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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새로운 시작]
11. 하나님의 동산을 지킬 사람을 지으심
(창2:4-8) 2020. 2. 15. 이현래 목사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말씀을 드렸다. 왜 안식하셨는가? 모든 일에 만족하니까 사람을 지으시고 안식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만족하셨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이다. 생각해 보면 창조자가 만족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자는 아기를 낳을 때는 고통스럽지만 낳고 나서는 만족한다. 아기를 낳고 나서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고통스러웠어도 아기를 낳고 나면 여자는 만족한다. 그래서 다시는 절대로 아기를 낳지 않겠다고 하던 사람도 또 아기를 낳는다. 아기를 보는 순간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여자가 아기를 낳는 것은 죽을 고비를 겪는 것이라고 한다. 전에 수술을 하고 변을 보려고 힘을 써도 나오지 않았다. 수술을 하면서 착각하고 탈지면을 박아놓아서 아무리 힘을 써도 변이 나오지 않았다. 죽을 것 같아서 의사를 불렀는데 의사가 탈지면을 박아놓은 것을 빼주니까 대변이 나왔다. 그때 변을 보지 못했으면 힘이 다 빠져서 죽을 것 같았다. 힘을 안쓰면 좋겠는데 위에서 밀어내니까 힘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여자가 아기를 낳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경험했다. 아기는 나오려고 하는데 낳지 못하니 힘든 것이다. 요즘은 병원에서 낳으니 그런 일이 없지만 옛날에 아기를 낳다 죽은 여자가 많다. 여자가 아기를 낳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도 우리 생각에는 간단한 것 같아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창조하신 분은 당연히 만족하셨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 자신의 목적대로, 하나님이 원하신 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족하신 것이다. 사람도 이에 대해서 만족하면 행복하지만 지으신 이는 만족하는데 사람이 만족하지 않으면 안식이 깨져버린다. 주는 사람이 좋다고 하면 받는 사람도 좋다고 해야 되지 주는 사람은 만족한데 받는 사람이 시원찮다고 여기면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족하실 때 사람이 만족하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이 만족하신 것을 사람도 만족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이 많다. 그러나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의 조건을 갖추려면 끝이 없다. 그 조건을 맞추어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에 대해서 사람이 만족하면 행복인 것이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씀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영으로서는 표현이 안되니까 영이신 하나님은 자기를 표현해 줄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사람들이 성령을 받느니 어쩌느니 하는 것은 사람에게 영이 없기 때문이다. 손과 발이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기능도 있지만 사람은 생명이 없다. 그래서 영적인 것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은 영이신데 손이 없다. 그래서 표현이 필요하다. 영이신데 자기는 형상이 아니니까 형상인 사람을 좋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왜 좋아하시는가? 그것은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것만 알아도 인생은 행복하다. 내가 무엇을 가져서, 무엇을 해서, 무엇을 이루어서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형상화할 수 있기 때문에 만족하시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그분만 나타낼 수 있으면 대만족인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러분이 간증을 하면서 참으로 행복한 것은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을 때 아주 만족해지는 것이다. 만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 이상의 만족은 없다. 영이신 하나님은 형상이 필요한 분이다. 오늘은 동산을 창설하셨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동산은 하나님이 거하는 곳이다. 하나님이 거하는 곳에는 이곳을 관리할 경작자가 필요하다. 밭은 경작할 사람이 필요하고 집은 관리자가 필요하다. 성전을 지어놓았는데 아무도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성전은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제사장들이다. 제사장이 성전을 섬길 때 성전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창세기 2장은 동산을 섬길 자, 동산을 경작할 자, 관리할 자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이다. 5-6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하였다. 안개가 있다는 말은 흐리멍텅하다는 뜻이다. 오리무중이라는 말이 있다. 혼미해졌다는 뜻인데 사람으로 말하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도 모르고 무엇 때문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혼미한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우주선을 타고 하늘을 날아가고 별짓을 다 한다 해도 인생이 왜 있는지, 인생은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모르면 혼미한 것이다. 