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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조운산경도朝雲山景圖
김익하
1
2016년 8월 4일 오후 다섯 시 무렵.
동양화가 서곡은 인사동 ‘갈르리 원galerie 鴛’에서 걸어온 전활 받았다. 갈르리 원은 본디 ‘화랑 원畫廊 鴛’이었다가 프랑스 유학한 아들이 가업을 이으며 삼대 만에 프랑스 발음으로 상호를 바꾼 회화 전용 전시판매장이다. 서곡은 제작한 그림을 그곳으로 통해서만 전시하고 판매했다. 작품성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보다 불편하기 짝없는 위작 시비로 늘 세간 이목이 집중하던 화단 세태라 화가로서 방어하는 의도로도 그런 고집만 굽히잖았다.
갈르리 원과 거래관계를 맺은 지도 어언 삼십여 년에 가까웠다. 그러니 서로 속사정까지 웬만큼 알고 있는 터라 인사동 화랑에 서곡 작품이 들어오면 진위를 원제작자에게 물어오기보다 갈르리 원으로 찾아와 확인하려는 촌극까지 이따금 벌어졌다. 그런 현상은 갈르리 원에서 서곡 작품 유통 경로를 누구보다 소상히 안다는 증거기도 했다. 서곡은 생활 소소한 면까지 화단은 물론 SNS상에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화가다. 이를테면 외적인 활동보다 오직 작품 제작에만 몰두하는 부류에 속한 화가였다.
서곡은 갈르리 원에서 책정 판매하는 그림 시세에 대체로 만족했다. 가격이 낮으면 품격이 손상한다는 생각으로 기분이 상했고, 반대로 과하다 싶으면 기쁘기에 앞서 부담스러웠다. 그런 서곡 처지를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갈르리 원이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제대로 헤아리는 셈이어서 믿음이 갔고 변함없는 응대로 마음 또한 편했다. 가뜩이나 이윤이 끼어든 상거래에 몸소 얼굴을 붉히며 속이 긁히고 또 자신을 추스르려 애 끓이잖고도 초연하게 그림 그리기에 몰입할 수 있어 정서에 맞았다.
아침 녘 남쪽 창을 뚫고 들앉은 나른한 햇볕을 휘젓듯 전화기가 울었다. 서곡은 두어 번 흘끔거리다 게으르게 전화길 들었다. 늙은이에게 바삐 서둘 일은 많잖았다. 일찍부터 바쁜 일은 젊은이들 몫이고 나이 들면 서둘지 않을 일들을 챙기면 된다는 그런 여유가 나이테에 묻은 셈이다. 서곡이 대거리하기도 앞서 전화기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선생님, 저 상현입니다. 건강하십니까?”
갈르리 원 주인 격인 남상현 목소리다. 고운 품성 바탕이 그대로 묻어나듯 늘 밝은 음성을 지녀 전화로 전하는 감성이 언제나 듣는 쪽을 편안하게 해서 호감을 주었다.
“응 자네가 웬일인가. 그곳도 별일 없지. 가게 일은 잘되고?”
서곡은 남상현 목소리에 귀 안이 귀지로 후벼낸 듯 확 밝아져 기분마저 좋아졌다. 상대에게 물음이 있음은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의미고, 그리고 한동안 소식마저 뜸했음에 자책하는 언사이기 때문이다. 따져보니 서곡은 인사동에 출입한 지도 한참이나 뜸한 뜸했다. 예전에는 틈틈이 요즘 화가들 작풍의 흐름이 궁금하여 전시장에 기웃거리기도 했으나, 요즘은 초대자리라야 잠깐 얼굴을 내밀다가 서둘러 돌아오곤 했다. 함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모임이라도 오가는 인사가 예전 같은 정나미가 없고, 사람에게 하는 언사마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오롯한 마음 정을 나누기보다 허명을 드높이려고 원로와 사진 찍기에 골몰하니 이끗만 좇는 감돌이와 같은 작자들만 설치는 오일장 마당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벌집을 파 뒤집은 듯 그저 시끄럽고 소란스럽기만 했다. 당연히 그런 자리가 불편해서 오래 머물기가 부담스러워 일찍 자리에서 뜨곤 했다.
“선생님 내일 특별한 약속이 있진 않으시지요?”
“요즘은 시계 시침처럼 늘 그렇게 한가하다네.”
요즈막 나일 먹으니 몸 여기저기 온전치 못하여 오래 앉아 버티기 어려워 손대던 그림에서도 자주 손 놓고 산책으로 빈둥거릴 만큼 게으름만 늘었다. 천천히 할 일과 서둘러 할 일을 가릴 나이라고 여유를 더하니 그것이 게으름을 늘이는 원흉이랄 수 있겠다.
“선생님 그러시담 내일 점심 무렵에 저희 가게로 나오세요. 복중인데 선생님이 즐겨 찾는 가회에서 요즘 물 좋은 민어가 들어 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날씨도 더운 데 그곳에서 식사나 같이하시지요?”
귀가 번쩍 뜨였다. 복중 보양탕은 뭐니뭐니해도 민어탕이 역시 입맛에 맞았다. 여느 생선보다 비싸기는 하나 워낙 선호하는 음식이라 복중 영양탕이나 삼계탕을 찾는 사람 식성을 알 수 없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이다. 민어는 산란기가 한창 여름인 팔월이라 알 드는 육칠월이 가장 기름지고 맛과 영양가가 뛰어난 어류로 알려졌다. 오죽했으면 생선에다 백성 민民 자를 붙이겠는가. 그랬다. 초복에 민어탕으로 운기를 북돋아놓아야 여름철 으레 치르는 학질을 피해갈 수 있다면서 예로부터 남도 사람들은 여름 보양식에선 으뜸으로 쳤다. 비록 조금 때를 놓치긴 했으나 민어탕 그릇이 앞에 놓인 듯 갑자기 목구멍이 칼칼해진다.
“자넨 요즘 바쁘지 않은가?”
서곡은 별 부담 없었으나 인사치레로 그렇게 빈말이라도 응답하고 싶었다.
“선생님, 제 일이야 손 놓고 있으면 그냥 세월 보낼 수 있습니다. 올해는 경기를 몹시 타는지 화가 선생님들이나 매입자들 발길이 아주 뜸합니다. 찬바람이 불어야 전시회를 기획하니 지금 그냥 한가한 편입니다.”
“그런가? 나를 보자는 특별난 이유는 없겠지?”
“일상 나들이나 하듯 그냥 천천히 나오셔서 점심이나 편히 드시고 가세요.”
“알겠네. 그럼 그때 봄세.”
서곡은 전화를 끊으면서 습관처럼 벽시계 쪽에다 시선을 흘낏 주었다. 시각은 오전 열 시를 지나고 있었다. 삼십 년 동안이나 홀로 사는 몸이라 외출에 이 눈치 저 눈치 살피잖으니 편해서 좋을 뿐 아니라 이젠 몸에도 익었다. 아내라도 있어 외출하자면 어린이집으로 보내지는 아이처럼 잔소리에 붙잡혀 이런저런 간섭 받아야 하지만, 그저 활동하기 편한 옷 걸치고 먼질 툭툭 터는 구두보다 발 편한 운동화 차림으로 나서 오 분 거리 전철역에서 떠나 종로 3가에 내리면 되는 외출이었다. 느린 걸음으로 이런저런, 별짓을 다 하며 가도 삼십 분이면 닿고도 남았다. 오랜만에 외출이라 내일이 하마 기다려지기도 했다.
