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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들(Politiques), I [다양체, 즉 응집 평면 또는 내재성 평면(plan de consistance ou d’immanence)]
들뢰즈와 파르네, in 대화집(Dialogues, 1977), Flammarion, 2008(1977, 1996), I. 151-162, II. 163-176(P.189) + 부록: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L’actuel et virtuel, 1995. nov)」.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클레르 파르네(Claire Parnet, s.d.)[1948?]
정체된(정태적) 여러 기구들에 의해 정치를 설명하기보다, 흐름으로 이어지는 선들과 선들의 연관으로 정치를 설명하는 것이, 국가와 국가기구 또한 내재성 평면과 전쟁기계 사이에서 정치를 파악하는데 정보와 소통의 시대에 더 잘 어울린다. 그런데 왜 정치들(Politiques)일까? - 거시의 지구(또는)와 미시의 지각(또는 감화)라는 최종심급 때문에. 정치학들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정치들이란 푸꼬 식으로 보아, 기성 제도에 파생적인 여러 장치들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 아닐까, 즉 푸꼬가 주장했던 새로운 지도 그리기(la cartographie)가 필요한 것으로 들뢰즈가 느낀 것이리라. (54VKF)
이 지도판(地圖版)은 지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들뢰즈에서는 감성(내재성)에 의해 생성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생성에는 기존의 형성과 정립방식과 달리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 나로서는 선들이라는 용어를 쓰기보다, 변역(變易)의 서죽(筮竹)들로 이루어진 다발과 같다- 들뢰즈는 벩송의 “사실들의 선들”의 변천과정을 빌려 온다. 벩송에서 선들은 운동 즉 생명의 과정 총체를 사유하면서 공동체에서 영혼을 지닌 생명체의 활동성의 영역을 도덕과 종교로 다루었는데 비해, 들뢰즈는 사회 또는 공동체라는 집단의 형성에서 선들의 여러 종류가 있음을 제시한다. 내가 보기에 벩송은 형이상학적 사유로서 인격을 지닌 영혼이 개체로서 스토아적인 숙명(une destinée), 공동체 안에서 상호 연관에서 오는 운명(un destin), 인류가 살아갈 양식을 실행하는 사명(la destination)의 과정을 걷는다고 암시했다. 이에 비해 들뢰즈는 여기서 집단을 형성한 인간 종에 있어서 단단한 방향들(les directions)을 설정하는 가운데, 각 방향에는 여러 연관들의 부분들이 각각의 운명(un destin)의 차이를 생산하며, 삶의 다양체를 형성한다. 예로서 직업이란 것이 그러하다. 다양체의 선들이 각각의 고유성에 따라 특이성을 발현함에 따라, 미지의 영역을 향해 새로운 행선지(la destination)가 여러 갈래로 설정될 것이라는 것인데, 이 갈래들의 놀이들마다 새로운 예술의 발현이 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
한 소설가의 삶에서 세 가지 선들을 볼 수 있다. 피츠제럴드는 이항 대립적 삶에서 단절(la coupure, 짤)의 한쪽을 살았고, 게다가 소수자로서 영토(지위)의 균열(la fêlure, 틈)을 맛보았고 결국에는 어느 영토에도 속하지도 결별(la rupture, 결별, 절편, 폐기)의 흐름이 있는데 그가 1920년대 ‘상실세대(Lost Generation)’의 시대에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들뢰즈가 영미 문학을 높이 평가하는데, 그 문학 속에서 제도와 국가기구에 저항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며, 일차대전과 이차대전을 겪은 작가들도 시민이라기보다 이민지와 떠돌이의 성격이 강한다. 이런 예로서는 키에르케고르의 신앙의 기사(騎士), 로렌스의 수필, 만화영화 “핑크 팬더(la Penthère rose)”에도 있다.
들리니(Deligny, 1913-1996)가 묘사한 자폐 어린이의 서술에서도 – 자폐아만이 아니라 정상아에도 그리고 어른에서도 - 3가지 선들을 볼 수 있다. 우선 이항 대립에서 단단하고 습관화된 선이 있다. 그리고 제도상으로 권력 장치에서 보아 추상기계와 국가기구의 선들이 있는데, 이들을 벗어나는 탈주선들도 있다. 셋째로 장치에 의한 조직화의 판과 달리, 응집 평면 또는 내재성 평면(plan de consistance ou d’immanence)이 있고, 이 평면(덩어리)로부터 분출선이든 생성이든 감화의 작동이 솟아난다.
들뢰즈는 선들의 이론에서든, 피츠제럴드의 삶 또는 문학에서든, 들리니의 실증적 관찰에서든 이런 이항 대립과는 다는 선들이 있다고 한다. 탈영토화의 제3항이 있다. 이런 예로서, 지스카르 데스탱 정부시절 제3세계, 트로이 전쟁에서 클라이스트가 극작화한 “펜테질리아”에서, 고다르의 새물결(누벨바그)에서, 68년 5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다른 작동, 달리 사유, 같잖은 이야기, 집단들 또는 개체들 안에서 선들의 연구(l’etude de ces lignes) 등을 다루는 방식들을 들뢰즈는 분열분석, 미시정치, 활용론(pragmatique), 다이아그램론, 리좀학, 지도제작 등 여러 이름을 붙인다.
이런 방식은 이항대립 또는 이원론과 다르며, 푸꼬가 장치라는 개념으로 정치를 다루는 것과도 다르다. 들뢰즈는 이항이 아니라 최소 3항을 다루는 토대를 배치라고 부르고, 또한 여러 선들을 생산하는 다양체라고 한다. 이 다양체는 목적과 결과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혁명, 권력, 억압(포획)의 욕망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양체가 혁명이고 권력이고 생성이며 창안이라는 것이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영혼도약으로서 자유이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양체의 미분입자인 이런 특이자는, 여기 지금 있음으로 여러 가지 되기를 실행중이다.