현대인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목적이 없어진 것이다. 목적이 없으니까 사람이 혼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땅은 목적이 없으면 혼미해져 버린다. 경작할 사람이 없으면 땅은 황무지가 되고 만다. 사람은 목적을 잃어 버리면 혼미해지는 것이다. 현대인은 어떤 사람인가? 목적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왜 사느냐고 물어 보면 아무도 대답할 사람이 없다. 왜 사는가, 인생은 왜 있는 것인가? 물어 보면 대답할 사람이 없다. 대학교수에게 “사람은 왜 삽니까? 무엇 때문에 살아야 되는 겁니까?”라고 물어보자. 아무도 대답할 사람이 없다. 문명이 발달해갈수록 더욱 답이 없다. 그래서 잘사는 나라 젊은이들은 그날을 즐기자는 것밖에 없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어 간다. 한동안 민주화 운동이니 뭐니 하며 데모하고 다닐 때는 목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요즘은 그런 것을 할 필요가 없게 되어서 아이들이 빈깡통처럼 아무 생각이 없다. ‘어디 가서 놀까. 무엇을 하면 편할까.’ 하는 생각밖에 없다. 미국에서 보니 주말이 되면 고속도로가 휴양지로 놀러가는 차로 가득 찼다. 요트 같은 것을 싣고 가는데 보니 끝이 없었다. 일하는 목적은 주말에 즐기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아이들은 아무 목적이 없다. 학교에서 공부를 해도 아무 목적이 없다. 옛날에는 가난했으니까 공부라도 해서 출세를 해 보려고 했지만 요즘 아이들은 잘 사니까 출세가 뭔지 모른다. 공부를 왜 하느냐고 물어 보면 대답하는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왜 공부를 해야 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되겠는가. 출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돈 벌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무엇 때문에 공부하라고 하는가? 나도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허무했다. “공부를 안하면 좋은 대학에 못가고 좋은 대학에 못가면 좋은 직장에 못가고, 좋은 직장에 못가면 좋은 결혼을 못한다.”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짐승들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짐승들이 자기 부모에게 물어보면 뭐라고 하겠는가? “건강하게 잘 커서 사냥을 배워야 먹고 살 수 있다.”라는 말밖에 더 할 말이 있겠는가. 사람도 자기 자식에게 할 말이 공부를 잘해야 취직을 잘하고 취직을 잘해야 결혼을 잘한다는 말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간단한 일도 아니다. 잘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뭐라고 대답해 줘야 될지 모르고 아이들도 공부를 왜 해야 되는지 알고 하는 아이가 별로 없다. 부모들이 하라니까 할 수 없이 하는 것이지 알고 하는 아이가 없다. 그러니까 하다 안되면 오층, 십층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것이 아이들 심정이다. 오죽 답답하면 그렇게 하겠는가. 앞으로는 사람이 어떤 형태의 사람이 될지 모른다. 우리 시대는 가난했던 시대니까 그런대로 ‘돈을 벌어야지.’, ‘공부를 해서 출세를 해야지.’ 하는 것이 있었는데 요즘은 잘사니까 그런 것도 없다. 공부를 안해도 먹고 살 수 있다. 북유럽의 몇몇 나라에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회보장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공부를 하나 안하나 별 차이가 없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인생을 사는데 지장이 없다. 공부가 재미있는 사람만 하면 되지 억지로 할 필요가 없으니까 참 좋은 세상인 것 같다. 그런데 할 일이 없어져 버리니까 인생이 허무해진다. 그래서 마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좋은 사회, 복지 사회,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져 주는 사회니까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사람이 목적이 없어져 버린다. 의욕도 없어져 버리고 마약을 하고 인생을 즐기자는 것밖에 없다. 옛날에 아편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굉장히 편안한 기분이 된다고 한다. 여름에 낮잠이 사르르 오려고 할 때 그런 기분이라는 것이다. 꼼짝도 하기 싫은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한 번은 보건소에 갔는데 의사가 아편을 하고 회전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 담뱃불이 타들어가도 털지를 않았다. 아편에 취해서 담뱃불이 손가락 사이로 뜨겁게 타들어가고 있어도 버리고 싶은 생각이 없을 정도로 편안했던 것이다. 나도 식중독에 걸려서 아편을 두 번 해 보았다. 배가 쥐어뜯듯이 아프고 설사를 나고 오한이 드는데 그 추위를 견기기 어려웠다. 집에서 영대 병원까지 업혀서 갔는데 병원에서 담요를 아무리 덮어도 추워서 몸이 오그라들었다. 그리고 모르핀을 혈관에 맞았는데 바늘이 빠져나오기도 전에 아픈 증세가 가라앉아 버렸다. 그런 약은 처음 보았다. 바늘이 빠져나오기도 전에 태풍이 사라져 버리고 고요함이 왔다. 그 기분을 아편쟁이들이 느끼고 사는 것이다. 아편을 하면 만사가 소용없다. 태풍이 불다 고요해 지는 잊을 수 없는 쾌감, 돈이고 뭐고 만사가 소용없는 쾌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아편을 끊지 못하는 것이다. 요즘 마약은 아편과 다르게 환각제라서 과대망상에 걸리거나 환각을 보게 된다. 