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제주올레 세 번째 아침이 밝았습니다.
날이 개기는 했지만, 하늘엔 듬성듬성 구름이 흐르고, 엷은 안개가 시야를 가립니다.
용머리해안, 산방산, 송악산 코스로 이어지는 10코스는 살짝 건드려도 쨍, 하며 깨질 듯한 청명한 날에 가야 하는데......
아쉽지만 아침 일찍 아이를 깨워 3일차 올레 걷기에 나섭니다.
서귀포 숙소에서 10코스가 시작되는 화순해수욕장까지는 버스를 한번 갈아타고, 1시간이 넘는 거리이기 때문에 서둘러야 합니다.
화순해수욕장으로 들어서는 길목입니다. 이 녀석 화순까지 오는 서회선 일주 시외버스 안에서 내내 졸더니만,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늘어지게 하품을 합니다. 이날도 오전에는 아들이 배낭을 메도록 합니다.
수심과 파도가 적당하여 가족단위 해수욕장으로 각광받는 화순해수욕장. 뒤로는 산방산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아이 얼굴은 편안한데, 왠지 기운이 없어 보입니다. 어제 빗속에 강행군을 한 탓인가 봅니다.
화순해수욕장을 지나 용머리해안까지는 사구(砂丘)와 퇴적암지대가 연이어 있습니다.
억겁의 세월 동안 모래와 조개껍질 등이 섞여 한 덩어리 바위가 된 퇴적암에 아이와 나란히 앉아
자연의 유구함을 이야기합니다.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바다는 큰 파도와 함께 일렁입니다.
용머리 언덕으로 이어지는 사구. 이제 불과 한 시간 여 정도 걸었는데, 아이가 벌써 무척 힘들어합니다.
배낭도 제가 대신 멨는데, 모래언덕을 오르는 아이 폼이 자기 힘들다고 광고를 하는 것 같습니다.
화순해수욕장에서 용머리 언덕까지 이어지는 사구와 퇴적암 지대.
흰 포말의 파도와 맞닿아있는 검은 부분이 조금 전 아이와 함께 앉아있던 퇴적암 지대입니다.
언덕 꼭대기에서 용머리 쪽을 향해 한 컷.
오른쪽 나무 펜스가 끝나는 지점에 용머리해안으로 들어가는 매표소가 있습니다.
거대한 석벽 아래로 나있는 해안 바윗길. 산방산 아래 유채꽃밭과 용머리해안 관광이 예전 신혼여행 단골코스였죠.
아쉽게도 이날은 파도가 높아 해안으로 내려가는 통로가 봉쇄됐습니다.
용머리해안과 산방산 밑 하멜 전시관을 지나면 이렇게 검은 모래언덕이 쭈욱 이어집니다.
사구마다 모래가 유실되지 않도록 듬성듬성한 나무 울타리를 쳐놨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왼쪽 섬이 형제섬이고, 오른쪽 중간 지점에는 송악산이 아스라이 보입니다.
사진상 송악산과 맞물려 있는 건물이 회깨나 먹어봤다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남경미락입니다.
인근의 진미식당과 함께 진품 다금바리를 내는 제주 대표 횟집 중 하나죠.
남경미락 벤치에서 잠시 다리를 쉬며 올려다본 산방산.
바닷가에 우뚝 솟은 자태가 웅장하면서 신비롭습니다.
아이는 아직 저 뒤 검은 모래사장에 작은 점이 되어 따라오고 있습니다.
머리가 아프고 힘들다 하는데도 매몰찬 아빠는 늘 그렇고 그런 엄살로 치부하고 홀로 앞질러 왔다지요.
산방산 인근 사계리 포구.
이 포구를 지나 화석발견지가 있는 사계리 해안도로가 끝나면 오늘의 하이라이트 송악산 입구에 닿습니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포구입니다. 원래 계획은 오전 중에 10코스 절반인 송악산 입구까지 가야 하는데,
아이가 자꾸 뒤처지는 탓에 사계포구 인근에서 점심식사할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사계초등학교 인근에 냉우동 잘하는 일성식당이 있다는 정보를 보고,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사계리 해안에서 상당히 멀리 있습니다. 돼지육수를 베이스로 하는 밀면 종류더군요.