그것은 탈영토화와 재영토와의 과정에서 볼 수 있다. 손이 땅에서 탈영토화하여 나뭇가지를 잡음으로서 나무들 속에서 이동의 재영토화가 이루어지듯이, 두발로 걷기에서 대퇴부의 발달로 초원을 재영토화 하듯이, 입이 숨쉬기와 먹기에서 탈영토화하여 젖가슴에 맞춘 입술로 재영토화 하듯이, 입술이 성관심과 언어(혀, langue)로 재영토화하듯이, 또한 달리기를 넘어서 자동차와 비행기로 탈영토화를 거쳐서 스마트폰으로 전지구적 환경을 재영토화하듯이, 인간은 다양한 선들로 몸과 환경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에 있다. 토지의 이탈 속도와 신체의 미분화 속도를 서로 보완하여 재영토화 과정을 걷고 있다. 정보화의 재영토화는 제국을 형성하는 듯이 보이나, 감화작용에서 소통의 탈영토화는 최종심금을 재설정할 것 같다. 토지와 인민. (2:29, 54V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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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들(Politiques) - I. 151-162(II. 163-176.)
I. (I. 151-162)
* [세 종류의 선들]
개체이건 집단이건 우리는 선들로 이루어졌으며, 선들은 본성 상(de nature) 매우 여럿입니다. 우리를 구성하는 첫째 종류의 선은 선분적(segmentaire)이며, 단단한 선분성(segmentarité, 분절성)에 속합니다(오히려 이미 이런 종류의 많은 선들이 있다). (151)
간단히 모든 종류의 방향 정립들(les directions)에서 잘 규정된 모든 종류의 선분들은 우리들에게 모든 방향으로 선분화된 선들의 꾸러미[봉지, 서죽통(筮竹筒)]들을 잘라낸다.
둘째 선들위에서 훨씬 많은 것들이, 즉 우리의 “역사(histoire, 이야기)”와 다른 리듬을 지닌 생성들, 미시생성들이 일어난다. 그럼에도 매우 수고스럽게 떠올릴 가족들의 이야기, 기준점의 표시들, 기억의 회상들이 있는데, 반면에 우리의 모든 진실한 변화들은 다른 곳에서, 다른 정치에서, 다른 시간에서 다른 개별화에서 일어난다. (152) [세상사는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개인의 선분과 선들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 국가제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도 지도자(대통령)의 선들의 방향과는 다른 방향에서 일어나는 것이 더 많다. 서죽통 속의 서죽들은 별개(변이, 별종)의 단위(집단)로 이루어져 있다. 화천대유(火天大有)도 천화동인(天火同人)도 집단이다. 시대의 주제인지는 비규정적일 뿐이다.]
셋째 종류의 선이 있는데, 이것은 훨씬 더 낯선(étrange) 선이다. ... 문턱을 가로질fj, 계셜할 수 없고 선전제하지 않은 미지의 행선지(la destination)를 향하여 .. 이 선은 단순하고 춧상적이며, 그럼에도 모든 선들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꼬인 선이다: 중력의 선 또는 신속성(célérité)의 선이며, 탈주의 선이며 보다 큰 경사선이다. (“무게 중심을 묘사해야만 하는 선은 확실히 매우 단순한 선이고, 그리고 그가 믿었던 점에 대부분의 경우에는 직선이지만, ... 다른 관점에서는 이 선은 과도하게 불가사의한 어떤 것을 지닌다. 왜냐하면 그에 의해면 이 선은 춤꾼의 영혼이 진행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152)
그럼에도 다른 방식으로 이 선은 운명(un destin)과 반대일지라도 예로부터 언제나(de tout temps) 거기에 있는 선이다. 이 선은 다른 선들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며, 이 선은 오히려 첫째(première) 선이고(먼저이고), 다른 선들이 이것으로부터 파생되었다. (152)
어쨋거나 3가지 선들은 내재적이고, 서로 서로 안으로 얽혀있다. 우리는 손만큼이나 걸쳐있는 선들을 가지고 있다.우리는 손과는 달리 복잡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여러 이름들로 부른 것, - 분열분석, 미시정치, 활용론(pragmatique), 다이아그램론, 리좀학, 지도제작 – 그것은 집단들 또는 개체들 안에서 선들의 연구(l’etude de ces lignes)일 뿐이다. (152-153)
* [피츠제럴드(Fitzgerald, 1896-1940)[마흔넷]의 단절(la coupure, 짤), 균열(la fêlure, 틈), 절편(la rupture, 결별, 폐기) - 짤림, 틈새, 결별(폐기): 절편들에서 푸꼬의 장치들이나 들뢰즈 배치들의 개념으로 세분화의 길을 간다.]