환각제에 취한 것을 보니 좌불안석으로 어찌할 줄 몰랐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집안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왜 저런 것을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서 무슨 쾌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에 비하면 아편은 고급이다. 나도 두 번 맞아 보았는데 신기한 약이다. 할 일이 없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아편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을 정도로 무서운 것이 아편이다. 사람이 목적이 없으면 혼미해져서 무엇이 필요한지 모른다. 우선 좋은 것이 좋지 이럴 필요도 없고 저럴 필요도 없다. 즐거운 것이 있으면 밥을 안먹어도 좋다. 이번에 아카데미 상을 휩쓴 ‘기생충’이라는 영화 속에는 코믹한 것이 들어 있다고 한다. 집이 없는 사람들이 남의 빈 집에 들어가서 사는 쾌감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재미있는 것을 좋아한다. 영화도 재미없는 것은 안팔린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품격과 품위를 갖추고 소설다운 소설을 써야 한다는 사람과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사람이다. 재미없는 소설은 아무리 좋아도 사람들이 읽지 않으니까 소설을 잘 쓰려면 첫째는 재미있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맞다. 소설을 보는 사람들이 연구해서 논문을 쓰려는 것이 아니니까 일단은 재미있어야 한다. 요즘은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되고 있다. 재미있는 것만 있으면 된다. 교회도 재미있는 것만 있으면 아이들이 많이 올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재미있는 것이 너무 많아서 교회에서 아무리 잘해도 세상만큼 재미있게 해 줄 수 없다. 사람은 목적이 없으면 혼미해져 버린다. 땅은 농부가 씨를 뿌리지 않으면 열매가 없다. 땅이 아무리 많아도 경작하는 사람이 없으면 수확이 안된다. 풀은 여전히 있고 나무도 여전히 있는데 거둘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인생도 경작이 안되면 추수할 것이 없다. 인생이 무엇을 추수할 것이 있겠는가? 살고 나서 보면 그렇지 않다. 내가 지금 이 나이에 거두려고 보니 아무것도 없다. 옥수수 한 톨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살기는 살았는데 추수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목적이 없는 인생은 혼미하다.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다고 한 것처럼 오리무중이다. 이런 땅에는 하나님이 거하실 동산을 지을 수 없다. 하나님도 재미없는 곳에는 사실 수 없다. 하나님도 재미가 있어야 하는 분이다. 옛날에는 아무도 없는 캄캄한 골방에 사셨지만 요즘 하나님은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재미있고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옛날처럼 캄캄한 방에 갇혀서 징역살이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여러분이 하나님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캄캄한 골방에 넣어 놓으면 좋아하시겠는가? 노인들을 모시면서 “그냥 계세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라고 하면 좋은 말 같지만 노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노인들을 모시려면 재미있게 해 드려야 한다. 살 보람을 느끼도록 일거리를 줘야 노인들이 좋아하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면 싫어한다. 여러분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쉬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날 직장에 갔을 때 자기 책상이 없으면 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옛날에 박기민 형제가 엘지에 근무할 때 출근을 하니까 책상이 없었다고 한다. 나가라는 말은 못하고 책상을 치워버린 것이다. 임무도 없고 아무 일도 할 일이 없다. 그런 사람들끼리 옥상에 모여서 담배만 피우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집에서 나올 때는 분명히 출근한다고 나왔는데 회사에 오면 책상이 없다. 그것처럼 비참한 것이 없다. 일이 없으면 편하고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일이 없으면 허무해지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게 인생을 살면 되겠는가. 아무 목적도 없는 사람, 출근한다고 넥타이 매고 나갔는데 일할 것이 없는 사람이 혼미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 속에는 하나님이 동산을 창설할 수 없다. 하나님도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담배만 피우고 사회를 불평하고 인생을 불평하는데 거기 어떻게 집을 짓겠는가. 성막을 거기 짓겠는가. 행복한 데 집을 짓고 살고 싶지 그런 데 하나님께서 집을 짓고 싶겠는가. “주여, 주여, 오십시오.”라고 한다고 하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에서 땅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 안에 머물기 원하신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잡아 두려면 매일 간증을 하면 된다. 한철이가 매일 간증을 하니까 하나님이 머물러 계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증할 때 하나님은 거기 머물러 계신다.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증거하는 속에 같이 계신다. 거기 동산을 마련하시지 황폐한 땅에는 동산을 마련할 수 없다.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한 진리다. 