2
2016년 8월 4일 오후 3시경.
한 여인이 갈르리 원 안으로 문을 밀치며 조심스레 들어섰다. 마흔을 막 넘어선 듯한 여인은 꽃무늬 망사 겹 소재 원피스 위에다 흰 카디건을 걸친 차림인데, 짧게 커트한 머리에 쉬 폰트 일러 검은 리본을 장식한 상아색 밀집 챙 넓은 모잘 쓰고 있었다. 어깨에다 파라솔 자루가 튀어나온 판타지 색상 숄더백을 둘러멘 채 문을 밀고 들어설 때 흰 레이스 신발이 걷기 편해 보일 만큼 가벼워 보였는데, 문안으로 들어와 들고 온 포장된 표구 액자를 내려놓고서야 비로소 포도주색 선글라스마저 벗어 해맑은 얼굴을 뚜렷이 드러냈다. 차림새는 금시 백화점으로 다녀온 듯한데 얼굴이 동안이라 그렇지 눈가 주름을 보면 사십 넘어선 게 맞는 듯했고, 찌는 날씨 탓인지 표정은 차림새와 다르게 냉한 채 밝진 않았다. 초면 자리에 찾아든 표정치곤 몹시 어두워 보였다.
“후유- 한참 찾았네.”
고향이 서울은 아닌 듯 겉모양과 달리 여자 말씨로서는 투박하게 들리는데, 찾아 헤매던 보물지도 끝자리에 닿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미처 남상현이 대답도 하기에 앞서 여인은 이미 가게 안으로 들어왔는데, 내처 굳이 새삼스레 가게 이름까지 확인하고자 따지듯 물었다.
“여기가 분명 갈르리 원이 맞죠?”
손에 쥔 메모지를 다시 한 번 훑고 나서 생뚱하니 반문했다. 메모지는 화랑 이름이 박힌 걸 보면 중간쯤 어느 화랑에 들러 위치를 물어보자, 그곳 주인이 그려준 듯 갈르리 원 약도가 낙서처럼 그려져 있었다. 꼬깃꼬깃 구겨져 사인펜 자국이 손 땀으로 번진 걸 보면 초조함은 물론 얼마나 야무지게 말아 쥐고 확인하며 왔는지 짐작 가고도 남았다. 간판을 확인하고 들어와 다시 확인하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더운 날씨에 고생하며 찾은 듯 이마에 땀까지 맺혀 있었다. 마치 진군이나 하듯 낯선 주소를 찾아 땀을 흘리며 찾아든 발걸음이 남상현에게는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예, 바로 찾아오셨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뭐 시원한 음료수라도 한 잔 드릴까요?”
“네. 찬 보리차 있음, 한 잔 주세요.”
탁자를 앞에 두고 앉은 여인은 소갈증에 걸린 듯 여직원이 전해 준 보리차를 단숨에 비우고 긴 호흡을 내뱉었다. 마주 앉은 남상현이 보리차를 비운 다음 컵을 내리는 여인에게 찾아온 까닭부터 물었다.
“어떤 일 때문에 저희 가게로 오셨나요?”
“저기, 저 거지 같은 그림 때문에 열 받쳐왔거든요.”
여인은 들고 온 표구 액자를 가리키며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초면 손님치곤 말투가 사나웠다. 남상현은 여인의 말에 진의를 확인하려고 눈을 동그랗게 떠 바라보았다. 아버지로부터 화랑을 물려받은 뒤 소장한 그림에 그렇게 저주를 퍼붓는 고객이 화랑으로 찾아드는 일은 여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저게 어떤 그림이고 또 무슨 사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나요?”
“한 여자 일생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은 그림이거든요. 그 여인이 바로 우리 어머니라네요. 어머니는 저 거지 같은 그림 때문에 사십 년 동안이나 미치듯 매달려 살아왔어요.”
가뜩이나 투박한 어투에다가 감정이 날카롭게 돋긴 언사여서 단정한 용모를 다시 한 번 흘끔 쳐다볼 만큼 겉모습과 달리 속으로 들끓는 화기를 느꼈다. 마치 긴 칼을 차고 싸움질이나 하러 온 듯 불량배처럼 적의가 말속에 성마르게 숨어 있었다.
“그만큼 대단한 그림인가요? 어머니가 반생 동안 간직해 올 만큼…….”
“명작은 아님이 분명해요. 제 눈에는 그저 구름 낀 아침 산골 풍경화인데 탄복할 만큼 마음으로 팍 와 닿지 않은 그러그러한 그림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그런데도 어머니는 저 거지 같은 그림에 멍하니 넋 놓고 보다가 소리 나지 않게 눈물 흘리는 걸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몰래 훔쳐보았으니 아저씬 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거예요. 하도 보기가 딱해 그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렸는데, 칠순이 넘도록 여태껏 단념하지 않고 매달려 있잖아요. 이제 나이도 나이려니와 저것으로 지레 생을 마감할까 봐, 저 거지 같은 것을 삼복중인 데도 이리 들고 왔네요.”
여인은 초면 자리인데도 말이 길었고 험했다. 그림에 얽힌 악감정을 호소하듯 분연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그림을 가져온 동기까지 시시콜콜 밝혔다. 물론 사건내막을 모르는 사람에게 동조까지 얻자면 과장도 필요할 테다. 그렇게나마 진솔하게 사실을 전달하여 답답함까지 풀고 싶은 마음으로 애절하게 표현하려다 보니 지켜야 할 선마저 훌쩍 넘은 듯했다.
이야기를 듣는 남상현 처지에서도 어차피 들고 온 그림이니 소유한 연유나 팔려는 이유를 물어보는 게 상거래상 어긋나는 일은 아니라 여겼다. 그러나 묻기도 전에 슬슬 풀어내는 일은 드물었다. 여인 속내는 대충 요약되었다. 여인 어머니는 미치도록 좋아하는 그림 때문에 어떤 연유인지 일생을 그것에 매달려 눈물까지 흘리며 살아왔다. 나이 많은 지금 지나치게 그림에 집착한 나머지 그런 까닭으로 일찍 죽을지도 모른다. 생명 연장에 위협을 느껴 그녀 몰래 그림을 싸 들고 이리로 왔다. 그게 여기로 온 까닭 전부일 터다. 그런 이야기를 여인은 평소 묵혀왔던 감정에다 매매장소를 찾은 해방감에 벅차 험한 소리로 넋두리하듯 풀어낸 모양이다.
“분명 그림은 어머님 소유일 텐데 손님께서 팔고 싶다 해서 그냥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잘못하면 저희가 장물취득죄에 걸리거든요.”
“장물취득죄요?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어머니가 올해 일흔인데 그림에 너무 연연해 그런지 안질을 자주 앓더니 녹내장으로 지금 시력을 거의 잃다시피 했어요. 앞이 보이지 않은 데도 여태껏 손끝으로 그림을 쓸면서 우는 모습이 지겹도록 속상해서 그 자리에 다른 그림을 걸어두고 몰래 가지고 나왔거든요.”