찬탄할 만한 단편소설에서 피츠제럴드는 삶이란 항상 여러 리듬과 여러 속도에 맞추어 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마치 피츠제럴드의 삶이 생생한 드라마인 것처럼, 그는 삶을 몰락의 과정처럼 정의한다. 그의 원문은, 그 몰락이 예시하듯이, 각 문장에 사랑을 불어 넣으면서도, 어둡다(noir). 그는 자신이 천재성을 상실했다고 말했을 때, 그 때 만큼 그가 천재성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는 자기에게서 우선 굵직한 선분들이 있다고 말 한다: 사회적 사건들의 연관 속에서(경제위기, 주식폭락, 소설을 대신하는 영화의 상승, 환타지의 형성, 필요에 따른 모든 종류의 이질성이지만, 이 모든 것의 선분들은 서로 응답하고 서두르며), 부자-빈자, 젊은이-늙은이, 성공-성공의 상실, 건강-질병, 사랑-고갈(tarissement), 창조력-불모성 [이란 선분들이 있다]. 피츠제럴드는 이 선분들을 단절들(coupures, 짤들)이라 부른다. (153)
피츠제럴드는 동시에 다른 것을 말한다. 즉 균열(la fêlure, 틈)의 선들이 있다. 이 선들은 커다란 선분적인 단절의 선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일단 사람들은 접시가 금이 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균열은 이 새로운 선[둘째 선]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오히려 모든 것이 잘 풀릴 때, 또한 모든 것이 다른 선[첫째 선] 위에서 더 잘 풀릴 때이다. 이 새로운 선은 비밀스럽고, 지각불가능하고, 저항을 줄이는 문턱을 표시하고 또는 요구하는 문턱을 상승을 표시한다. (153) [대립항들의 단절의 선과, 그 단절된 항 위에서 균열은 다른 선이다.
또한 피츠제럴드는 셋째 선을 또한 말하는데, 그는 그것을 폐기(la rupture, 단절, 결별)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이 변했다고 한다. .. 사람들은 “절대적” 문턱이 타격을 입었다고 말했다. 비밀은 더 이상 없다. 사람들은 일상인(tout le monde)이 되었으나, 정당하게도 사람들은 “tout-le-monde(세상전체)”로 생성(un devenir)를 만들었다. 사람들 누구나가 지각불가능하게 되었고, 지하저항자(clandestin)로 되었다.(154)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 호기심 있는 여행을 했다. 다른 어조로 말하지만, 마치 키에르케고르에서 신앙의 기사(騎士)가 “나는 오로지 움직임에만 주의를 기울인다.”고 묘사한 것과 약간 비슷하다. .. 그 기사가 벽과 뒤섞이고, 그러나 그 벽은 생명을 얻게 되고, 그 기사는 회색위에 회색으로 칠해진다. 또는 마치 핑크 팬더(la Penthère rose)처럼 세상을 자기 색깔로 칠하고 그는 손상시킬 수 없는 어떤 것을 얻었다. (154)
(이것은 마치 로렌스(Lawrence, 1885-1930)가 몇 쪽의 비슷한 문장들을 묘사한 것과 마찬가지로 호기심 가득하다.) (155) [피츠제럴드, 만화영화 “분홍빛 펜더”, 로렌스는 결별에서 새로운 생성을 그려냈다.]
* [들리니(Deligny, 1913-1996)의 지도제작법: 1. 이항관계, 2. 권력장치, 3. 조직화 평면(덧코드)]
오늘날 들리니(Deligny, 1913-1996)가 자폐아동의 행동과정을 추적하였을 때, 그가 제안한 지도제작법(la cartographie)은 다음과 같다. 먼저 관습적인 선들과 유연한 선들이 있는데, 이 선들에서 어린이는 고리를 만들고 어떤 것을 발견하고 손뼉을 치고 리토르넬로(후렴구)를 흥얼거리고, 자기 발걸음으로 되돌아온다. 그러고 나서 서로 서로 뒤엉켜져 “떠도는(방황하는) 선들”이 있다. 이 모든 선들은 뒤엉켜 있다.들리니는 지리분석, 즉 선들의 분석을 행하는 데, 이 분석은 정신분석학으로부터 멀어진 길을 간다. 이 분석은 자폐아동 뿐만이 아니라 모든 어린이들도 어른들도 관련되어 있다(어떤 이가 길에 걷고 있는 것을 보세요. 만일 그가 단단한 분절성에 지나지게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어떤 자잘한 발명들을 그가 길에 늘어놓는다는 것을 보세요.) 그리고 걸음걸이, 몸짓들, 감화들, 언어, 스타일들에 관련이 있다. (155)
우선 세 가지 선들에 보다 정확한 지위를 부여해야만 할 것이다. (223) [모든 사소한 행위들은 세 가지 선들의 분류에 각각을 포함시킬 수 있다.]
1°. 선분들은 이항 기계들에 의존한다. .. 이항 기계들은 요약적으로 이원론적이 아니라 오히려 이분법적(dichotomiques)이다. .. [그러나 아닌 경우들도 있다.] (백인도 흑인도 아니라면 혼혈이고,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면 여장 남자 ..) (155-156) [이항 대립은 환원 불가능의 경우인데, 세부적으로 둘 사이의 공유적인 제3이 있을 수 있다.]
2°. 선분들은 또한 권력의 장치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 장치들의 사이가 매우 다양하며, 그 각각은 상응하는 선문의 코드와 영토를 고정시킨다. 푸꼬(Foucault, 1926-1984)가 매우 멀리 분석을 이끌었던 권력장치들이다. (156)
예로서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샤를뤼스 남작과 베르뒤랑부인 사이의 코드의 이상작동...
카프카(Kafka, 1883-1924)의 국가와 법의 단절에서 .. [여기서 카프카의 소송을 칸트의 도덕과 정언규약(추상법화)] (156)
그런데 국가 기구는 구체적 배치이며, 이 배치는 사회의 덧코드화의 기계를 실행한다. 따라서 이런 기계는 이번에는 국가 자체가 아니다. 이 기계는 추상기계이며, 이 기계는 우세한 언설들과 사회의 기성질서를, 지배 언어들과 지배 지식들을, 규범적인 행동들과 감정들을, 다른 것들보다 우세한 선분들을 조직화한다. 이 덧코드화 추상기계는 다른 선분들의 동질성, 이것들의 전환성, 이것들의 번역가능성을 보장한다. 이 추상기계는 어떤 우세한 장점하에 선분들 서로간의 이행을 조절한다. (156-157) [추상기계는 유클리드 기하학처럼 이행한다.]