여러분도 재미있는 데 있고 싶지 모여서 불평불만이나 하고 있는 데 있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일부러 그런 데만 찾아다니는데 그것은 망할 짓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기도 그렇게 되고 만다. 행복한 사람들 속에 있으면 자기도 행복해지는데 불행하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 자기도 불행한 사람이 된다. 하나님도 그러하시지 않겠는가. 맨날 불평만 하는 사람에게 자기 집을 짓고 싶겠는가.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 않고 경작할 사람이 없으니까 안개만 올라와서 자욱한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 속에는 생명과 성품이 있다. 이 생명과 성품은 사람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호랑이 속에 머물겠는가, 코끼리 속에 머물겠는가. 다 지어놓았는데 거기 하나님이 머물 곳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머무시려고 창조한 존재니까 보통 존재가 아니다. 직장이 이러니 저러니 할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이 머물러야 하는 곳이다. 하나님이 머물기를 원하시는 것이 사람이다. 다른 조건은 없다. 어떤 사람이 돼야만 하나님이 머무신다는 조건이 없다. 그냥 사람이면 된다. 누구든지 사람만 되면 된다. 재주가 없어도 되고 돈이 없어도 되고 무식해도 된다. 사람이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거기서 머무신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한 것은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신 말씀이 예수 안에 머물렀다는 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니까 하나님이신 말씀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신 말씀이, 하나님이 육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 속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 속에만 머무실 수 있지 다른 데는 머무실 수 없다. 그리고 사람 속에서 경작되어 나와야 은혜 위에 은혜가 된다. 그냥 하늘에 계신다고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 속에 와서 사람의 인격에 의해 경작이 될 때 은혜가 되는 것이다. 사람을 비교해 보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 하나님이 달라진 것인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달라진 것이다. 모세라는 사람 속에 와서는 율법이 되었다. 하나님이 모세 안에 머무르니까 모세에게서 율법이 계속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 안에 머무르니까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게 나온 것이다. 똑같이 소고기 한 근씩을 먹고 한 사람은 80키로짜리 쌀가마니를 들 수 있는데 한 사람은 20키로짜리 물 한 말도 못든다. 나는 뷔페 식당에 가면 많이 먹지 못하니까 늘 손해본다는 생각이 드는데 소고기 입장에서는 ‘저 사람은 나를 한 근이나 먹고도 힘도 못쓰네.’라며 불평할 것이다. 이만기는 한 근을 먹고 천하장사가 되는데 나는 열 근을 먹어도 골목대장도 못하니까 소고기가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나님도 똑같다. 사람 속에 머물러야만 되고 그 사람 속에서 어떻게 경작되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같은 물건이라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우리 집 컴퓨터는 내가 쓰면 많이 못쓴다. 아는 것이 없으니까 많이 쓸 수 없다. 그런데 컴퓨터를 잘 아는 사람은 나보다 열 배, 백 배를 쓸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집 컴퓨터는 나를 볼 때마다 ‘내가 주인을 잘못 만나서 내 가치가 발휘되지 않는구나.’ 라며 한심스러워할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만물이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하였다. 만물도 허무한 데 굴복하기를 원치 않는다. 이 컴퓨터는 재수 없이 나한테 와서 기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집 컴퓨터는 재수없는 컴퓨터인 셈이다. 사람이 이렇게 중요하다. 하나님까지도 사람을 잘 만나야 그분의 모든 가치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의 주제로 돌아와 보자. 지금 우리 교회의 주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중에 제일 하발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십자가라고 알고 있다. 인간으로서 더 이상 할 수 없는 충성이라고 알고 있다. 굉장하고 놀라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남은 찌끄러기가 ‘뛰어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다 가져가 버리고 뛰어내리지 못한 것만 남았다. 제일 가치 없는 것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가치를 높이고 있다. 그러니 예수님은 누구에게 감사하시겠는가. ‘야! 대구교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 버리고 간 나를 이렇게 찬양하고 이렇게 영광스럽게 하는구나.’라고 하시지 않겠는가! 나는 예수님이 나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예수님을 만난 것은 나만 행운이 아니라 그분에게도 행운이다. 사람들이 다 버리고 간 것을 사용하는 것이니까 그분에게도 행운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존재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것을 사용하니 예수님이 얼마나 좋아하시겠는가. 