“눈이 어두우시니 대신 걸어놓은 다른 그림에도 그러지 않으시겠어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건 이젠 저와 상관없어요. 저 거지 같은 것만 아니면 돼요. 아마 어머니는 저 그림이 여기까지 온 걸 꿈에도 모르고 있을 걸요. 만약에 나중 제가 어머니 사연을 이해할 때가 있다면 손해배상 대가를 지급해서라도 찾아가겠어요. 이건 제가 확실히 약속할 수 있어요.”
“손님, 그건 참으로 억지입니다. 어찌 들으면 저 그림을 저희 가게에서 사서 보관해 두었다가 손님이 어머님을 이해하면 그때 돌려 달라는 말씀과 같으니까요.”
“어머, 어머! 보관하는 그런 방법도 있었네요. 난 그건 몰랐네. 전 사실 그래요. 저 거지 같은 그림 금액 가치는 알 바 없어요. 다만 저것 때문에 고통을 받는 어머니 눈앞에서 그것을 치워야 한다는 생각, 아니 내 눈앞에서 여러 정황 때문에 보이지 않아야 할 그림이거든요.”
“이리 오시다 중간에 들른 그 화랑에도 저 그림을 보여 주었나요?”
“네, 입구에 있는 첫 집에서요. 주인이 저 거지 같은 그림을 한참 보더니 약돌 그려주면서 이리로 가라고 일러 주었어요. 그곳에 가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면서요.”
“우리 가게에서 해결을요?”
“네에-. 이리로 가면 틀림없이 살 거라 확실한 언질까지 주었다니까요.”
여인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듯 처음으로 얼굴에다 시원한 웃음까지 얹었다. 비로소 무더위를 이기고 찾아온 보람을 느낀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무거운 임짐을 이고 온 여인네가 그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웃으며 치마꼬리를 틀어쥐고 막 돌아서려는 모습이다.
그러나 남상현은 여인의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입구 화랑에서 그림을 보고 두말없이 이리로 안내한 게 심상치 않았던 탓이다. 그림에 대하여 뭔가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환한 얼굴로 앞자리에 앉은 여인에게 남상현이 그림에 관심을 그제야 드러냈다.
“그렇습니까? 그럼 어떤 그림인지 한 번 보기나 합시다.”
여인은 용수철에 튀기듯 냉큼 일어나 가져온 표구 액자 표장을 서둘러 끌렀다. 포장지를 헤치고 드러난 그림은 풍경화로는 그리 크지 않은 20호짜리 산수화였다. 아침 하늘에 낀 구름 사이로 보이는 산을 몽환적으로 그린 그림인 듯한데 완숙한 경지에 들지 않았으나 경물을 보고 그려낸 시선이 참신하고 구조에 짜임새가 있었다. 수준급을 평가할 그림이다.
그림을 살피던 남상현은 화폭 오른쪽 아랫단에 찍힌 낙성관지落成款識를 보고 깜짝 놀랐다. 화제는 <조운산경도朝雲山景圖>라 붙였고, ‘1974年 爲 張秀瑛 솔뫼 그리다.’ 이라 쌍관한 밑에다 한 방 낙관을 찍었다. 호인 ‘솔뫼’라 양각한 낙관을 찍은 옆에 성명인 ‘徐鵠’이라 음각한 낙관이 찍혔기 때문이다. 서곡이 노년에 사용하는 낙관보다 작고 전서체가 아니라 해서체지만, 서곡 작품과 그의 초기 낙관임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면 입구 화랑 안내에 따라 이곳으로 순리대로 찾아올 곳에 제대로 찾아든 그림이었다. 남상현은 그림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을 만큼 놀랐지만, 그림을 받은 장수영이란 여인 신분이 궁금했고, 여인 어머니가 소장하게 된 사연에도 호기심이 발동했다. 남상현이 여인에게 지나는 소리나 하듯 가볍게 물었다.
“혹 장수영이란 분을 아십니까?”
“네, 어떻게 장수영을?! 우리 어머닌데…….”
“어머니라고요? 여기 이렇게 적혀 있지 않습니까?”
“어마, 거지 같은 그림이 눈에 꼴도 보기 싫다 보니 그곳 낙관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사실 그랬다. 어머니는 여인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 그림에 집착했다. 다만 어머니가 그림에 하도 집착하기에 물어본 적이 있는데, 어머니는 어릴 때 살던 고향 경치를 어떤 사람이 그려 주어서 자주 눈길이 가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오히려 되묻기까지 했다.
여인의 회상을 깨뜨리며 남상현이 친절하게 손끝으로 낙관 부분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보세요. 여기 이렇게 적혀 있잖습니까. 일천구백칠십사 년 장수영을 위하여 솔뫼가 그리다. 이렇게 말입니다.”
“일천구백칠십사 년이라면 내가 태어나기 바로 전해였네. 그런데 솔뫼라는 화가가 있긴 있나요?”
“예, 산수화로 유명한 분인데, 본명이 여기 나타나 있지 않아요? 이름이 서곡이라고…….”
남상현은 그런 대답을 하면서도 서곡의 생존 사실을 입에 올리잖았다. 서곡과 장수영이 어떤 사이인지도 모르는 판국에 딸인 여인에게 밝혀야 할지 숨겨야 할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행 여인은 남상현의 고민 같은 건 관심이 없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런가요? 그분이 유명하다면 이 거지 같은 그림을 사줄 사람이 나타나거나 아니면 여기서 사주시면 문제는 해결되겠네요.”
서곡이 여인 어머니에게 직접 그려준 그림이라면 소중한 그림임이 틀림없을 테지만, 여인은 오직 그림을 어머니 눈앞에서 없애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지금 표정에서는 그림을 팔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찾아들 때와 달리 다른 사람으로 보일 만큼 얼굴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그러나 남상현은 사십 년 전에 그려진 그림은 서곡과 장수영이 어떤 사연이 숨어 있지 않으냐는 짐작에서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앞뒤가 선명하게 간추려지지 않았다.
“저어, 혹시 아버님은 지금 생존해 계시는가요?”
“제 아버지 말씀이세요?”
“예, 예, 아버님 말씀입니다.”
여인은 웬 생뚱맞은 물음이냐는 표정으로 남상현에게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면서 타인 이야기나 하듯 가볍게 대답했다.
“전 유복자예요. 그러니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게 당연하죠. 아버지란 단어조차 오랜만에 듣고 보니 제겐 그 단어 차체가 무척 생소하게 들리네요. 아니 그런데 그걸 왜 갑자기 묻고 그러세요?”
“그냥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기분 나쁘다면 용서하십시오.”
“아니, 아니에요. 전 상관없어요. 그런데 이 거지 같은 그림은 어떻게 하실래요?”
남상현 머릿속은 헝클어진 실꾸리처럼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새로이 벌어진 상황에 뭔가 추리가 가능할 듯한데 명징하게 추려지지 않았다. 좀 더 머릿속을 정리해야 할 성싶었다. 그런 계산 하면서도 보채는 여인에게 당장 답변 주어야 할 정황이었다. 퍼뜩 떠오른 생각이 오래된 그림이라 서곡에게 보여줘 사실을 확인한 뒤 매물로 내놓든 돌려주든 해야 한다고 판단까진 했다.