그리스 기하학은 추상기계처럼 기능한다. 이 추상기계는, 도시국가 권력의 구체적 배치의 조건 아래서, 사회적 공간을 조직화했다. .. 덧코드화된 추상기계가 근대국가의 형식으로 기능을 행사한다. 사람들은 국가에 봉사하는 “지식들”을 생각할 수 있고; 오늘날에는 정보학(l’informatique)이 그렇지요?. (157)
따라서 단단한 분절성의 선 위에서, 사람들은 여러 선분들을 코트화하는 권력 장치들, 즉 선분들의 연관을 규제[조정]하는 추상기계, 이 추상기계를 실행하는 국가기구를 구별해야 한다. (157) [푸꼬의 권력장치들 안에, 추상기계와 국가기구를 구별해야한다. 추상기계는 절대자의 법과 같고 이를 실행하는 기구들은 행정기관들인 셈이다. 이 절대자와 같은 법이 통치체제에서 국가의 훈육체제로, 그리고 자본의 소통체제로 전환되고, 여기에 각각 고중세에서는 형상형이상학이, 그리고 근대에서 이성의 광기와 같은 지식들(신칸트학파)이, 그 다음으로 전지구적으로 탈영토화를 실행한 자본에게 정보학이 재영토로 봉사하고 있다. 그러면 응집의 평면에서 무엇이 어떻게 생성되어야 할 것인가? 즉 철학이 혁명적이라고 할 때, 정보학의 시대에 전쟁기계는 무엇을 할 것인가? (54VLB)]
3°결국 모든 단단한 선분들, 단단한 선분성의 모든 선분성이 어떤 평면(un certain plan)을 감싸고 있다. 이 평면은 형태들과 형태들의 발전에 그리고 동시에 주체들과 주체들의 형성작업에 관련있다. 조직화 평면(Plan d’organisation)인데, 이것은 언제나 보충적인 차원 (즉 덧코드화)을 다룬다. 주체의 교육과 형태의 조화로움은 우리 문화를 끊임없이 사로잡고 있다. (157) [조직화의 평면은 내재성의 평면과 다르다.]
플뢰티오(Pierrette Fleutiaux 1941- )는 레이저와 같은 자르는 무서운 렌즈의 예를 든다. (157-158) - [정치체는 이항 대립처럼 보이는 선분들이 있고, 이를 푸꼬는 장치들이라 한다. 그 선분들 최상위에 추상기계가 있고 이 추상기계의 적용으로 국가기구가 있다. 장치들의 견고함은 조직화 평면에서 이다. 이런 평면과 다른 노마드의 평면, 즉 응집평면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 [선들의 다른 전형: 응집 평면에서 – 제3의 선들(un tiers)]
선들의 다른 전형에서는 그 지위는 전혀 다를 것 같다. 그 선분들은 거기에서 동일한 선분들이 아니라서, 문턱을 따라서 처리하고, 생성들과 생성들의 블록을 구성하고, 강도성의 연속체와 흐름의 결합을 표시합니다. 추상기계들도 거기에서 동일한 것들이아니라서, 변이를 일으키고, 덧코드화하지 않고, 각각의 문턱과 각각의 결합에게 이 추상 기계들의 변종[돌연변이] 표시합니다. 평면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서, 응집 평면 또는 내재성 평면(plan de consistance ou d’immanence)이기에, 형태들에서 입자들을 – 입자들 사이에 빠름과 느림만 있는 - 을 뽑아내고, 주체들에서 감화들[파토스] - “이것임(heccéité)”에 의해 개체화들 만을 작업하는 - 을 뽑아낸다. (158) [다른 선은 이항관계의 경계에 또는 탈주선을 생성하는 별종(anomalie)의 선, 제3의 선(un tiers)이다.]
두 항들의 종합 또는 1과 2의 종합이 문제가 아니라, 제3항이 문제이다. 제3항은 둘의 이 이항성이 흔들어 놓고, 또한 이항성의 보충에서도 대립에서도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존 선분들 위에 새로운 한 선분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선분들 가운데서 다른 선분을 그리는 것이다. (158) [이 새로운 선은 두 항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성 또는 되기의 길을 가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말해보자. .. 데스땅(d'Estaing, 1926-2020)은 말하는 동서관계와 남북관계에서 깊은 시냇물이 파여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159) [그의 언설은 1974년-1981년 프랑스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 인데, 제3세계 비동맹이 활발할 때 일 것이다.] )
그리스인과 트로이 사이에서 ‘아마존의 여전사’ - 이들은 어느 편도 아니다. - 클라이스트(Kleist, 1777-1811)의 펜테질리아(Penthésilée(Penthesilea)에서 아마존 여전사들의 전쟁들.. (159)
고다르(Jean-Luc Godard, 1930-): 서로 대치되어 있는, 거대한 선 위에 두 진영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선도 있다. 그 경계선을 통해서 모든 것이 지나가고, 모든 것이 다른 방향으로 분자구조적인 깨어진 선위로 펼친다. (159)
68년 5월[혁명], 그것은 그러한 분자구조적(moléculaire) 선의 폭발이며[2016년 10월-2017년 5월의 촛불 시위], 아마존 여전사들[학생과 노동자]의 침입이며, 기대하지 않은 선을 그린 경계이며, [이는] 마치 재인식하지 못한 채 뽑혀져 나온 블록들처럼 선분들을 끌고 간다. (159) [최순실 농단을 계기로 솟아난 촛불 시위는 다른 선들이 있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선들의 합의과 계약이 잠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문재인 정부의 출범이다.]