나에게 어떤 약점이 있어서 사람들이 다 그것을 싫어하는데 어떤 사람이 그 약점을 높이 평가해서 사용한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그 사람이 얼마나 감사하겠는가.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나에게 얼마나 감사하시겠는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것을 날마다 찬송하고 날마다 영광을 돌리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보시면 얼마나 좋아하시겠는가. 나는 예수님이 나를 만난 것이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예수님을 만난 것만 잘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나를 만나신 것도 정말 잘한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을 택하셨으니까 이렇게 되었지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가져가라고 해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 천국은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공평한 것이다. 왜 하나님은 나만 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았는가? 다 이유가 있다. 아무리 주려고 해도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을 때 거기 베드로만 있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었는데 시시해서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저 사람을 따라가서 뭐하겠는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성경에서 보니까 대단한 말 같지만 그때 당시에 서른 살 먹은 시골 총각이 “나를 따라오십시요. 내가 당신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으면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가 이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 복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 말씀을 듣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복이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그러니 베드로가 들었다는 것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서로 좋은 일이다. 이것이 참 안식이다.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고, 나도 살 맛 나고 하나님도 살 맛 나는 일이다. 똑같은 하나님이 모세 안에서는 율법이 되었는데 예수 안에서는 은혜가 되셨다. 같은 풀을 먹어도 소가 먹으면 소고기가 되고 양이 먹으면 양고기가 된다. 소고기에 비해 양고기가 훨씬 더 맛있다고 한다.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제일 맛있는 고기는 양고기고 제일 좋은 술은 백포도주라고 했다. 같은 풀을 먹었어도 양고기가 훨씬 맛있다. 옛날에 순회 다닐 때 충주에 문화식당이라는 곳에 가면 염소 고기 전골을 해 주는데 그렇게 맛있는 데는 처음 보았다. 소고기와 다르게 양고기는 먹어 보면 달다. 같은 풀을 먹었는데 소고기와 양고기가 다르다. 우리 교회에 오신 분들은 똑같은 말씀을 듣고 같은 양식을 먹었는데 어떤 사람에게서는 재미있는 것이 나오고 은혜가 나오는데 어떤 사람에게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사람은 참으로 신기한 동물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재배하면 놀라운 것이 나오게 되는 존재다. 함부로 쓰거나 아무것이나 하다가 인생을 버릴 수 있는 시시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면 안될 일이 있다. 절대로 사람이 아니면 안되는 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배양하는 일, 경작하는 일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해도 하나님은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신다.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 드린 것이 있는가. 돈이 있어서 헌금을 했는가, 힘이 있어서 일을 했는가. 아무것도 못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이 나를 제일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좋아하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시지 누구를 좋아하시겠는가. 잠자다가도 생각하고 꿈에서도 생각하는데 왜 나를 싫어하시겠는가. 하나님도 가난한 분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니 얼마나 가난한 분인가. 사람들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고 “네가 하나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믿겠다.”고 하는 판인데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을 믿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예수님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하시겠는가.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예수를 부르고 소리만 지르지만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이 예수로 인해서 우리에게 나타났다. 그래서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하는 것이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유일하다는 말이고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이 그렇게 완전하게 나타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독생자인 것이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셨다. 