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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올림픽 영웅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1900년 올림픽을 시작으로 1904년,중간 올림픽인 1906년,그리고 I908년 둥 4개 대회에서 10개의 금메달과 3개의 세계 신기록을 수립한 미국의 레이 어리, 그는 지금은 폐지된 스탠딩 점프(제자리에 서서 하는 높이 뛰기와 멀리 뛰기, 3단 뛰기)
의 일인자였다. 1873년 10월 18일 미국 인디애나주 라파예트에서 태어난 어리는 어릴 때 무척 병약했다. 더구나 소아마비까지 앓아 다리 하나가 부실했다. 휠체어에 의지해 평생을 살도록. 할 수 없어 부모는 그에게 건강 미용 체조를 시켰다. 앉아서만 지낼 수 없다는 절박한 어리의 노력도 처절했다. 조금씩 몸이 회복되어 갔다. 어느 정도 근육이 붙고 힘도 생기자 그는 매일 점프 연습을 했다. 장애자도 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198cm의 당당한 청년으로 성장한 어리는 1890년 퍼듀 대학에 입학, 1897년 석사 학위를 받았는데 전공은 기계 공학이었다. 대학에서도 그는 계속 점프를 했다. 퍼듀 대학의 육상부 주장으로 활약했고 미식 축구 선수로도 뛰었다. 부상으로 미식 축구는 포기하고 육상에만 전념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1년간 어리는 시카고 육상 협회가 주최하는 각종 대회에 참가해 실력을 인정 받았다. 그리고는 뉴욕으로 옮겨 발전기 회사의 기술자로 일했다. 뉴욕에서도 그는 열심히 육상을 했다. 마침내 1900년, 파리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출전했다. 7월 16일, 이날 어리는 3개의 금메달을 휩쓸었다. 선채로 멀리 뛰기와 3단 뛰기에서 우승한데 이어 높이 뛰기에서는 165cm, 종전보다 10cm나 높은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또 목에 걸었다. 1912년 헬싱키 올림픽에도 그는 출전하려고 했다. 38살 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체력이 떨어졌으니 이제 은퇴하라는 올림픽 동료인 동독의 마틴 세리단의 충고를 듣고 선수 생활을 끝냈다. 19l2년 대회 이후로 스탠딩 점프는 폐지되었다. 1937년 9월27일, 올림픽의 영웅 레이 어리는 64살에 세상을 떠났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1948년 올림픽 사격 속사 권총에서 연속 금메달을 딴 헝가리의 카로리 타카스는 원래가 오른 손의 명 사수였다. 1910년 1월 21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한 그는 1929 년부터 38년까지 헝가리 사격 국가 대표로 각종 대회에 출전했다. 그런 그는 1938년 군 복무 중 수류탄 폭발 사고로 그만 오른 손을 잃고 말았다. 사격 선수에게 손은 생명과 같은 것으로 육상 선수가 다리를, 농구 선수가 팔을 상실한 것과 같은 일이었다. 타키스는 너무나 큰 충격에 어찌 할 줄 몰랐다. 하지만 그는 냉정했고 이성적이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대신할 수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아직 왼 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타카스는 다시 권총을 잡았다. 오른 손이 했는데 왼 순이 못할 이유가 없다고, 의지와 의욕의 문제라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타카스였다. 그리고는 훈련에 열중했다. 새로 시작하는 사격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왼 손이요, 한 팔이 없어 몸의 균형 잡기도 만만치가 않았다. 정확한 자세로 오른 손만큼 재빠르게 왼 손을 놀리게 되기 까지 l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1939년 루선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것이다. 그간 그의 노력이 얼마나 컸나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요, 인간의 능력이 무한함을 증명한 것이기도 했다. 타카스는 그러나 만족하지 않았다. 목표를 올림픽에 두고 훈련을 계속했다. 10년의 세월이 그렇게 지났다. 그리고 맞은 1948년 런던 올림픽, 타카스는 헝가리 대표로 속사 권총에 외팔로 참가했다. 그 동안 쌓은 실력이 헛되지 않아 금메달이었다. 52년 헬싱키 올림픽, 타카스의 나이 42살, 그는 또 속사 권총에서 우승했다. 불구가 된 것도 서러운 일인데 권총을 잡아야 하는 오른 손을 잘렸으니 사격 선수로서는 끝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타카스는 좌절하지 않고 왼 손으로 세계를 제패한 것이다. 