* [이항 대립의 변증법과 다른 제3의 흐름: 배치 또는 다양체. - 변증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다양체의 사유가 필요하다. - 결선투표제가 필수적인 이유이다. ]
사람들은 우리가 이원론(le dualisme)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다른 선이 있어도 사람들은 이원화의 구조 속에 복속시키려 한다. 들뢰즈는 그렇지 않다고 하고, 변증법을 매우 싫어한다.] (158)
2개의 항이든 2개 이상의 항이든 항들 사이에서 가장자리 또는 경계와 같은 좁은 협로(un défilé)를 찾아낼 때, 이원론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경계는 집합으로 다양체(une multilicité)를, 부분들의 수와 독립적인 다양체를 만들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배치(un agencement)라고 부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양체이다. 그런데 어떤 배치는 필연적으로 단단하고 이항의 선분들을 허용하고, 또는 가장자리 선들, 탈주의 선 즉 경사의 선들을 허용한다. (160)
[푸꼬의] 권력 장치들은 우리가 보기에 배치들의 구성적인 것이 아니고, 한 차원을 안에서 배치의 일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160) [푸꼬의 장치개념은 구성적이고 부분적이다.]
덧코드화하는 추상적 기계들과 돌연변이의 추상기계 사이에 이원론이 없다. .. 초월적 조직화의 평면들과 응집 평면 또는 내재성 평면(plan de consistance ou d’immanence) 사이에 이원론은 없다. .. 우리는 “사물들”의 두 종류 사이에 이원론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치들 가운데서 차원들의 다양체, 선들의 다양체, 방향들의 다양체를 말한다. (160)
혁명이란(derévolution) 욕망이 없듯이, 권력이란욕망도 억압하는이란욕망도, 억압받는이란욕망도 없다. 그러나 혁명, 억압, 권력 …등은 주어진 배치의 현실적 혼성으로(composantes) 이루어진 선들이다. 선현존하는 선들은 없다. (161)
예들 들면 음악적 배치가 진실이다. .. 오랫동안 음악적 배치들 안에 교회 권력의 역할이 있었다. [이에 비해 다른 차원으로] 음악가들이 [배치의] 그 안에 또는 그 한가운데로 통과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것이 모든 배치의 진실이다. (161) [천개의 고원, 제11장 1837년: 리토르넬로에 대해, 교회를 벗어난 음악에는 어머니의 자장가, 어린이 동요가 들어간다. - 21세기 소통체제에서 BTS의 노래에는 웅얼거림이, 오징어 게임은 어린이 놀이가 체제 속에 침입하고 있다. 우리말 입말에서도 쓴글에서도, 반듯이 그리고 반드시 그리고 ... , 일어나고 있다. (54VLC)]
* [이원론의 종합으로 속좁은 이성의 광기는 이항 대립이 종합으로 지양을 말한다. 그런데 탈영토와 재영토는 지양이 아니라 다른 삶을 생성 또는 창조한다.]
각 경우에서 비교해야만 했을 것, 그것은 한 배치 안에서 나타나는 탈영토와의 운동들과 재영토화의 과정들이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가타리는 이것으로 변할 수 있는 계수들(coefficients, 係數)을 만들기 위해 발명했다. (161)
사람들은 인류의 진화에서 공통의 장소들을 다시 다루리라. 즉 인간은 탈영토화되는 동물(animal deterritorialité)이다. (161)
두 앞발이 손으로 운동수단(locomotrice)이 되어, 탈영토화의 문턱들(des seuils) 또는 양자들(des quanta)[속도를 지닌 수단으로 은유적으로 표현] 이 되고, 운동수단의 손이 나뭇가지를 잡음으로서 숲이 재영토화한다. .. 막대기(bâton)라는 탈영토화된 가지이다. ... 인간의 위대한 발견은 탈영토화된 숲처럼 초원을 통과를 포함한다. 그리고 초원을 재영토화한다. (162)[천개의 고원에서 징기스칸의 예이지만, 우리로서는 바다로 나가서 부딪힌 매끈한 공간을 재영토화하는 것으로 본다.]
[이상에서 거시적으로(형식에 관하여) 환경에 대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라면, 미시적으로(감화에 관하여) 신체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도 있다.]
가슴은 수직으로 곧추선 자세에서, (입술) 외부로 점막을 뒤집음으로써, 탈영토화 된 젖샘(une glande mammaire)이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로서 성관심과 언어(langue, 혀)의 과정도 있다.]
신체들과 환경들은 매우 다른 또한 매우 다른 탈영토화의 속도로, 그리고 미분화된 속도로 주파하고 있다. 이 양자의 보충성은 강도성의 연속체를 형성할 것이고 재영토화의 과정들을 일어나게 할 것이다. [결국] 극한의 경우에서 [그 연속체라는 것,] 그것은 지구 자체가 탈영토화된 된 것이다[우주로 확장을 의미하는가?]. (사막은 증가하고…)[지구를 황폐화시키고]. 노마드란 지구(토지)의 인간(l’homme de la terre)인데, 탈영토화의 인간이다. [지구를 황폐화하고 탈영토화 한다고 해도] 그는 또한 움직이지 않고 환경에 즉 사막과 초원에 묶여있는인간이다. (162) [니체의 “지구(토지)에 충실하라”는 말은 유효하다. 소통체제의 시대 그래도 답은 토지이며, 그 속에 사는 인민이 최종심급이다. (162)]
(8:25, 54VLC)
# 인명 및 용어들 ***
1777 클라이스트(Bernd Heinrich Wilhelm von Kleist, 1777-1811)[마흔넷] 독일의 극작가이다. 판테질레아(Penthésilée (Penthesilea)(écrit en 1805-1807, publié en 1808), Le Prince de Hombourg (Prinz Friedrich von Homburg)(écrit en 1808-1810, paru et créé en 1821), 인형극 시론(Essai sur le théâtre des marionnettes (Über das Marionettentheater), 1810
1813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마흔둘] 덴마크 작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철학자. 실존주의 형성자. 익명(Johannes de Silentio)으로 두려움과 전율(Crainte et Tremblement (Frygt og Bæven, 1843), 같은 해 익명 “콘스탄틴 콘스탄티우스”로 반복(La Répétition, un essai de psychologie expérimentale, (Gjentagelsen, 1843)
1883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마흔하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 1906년 법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1907년 프라하의 보험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의 유일한 의미와 목표는 문학창작에 있었다. 1917년 결핵 진단을 받고 1922년 보험회사에서 퇴직, 1924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결핵요양소 키얼링(Kierling)에서 사망하였다.