모세가 있고 엘리야가 있었다. 구약 시대에 모세와 엘리야는 대단한 존재였다.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만난 사람이고 엘리야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다. 베드로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하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셨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어떻게 모세와 엘리야에게 비교하느냐며 시끄러운 소리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는 어디로 가 버리고 예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유대인들이 알아들으면 천인공노할 일이다. 모세가 누군데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이 예수 안에서 풍성하게 경작되었기 때문이다. 모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백 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끌고 나와서 홍해를 건너게 하고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여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한 사람이다. 그에 비하면 예수님은 시간으로 보면 삼년 반이고 질량으로 보면 백 분의 일도 안된다. 그런데 왜 모세와 엘리야를 치우고 예수만이 기뻐하시는 아들이라고 하셨는가. 그분이 능력이 높아서도 아니고 신비가 있어서도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이 예수 안에서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자기로써 알려지기를 원하신다. 내 속에 있는 것을 다 알아주고 표현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은 친구이겠는가. 다 건성으로 아는데 한 사람이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내 뼈 속까지 안다면 얼마나 좋은 친구이겠는가. 내가 외로울 때 친구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때 다 망해서 어디에도 이야기할 데가 없었다. 그 친구는 조건이 좋았는데 나를 다 받아주었고 대화의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 친구가 몇 년 전에 죽었는데 나는 그 친구를 굉장히 고맙게 생각한다. 백이면 백 가지를 다 내가 부러워하던 친구였다. 건강, 학벌 등 모든 것이 훌륭한 친구였다. 그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이었다. 여름 방학에 내려왔고 겨울 방학에 내려왔는데 그 친구가 오면 매일 그 집에 가서 놀았다. 그 친구가 없으면 놀러갈 데도 없고 이야기할 데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애인을 기다리듯이 방학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도 나를 좋아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친구는 없었다. 이 친구만 내가 좋아하는 친구였다. 몇 년 전에 암으로 죽었는데 죽기 전에 “내가 너 보다는 오래 살아야 할 텐데.”라고 했고 나도 “그렇지. 나보다 네가 오래 살아야지.”라고 했는데 나보다 먼저 가 버렸다. 우리 교회 헌당식 하는 날 아침에 그 친구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친구 하나만 있어도 외로움이 없어지는데 예수님에게 친구가 없었다. 다 도망가 버리고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있고 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있거니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다. 얼마나 친구가 필요하면 이런 말씀을 하셨겠는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외로운 분이다. 그분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왜 알아 줄 사람이 없는가? 알아 줄 건덕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적을 행하실 때는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 건성이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나니까 뭐라고 했는가. 모세는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떡을 주어 먹게했는데 당신은 무엇을 보여주겠느냐고 했던 것이다. 배고픈 사람들을 한 끼 먹여 놓으니 그 정도 갖고 되겠느냐고 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얼마나 한심하셨겠는가. 아무리 먹여도 안되고 건성만 보고 따라오는 사람들이니 얼마나 외로우셨겠는가. 요즘도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선거철이 되니까 SNS에 쌍방에서 싸움이 대단하다. 이럴 때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어찌 되겠는가. 그러니까 교회가 아니면 나를 알아 줄 데가 없다.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순모임을 하고 교제를 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순모임에서 하는 말을 다른 데 가면 못한다. 그런 말은 아무도 들어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이 모자란다. 돈 버는 이야기도 아니고 별 것 아닌 이야기다. 그런데도 서로를 아니까, 교통이 되니까 즐겁고 좋은 것이다. 예수님과 우리도 마찬가지다. 서로 교통이 되면 예수님이 얼마나 좋아하시겠는가. 우리가 착해서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다. 