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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천불상의 표류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천불상
🧧표류와 불교
글, 이종수(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성리학이 통치 이념이던 조선 시대에 불교는 이웃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왜구의 활동을 막기 위한 바닷길의 봉쇄로 이마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고가 그 길을 이어주기도 했다. 표류로 인해 일본을 거쳐 돌아온 대흥사 천불상처럼 말이다. 당시 이 불상을 싣고 가던 승려 현정은 그때의 일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국에서의 풍경까지도 고스란히 담았다.
『기 풍계선사 현정 표해록(記溪禪師正漂海錄)』 표지 (송광사성보박물관)
15세기 이후 조선과 중국 정부는 왜구의 활동을 근절하기 위해 해상을 봉쇄하고, 몇 군데의 항구만을 개방하여 일본과의 무역을 허락하였다. 조선은 건국 이후 중국과는 육로를 통해 교류하고 일본과는 동래포구로 장소를 한정하여 교류하였다. 그 때문에 중국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의 출발점이던 서해안 곳곳의 포구는 점차 그 생명력을 잃어갔다. 신라 시대에 장보고가 호령하던 해상무역의 중심지 청해진(지금의 완도)은 더 이상 무역항으로서 성장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해상무역의 퇴조는 자연스럽게 불교 교류에도 퇴조를 가져왔다. 조선의 위정자들이 건국 이후 불교를 멀리하고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삼는 유학 숭상 정책을 펼침에 따라 위축되던 불교는 해상무역의 퇴조로 인해 대외 교류마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로 바닷길을 통한 불교의 해외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주로 표류선에 의한 사례에서 발견된다. 불상이나 불서를 싣고 가던 조선의 상선이 풍랑을 만나 일본으로 표류했다가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고, 중국 상선이 일본으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조선으로 표류한 경우도 있었다. 이 가운데 조선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표류 사건은 1681년(숙종 7) 6월 중국 상선의 서해안 임자도 표착이다. 이때 표류선을 통해 전래된 수천 권의 불서는 조선 후기 불교 강원(講院)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불상을 싣고 가던 조선 배가 일본에 표류한 사건도 있었다. 해남 대흥사 승려 풍계 현정(楓溪 實正)이 1821년(순조 21)에 저술한 『일본 표해록(日本漂海錄)』에 그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현정의 『일본 표해록』은 송광사성보박물관과 영남대 동빈문고(東濱文庫)에 소장되어 있으며 모두 필사본이다. 송광사 소장본은 표제에 표해록단(漂海錄)'이라고 되어 있고, 1면에는 19세기 문인 수암(睡菴) 정윤용(1792~1865)의 서문인 「기 풍계선사 현정 표해록(記楓溪禪師賢正漂海錄)」이 실려 있으며, 7면부터 '일본 표해록'이라는 제목으로 본문이 시작된다. 총 1책 27장이며 한면에 10행 17~18자의 글자가 필사되어 있다. 영남대 소장본은 『고고미술』 제5권 제1호(한국미술사학회, 1964)에 실려 있는 자료를 보면, 정윤용의 서문이 없고 송광사 소장본의 글자와 차이가 있다. 동국대학교 출판부에서 『일본표해록」을 『한국불교전서』 제10책에 수록하였는데, 앞의 두 필사본 가운데 송광사 소장본을 저본으로 하고 영남대 소장본을 대교하여 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현재는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홈페이지에서 『한국불교전서』에 수록된 『일본 표해록』의 원문과 번역문을 검색할 수 있다.
『일본 표해록』의 저자 풍계 현정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일본 표해록』 말미에서 스스로 '능주(綾州)쌍봉사(雙峰寺)의 승려' 라고 하였으므로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 쌍봉사에서 출가한 승려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 위창(董滄) 오세창(1864~1953)이 쓴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석풍계(釋楓溪)」 항목에 그에 대한 짤막한 기록이 남아 전한다.
“그림 그리는 화원 승려로 광주의 원효사에 있었다. 해남 대흥사의 천불상을 경주의 석굴암에서 만든 지 여러 해 만에 일이 끝나 배에 싣고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서 일본의 장기도(長崎島)에 정박하게 되었다. 그런데 싣고 있던 천불상이 홀연히 광명을 나타내니 일본 사람들이 대단히 이상히 여기고 신앙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현정은 천불상을 봉안하고 대흥사에 3년을 더 머물다가 돌아와서 표해록을 지었다. 그 제자 해운이 또한 화원으로서 세상에 이름났다.”