“저어 손님, 이 그림을 이렇게 합시다. 제가 진위를 판단한 뒤 팔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보관증 하날 써 드릴 테니 이 그림을 제 가게에다 우선 맡기십시오. 며칠 기다시면 제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때 오셔서 그림값을 받아가든 이 그림을 다시 가져가시든 하십시오. 수고스럽지만, 다시 한 번 나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남상현은 우선 그렇게 시간을 벌어놓고 보자는 심산으로 약속을 늘려 잡았다. 성급하게 처리할 성질의 그림은 아니란 생각이 머릿속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파는 쪽으로 해주세요. 파는 게 확실하다면 저도 좋아요. 어머니 생에 붙은 악귀 같은 거니 전 며칠을 더 참아낼 수 있어요. 여기 명함은 제가 챙겼으니 제 전화번호를 적어드리면 되죠? 제 이름은 서이연이라 불러요.”
3
1989년 8월 그믐께쯤.
서이연이 어머니 방에서 <조운산경도>를 본 때는 이미 외조부모가 돌아간 뒤였다. 바로 중학교 2학년 때였고 어머니가 중년을 막 넘어섰을 무렵이다. 외조부모 외동딸인 어머니는 외딸인 서이연을 데리고 외가에서 살았다. 외조부모나 어머니는 서이연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죽었다고 일러주었다. 외갓집에서 어려서부터 자랐기에 철들 무렵까지 아버지에 관한 일은 ‘죽었다.’는 동사 세 글자밖에 아는 게 없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 같은 건 아예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부족함 없이 메워 주었기에 부정을 그립지도 않았다. 간간이 어떤 모습일까 그런 궁금증을 커서 더러 가져보긴 했으나, 어머니 모습을 더 많이 닮았다는 소리만 많이 들어서 그런지 일찍 죽은 사람에게 더는 바랄 수 없는 일이기에 신경조차 쓰잖았다. 어머니는 외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덕으로 아버지 없이도 살림에 쪼들리지 않고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으므로 아버지 존재는 더더욱 미미했다.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보다 십 년 뒤에 돌아가자, 어느 날 어머니는 벽장 속 깊이 묻어둔 그림을 찾아내 묻은 먼지까지 샅샅이 닦고 있는데, 코를 훌쩍거릴 만큼 울음을 참는 모습이 서이연 눈에 띄었다. 그날 그녀 눈에 비친 어머니는 지금껏 보아온 모습과는 판이했다. 담아놓은 대접 물처럼 흔들림 없던 어머니인데, 그림을 쓰다듬으며 들썩이는 어깨가 한없이 가냘프게 보여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절로 바스러질 듯 보였다.
그림을 거울같이 닦은 어머니는 눈에 가장 잘 뜨이는 장소에다 걸어 놓고 액자가 뚫어질 듯 바라보기 일쑤였다. 그때면 서이연이 뭐라 물어도 정신이 온통 그림에 팔려 물음에 제대로 대꾸조차 하지 못할 만큼 한 넋이 빠져 있었다.
그러기 전에도 외할아버지 입에서 재가하라고 재촉하는 소릴 듣긴 했으나, 어머니는 타인 얘기나 듣듯 쓰다 달다 대꾸 한마디조차 없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그런 말 할 때마다 옆구릴 쿡쿡 찌르며 눈을 꿈쩍여 말문을 지레 막았다. 서이연 눈에는 서둘러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사전에 틀어막을 행위로만 보였다.
“애한테 부담을 너무 주지 마세요. 가뜩이나 상처받은 몸인데……. 뭐든 마음에서 쉽사리 털지 못하는 걔 성격을 판연히 잘 아시면서도 자꾸 숨도 못 쉬게 옥죄세요? 걘들 오죽하겠어요.”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모를까? 당장 보기 답답해서 내가 그러네.”
“저도 뜻이 있으면 생각을 바꾸겠지요. 기다려 보세요.”
어머니는 성격이 그래서 그런지 집 안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다. 좀체 속마음까지 잘 드러내잖은 성격이라 맞닥뜨린 일에 과격한 행동을 보인 적 없이 늘 속으로만 꽁꽁 앓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방에 그림을 걸고부터 속으로만 더는 참아낼 수 없던지 서이연 눈을 피하여 그림을 쓰다듬으면서 자주 속울음을 더 깊이 삼키곤 했다.
서이연이 고등학생이던 어느 날, 이제는 물어도 좋을 나이 때가 됐다 싶어 어머니 눈물샘을 자극하는 그림에 증오심이 일어 참았던 말을 기어코 어머니에게 던졌다.
“엄마, 그러지 말고 저 거지 같은 그림을 떼 치우자.”
어머니는 끓는 솥에 손이 닿은 듯 화들짝 놀라며 황망히 제지했다.
“왜?”
“보기 너무 민망해서 그래. 저게 뭔데 그렇게 집착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물어오는 데도 어머니는 대답해줄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간신히 입을 열어 더듬으며 대꾸했다.
“저 그림, 응 저 그림은 말이야. 내가 살았던 곳 경치를 그린 것인데. 그래 맞아. 그곳에서 살던 때 생각이 나서 그래. 맞아 향수란 말만 들어도 괜히 울컥할 때가 있잖아? 내겐 바로 향수 같은 그런 감정일 거야.”
“그런 일로 울어? 에이 엄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생각이 나서 그런 그지?”
“우는 걸 봤니? 물론 아버지 어머니 생각하면 늘 눈물이 나기도 하지.”
“그러니 저 거지 같은 그림을 떼서 벽장에 두든 아니면 버리자. 응? 내가 보기엔 엄마가 저 그림에 너무 집착하여 병이 날까 봐 그래. 거기서 벗어나자면 저 거지 같은 그림을 눈앞에서 없애자?”
“그렇게는 할 수 없다. 너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살아있을 때 걸지 못했던 그림을 이제 건 일도 후회하는 참이다.”
딸의 말에 어머니는 지금껏 태도를 바꿔 목소리는 낮췄으나 완강함이 말속에 숨어 있었다. 억양으로 따져 보면 천길 방벽을 쌓아둔 듯한 완강함이었다. 그러나 서이연 역시 가만히 물러서지만 않았다.
“엄마, 저 거지 같은 그림이 뭔데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내가 버릴 테야.”
서이연은 다시 한 번 고집을 부려봤다. 그러나 그녀 의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그림에 더욱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건 그렇게 할 수 없다. 내 죽은 뒤면 모를까. 아니다. 너에게 넘겨주면 금방 버릴 게 뻔하니 내가 죽어서도 관속에다 넣어갈 것이다.”
“엄마! 지금 제정신이야? 그게 뭐가 그리 소중하다고 그런 말까지 해요?”
“저것이 나와 너를 잡은 끈이기에 놓을 수 없다는 뜻이다.”
4
2016년 8월 5일 11시 반 어름.
남상현은 서이연이 두고 간 <조운산경도>를 보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 그림이 얽힌 사연의 궁금증 때문이다. 그림에다 이름까지 밝혀 건넨 것은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도 사십여 년 앞선 일이니 젊은 시절 어떤 기회로든 서로 만났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장수영이 그처럼 그림에 매달려 사는 처지를 헤아리면, 분명 그럴 만한 사연이 있지 않고서야 그렇게 집착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닿았다. 그런데 한 발 더 내디뎌 추측하면 서로 간 상대방 행방마저 모른 채 산다는 정황까지 추리가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서이연은 어머니 그런 처지를 감감히 모르고 있는 듯했다.