타카스야 말로 진정한 올림픽 영웅이 아닌가.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레슬링 그레코 로망형 웰터급에서 우승한 헝가리의 미크로스 질바시도 타카스와 비슷한 경력의 올림픽 영웅이다. 1946년 경찰관으로 근무할 때 동료의 오발로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결과는 다리 마비라는 레슬링 선수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걷지도 못했고 혼자 힘으로 설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강했다. 거기서 주저 앉지 않았다. 매일 다리에 커다란 돌을 매달고 각력 회복을 위한 훈련을 했다. 차츰 마비 중세가 없어졌고 다리에 힘이 붙어 갔다. 상체의 능력이 더욱 커졌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그리고 52년, 마침내 금메달을 손에 쥐게 되었다.
+ 절름발이 흑인소녀, 윌마 루돌프 1960년 로마 올림픽 100, 00m와 400m계주에서 우승, 올림픽 여자 최초로 3관 왕이 된 미국의 윌마 루돌프는 11 살 때까지 목발을 짚고 다닌 장애자였다. 1940년 6월 23 일,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빌에서 태어난 윌마는 체중이 겨우 2kg의 허약한 아이였다. 4살 때 성홍열과 소어마비에 폐렴까지 앓았다. 흑인 가정의 22명 자녀 중 20번째인 윌마는 변변히 치료도 받지 못했다. 운 좋게도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그 후유증으로 6살에 왼쪽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침대에서만 지내게 된 윌마의 건강 회복을 위해 부모와 형제들은 2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의 다리를 마사지 했다. 가족들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8살 때 윌마는 목발을 짚고서 였지만 걸을 수가 있었다. 목발에 의지해 초등학교에 다닌 그는 남들처럼 뛰어 놀 수 없어 바구니에 농구 공을 던져 넣는 놀이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그러는 한편 남몰래 걷는 연습을 했다. 11 살 때 마침내 목발 없이도 설 수 있게 되었고 중학교에 들어가서 농구부에 입단했다.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윌마는 배 이상의 연습을 했고 곧 우수한 농구 선수가 되었다. 윌마의 특출한 운동 소질을 인정한 학교에서는 그를 위해 육상부를 창단했다. 정상인을 능가하는 선수를 목표로 윌마는 달리기에 전념했다. 그의 집념은 끈질겼다. 각종 육상 단거리 부문을 석권하게 되었다. 그리고 16살 때인 56년 미국 육상 대표로 멜보른 올림픽에 출전, 400 m 계주에서 동메달을 땄다. 올림픽에서 돌아 온 윌마는 특기생으로 테네시 주립 대학에 입학, 집안 최초의 대학생이 되었다. 계속 달리기에 집중한 그는 60년 로마 올림픽, 여자 100m에서 종전 기록보다 0.3초나 빠른 1l 초,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바람 탓에 공인 받지 못했으나 놀라운 기록이었다. 200m에서도 22.9 초로 이미 세계 기록을 작성한 그는 또 금메달을 차지했다. 400m계주 마지막 주자로 뛴 윌마는 뒤늦게 바톤을 넘겨 받았으나 발군의 스피드로 선두를 제치고 1 위로 골인, 금메달을 추가했다. 44.4초,그 또한 세계 신기록이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남자 높이 뛰기에서 2.04m,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한 미국의 월터 데이비스, 그도 8살 때 소아마비로 5년간이나 휠체어 신세를 진 장애자로 농구에서 육상으로 전향해 성공한 선수였다. 60년 로마 올림픽 10종 경기의 우승 미국의 레이퍼 존슨은 미국 텍사스주 힐스보로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콘베어 벨트에 다리가 말려 절단 수술을 받아야 할만큼 심한 부상을 입었다. 겨우 절단은 모면했지만 23바늘이나 꿰매는 대 수술 끝에 목발을 짚고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 올림픽,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10종 경기에 출전해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그는 은퇴 후 배우, TV 스포츠 캐스터로 활약했고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역시 로마 올림픽 500m 에서 금메달을 딴 뉴질랜드의 머레이 할버그도 장애자였다.17세 때 럭비를 하다가 왼 쪽 어깨를 크게 다쳤고 응혈 합병증으로 생명이 위독했다. 