위의 기록으로 볼 때 현정은 당시에 화원으로 이름난 승려였던 것 같다. 범해 각안(梵海 覺岸, 1820~1896)이 쓴 「전불조성약기(千佛造成略記)」에 의하면, 현정이 천불을 조성할 때 처음에 경산(京山) 화원 8명으로 일을 시작하였지만, 점안(點眼)을 할 때는 경산 화원 9명, 영남 화원 24명, 전라도 화원 11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현정은 영남과 호남의 화원 수십 명을 동원할 정도의 역량을 가진 화원 승려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대흥사 천불상 조성의 배경 및 장소
현정은 『일본 표해록』에서 천불상을 조성하게 된 배경을 대흥사 완호대사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완호대사는 추사 김정희의 친구이자 다
성(茶聖)으로 추앙받았던 초의 의순(艸衣 意恂, 1786~1866)의 스승인 윤우(1758~1826)로 훗날 대흥사 제10대 강사로 추대되어 대흥사를 중건한 스님이다. 1811년(순조 11) 2월에 대흥사에 불이 나서 전각 세 개만 남고 아홉 전각이 모두 소실되자 완호대사는 중창 불사를 시작하여 1812년 5월에 극락전·용화당 지장전 등을 중건하였고, 이후 천불전(千佛殿)을 조성하고 천불을 봉안하기 위해 화원승 현정을 초빙하여 1817년 천불상을 봉안하였던 것이다.
완호대사의 부탁을 받은 현정은 천불상을 조성하기 위해 경주 불석산으로 갔다. 경주는 예로부터 옥돌이 유명하여 '경주 돌이면 다 옥돌인가?'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경주 옥돌로 만든 대표적인 불상으로 직지사 천불상이 있다. 『직지사지』에 수록된 「천불조성기」에 의하면, 직지사 천불상은 1656년(효종 7) 경잠(景) 스님이 처음 조성하였으며, 1784년(정조 8)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걸쳐 259위의 불상을 경주 기림사에서 새로 조성하여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경북 신흥암 아미타불상·운문사 내원암 아미타불상 등 현재 전국 각지에는 경주 옥돌로 만든 불상들이 다수 있다. 그리고 현존하지는 않지만 1654년 법성이 지리산 쌍계사 나한전에 봉안한 십육나한상 역시 경주 옥돌로 조성한 것이었다. 그런데 불석산의 이름이나 위치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완호대사비명」에서는 “기림사에서 천불상을 완성하였다.” 라고 하였고, 『근역서화징』에서는 “천불을 경주 석굴암에서 조상하였다.” 라고 하였으므로 불석산은 기림사와 석굴암 근처로 추정된다.
🧶천불상의 운반과 일본 표착
천불 조성의 최종적인 단계는 점안식이다. 천불전의 중앙에 봉안하는 1위는 별도로 조성하므로 총 999위의 불상을 경주 불석으로 조성하였다. 이에 대해 범해 각안의 「천불조성약기」에서는 1817년 10월 18일 경산 화원 9명이 333위를 점안하고, 19일 영남 화원 24명이 333위를 점안하고, 20일 전라도화원 11명이 333위를 점안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 표해록』에서는 11월에 공사를 마치고 11월 16일에 경주 장진포로 운반하였다고 하였다.
불석산에서 장진포까지 천불을 운반하고 다시 완도 상선에 실어 11월 18일에 배를 띄웠다. 완도 상선이 23일에 울산 장생포에 도착하였다고 하였으니 5일이 걸린 셈이다.
그런데 배 한 척에 천불을 싣고 운반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마침 장생포에서 해남으로 가려던 함경도 홍원 상선을 빌릴 수 있었다. 홍원 상선이 더 큰 배였기 때문에 768위를 옮겨 싣고 완도 상선에는 232위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홍원 상선에는 승려 15인과 속인 12명이 탔고 완도 상선에는 7명이 승선하였다. 두 배는 24
에 장생포를 출발하여 항해하였는데 바람이 좋지 않아 울산 군령포에 정박하여 하룻밤을 보낸 뒤 25일에 다시 출발하였다.