남상현은 생각이 그곳까지 미치자, 짜릿한 자극으로 마음이 설레기보다 자신까지 묘한 상황에 빠졌음을 알았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낭패를 볼 일이라 여겼다. 딸 이름이 서이연이라면 셋 관계가 의심할 여지 없지만, 장수영이 아버지 존재를 딸에게 극명하게 알려주지 않은 근원이 궁금했다. 셋이 반드시 만나야 할 인연일지라도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성급하게 예단할 수만 없었다. 그러나 남상현 머릿속에는 필연이란 말이 떠나지 않고 자리 잡고 있어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속으로만 끙끙대고 있었다.
“소나기 한줄기가 온다더니만 오늘도 영락없게 기상예보는 엉터리야. 하늘이 베풀어야 땅이 넉넉해지지…….”
약속보다 이른 시각에 서곡이 갈르리 원의 문을 밀고 들어서며 더운 날씨를 시비 삼아 방송국 기상예보 오보를 탓했다. 지하철에서 짧은 거리인데도 접첩선을 팔이 아프도록 부치며 온 듯 땀 밴 얼굴이 더위로 벌겋게 익어 있었다. 남상현은 반갑게 두어 발작 나아가 그를 맞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하필 더운 날 잡아 나오시라 해서 말입니다.”
“어이구, 아닐세. 오랜만에 콧구멍에 바람 넣게 돼서 좋은 일이지.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에 내가 할 일이 분명 있지? 그게 뭔가?”
“역시 선생님 눈을 속이기 이렇게 어렵다니까요. 예견은 여전하십니다.”
“우리가 만난 지 벌써 몇 년째인가? 자네 목소리는 전화로도 이미 그런 냄새가 났어.”
둘은 마주 보고 유쾌하게 웃음을 나눴다. 남상현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사실 어제 선생님이 그린 산수화 한 점이 들어왔습니다. 제 눈에는 화풍을 보건 낙관을 보건 선생님 작품이 틀림없습니다. 그림은 잘 알지 못하는 분이 가져왔는데 본인도 입수 경로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남상현은 <조운산경도>를 서곡 앞에다 내놓으며 뒷말은 꾸며 서이연 신분을 일부러 감췄다. 말을 마친 남상현은 서곡 표정을 눈여겨 살펴봤다. 그림을 보는 순간 서곡은 충격을 받은 듯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는 그림을 대각선으로 몇 번이나 찬찬히 훑었다. 그러나 그렇게 대각선으로 타내리는 눈동자가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변화를 곁눈으로 찬찬히 바라보던 남상현이 가볍게 물었다.
“선생님이 사십 년 전에 그린 그림이 틀림은 없으시죠?”
서곡은 그 말에는 대답이 없고 그림에다 시선을 묻은 채 달리 물었다.
“이 그림은 누가 가지고 왔던가?”
“사십 남짓한 여성인데 소장한 연유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혹 이름이나 연락처라도 남기지 않았는가?”
표정에는 변화가 없는데 감정을 지그시 눌러 참느라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남기지 않고 본인이 지나는 길에 들리겠단 얘기하고 보관증만 받아 갔습니다.”
남상현은 서이연 신상을 거짓말로 둘러대야 했다. 그 그림에 숨겨진 비밀을 캐내기 전에는 나중에 꾸중을 듣더라도 지금은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서곡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입맛을 쩍 다셨다.
“이 그림을 사달라고 하든가, 팔아 달라고 하든가?”
“둘 다였습니다.”
“그럴 것 없네. 내가 사 가겠네. 아니 그 여성이 이곳에 들릴 때까지 이곳에다 그냥 두시게. 그리고 그 여성이 오면 나에게 급히 연락하게. 만나보고 나서 이 그림을 내가 처리하도록 하겠네. 꼭 그리해주게, 알겠는가?”
말을 마친 서곡은 분연히 이는 감정을 참아내려는지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물 잔을 들었다. 물 잔 쥔 손은 힘이 빠져 보이는데, 시선은 허공에다 망연히 띄워놓고 있었다.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남상현은 가볍게 대답한 뒤 더나 그림에 관해서 묻지를 않기로 했다. 감정이 심하게 복받쳐 있음이 분명한 사람에게 물음을 연이어 던지는 게 잔인했다. 남상현은 서둘러 서곡을 민어탕 집으로 안내했다.
남상현은 복더위로 땀 목욕할 정도지만 그림으로 충격받았을 서곡에게 청주 한 잔을 공손히 건넸다.
“선생님 한 잔 드십시오. 괜히 나오시라 한 것 같습니다.”
“그 그림말일세.”
청주 잔을 거듭 마시고 난 서곡이 뜨거운 민어탕 김을 불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까 선생님이 젊었을 때 그렸다는 그 그림, 말입니까?”
남상현은 짐짓 딴청 피웠다. 스스로 말문이 터지기를 기다릴 심산이었는데, 서곡이 그 답답함을 풀어주려 했다.
“그 그림이 어떻게 자네 가게까지 왔는지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아.”
“우리 가게에서만 선생님 그림을 취급하니 당연한 일 아닙니까?”
“아닐세. 다른 그림이라면 혹 모를까. 그 그림만은…….”
“참, 그런데 그림의 장수영은 누굽니까?”
남상현은 빈 잔에다 청주를 따르며 가장 궁금한 사실에 접근하려고 했다. 오늘따라 점심 자리인데도 서곡은 잔을 자주 비웠다. 마치 텅텅 비는 속을 청주로 메울 사람으로 보였다.
“장수영? 그 사람은 내가 만난 처음 여자였네. 철없던 시절 오직 그림에 미쳐만 있을 때 한창 감정이 격정적일 때 마주쳤다가 꿈길로 떠나듯 그렇게 헤어졌네. 난 아무런 대책 없이 만나자마자 죄를 짓고 프랑스로 떠났지만, 아직도 잊지 못한 사람이네.”
뜻밖에도 서곡은 쉽게 보따릴 풀었다. 그러나 마치 봄날에 꾼 꿈 이야기하듯 눈꼬리가 아련히 젖어 있었다. 청주 탓인지 장수영 탓인지 나이로 주름진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지금도 생존해 있다면 만나보고 싶습니까?”
일부러 골라내도 쉽게 고르지 못할 짓궂은 물음일 테다. 그러나 서곡은 속마음을 만판 드러냈다. 입꼬리조차 가늘게 떨렸다.
“이 사람아, 나도 정을 가진 인간이네. 그런데 그 그림이 이제 화랑에 나왔다면 소장하던 사람이 필시 세상을 떠나서 그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그 그림을 보는 순간 퍼뜩 머리에 스쳤다네. 순간 나는 무언가 큰 것을 놓친 듯 아뜩했다네. 그리 홀로 세상을 떠났다면……. 휴우-. 그러면 내 지루하게 끌어오던 이 긴 기다림도 이제 끝내는 게니 말일세.”
“긴 기다림이라 했습니까?”
“그러네. 오늘까지 기다렸으니까…….”
