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4계절이 아니었다.
천왕봉을 중심으로 북쪽은 미미한 여름과 극한의 겨울만 존재하였다.
사람들의 불평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왜 이리 더워? 지금이 5월 아냐?”
“너무 추워! 9월도 채 안 되었는데 이거 이상한 거 아냐?”
게다가 미미한 여름에도 가끔 날이 추워지면서 때때로 눈이 내렸다.
나머지 남서쪽 또한, 이상 기온으로 북쪽과 비슷하게 변모되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동쪽 평화마을과 부촌 마을만 4계절이 미미하게 유지되었다.
율도는 해자가 완성되자, 아버지를 기억해 내었다.
율도가 이혼한 아버지를 따라 지리산에 온 것은 그의 나이가 대여섯 살 때였다.
처음 정착한 곳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허름한 움막이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매일 술만 마셨다.
벌컥, 벌컥.
크으~ 취한다. 좋아! 좋아.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율도를 데리고 청학동 도인촌에 자주 데려갔다.
“네 눈으로 똑똑히 보고 배우거라. 이게 이곳의 생존법이야.”
어린 그의 눈에 도인촌의 사람들은 보통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아버지와 창문도 없는 방에서 술을 마셨다.
그런데도 밖에 비가 오는지,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를 알아맞혔다.
또한 예리한 눈빛과 주문만으로도 불을 피웠다.
어떤 땐 손바닥 바람으로 문을 열었다.
휘리릭~. 덜컹.
한밤중에 읍내에 가서 술을 사 온다며 바람같이 사라졌다.
그리곤 이내 술을 들고 오기도 하였다.
나중엔 알았지만 이게 도인들이 사용한다던 염력과 장풍 그리고 순간 이동이었다.
그러다 아버지는 율도를 그곳에서 가장 영험하다던 장 도인에게 맡겼다.
“그래, 네가 율도구나. 내 성심껏 가르쳐 줄 터이니 열심히 하거라.”
“네, 도인님.”
짧은 시간이었지만, 영리한 율도는 장 도인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율도가 산골 마을 아이들처럼 초등학교에 갈 나이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율도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는 율도에게 이런 말을 수시로 했다.
“학교 공부는 다 필요 없어. 넌 그냥 생존 기술만 배우면 돼.”
그리하여 오전에는 자신이 직접 간단한 공부에 대해 가르쳤다.
오후엔 불 피우기, 활쏘기와 체력 훈련 등 생존에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도록 했다. 그때부터 율도는 난리가 나기 전까지 산과 들을 쫓아다녔다.
동물을 사냥하거나, 마을 사람들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지냈다.
그런 즈음 두 곳의 동시 원전 붕괴로 세상에 난리가 났다.
그때 백일도의 아들, 율도의 나이는 10살이었다.
“때가 왔다.”
난리가 난 날, 아버지는 보란 듯이 마을에 대안학교를 세웠다.
읍내의 학교에 갈 수 없었던 아이들은 죄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데 과목이 보통 학교와는 달랐다.
‘가난하게 살기’, ‘대체에너지 개발과 응용’, ‘자연의 생존전략’, ‘인문학 입문’ 등, 어린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과목들이었다.
부모들이 웅성거렸다.
“아이들에게 뭔 그런 어려운 걸 가르친대?”
“글쎄다. 우리야 알 수가 있나? 그저 백 선생을 믿고 맡길 수밖에.”
대다수 아이를 둔 마을 사람들은 약간의 불평을 했다.
하지만 이 길만이 지리산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임을 애써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율도의 아버지인 백일도를 끝까지 존경한 것이다.
그렇던 율도의 아버지 백일도는 이듬해 그만 술병으로 세상을 떴다.
율도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에 관하여 한기백 소장을 통해 들었다.
아버지는 대학에서 국문과 재학 시 신춘문예에 당선한 시인이었다.
졸업 후에 한때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옮긴 곳이 환경을 취급하는 일간지 기자였다. 그때 아버지는 환경 오염과 지구 황폐화에 관하여 공부를 많이 했다.
그 시기에 한기백 소장과 죽이 맞았다고 했다.
율도는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다음 세상이 온다.”, 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환경 오염으로 곧 이 세상이 멸망하고 다른 세상이 올 것을 예언했다.
그래서 자신을 정규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오롯이 생존에 필요한 교육만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버지의 일기장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이제 인간은 고대의 신(神)에 버금가는 능력을 보유했다.
세상을 창조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다.’
* * *
해자가 완성되고 마을 입구 쪽 방어벽이 완성된 날 저녁이었다.
“한 소장님도 좋아하실 거야.”
율도는 직접 사냥해 온 멧돼지와 노루를 잔치에 내어놓았다.
“다들 모이세요. 그리고 이 맛난 고기를 드세요.”
그러면서 이 작업에 동원된 마을 사람들에게 직접 술을 따르며 그들을 격려했다.
마을 사람들은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율도가 베푼 마을잔치는 흥겹게 끝났다.