그런데 동래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서북풍이 불어닥쳤다. 완도 상선은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해안을 따라 동래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홍원 상선은 크기가 커서 해안에 배를 정박시킬 수가 없었다.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떠밀려갔고 기센 바람 탓에 아무리 돛을 돌리려 해도 돌릴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바람에 배를 맡기고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바람이 그치면 배도 멈추고 바람이 불면 배도 움직었다. 그렇게 이틀 밤낮을 지새우고 27일 저녁에, 멀리 배 한 척을 발견하고 그 배를 따라갔다. 어둠이 깊어진 후 어떤 곳에 배를 정박하였는데 칠흑같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멀고 가까운 곳곳에 희미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고, 멀리 마을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서로 이어졌다. 비록 어느 지방인지는 알지 못하였지만 일본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일본의 조선 표류민 처리
현정 일행은 배가 정박한 후에야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류하던 이틀 동안 한 톨의 곡식도 입에 넣지 못하였고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하였는데 배고픈 줄도, 졸린 줄도 몰랐다. 그런지라 배가 정박하자마자 모두 혼절하여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이튿날 해가 뜨고 그제야 일어나 비로소 밥을 해 먹고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살펴보니, 포구 마을이었는데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바닷물이 한 굽이 흘러들어와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호수의 너비는 3리쯤 되었고 길이는 10리쯤 되었으며, 호수의 입구 밑바닥에 뾰족하게 삐져나온 암초가 곳곳에 있었다. 산의 형세는 맑고 아름다웠으며 물의 형세는 거울처럼 잠잠했다. 포구 마을에는 인가(人家) 30여 채가 있었는데 기와집이 들쑥날쑥 있는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곳곳에 모여서 볼 뿐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장교(將校) 같은 어떤 사람이 종자 한 명을 데리고 와서 종이와 붓을 가지고 글을 써서 물었다. “어느 나라 어느 읍에 사는 사람이오?"현정이 대답하였다. “조선국 전라도 대흥사에 있는 풍계대사입니다. 경상도 경주 불석산에 가서 옥을 쪼아 천불상을 만들고 배에 실어 운반하다가 동래 앞바다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여기에 오게 된 것입니다.” 현정이 글을 써서 물었다. “여기는 어느 나라 어느 지방입니까?” “일본 사이카이도(西海道) 지쿠젠노쿠니(筑前國) 무나카타군(宗像郡) 오시마우라(大島浦)입니다.”
일행은 11월 28일 아침에 일본 관리들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오시마우라에서 유숙한 지 5일 후, 무나카타군에서 표류선을 호송하기 위해 관선(官船) 1척과 지로선(指路船, 길을 안내하는 배) 1척, 그리고 비선(飛船) 40여 척🎋
현장 일행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그림.우카다 잇케이
<조선표객도朝鮮漂客圖>, 한림대학교박물관
일본(日本)
가경정축대흥사이안
앞 페이지에 보이는 그림인 「조선표객도」나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 '「다산 정약용의 시간」에 나타나는 기록은 모두 무인년, 1818년이다. 그리고 대흥사 천불전의 불상 중 지금까지 본 사진처럼 일(日)이나 일본(本)이라고 적힌 불상은 다산 정약용의 서간 내용에 따르면 일본으로 표류되었다가 돌아온 불상들을 따로 선별하여 소전(小篆)으로 표시하여 둔 것이다. 그러니 이들도 모두 1818년에 대홍사로 돌아와 천불전에 모셔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위 불상의 등에는 '가경정축대흥사이안(沿慶北大興寺移安)'이라고 적혀 있다.
가경은 1796년부터 1820년까지 사용된 청나라 연호이다.
그리고 정축은 무인보다 한 해 빠른 1817년이다. 더불어 이안(移安)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이운(移延)과 같은 의미다. 이안은 유교식 표현이며 이운은 불교식 표현인데 둘 다 옮기어 모신다.는 의미이다. 이안은 신주나 영령과 같은 것을 옮길 때 쓰는 말이고 이운은 불상이나 불구와 같은 것들을 이미 있던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다산은 일본에서 돌아온 불상에 글씨를 써서 표시를 하라고 했다. 그러나 불상의 등에 남아 있는 글로 미루어 1817년에 먼저 돌아온 232구의 불상에도 더러 표시를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불상이 이렇듯 서로 나뉘어 봉안되었던 까닭은 바로 표류. 1817년 11월 경주에서 조성한 불상을 배에 실을 당시 큰 배와 작은 배에 나뉘어 실었는데 그 중 232구를 실은 작은 배는 그 해에 대흥사로 왔다. 그러나 768구를 싣고 있던 큰 배는 표류되어 일본으로 갔다가 이듬해인 1818년 봄에 돌아 왔기 때문에 이러한 표식들이 생겨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