말을 마친 서곡은 쓸쓸한 표정으로 지난 일을 남상현에게 옮기기 시작했다.
5
1974년 8월 초순을 막 지날 때.
서곡은 인제군 기린면 아침가리 계곡을 찾았다. 아침 안갯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산세를 화폭에 담기 위해서다. 안갯속에서 숨바꼭질하는 산세는 처녀림처럼 몽환적 분위기로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시선을 압도했다. 서곡은 해마다 여름이면 그곳에 찾아가 한 달 남짓 머무르며 작업했다. 그런데 머물던 집에 도착한 서곡은 당황했다. 국전에 응모할 작품을 그릴 작심한 다음 일상 머물던 곳이라 무턱대고 찾았는데 낯선 사람이 그를 맞았다. 춘천에서 온 부부가 딸아이와 같이 머물고 있었다. 며칠 지나서야 안 일이지만, 병약한 딸 때문에 본채는 춘천에 둔 채 이곳으로 요양 삼아 들어 왔다는 걸 알았다.
서곡은 난감했다. 인가들이 겅성드뭇한 첩첩 산골이라 달리 머물 곳을 쉽사리 찾을 성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되돌아갈 순 없었다. 갖은소릴 하며 사정사정한 끝에야 간신히 허락 얻어 한 달간 방 하날 빌렸다. 그들은 세 사람이었으나 물밑 가재 구멍처럼 말소리도 크게 나지 않을 만큼 조용히 사는 가족이었다. 그 틈바구니에 끼어든 서곡도 그런 분위기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주변에 인적이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런 무관심한 분위기는 그림에 몰입하기에는 어찌 보면 바라는 바기도 했다.
중년 부부는 딸에게 어린아이를 부르듯 ‘수영아! 수영아.’ 호칭하기에 서곡은 딸 이름을 일찍 알 수 있었다. 장수영은 아침나절에는 흔들그네의자에 앉아 안개가 몰려다니는 계곡에다 한 넋을 놓았다. 그럴 때 뒷모습은 스물여덟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병약해 보이지만, 정작 마주칠 때 하도 적적함에 말을 걸 법도 한데도 눈인사로만 일별했다. 그러나 밝은 표정에선 이십 중반답게 성숙미가 드러났으며 얼굴은 안개에 물든 듯 푸른 숲 배경으로 하얗게 보였다.
장수영은 서곡에게 대체로 무심한 듯했다. 그저 서곡이 그리는 그림을 멀찍이서 바라보곤 했지만 그려지는 그림에는 이다기다 한마디 말도 없었다. 그녀는 서곡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화폭 구도에서 벗어나려고 몸가짐을 조심하는 양 싶었다. 캔버스를 들고 나서는 서곡 시선에 종종 멈춰서는 흔들그네의자 움직임으로도 그런 배려를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곡은 흔들그네의자 흔들림이 부담스러웠다. 신경을 쓰다 보니 그것이 그림 구도 안으로 들어오고, 그 흔들그네의자에는 그녀가 앉은 모습이, 또한 안개가 짙게 몰려올 땐 마치 그것을 끌어들인다는 환영을 몰아왔다.
산속에서 작은 뭉치로 모여 큰 무리를 이룬 계곡 아침 안개는 팔월 푸르게 단장한 산 정기를 서서히 개먹다가 느리게 토해냈다. 그때마다 산은 안개에 파묻혀 몽롱하게 무너져내렸다. 맞바람이라도 불어오면 계곡에서 건너온 안개가 엷은 형체로 전신에다 습한 바람을 끼얹었다. 그때면 그림을 그리는 서곡의 목마름을 풀어주듯 습기가 목 너머로 넘어가느라 목젖이 더 젖었다.
서곡은 그렇게 보내던 며칠 뒤에야 눈으로 들어와 잡히는 구도가 예전과 다름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산과 안개의 뒤섞임이었으나, 지금은 그 뒤섞임에 장수영의 흔들그네의자 움직임이 끼어있었다. 산과 안개를 그리면 어느 한 공간에다 흔들그네의자를 그려 넣어야 물상 배치가 완결될 성싶은 구조로 바꿔 있었다. 그런 물상의 구도는 늘 새로운 변화를 주었다. 아침 하늘에 낀 구름 사이로 산을 바라보면 어제와 또 달리 모든 게 새롭게 배치된 듯했다. 흐르는 안개로 물상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그런 새로움 때문인지 어제 혼신으로 그려놓은 캔버스 그림들이 오늘에서는 먼 데 것을 그린 듯 못마땅함이 여기저기 보여 새삼 그리고자 하는 욕구마저 솟음쳤다. 그리고 나날이 달라지는 걸 새롭게 담고자 하니 늘 솜씨가 부족했다. 정작 안개에서 벗어나는 산을 그려야 하는데, 모든 게 안개에 갇힌 듯했다. 장수영이 앉았던 흔들그네의자의 잦아드는 흔들림도 안개와 같이 그림 구도를 흔들었다. 서곡은 안개와 흔들그네의자와 장수영을 분리하고 싶었다. 그것들이 하나 의미를 가지듯 너무 밀착되어 캔버스 위로 유령처럼 걸어 다녔다.
안절부절못하고 애씀에도 의도대로 작업은 진전이 없었다. 오히려 본디 풍경에서 벗어나 몽환적이 색조가 점점 강하게 드러나면서 안개가 원경을 밀어내고 모호함만 길러냈다. 때로는 안개가 모든 걸 집어삼키기도 했다. 그것에 집착할수록 그림은 점점 마음에서 멀어지고 그 자리에 장수영이 앉은 흔들그네의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이 마음을 통째로 흔들었다.
그림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 날은 밤잠조차 잃었다. 그저 분하고 뭔가에 쫓기는 기분만 들었다. 그런 혼망함을 떨치고자 애써 그려낸 그림이 <조운산경도>였다. 결과를 보면 그녀 시선을 잡아들이려고 의도적인 속셈으로 그린 그림이 되고 말았지만 그림에는 흔들그네의자는 없었다. 서곡은 그림의 안갯속에 그것을 묻었다. 그리고 장수영에게 주었다. 그녀가 간직할 그림이라 생각했다. 그림을 건네받은 장수영은 놀라거나 고맙다는 인사 대신 짧게 말했다.
“애써 그린 걸 제게 준다고요?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기념으로 남기고 싶어서요.”
“안 그래도 되는데……. 이거 저 건너편 경치가 아니에요? 이 그림이 아니어도 이곳에서는 늘 새롭게 변화하는 안개를 볼 수 있는데, 이건 순간에 갇힌 안개가 아닌가…….”
서곡은 머쓱해서 무안을 당한 아이처럼 머리를 오른쪽으로 기울러 뒤통수를 긁었다. 그러다 장수영 눈빛을 마주하지 못한 채 그림만 남겨두고 방에서 서둘러 물러 나와야 했다. 앞에서 힐난을 받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런데 무시가 아니라 모욕당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서곡은 그날 밤은 끝끝내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꼬박 밝혔다.
이튿날부터 닷새 동안 소나기가 쏟아졌다.