외로운 사람에게는 친하는 것이 소중하지 그 사람이 착하든 훌륭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여러분도 외로워 보면 내 속을 알아 주는 사람이 필요하지 훌륭하거나 위대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좋은 친구다. 좋은 반려자다. 아마 대구 시내를 두루 다니며 살펴 보시다가 대구교회에 와서 보시면 ‘이 사람들은 괜찮네.’라고 하실 것이다. ‘내 제일 못난 것을 가지고 저렇게 좋아하는데 좋은 것은 얼마나 더 좋아하겠는가.’라고 하실 것이다. 다른 데서는 위대한 것만 찾고 있다. 예수님에게 와서 하나님의 사랑이니 어쩌니 하니까 예수님도 피곤하시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는 예수를 좋아하고 있으니 예수님이 얼마나 반가워하시겠는가.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나를 제일 좋아하실 것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음성을 들었다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무슨 음성을 들었느냐고 물으니 “나는 네가 제일 좋다.”고 했다는 것이다. 공중에서 나는 소리를 한 번 듣고 평생 울궈먹고 사는 것인데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그분의 제일 못난 점을 제일 좋아하니까 정상이다. 천하 절색인 여자는 행복할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이 결혼 생활을 잘 못한다고 한다. 자기가 예쁜 것만큼 자기를 알아 주는 남자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여자는 잘 생기지는 못해도 행복하다. 자기가 못생긴 것을 너무 좋아하는 남자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는 코가 납작한데 납작 코를 너무 좋아해서 “나는 네 코가 제일 예쁘다.”고 하는 신랑을 만난 여자는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이 제일 부끄러운 일이다.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했는데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것은 예수님으로서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을 개의치 않으신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마저도 장식을 해서 이러고 저러고 하고 신이니 어쩌니 한다. 속을 모르고 그런 소리를 하지만 사람보고 신이라고 하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사람을 보고 신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은 좋아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보고 신이라고 하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잠을 제대로 자겠는가.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와서 “당신은 신입니다. 인간이 아닙니다.”라며 높이면 좋겠는가? 좋다고 하면 미친 사람이다. 자기를 보고 신이라고 하는데 좋다고 하면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다. 그 사람의 제일 못난 것, 제일 약한 것인데 그것을 좋아하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겠는가. 행복은 간단하다.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니 산 혼이 되지 않았는가. 그와 꼭 같이 흙에 씨를 불어 넣으면 무엇이 나오는가. 열매가 나온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은 흙이 주제다. 흙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 산 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씨를 심어 놓으면, 하나님 말씀을 심어 놓으면, 하나님의 인상을 심어 놓으면 열매가 나온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예수의 인상을 심어 놓으면 무엇이 나오겠는가. 여러분이 진짜로 좋아하는 열매가 나온다. 그분에게서 여러분이 좋아하는 그 점이 나온다. 심는대로 나오는 것이 흙이다.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은 사람 안에서 경작되어야 제대로 가치가 있고 풍성해진다. 그러니 하나님은 사람을 얼마나 기다리겠는가. 알고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도 만족하지 못하셨다. 그때는 만족했지만 지금 모세가 온다면 만족하시지 않는다. 그때는 천하에 없는 사람이었지만 지금 모세가 온다면 나만 못하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고 율법을 내놓았고 그때로서는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모세가 최고였다. 하나님은 지면에 이런 사람이 없다고 모세를 칭찬하셨지만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지금은 그렇지 않다.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율법을 내놓았지만 예수는 자기 속에 하나님이 있으니까 속에서 하나님이 생산이 되어 나왔다. 보고 와서 말한 것과 속에서 생산되어 나오는 것이 같겠는가. 지금은 모세가 오면 안된다. 그래서 치우라고 하셨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하니까 치우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다 지나갔고 지금은 예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통해서 경작되는가. 이것이 하나님으로서는 큰 숙제다. 하나님은 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 사람을 두셨다. 동산은 하나님과 사람이 같이 사는 곳, 동거하는 영역이다. 사람이 있을 곳은 하나님의 동산이다. 