가까스로 위기는 넘겼으나 평생 반신불수로 지내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할버그는 1년 후, 왼쪽 어깨와 팔을 흔들며 달리기 연습을 했다. 6년간의 피나는 노력이 헛되지 않아 1958년 그는 영연방 대회 3마일 경주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60년 로마 올림픽에 출전, 500m에서 끝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렇듯 올림픽 대회에는 특히 육상 경기에 소아마비 등으로 불구자가 된 사람들이 불굴의 의지로 세계 정상에 우뚝 서 우리를 감동시킨 경우가 종종 있다.
+ 목뼈를 다치고도 출전해 우승.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처럼 고귀한 경험은 없다. 어떤 직업, 아무리 막강한 권력, 떼 돈도 올림픽의 경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네 번의 올림픽 투원반에서 네 번 다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딴 집념의 사나이 알 오터가 한 말이다. 1936년 미국 뉴욕주 아스토리아 출신의 오터는 고등학생 때인 1954년에 고교 신기록을 세워 캔서스 대학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가 처음으로 올림픽에 나간 것은 대학 2학년 때인 1956년 멜버른 대회로 그 이후 60년, 64년, 68년 멕시코까지 16년간 4회 연속 참가해 모두 우승했다. 그런 그는 불행하게도 62년 국내 경기 중 목뼈를 다쳐 1년 넘게 목에 깁스를 하고 지냈다. 그런데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64년 도꾜 올림픽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서야 겨우 깁스를 풀었으나 목에 부목을 대고 부앧로 감아 마치 미라 같은 모습으로 경기장에 섰다. 그래도 고통이 가시지 않아 마취제인 암모니아 캡슐을 사용했다.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세번째 시기, 오터는 부목도 붕대도 풀어버렸다. 필사적인 몸부림이었고 놀라운 투혼이었다. 역시 금메달에 세계 기록이었다. 경기 후 오터는 '누군가가 내 갈비뼈를 뽑아 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고 실토했다.
+ 스포츠 맨쉽의 귀감 1936년 LA 올림픽 육상 5000m 결승 경기, 핀랜드의 라우리 라티넨과 미국의 랄프 힐이 접전을 벌였다. 결승선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라티넨이 한 발 앞서 달렸고 그 뒤를 힐이 바짝 추격했다. 힐이 사력을 다 해 라티넨을 앞서려고 바깥 쪽으로 빠져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라티넨이 힐의 앞을 가로 막는 것이었다. 멈칫하던 힐은 다시 방향을 고쳐 안 쪽으로 추월하려 했다. 그러자 라티넨이 또 그 쪽으로 몸을 트는 것이었다. 주춤할 수 밖에 없는 힐이었고 그렇게 라티넨과 힐은 거의 동시에 골인했다. 사진 판독 결과 라티넨의 우승으로 결정이 났다. 그러나 관중석에서 야유의 함성이 이는 것이었다. 달리기 경주에서 앞지르려는 선수의 길을 막으면 실격으로 처리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관중들이 라티넨의 우승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힘이 달려 비틀거렸을 뿐인 라티넨은 관중들이 왜 소란을 피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필름을 보고서야 당시의 상황을 알게 된 라티넨은 얼굴이 붉어졌다. 분명한 진로 방해였던 것이다. 라티넨은 그 즉시 힐에게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그러나 힐은 오히려 민망해 하며 라티넨의 우승을 축하해 주는 것이었다. 시상대에 올라서 였다. 라티넨은 힐을 한사코 맨 윗자리로 미는 것이었다. 우승자는 자기가 아니라 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힐은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사양하는 것이엇다. 둘의 실랑이를 관중석에서도 다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스포츠 정신에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 두 선수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것이었다. 라티넨과 힐, 그들도 올림픽 영웅임에 틀림없다.