안개는 소나기에 맞아 달아나고 빗속에 산들이 명징하게 우뚝 서 보였다. 소나기 내리는 동안 서곡은 나흘이나 신열로 앓았다. 신열이 높을 땐 때때로 정신을 잃기도 했다. 헛소리를 지른 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신이 들 때마다 차탁 위에 놓인 미음이나 물병 위치가 달라 보였고, 젖은 채 접힌 물수건의 놓인 자리가 이마에서 차탁 위로 오갔음을 짐작하게 했다. 그곳에 사람은 없는 채 장수영의 걱정스러운 시선만 흐릿하게 오락가락했다. 비로소 홀로임을 일깨워준 그녀 마음 씀씀이가 말로 할 수 없는 고마움으로 여겨져 귀로 향하여 눈물방울을 두어 번 기어 내리게 했다.
병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그림은 그려지지 않은 채 돌아갈 날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서곡은 초조함을 느꼈다. 내세울 만한 그림은 한 장도 없었던 탓이다. 자고 일어나 계곡을 바라보면 안개는 천연덕스럽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둘러 캔버스를 들고나서 구도에 골몰하다 눈길을 들면 아침 햇살이 안개를 가리가리 해체해 눈앞에서 치웠다.
국전에 이것이다, 할 작품은 구도조차 잡히지 않은 채였다. 산수화를 그리자면 그려내고자 하는 주위 것들이 한 눈으로 들어와 다시 제가끔 갖은 특색을 골라 재해석해 나타내야 하는데, 잡다한 생각만 찢긴 거미줄처럼 머릿속에 얽혀 있었다. 그럴수록 그림을 그리는 눈앞에 그녀가 말없이 서 있는 게 환각으로 보였다. 마치 몽롱한 정신으로 우리에 갇힌 듯 압박감을 느꼈다. 빨리 이곳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답답함을 느꼈다. 서곡은 끝내 올해 국전 출품은 포기한다는 마음을 굳히자 왠지 모를 억울함에 분노마저 치밀었다. 올해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국전에 뽑히고 싶었는데 또 한 해를 기다려야 한다는 게 미칠 지경이었다.
내일이면 떠나고자 짐을 챙기는 서곡에게 장수영이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가시게요? 내년에 다시 오실 수 있어요?”
“……. 예?!”
“제대로 완성한 그림을 그려야 하잖아요. 제가 아는데…….”
“…….”
“좋아요. 그렇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병치레해서 미안해요. 정신을 잃어 그땐 몰랐군요.”
“아픈 사람 앞에서 아무도 할 수 없는 제가 바보 같아 오히려 한심했어요.”
“도와주어 이렇게 나았잖아요.”
“낯선 사람에게 처음으로 마음 아파했어요.”
서곡은 그녀의 소리 없는 웃음을 처음 보았다. 반가움도 슬픔도 고루 섞인 반쪽짜리가 합쳐진 웃음이었다. 그림 그리는 것을 막아서던 여자가 아니고 무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걸 말없이 지켜본 사람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몸살을 앓은 뒤 장수영은 너무 가까이 와 있었다. 그런데 서곡은 자신도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울컥 솟구쳤다.
밤이 깊어 자리에 누웠으나 가슴이 답답해 잠은 오지 않았다.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감에 분명한 것은 아침가리 계곡 아침 환경에 완벽하게 패배했으며 원인이 안개를 매개로 하여 산 정기를 빨아들인 그녀의 몽환적인 모습 때문이란 엉뚱한 생각까지 했다. 분명 자신은 허깨비만 잡고 있었다. 비참하다는 자괴감을 느끼면서 장수영의 말들이 낱낱이 떠올랐다. 어떤 근거로 한 셈법인지 승자는 그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넘어야 할 하나의 벽이었다. 그 벽에 닿는 모든 게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
서곡은 밖으로 나왔다. 그녀 방에는 흐릿하게 불빛이 보였으나 조용했다. 소란하지 않은 그것에 또한 반감이 일었다. 이대로 빈손으로 떠날 수 없었다. 마침 밤안개가 일어 먼 산 울음처럼 밀려왔다. 안개를 삼킬 때마다 갈증이 났다. 허한 마음속에서 울음이 치달았다. 장수영의 몽환적인 실체를 품고 싶었다. 서곡은 그녀 방으로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저 여기 있어요.”
흔들그네의자 쪽에서 장수영이 성큼성큼 다가들었다. 기류가 빠르게 흐르는 아침이면 안개는 나무와 산 그리고 계곡까지 폭력적으로 잠식하며 몽환을 취했다. 그런 안개가 지금 앞에 있었고 그 끝자락에 장수영이 멈춰 서 있었다. 자운영 무성한 풀밭에 미끄러졌을 뿐인데 옷만 아니라 손톱 밑 살까지 퍼렇게 풀물이 들던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손톱 밑이 아니라 마음이 그렇게 퍼렇게 물이 드는 듯싶었다. 안개가 목으로 넘어왔다. 습기일 텐데 성마름이 일었다. 목마른 사람에게로 장수영이 파고들었다. 그녀도 서곡도 사람 감정은 일순에 기운다는 말을 증명하듯 둘 사이 가로막이 젖히지 않아도 절로 걷혔다. 장수영이 들뜬 목소리로 거칠게 제안했다.
“암말 말아요.”
안개에 쌓인 듯했고 둘은 몽환에 파묻혔다. 서곡의 갈망 끝이 장수영 기다림 초입에 닿았다. 젊음이 맞닿아 솟음쳐 오른 뜨거움을 넘어 나른함에 안착하려고 일었던 격정이 밥물처럼 잦아들었다. 사랑은 확인했으나 이별이 내일로 와 있었다.
6
1976년 8월 중순 어느 날.
프랑스에 그림 공부하러 갔다가 이태를 보낸 뒤 귀국한 서곡은 지체하잖고 인제군 기린면 아침가리 계곡으로 찾아갔다. 아침 안개에서 벗어나는 계곡 산수를 그리려 찾아간 게 아니라 자기 그림 앞에 가로막아 서던 장수영을 만나려 했다. 그러나 아침가리 계곡은 작심하고 찾아온 서곡은 황당함만 안았다. 이번에도 거주자가 바뀌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장수영 가족 행방을 묻는 그에게 주인 남자가 들려준 대답이었다.
“임대하여 살던 사람이어서 나랑 계약은 원주인과 했기에 여긴 주소조차 남지 않네요. 더군다나 드문드문 흩어져 살다 보니 이웃 간에 왕래도 없어 이곳에서 떠나면 소식이 끊어지는 곳이라 알 길이 감감하네요. 그러니…….”
서곡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대로 돌아서야 했다. 모든 것들이 선연하게 떠올라 시선을 옥죄여서 잠시라도 머물 수가 없었다. 이젠 찾아갈 곳이 없으니 올 소식만 기다려야 하지만, 남긴 그녀의 주소는 없었다. 이태 세월이 이곳 흔적마저 싸안고 현실에서 훌쩍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장수영을 찾아 춘천까지 훑었다. 의암호 너른 수면처럼 그저 막막했다. 춘천에서 안고 돌아온 막막함으로 다섯 해를 보내니 눈앞에 1981년이 와 있었다. 그동안 국전에도 뽑혔고 대학 강단에도 섰지만, 미련의 끈은 한 번도 놓지 않고 장수영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행동에서나 성격에서나 자루에 넣어 둔 모난 돌처럼 이리저리 툭툭 튀어나오는 여제자와 계약서 한 장 없이 다섯 해를 살았다. 어느 날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난 여제자를 서곡은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았다. 휑하니 빈방 안을 훑던 멀건 눈으로 달력을 쳐다보니 1986년 섣달그믐인데 사진 속에는 녹지 않는 눈만 가득했다. 제자는 애초 곁에 오래 머물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매사에 쉽게 뒤집히고 엎어지는 성격이라 서곡의 하찮은 언행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서곡보다 훨씬 더 예민한 감각을 가진 여자인데 참을성마저 모자랐다. 그 여자가 가장 자주 그에게 한 말에는 늘 날카롭게 씹히는 뼈가 숨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옆에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멍한 채 골몰하세요? 그럴 때면 선생님은 아주 딴사람으로 보여요.”
