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아함경>의 <수유경水喩經>에서는 성문의 사과四果를 물에 빠진 사람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일곱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1) 물에 빠져서 나오려고 하지 않고 물속에 누워 있는 사람
(2) 물에서 나왔다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는 사람
(3) 물에서 나와 물 위에 머무는 사람
(4) 물에서 나와 물 위에 머물면서 주위를 살피는 사람
(5) 물위에서 주위를 살피며 물을 건너가는 사람
(6) 물을 건너가 피안彼岸에 도달한 사람
(7) 피안에 도달하여 스스로 피안에 도달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곱 종류의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람을 비유한 것입니다.
첫째, 물속에 누워 있는 사람은 불선법不善法에 뒤덮이고 더러움에 물들어, 악법惡法의 과보果報를 받으면서 생사生死의 근본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탐, 진, 치 삼독심三毒心에 마음이 뒤덮여 온갖 번뇌에 시달리면서 허망한 유위를 조작하여 생사의 괴로움을 받고 있는 사람을 물속에 누워 있는 사람에 비유한 것입니다.
둘째, 물에서 나왔다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선법善法을 믿고 지계持戒, 보시布施, 다문多聞, 지혜智慧 등의 선법을 닦고 익히다가 믿음이 견고하지 못하여 뒤에 지계持戒 등의 선법을 상실하는 사람입니다. 물속에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착한 일을 지속적으로 하지 못하고 게을러지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셋째, 물에서 나와 물 위에 머무는 사람은, 믿음이 견고해서 지계 등의 선법을 상실하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믿음에 의지해서 선을 행하고 있지만, 아직 스스로 선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비유한 것입니다.
넷째, 물에서 나와 물 위에 머물면서 주위를 살피는 사람은, 견고한 믿음으로 지계, 보시布施,다문多聞, 지혜智慧 등의 선법을 상실하지 않고, 그 가운데 머물면서 사성제四聖諦를 여실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사성제를 여실하게 앎으로써 신견身見, 계금취견戒禁取見, 의심疑心 등의 세 가지 번뇌가 사라진 사람을 비유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수다원이라고 불렀습니다.
신견身見이란 오온을 자신의 존재로 생각하는 사견邪見을 의미하고, 계금취견戒禁取見은 참된 계율이 아닌 삿된 계율을 계율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의심疑心은 업보의 인과응보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다원은 사성제의 도리를 알아서 무아無我를 확신하고, 삿된 계율을 버리고, 선업에는 즐거운 과보가 있고, 악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물이란 생사의 괴로움이 있는 세간을 의미합니다. 수다원은 세간에 있으면서도 진리를 알아서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으므로,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언제인가는 열반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수다원을 입류入流 또는 예류豫流라고도부릅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열반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흐름에 들어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성제의 견도見道에 해당됩니다. 수다원은 사선四禪을 닦아 사성제라는 진리를 이해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다섯째, 물 위에서 주위를 살피면서 물을 건너가는 사람은, 선법을 상실하지 않고 선법으로 살아가면서, 사성제를 여실하게 알아 탐, 진, 치가 줄어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사다함이라고 불렀습니다. 무아無我의 진리를 알아 무아를 실천함으로써, 탐, 진, 치 삼독심이 많이 제거된 사람을 사다함이라고 합니다.
사다함은 일래一來라고도 부르는데, 아직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에 천상에 갔다가 다시 인간에 돌아와 열반을 성취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존재에 대한 집착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한 차례 더 자기존재에 대한 반성이 요구되는 단계를 사다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다함은 사성제의 수도修道의 단계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물을 건너가 피안에 도달한 사람은, 사성제를 여실하게 알고 탐, 진, 치를 멸한 사람을 비유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아라함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나함은 불환不還이라고도 부릅니다. 아나함은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여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이 성취한 열반은 생사를 떠나서 얻는 것입니다. 즉,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고 있는 사람의 열반입니다. 그래서 비록 열반을 성취했으나 진리를 완전히 성취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일곱째, 피안에 도달하여 자신이 피안에 도달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사성제를 여실하게 알고 실천하여 심해탈과 혜해탈을 성취하고, 해탈지견을 얻은 사람을 비유한 것입니다. 해탈지견을 얻은 사람은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의 삶이 곧 열반이라는 것을, 다시 말해서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자각한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와 같이 아라한은 사성제를 수행하여 오온(生死)의 몸으로 오분법신(涅槃)을 성취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성제의 무학도無學道에 해당됩니다.
<아함경>에서는 이러한 아라한을 수행의 최고의 과보果報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라한의 경지가 부파불교에서는 개인적인 수행의 경지롤 이해되었기 때문에, 대승불교에서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일체 중생이 함께 열반을 성취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이것을 무상정등정각,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불렀습니다. 대승불교의 선정은 개인의 열반이 목적이 아니라 일체 중생의 성불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정바라밀은 일체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으로 선정禪定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