1885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마흔다섯] 영국 소설가, 시인 겸 비평가. 『채털리 부인의 사랑, 1928)은 그의 성철학(性哲學)을 펼친 작품이며 외설시비로 오랜 재판을 겪은 후 미국에서는 1959년에, 영국에서는 1960년에야 비로소 완본 출판이 허용되었다. 이 밖에도 많은 중편 및 단편소설, 시집, 여행기, 평론집, 서간집 등이 있다. 『아들과 연인, 1913)
1896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 1896-1940)[마흔넷] 미국의 소설가. 술의 밀조로 거부가 된 주인공의 비극적인 생애를 그린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1925)」로 유명하다. 그 외 할리우드를 다룬 최후의 대군, 전후 1920년 새로운 세대의 선언이라 할 만한 낙원의 이쪽이 있다. 밤은 부드러워(Tender is the Night 1934) / 단편소설 「파열(The Crack Up, 1936)」[La Fêlure, 균열]과 1945년 에세이 유작집 「붕괴/ 파열(The Crack Up)」와는 다른 것 같다. 1935: 피츠제럴드가 병에 걸려, 휴양을 위해 트라이턴과 애슈빌에 머뭄. ‘파열’이라는 에세이집에 실리게 되는 글을 이때 집필.
1913 들리니(Fernand Deligny, 1913-1996) 프랑스 교육자, 사회문화 애호가. 「안정정인 것에 대한 노트들(Cahiers de l’immuable)」(« Voix et voir » Recherches no 18, « Dérives » Recherches no 20 et « Au défaut du langage » Recherches no 24, 1975-1976.) [세 번에 걸쳐 실은 이 글은 어린이 자폐증에 관한 글인 모양이다.]
1925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Qu'est ce qu'un dispositif”, dans Deux régimes de fous et autres textes 1975-1995(2003, David Lapoujade)
1926 지스까르 데스땅(Valéry Giscard d'Estaing, « VGE » 1926-2020) 에꼴 폴리테크니끄 출신, 카톨릭 신자. 프랑스 대통령(de 1974 à 1981).
1926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 철학자. 레이몽 루셀(Raymond Roussel, 1963), 지식의 고고학(L'Archéologie du savoir, 1969),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1975,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Histoire de la sexualité, vol. 1: La volonté de savoir, 1976), 성의 역사 3: 자기 배려(Histoire de la sexualité, 3: Le souci de soi, 1984)
1941 피에레트 플루티오(Pierrette Fleutiaux 1941- ) 프랑스 여성 작가, 여행을 좋아한다. 영어교사 자격증. 소용돌이와 렌즈의 역사(Histoire du gouffre et de la lunette, 1976), Nous sommes éternels, 1990, L'Os d'aurochs, 2007
1930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 프랑스, 스위스의 영화감독, 영화 각본가, 영화 평론가. 1960년대 프랑스의 영화 운동인 누벨바그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판테질레이아(Penthésilée, Πενθεσίλεια / Penthesíleia), 그리스 신화에서 아마존족의 여왕.클라이스트(Kleist, 1777-1811)는 판테질레아(1808)에서, - 펜테질레아는 아킬레스를 처음 본 순간 사랑하게 됩니다. 아킬레스에게 여인국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합니다. 아킬레스도 펜테질레아를 사랑합니다. 전쟁에서 지는 것만이 그녀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아킬레스는 압니다. 펜테질레아에게 '지기 위해' 전투를 신청합니다. 펜테질레아가 아킬레스를 오해해 버립니다. 아킬레스를 검으로 제압해 죽입니다. 그것이 모자라 개떼와 코끼리떼를 풀어 아킬레스의 시체를 짓이깁니다. 아킬레스의 진심과 자신의 행위를 인식한 후에 아킬레스의 주검에다 키스를 하고 아킬레스를 뒤따라 갑니다. 물어뜯음과 키스는 운이 맞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말로만 하는 것을 자신은 행동으로 옮겼다고 하면서,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그를 물어 뜯을 수 있었다고 하면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펜테질레아를 어떻게 이해할까요?
두려움과 떨림(Frygt og Bæven, 1843)(Crainte et Tremblement): 키르케고르가 쓴 책인데, 익명(Johannes de Silentio: Jean le Silencieux)으로 발표
키르케고르가 ‘신앙의 기사’라고 부른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희생 제물로 바친 행위를 묘사한 <조율>, <아브라함에 대한 찬미>, <문제들> 중 ‘예비적 심정 토로’ 부분을 옮겼다. 윤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심미적·윤리적·종교적, 최종적으로는 기독교적 실존에 따라 다각도로 바라보면서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만가능한 행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두려움과 떨림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다.