하나님과 같이 있는 곳이니까 이만한 데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왕궁이 좋겠는가, 내가 제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초가집이 좋겠는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어쩌구 하는 노래가 있는데 언덕 위에 하얀 집은 별로 좋은 집이 아니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높은 언덕 위에까지 집을 지어놓았다. 산동네에 판자촌 같이 다닥다닥 붙여서 집을 지어놓았는데 색깔을 다르게 칠해 놓아서 멀리서 보면 굉장히 아름답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판자촌이다. 옛날에 이주해 왔던 사람들이 지어 놓은 집에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집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이 좋겠는가, 아니면 싫어하는 사람과 왕궁에 사는 것이 좋겠는가. 미련한 여자는 왕궁에 가고 싶겠지만 지혜로운 여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동산에 산다는 것은 거기가 어디가 되었든 간에 이보다 더 좋은 데가 없다. 나를 사람으로 알아 주는 곳, 인간으로 알아 주는 곳, 자기의 형상으로 알아 주는 분, 그분과 같이 있다는 것이 행복이다. 사람들은 모두 인간 말종들을 어디 써 먹겠느냐고 하고 마지막 갈 곳은 지옥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신다. 나를 좋아하시는 분, 나를 필요로 하는 분이 있다. 이런 분과 사는 곳이 천국이고 낙원이다. ‘저 푸른 초원 위’는 우리 나라에서는 빈민들이 사는 곳이지만 미국에 가면 아주 좋은 곳이다. 사람이 있을 곳은 어디인가? 하나님의 동산이다. 동산은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을 경작하는 곳이다. 거기 있으면 내 속에서 저절로 사랑이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 속에 모르던 사랑이 나온다. 억지로 사랑하려면 안되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내 속에 숨어 있던 사랑이 나온다. 연애를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도 참으로 냉랭한 사람인데 좋은 사람을 만나니까 어디서 나왔는지 몰라도 사랑이 나왔다. 동네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생전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 같았는데 정신이 빠져서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없어지니까 그것도 없어져 버렸다.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생명의 현상이다. 만나면 나오는데 안만나면 안나온다. 경험해 보니 사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표현이 나오는 것이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좋으면 엄청난 것이 나오게 되어 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우리 속에 들어와서 좋으면 하나님의 모든 것이 터져나온다. 밭에서 열매가 나오듯이 나온다. 한 번밖에 못해보았지만 연애해 보았다고 자랑해서 미안한데 나는 요즘 하나님과, 예수님과 연애하는 중이다. 이것이 진짜 연애다. 아담은 하나님의 동산을 떠났으니 어찌 되었겠는가. 거기서 쫓겨나서 하나님과 함께 살지 못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비참한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 복귀시키려고 오셨다. 잃어 버린 땅, 잃어 버린 동산을 다시 찾게 해 주려고 오셨다. 이것이 구속이다. 우리가 원래 있던 데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원래 동산에 거하던 사람이다. 아가서를 읽어 보면 동산의 사랑을 표현해 놓았다. 남녀간의 사랑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알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이다. 동산에 거하는 여자를 표현한 것이다.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절절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가 들어 있는가! 사람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이 그 안에서 녹아져 나와 있다. 여러분은 다 결혼을 했으니 진짜 연애를 해 봐야 한다. 하나님과 나와의 진짜 연애를 해 보면 행복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동산을 창설하시기 위해서 아담을 데리고 오셨다. 창세기 1장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는데 2장은 동산 안의 이야기다. 꼭 아늑한 집 안에 들어와서 사랑을 속삭이는 것 같다. 폭풍의 언덕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고요한 안방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동산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영원한 사랑과 은혜가 흐르는 곳이다.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은 바로 이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철이가 아멘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들은 것 같다. 내가 보니 잊어버려서 그렇지 듣기는 확실히 듣는다. 한철이는 오늘뿐이다. 인생은 오늘뿐이다. 그러니까 듣기만 잘하면 부족함이 전혀 없다. 내일 또 듣고 다음에 또 들으면 되니까 문제가 없다. 녹음을 해 놓았으니까 또 들을 수 있고 맨날 들을 수 있다. 계속 들으면 되니까 기억할 필요도 없다. 인생의 영광과 존귀가 다 있는 곳, 영원한 직장이 있는 곳, 직분이 있는 곳, 내 할 일이 있는 곳, 영원히 찬송할 일이 있는 곳, 이곳이 동산이다. 하나님은 동산의 사람으로 우리를 부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