경기 도중 머리를 크게 다치고도 분전,금메달을 차지한 미국의 다이빙 천재 그레그 루가니스는 88서울 올림픽에서 가장 영웅적인 선수로 꼽혔다.1982년부터 87년까지 국제 대회에서 19연승을 기록했고 84년 LA 대회에서 이미 스프링 보드,프랫트폼 다이빙 두 종목을 석권한바 있는 그는 서울 올림픽에서도 당연히 우승 후보 1순위였다. 그런데 그는 스프링보드 다이빙 예선전에서 도약대에 머리를 부딛쳐 8바늘이나 꿰매는 부상을 입었다. 웬만한 선수라면 경기를 포기 했을 것인데 루가니스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계속 출전,결국 금메달을 따냈다. 그는 이어 프랫트폼 다이빙에서도 정상에 올라 올림픽 사상 최초의 다이빙 두 종목 2회 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영웅적인 투혼이요,정신력의 승리였다.
개인 혼영 400m 세계 기록 보유자로 64년 도꾜 올림픽에서도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미국의 리차드 로스는 경기 이틀 전 심한 복통으로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었다.맹장염으로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일본 의사는 진단했지만 캘리포니아 출신의 17살의 로스는 "나는 금메달을 따기 위해 이곳에 온 곳이지 수술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다"라며 진통제마저 거부, 얼음 찜질로 통증을 달래며 기어코 경기에 참가했다.그렇게 로스는 예선을 거쳐 결승에 진출,종전의 자기가 세운 기록을 무려 3초나 단축한 4분45.4초,신기록으로 우승했다. 금메달을 목에 건 후에야 맹장 수술을 받은 로스였다.
36년 베르린 올림픽 권투 라이트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헝가리의 임레 하란기 선수도 부상을 무릅쓰고 링에 오른 고집 불통의 사나이였다. 올림픽이 있기 몇 달전에 열린 국내 대회에서 하란기는 코를 심하게 다쳤다.의사는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올림픽 이후로 미루었다. 그리고는 맹 훈련 끝에 마침내 올림픽 시상대 맨 윗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런 후에야 코 수술을 받은 하란기였다. 금메달이 값진 것이기는 해도 건강만큼이야 하랴만 선수들에게 그런 의지,의욕,투지,정신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1908년 런던 올리픽 수영 남자 800m 계영 결승 경기였다.마지막 선수가 뛰어들 때 선두 헝가리는 2위 영국보다 상당히 앞서 있었다. 결승점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그런데 헝가리의 졸탄 할메이가 갑자기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이었다.1906년 아테네에서 열렸던 올림픽 10주년 기념 대회에서 역시 최종 영자로 금메달을 따 낸 바 있는 할메이였지만 다리에 쥐가 나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몸은 말을 듣지 않고 의식은 가물거리고, 그래도 초인적인 의지로 제 코스를 찾아 버둥대는 할메이였다. 그러나 근육 경련은 좀처럼 풀리지가 않았다.그렇게 세 번씩이나 물속에서 텀벙거리면서도 기권하지 않고 사력을 다 한 할메이는 2위로 골인했다. 그리고는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급히 임원들이 끌어 올려 응급 처치를 했지만 몇 시간이 지나서야 그는 겨우 눈을 떴다.이 또한 투지로 따낸 은메달이었다.
