으로 보인다.
〔제주에 부임하지 못한 목사들〕
1. 박안신(朴安臣) : 세종때 제주목사로 임명됐으나 부인의 중환을 이유로 도임하지 아니함.
2. 정인인(鄭麟仁) : 민휘 목사의 후임으로 연산군때 임명됐으나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음.
3. 김양필(金良弼) : 1517년 12월(중종12) 제주목사로 임명했으나 반대하는 중신들이 있어 도임하지 못함.
4. 민제인(閔劑仁) : 중종때 임명됐으나 73세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제주도 도임하지 않음.
5. 이정(李玎) : 명종때 제주목사로 제수됐으나 임지에 가기를 머뭇거리자 절도에 유배됨.
6. 홍유의(洪有義) : 광해군때 제주목사로 임명됐으나 사간원에서 파직을 요청해 도임하지 못함.
7. 홍전(洪瑑) : 효종때 김수익의 후임으로 제수됐으나 도임하기전 청주목사로 환직되서 부임못함.
8. 정언황(丁彦黃) : 제주목사로 삼았으나 사헌부에서 부당함을 아뢰니 이원진을 제주목사로 보냄.
9. 김억추(金億秋) : 사간원의 진언으로 부임하기전에 파직됨.
10. 원백규(元百揆) : 1729년 영조가 정계장의 후임으로 임명했으나 부임하지 않자 파직당함.
11. 손명대(孫命大) : 1733년 제주목사로 임명됐으나 부임중 강진에서 병사로 도임못함.
12. 우하형(禹夏亨) : 1747년 한억증의 후임으로 임명됐으나 주변 반대여론으로 인해 박태신으로 바뀜.
첫댓글 제주 유배사 정리 감사합니다. 논문의 대가 태백쌤... 정말 성실하시고 꼼꼼하시고 집요하십니다~😆 쌤의 논문정신 쭈욱 계속되길...!
자료조사를 참 열심히 하셨네요.
성실하신 샘 덕분에 지식이 풍요로워지겠습니다.
머리아퍼하는 사람들은 빼고 ㅎㅎㅎㅎㅎ
참으로 대단 하십니다.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