더운 날 시원하고 맛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 아프다는 아이를 데리고 2,3km나 빙 돌아갈 일은 아니었지 싶었습니다.
색다른 맛집은 경험치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꼭 찾아가고 싶은 아빠 욕심이었지요.
멀리까지 돌아가서 밀면만 먹기 뭣해 추가로 주문한 제육 한 접시.
고소하고 맛있습니다만, 서귀포시에 있는 관촌밀면 제육에 더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사계리 일성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아이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속이 거북하고 머리가 아프다고 어디서 잠시 잠을 자고 가잡니다.
근처에 정자라도 있으면 시원한 그늘에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게 하고 싶은데,
사계초등학교에서 해안도로 나오도록 그늘이 하나 없더군요.
어쩔 수 없이 해안도로에 있는 사계리 체육공원 벤치에 땡볕에 얼굴만 덮어주고 자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30분 이상을 달게 자더군요.
아이가 잠든 사이 아빠는 주변 해안을 어슬렁거립니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아프다 하여 쳇기가 있나 싶어 손을 만져봐도 정상체온이고 머리에 열도 없더군요.
무지한 아빠는 아이가 전날 우중에 강행군을 해서 단순 몸살기가 있는 것으로만 해석해버렸습니다.
뙤약볕 아래 마냥 재울 수만은 없어서 어르고 달래며 다시 길을 재촉합니다.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뭔가 아이가 흥미를 가질 만한 이야깃거리를 찾느라고 마음만 간절합니다.
도중에 이런 화석발견지가 있었지만, 관찰 감상할 여유는 없고 무의식적으로 카메라만 눌렀습니다.
아이가 너무 힘들어 하고 어디 쉴 만한 데가 없어서 염치를 무릅쓰고 화석관리사무소 문을 두드렸습니다.
서귀포시청에서 파견나온 관리 공무원 한분과 마실 온 동네 어르신 한분 계시더군요.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했더니, 아주 흔쾌히 아이가 쉴 자리를 마련해 주십니다.
아이가 춥다니까 따뜻한 차까지 손수 끓여 대접해주는 수고를 마다 않습니다.
얼추 연배가 비슷한 관리사무소 직원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한 시간 여쯤 아이를 재웠다가 다시 데리고 나왔는데, 아이가 조금도 나아진 기색이 없습니다.
관리사무소에 있던 어르신이 조금만 더 가면 편의점이 있다기에 몸살약이라도 사 먹이려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걷다 보니 송악산 입구까지 왔네요. 편의점에서 뭐 적당한 의약품을 팔 리가 없지요.
속이 더부룩하고 메스껍다고 하여 체했나 싶어 결국 활명수 한 병 사서 먹일 도리밖에요.
아이가 평상에 앉아 잠시 쉬는 사이, 디카에 담은 송악산 입구 해안입니다.
여기도 일제가 파놓은 해안동굴이 눈에 띄는군요.
사진 몇장 찍고 왔는데, 평상에서 쉬던 아이가 “아빠 토할 것 같애” 합니다.
후미진 곳으로 데려가 등을 두드려주었더니, 바로 속을 비워냅니다.
좀 심한 엄살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짜로 아팠던 것입니다.
아이의 상태는 아랑곳없이 욕심껏 걷게만 한 아빠가 참으로 미안한 오후였습니다.
더 이상 걷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결국 모슬포 콜택시를 불러 숙소가 있는 서귀포로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첫댓글 나는 이 하품하는 어린 친구의 제주도 고모? 이모? 함튼 보호자 어른으로 자처하고 말았다. 그건 내가 원한 것이었다. 나는 느꼈고 보았고, 그리고는 다 알것 같다는 미심쩍은 섵부른 내 마음도 털어내 본다. ㅎㅎㅎ 넘 진지했나? ㅋㅋ 치현이는 한마디로 정이 많이 들었고 어느 누구가 만나도 정을 주고 싶은 아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