1896년 1회 올림픽 사이클,아테네와 마라톤간의 왕복 87km 도로 경기에서 그리스의 콘스탄틴 티니디스가 천신만고 끝에 우승했다.이것 역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쾌거였다. 마라톤 까지 선두로 달린 콘스탄틴은 돌아 오는 길에 다른 선수와 충돌해 나 딩굴었다. 자전거는 망가졌고 부상도 입었다.응급 치료를 받고 다시 일어난 그는 보조원의 자전거를 빌어 타고 달렸다.아테네에 다 들어 와서 그는 길 가의 사람을 피하려다 또 벽을 받았다. 자전거는 못쓰게 되었고 상처도 컸다.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충 치료를 받고 이번에는 관중의 자전거를 얻어 탔다. 그렇게 콘스탄틴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그의 몸은 땀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그의 표정에는 수 많은 고난을 겪은 흔적이 역력했다."고 당시의 기록은 적고 있다.
+비록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가장 용감한여자 선수'로 모두가 기억하는 미국 여자 다이빙의 미키 킹, 그는 루가니스 못지 않은 투혼을 발휘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스프링보드 다이빙에서 마지막 두 차례의 시기를 남겨 놓고 그는 선두였다. 그러나 바로 그 마지막 두 번째의 다이빙에서 실수로 도약대에 걸려 왼팔에 골절상을 입었다. 지독한 아픔이었고 심리적 충격 또한 컸다. 그런 몸을 하고도 미키는 마지막 까지 나가 뛰었다. 메달 권에서 밀려나 4위에 그쳤지만 그의 감투 정신은 지금까지도 우리 가슴에 감동으로 남아 있다. 메달은 따지 못했어도,고작 7위에 머물렀어도 미련할 정도의 투지로 끝내 경기를 마치고 쓰러진 선수가 있다. 1936년 베르린 올림픽 근대 5종에 출전한 미국의 알프레드 스타버드,그는 당시 미 육군 중의였다. 그는 경기 직전에 발목 뼈가 부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그런데도 그는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4천 m 크로스 컨트리등 5개 종목을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치루어 냈다. 결과는 7위,그리고 곧바로 입원,수술을 받고 깁스를 했다. 36년 베르린 올림픽남자 1만 m에서 우승한 핀랜드의 일마리 살미넨은 5 천 m 에도 도전했다.세 바퀴를 남겨두고 살미넨은 선두인 동료 군나르 헥케르트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차 하는 순간 군나르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막 판에 그렇게 되면 탈락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 선두는 이마 저만큼 달아나고 있었고 7,8명의 선수가 그를 비웃듯 앞지르고 있었다. 군나르는 주저 앉지 않았다. 다리를 절룩이며 다시 뛰는 것이었다. 앞 서 가는 선수를 차례로 따 돌리고 역주를 해보았지만 이미 늦었다.6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것도 최후의 일각까지 최선을 다 한 스포츠 정신의 표본이 아닌가.
+장애자 선수의 귀감. 1936년 LA 올림픽 수구 경기에서 우승, 지난 대회에 이어 2 연승한 헝가리 대표 팀에는 외다리 선수가 있어 화제가 되었다.그의 이름 올리버 할라씨,그는 11살 때 부다페스트에서 전차에 치어 한 쪽 다리의 무릎을 절단해야 했다. 그런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할라씨는 피나는 훈련을 거듭해 유럽 수영 선수권 대회 1500m 경기에서 우승했을 뿐 아니라 헝가리 국가 대표 수구 선수로 96회나 출전하는 등 헝가리 수구의 주전으로 활약했다.그가 처음으로 올림픽에 나간 것은 1928년 암스텔담 대회로 그 때 헝가리는 준 우승을 했다.세 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은메달 1개를 목에 건 할라씨,그는 장애자들에게 하면 된다는 모범을 보여준 인간 승리의 귀감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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