반복(Gjentagelsen, 1843) 키르케고르가 쓴 책인데, 익명 "콘스탄틴 콘스탄티우스"로 1843년 10월 16일에 출간되었다.
인생의 대부분은 임의적이고 우연한 사건에 의존하고 있으며, 과거의 사건은 재창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우리가 어떤 사건에 대해 연상한 감정의 결과일 뿐, 사실이 아니다. 반복은 과거의 느낌을 다시 되살리려는 시도이다. (54VLB)
핑크 팬더(The Pink Panther) 동명의 단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주인공으로, 분홍색 표범이다. 핑크팬더는 1963년 공개된 미국의 동명 [만화] 영화를 첫 작품으로 하는 영화 시리즈이다. 핑크 팬더(The Pink Panther Show, 1969-1980), Pink Panther and Sons (1984-1985), 핑크 팬더(The Pink Panther, 1993-1995), 핑크 팬더와 친구들(Pink Panther and Pals, 2010)
<< 이 녀석의 이름이다. 핑크 팬더는 핑크색의 팬더가 아니다. 핑크 팬더는 핑크색의 팬서(흑표범)이다. 우리가 아는 마블 시리즈의 영화 블랙 팬서의 그 팬서(흑표범)이다. 그런데 이 녀석 팬서(흑표범) 주제에 팬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팬더[곰]는 동글동글하고, 주변에 널려있는 대나무를 먹으며, 날렵함은 하나도 없는 반면에 팬서[표범]는 길쭉길쭉하고, 날씬날씬하며, 언제라도 사냥감을 향해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전혀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외형, 속도, 행위를 가진 두 동물(팬더와 팬서)이 섞여 한 녀석은 이름이 되었고 한 녀석은 외형이 되었다. 한 마디로 핑크 팬서라는 이름을 가진 핑크색의 판다 외형을 가진 것과 같은 것이다. 핑크 팬더의 이름은 판다(panda)와 팬서(panther)의 횡단, “다”(da)와 “서(ther)”의 삐긋으로 탄생한 것이다.
“핑크 팬더는 아무 것도 모방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복제하지 않고, 분홍 위에 분홍으로, 자기 색깔로 세상을 그린다. 이것이 핑크 팬더의 세계-되기인데, 그것은 핑크 팬더 자신이 지각할 수 없고 기표작용을 하지 않게 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단절[rupture, 결별]을 행하고 스스로 자신의 도주선을 내고 자신의 비평행적 진화를 끝까지 밀고 나간다” - 천개의 고원, 서문 리좀 27 page
– 류수정, 남산강학원, 19-09-01 15:07
http://kungfus.net/bbs/board.php?bo_table=0407&wr_id=759>>
인식(epistêmê) [ >> 박홍규: 테아이테토스편 처음에 인식(epistêmê)이 뭐냐고 질문을 하니까 여러 가지 개개의 인식을 열거했지? 그러니까 그러지 말고 하나, <여럿에 걸친 하나(hen epi toû poloû)>를 찾아야 된다고 했어. 그 뜻이 무엇이야? (176)
>박: 여러 인식들이 먼저 있고, 그 인식들의 사상(pragma)은 무엇이냐를 생각해야 돼. <pragma>[프라그마(πρᾶγμα)]는 현대말로 바꾸면 데이터야. 인식의 데이터는 여러 가지의 인식들이야. 그것은 인식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에 대한 인식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인식들이 있고, 그 인식들에 대한 하나의 정의(definition)를 내려 보자는 것 아냐? (176-177) << - 박홍규, “인식과 존재: 테아이테토스편과 소피스트편”, 형이상학 강의 1: 박홍규전집 2, 민음사, 2007(1995) pp. 176-247.]
[여럿에 걸친 하나, 공통성을 찾는 의미일 것이다. 공통성은 인식상 인접성 또는 친밀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감성(감관)에 기초하는 것 같다. 그리고 유사성(닮음)에 의한 공통을 찾는 일반화라는 점에서 개념화에 가깝다. 그리고 이런 여럿을 최종의 하나로 모으는 것은 추상화 방식이다. 이런 과정은 형상화의 길이며, 제도 속에 기구화, 제도화의 길과 닮았으며, 이는 편리와 유용성을 이용하며 제도 기구를 통한 이익의 추구뿐만 아니라, 특수기구로서는 착취를 하는 것도 정복을 통한 몰수(식민)를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런 제도와 국가기구 등에 저항하며 자유를 추구하는 노마드들은 항상 있어왔으며, 이런 노마드들의 저항이 국가와 부딪힐 때 전쟁기계로서 탈주선을 형성하고 생성하기 때문이다.(54VLB)]
광선 망원경(Lunette à royon), [= 레이저.]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광선 망원경(Lunette à royon)>을 찾는다. 이것은 보기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절단하고 재단하기 위해 쓰인다. 그것은 레이저 광선을 발사하고, 거대한 기표작용적 절단이 도처에서 지배하도록 해주며 순간적으로 위협받은 그램분자적 질서를 복원하는 기하학적 도구이다. 재단하는 망원경은 모든 것을 덧코드화한다. (245, 382-383) - Alors on va chercher la terrible Lunette à rayon. Celle-là ne sert pas à voir, mais à couper, à découper. C'est elle, l'instrument géométrique qui émet un rayon lazer, et fait régner partout la grande coupure signifiante, restaure l’ordre molaire un instant menacé.La lunette à découper surcodetoute chose; elle travaille dans la chaire et le sang, mais n’est que géométrie pure, la géométrie comme affaire d’Etat et la physique des courts-voyeurs? - (Ch. 8. 1874: “Trois nouvelle ou qu’est ce qui s’est passé?, 245. in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상층은 표면을 재단하고 덧코드화한다.] [추상적이고 기하적적 선으로 자름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르기 때문에 무시무시하게 자른다. 분절에 따라 자르는 것이 아니다. (54VLB)]
하지만 그들은 재단하는 <la 망원경(Lunette)>이 허울뿐인 기하학적 정의(正義, justice) 아래서 야기하는 끔직한 폐해를 확인하기도 한다. 그들은 예견하고 앞서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들의 눈에는 이미 일어났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247, 385)
[절대공간에 성립하는 기하학적 자름은 허공의 자름인데 비해, 현실에서(토지 위에서) 자름은 중독의 국가의 경계 또는 미국 지도의 텍사스주를 보면 된다. 상층의 무자비한 자름(재단)이다.]