그런 말 한마디 던짐으로써 끝나는 게 아니라 근원을 파려고 잔머리 굴리다가 여자로서 상상으로 잡히는 예감으로 서슴없이 찔러 댔다.
“저를 만난 나이까지 분명 여자가 있었죠? 그도 한둘 아니죠? 우리 허심탄회하게 얘기 좀 해요. 전 모두 이해할 수 있어요. 어디 한번 터놓고 얘기해 보세요.”
처음에는 그런 말에 서곡은 적잖이 당황했지만, 물어 오는 저의를 분명 파악한 만큼 에둘러 말 마감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와 살림이라고 살긴 당신이 처음이오. 괜한 상상은 그만둬요. 그동안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 그만둘 때가 아니오.”
7
2016년 8월 6일 늦은 아침.
서이연이 마당 가에서 흐드러지게 핀 봉선화 꽃잎을 딸 때였다. 어머니 방에서 거울이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그녀는 부리나케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조운산경도> 자리에 대신 걸어 둔 그림 액자 유리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방바닥에 흐트러져 있었다. 앉은 채 손에 피를 흘리는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는데, 곁에는 액자 유리를 박살 낸 검은색 원형 알람 탁상시계가 모로 누운 채 째깍째깍 하릴없이 시각을 재고 있었다. 유리 파열음이 사라진 뒤 적막감을 몰아내는 탁상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서이연 귀를 자극했다.
“엄마?!”
서이연은 주저앉은 어머니 앞에 흩어진 유리조각을 치울 생각도 잊은 듯 달려들 기세로 외쳤다. 외치고 나서야 심장이 심하게 뛰는 걸 의식했다. 어머니는 돌부처처럼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서이연은 울컥 치닫는 분노를 참지 못한 채 다시 소릴 냅다 질렀다.
“엄마?! 도대체 왜, 왜 그랬어. 왜?”
방안이 쩡쩡 울리는 소리에도 어머니는 대답마저 잃은 채 눈물만 흘렸다. 그런 모습이 서이연 속을 더욱 뒤집어엎었다. 그녀는 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쏴대기 시작했다.
“엄마, 말 좀 해 봐! 도대체 왜 그랬느냐고? 어쩌려고 이랬어?”
“먼저 그림을 다시 가져다 걸어라.”
어머니 목소리는 뜻밖에도 감정을 체에 걸러내듯 차분했다. 미리 짐작하고 바꾼 액자 테와 문양이 흡사한 것으로 했는데도 어머니 손끝 감각을 속이지는 못했다. 그것마저 선별해 내는 어머니 손끝 감각이 그저 야속했다.
“엄마, 그 거지 같은 그림이 뭐가 소중해서 이 난리를 피우세요?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요. 엄마 이제 제발 그 거지 같은 그림을 버리고 웃으며 살자. 응 내가 이렇게 빌게. 엄마아-.”
서이연은 북받치는 서러움에 울음을 뱉으며 어머니 앞에 떨어진 유리조각을 슬리퍼로 밀어내고 두 무릎을 꿇고 빌었다. 날 선 도끼라도 있다면 그림과 어머니 관계를 끊어내고 싶었다. 사십 년이나 어머니 장수영을 잡고 있던 그림이다. 어머니는 두 손을 뻗어 서이연 머리를 잡아 가슴팍에다 끌어당겨 거칠게 안으며 속마음에 맺힌 말을 비로소 토해냈다.
“이것아, 그 그림은 네 아버지 그림이다.”
8
2016년 8월 7일 정오 못미처.
몽환 냄새가 짙게 풍기는 산수화 <조운산경도> 때문에 진퇴양난에 빠져 고민하던 남상현에게로 일찍 전화가 걸려왔다.
“며칠 전에 그림을 맡긴 서이연입니다.”
남상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예상보다 일찍 걸려온 전화였다. 목소리가 차분한 걸 보면 독촉하려는 듯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림은…….”
“그게 아니라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누구라고 했죠? 그땐 들었는데 그만 잊었네요.”
남상현은 다시 가슴이 뛰었다. 우선 <조운산경도> 호칭에서 ‘거지 같은’ 투가 빠져 있었다. 자세히 목소리 음색을 새기니 격한 감정이 사라지고 잔잔하게 애성이 묻어났다. 남상현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뫼 서곡 선생님입니다.”
“그분 신분을 잘 아시나요?”
“우리 화랑 단골이라 어느 정도까지요.”
“생존해 계시나요?”
서이연은 수사관이나 사건 담당 기자처럼 짧게 짧게 끊어 물어왔다. 긴말은 행간에서 감정이 묻어나서 속내가 드러나는데 짧은 말은 메마르게 감정만 또박또박 전해질뿐이다.
“예, 올해 일흔둘이지만 정정하십니다.”
“물론 가족들은 있겠죠?”
남상현은 그제야 긴장을 놓았다. 물어오는 말을 모으면 서이연은 이미 서곡과 자신의 관계를 인지한 듯했다. 전에 전혀 무심한 부분에 관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일이 그렇게 전개되는 게 남상현 처지에서는 홀가분했다. 그들 해후는 이제 결심에 달린 그들 몫이었던 탓이다. 자기로서는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할 뿐 상황 변화는 그들 처신에 맡겨져 있었다.
“정식 결혼하지 않은 채 오래도록 홀로 지내시는 거로 압니다.”
“아,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참 그 그림 있죠?”
“예?”
“아직 그림은 팔리지는 않았죠?”
“팔렸으면 제가 먼저 전활 드렸겠지요.”
“우휴-. 정말 다행이다. 그 그림을 절대 팔지 마세요. 제가 내일 가지러 갈 거예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서이연은 제 말만 부지런히 마치고 전활 끊었다. 남상현은 긴 고문 끝에 놓여난 기분이듯 홀가분한 해방감을 느꼈다. 또박또박 대답하다 보니 얽혀 고민한 일이 스스로 풀렸다. 비로소 남상현은 서곡에게 전할 말이 분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서곡에게 전화를 넣었다. 서곡은 전화기 앞에서 여태 기다린 듯 냉큼 전활 받았다.
“선생님, 저 상현입니다. 내일 그림 맡긴 분이 가게로 온답니다.”
“그런가? 알았네. 나도 일찍 나감세.”
남상현이 말하기에 앞서 전화 끊기는 소리가 먼저 그의 귀에 들리는데 여운은 산사 종소리처럼 길게 남았다. 남상현은 이제야 단단히 갇힌 그물눈에서 빠져나온 느낌이 들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