그런 날인데도, 한 소장은 자기 연구실에 있었다.
잔치가 거의 끝나는 시간이었다.
똑똑.
율도는 차나 한잔할까, 하고 한기백 소장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지금 하고 계시는 연구가 잘 안되나 봐요. 그래도 오늘은 좀 쉬시지 않고요.”
율도는 늘 그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상, 이제 한기백 소장은 그의 아버지나 진배없었다.
“어서 와. 아냐, 오늘은 쉬고 있었어. 오늘 수고 많았지?”
“수고는요. 마을 분들이 더 수고하였죠.”
율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오랜만에 나랑 술이나 한잔할까? 왜? 아까 많이 마셨냐?”
“아뇨. 그게 아니라, 소장님이 괜찮으신가 해서요.”
나? 난 괜찮아. 그리고 이건 독주가 아니야. 머루주거든.”
한기백 소장의 밝은 얼굴에 율도는 안심했다.
그러지 않아도 마을잔치에서 도를 넘지 않으려고 술을 자제한 참이었다.
“좋아요. 오랜만에 아저씨랑 한잔해요.”
술이 거나하게 오르자 율도가 평소 궁금한 점을 물었다.
“10년 전, 그 난리는 어떻게 해서 일어난 거죠?”
“원전이 폭발한 것 말이냐?”
“네, ”
율도의 질문에 한 소장은 지난날을 떠올렸다.
“원전 폭발 이전에 지구온난화가 문제였어.”
“네?”
“지구온난화와 원전 폭발이 어떤 연관이 있죠?”
“응? 아, 그래.”
한 소장은 율도에게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설명하기로 했다.
“지구온난화는 오존층 파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오존층이 뭔데요?”
“지구 성층권에는 오존이란 물질이 존재하는데, 오존은 지구를 태양의 자외선으로부터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해.”
“그래서요?”
“그런데 지구온난화, 즉 지구가 뜨거워지면 극한과 폭염 현상이 심해져서 태풍, 홍수, 지진 등 이상 기온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난단 말이야.”
“이상 기온 현상이라면.”
“즉 온실효과가 커지면서 대기 순환과 땅속의 열 흐름이 부자연스러워져 지진이 일어나면서 오존층도 파괴가 되는 원리야.”
한 소장의 말에 율도는 대충 그의 말을 이해하였다.
“그래서 소장님은 우리 마을 사람들이라도 화석연료를 쓰지 말라고 하셨군요.”
율도의 재치 있는 대답에 한 소장은 흐뭇했다.
“그렇지.”
사실이었다.
탄소 중립 달성은 현재 지리산 마을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거였다.
“나무를 때면 안 됩니다. 자전거로 발전하세요.”
한 소장은 매일 주민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하지만 당장 화석연료 사용을 중단하고 탈탄소화를 이루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기에다 지리산은 땅이 협소하고 산이 많은 지형이었다.
무엇보다 지리산을 둘러싸고 있는 반구형 막이 문제였다.
그러기에 태양열이나 풍력 에너지는 한계가 있었다.
그제야 율도는 한 소장을 깊이 이해하였다.
“그래서 소장님이 연 발전기에 애착을 가지는 거군요.”
“그렇지. 연 발전기만 완성되면 우리 지리산 사람들은 땔감 등 화석연료를 쓰지 않고도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고 농사짓는 데도 매우 유용할 거야. ”
“그럼요, 제가 아는 소장님은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그제야 한 소장과 율도의 입가에는 웃음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한 소장이 율도에게 매우 중요한 말을 꺼냈다.
“율도 넌, 평화마을 촌장이 이룩해야 할 게 뭐라고 생각하니?”
“그야, 우리 마을 사람들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것이죠. ”
율도의 말에 한 소장은 헛기침한 후, 또박또박 말했다.
“그건 기본이고. 더 중요한 것은 지리산 마을의 통일이야.”
“통일?”
“그래, 돌아가신 네 아버지의 꿈이기도 하지. 안 그러냐?”
“맞아요. 저도 그 부분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좋아,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순간, 율도는 현행 유지되는 마을 규찰대를 떠올렸다.
“규찰대?”
“그렇지. 하지만 이제부터는 규찰대를 넘어 강력한 군대가 필요할 때야.”
“군대?”
율도는 한 소장의 말에 전율이 일었다.
다음 날, 한 소장의 조언대로 율도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율도는 10대부터 50대까지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규합했다.
그리곤 곧바로 실전훈련에 들어갔다.
그들은 칼 쓰기부터 활쏘기, 백병전을 연마했다.
지구력을 기르기 위해 매일 삼신봉을 뛰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팔굽혀 펴기, 무거운 바위 들어 올리기 등은 기본이었다.
율도 또한 예전 도인들에게 배운 무예 실력을 그들 앞에서 선보였다.
그들은 이내 율도를 능가할 정도로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좋아. 이 정도면 지리산 정착촌 어떤 군대보다 강력해.’
한 소장이 뒤에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대견한 녀석 ….’
이렇게 지리산 통일 전쟁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