분자구조(조합과 기능) (Le nom « molécule ») provient du latin scientifique molecula, diminutif du nom latin moles, se traduisant par « masse ». 이 개념은 1811년 아보가도르(Avogadro, 1776-1856)에 의해 소개되었다.
Une molécule est une structure de base de la matièreappartenant à la famille des composés covalents(공유결합).
분자단위[분자체(分子體)]: La mole(symbole : mol) est une des unitésde base du Système international, adoptée en 1971, qui est principalement utilisée en physique et en chimie. La mole est la quantité de matière d'un système contenant exactement 6.022 140 76 × 1023entités élémentaires (atomes, ions, molécules, etc.). Ce nombre, appelé « nombre d'Avogadro », 물질량의 SI 단위인 몰(mole, 기호: mol)은 그동안 '탄소-12 12 g 속에 들어있는 원자의 물질량'으로 정의됐다. 2019년에는 탄소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12:11, 54V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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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최종심급: 통합된 절대자로서 하나, 대(對) 공집합과 닮은 토대로서 최종심금.
*부동산과 투기(투자가 아닌)의 문제에서 정치 경제학의 최종심급은 상품의 생산-분배-소비가 아니라, 자본의 탈영토화-재영토화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생산의 기본이 되는 토지가 될 것이다. 규소의 시대에 분배-소비가 소통-소비로 전환에서 토지를 불모성이지만 순회처(휴식처) 쯤으로 되어 가는데 비해, 삶의 순환으로 생명의 귀환처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생활과 활동에서 최종심급은 제도와 법률(또는 자연권)이 아니라 인민(전쟁기계)일 것이다. 자본의 착취에 의해 탈영토가 심화되어 인민이 반지하로 또 지하로 이동하여 이동성이 부족할 수 없는데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노마드를 이룰 수 있는 SNS의 덕분으로 지하에서 지하로 건너뛰기(다리놓기, 가로지르기)로 너울의 파를 펼쳐간다. 이런 전파에서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를 가상성과 투사성에 비해, 입말과 손글이 이미지 속에서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말의 “”(인용) 보다 종이 의 ‘쪽지’가 즉 쓴글이 최종심급이 될 것이다. 이는 구전시대에서 문자시대의 전환 시대에서 이미 음류시인의 가사로 전파와 쓴 글의 전승으로 이어지면서 쓴글[등록, 기록]이 최종심급이 되는 것과 같다. 그 최종심급이 법률이나 신법과 같은 체계 속에 머물 때 제도에 복속되기를 가속화할 것이고 인민들 사이에 노래, 놀이, 문학, 연극, 영화 속으로 흐르는 과정에서 민주화가 전개될 것이다. 철학과 인문학은 쓴글로서 최종심급을 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파되는 과정에서 포획되지 않은 전쟁기계를 수행할 때, 새로운 세상으로 향할 것이다. (54VLB)
** 인식: 일반화(전통논리) 대 같잖은 감화.
** [ >> 박홍규: 테아이테토스편 처음에 인식(epistêmê)이 뭐냐고 질문을 하니까 여러 가지 개개의 인식을 열거했지? 그러니까 그러지 말고 하나, <여럿에 걸친 하나(hen epi toû poloû)>를 찾아야 된다고 했어. 그 뜻이 무엇이야? (176)
>박: 여러 인식들이 먼저 있고, 그 인식들의 사상(pragma)은 무엇이냐를 생각해야 돼. <pragma>[프라그마(πρᾶγμα)]는 현대말로 바꾸면 데이터야. 인식의 데이터는 여러 가지의 인식들이야. 그것은 인식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에 대한 인식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인식들이 있고, 그 인식들에 대한 하나의 정의(definition)를 내려 보자는 것 아냐? (176-177) << - 박홍규, “인식과 존재: 테아이테토스편과 소피스트편”, 형이상학 강의 1: 박홍규전집 2, 민음사, 2007(1995) pp. 176-247.]
[여럿에 걸친 하나, 공통성을 찾는 의미일 것이다. 공통성은 인식상 인접성 또는 친밀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감성(감관)에 기초하는 것 같다. 그리고 유사성(닮음)에 의한 공통을 찾는 일반화라는 점에서 개념화에 가깝다. 그리고 이런 여럿을 최종의 하나로 모으는 것은 추상화 방식이다. 이런 과정은 형상화의 길이며, 제도 속에 기구화, 제도화의 길과 닮았으며, 이는 편리와 유용성을 이용하며 제도 기구를 통한 이익의 추구뿐만 아니라, 특수기구로서는 착취를 하는 것도 정복을 통한 몰수(식민)를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런 제도와 국가기구 등에 저항하며 자유를 추구하는 노마드들은 항상 있어왔으며, 이런 노마드들의 저항이 국가와 부딪힐 때 전쟁기계로서 탈주선을 형성하고 생성하기 때문이다.(54VL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