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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류저우 도착 후 더한 악전고투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꾸이린 여행 중에 저녁에 류저우로 이동해서 묵을 호텔을 물색하여 네댓 군데 전화를 걸어서 외국인 투숙이 된다는 곳에 예약을 해두었었다.
지친 몸을 끌고 류저우역에서 1.9km가량 떨어진 그 호텔에 도착하여 신분확인 등 체크인을 하려했다. 데스크의 중년 여성이 투숙 절차를 밟던 중 시스템이 오류가 나자 말을 바꾸어 외국인은 투숙할 수 없다고 한다. 한 시간 반이 넘도록 프런터 앞에 서서 씨름을 하다가 이도저도 되지 않아 환전을 받고 그 호텔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낯선 도시에서 다른 호텔을 찾아야 하는 황망한 상황에 던져진 것이다. 지도 어플로 검색을 하고 전화로 확인하는 등 악전고투 끝에 몸을 누일 호텔을 찾아 배낭을 내리니 두 시가 가까와 온다.
길었던 어제 하루 무거운 피로가 선사한 깊고 달콤한 잠에서 깨어났다. 호텔 8층 객실 창 밖으로 류강(柳江) 위에 걸린 문혜교(文惠桥; 원후이교)와 정상부에 작은 정자가 자리한 백여 미터 높이 원추형 가학산(驾鹤山; 지아허산)이 눈에 들어온다.
호텔 1층 좁은 식당의 탁자 서너 개와 의자들은 모두 찼고, 여러 투숙객들이 음식이 담긴 접시를 손에 들고 서서 식사를 하거나, 접시에 음식을 담아 호텔 방으로 이동하는 장면은 난생 처음 접하는 광경이다. 나도 볶음밥 계란 흰죽을 그릇과 접시에 담은 후 선 채로 허겁지겁 허한 배를 달랬다.
어제 새벽 한 시쯤 체크인을 할 무렵까지 끊이지 않고 한둘씩 몰려드는 투숙객들을 대응하고 수시로 빈 방이 있는 지 문의 전화를 받으며 버거워 하던 프론터 여직원의 모습이 떠오른다. 매일같이 이런 상황이라면 아침을 제공하는 호텔의 방침이 과연 합리적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옛 백월(百越) 땅이었던 류저우는 진나라 때 계림군, 한나라 초에 남월(南越国)에 각각 속했다가 서한 때인 BC 111년에 담중현(潭中县)이 설치되고 호텔 창밖으로 바라보이던 가학산(驾鹤山) 부근에 치소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인구 419만여 명으로 광시성 내 공업 총 생산량의 약 4분의 1을 점하는 제2의 도시로 '산수 도시 중 공업이 가장 강하고 공업도시 중 중 산수가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고 한다.
호텔 방으로 돌아와서 하루 일정을 구상해 본다. 류강에 둘러싸여 반도처럼 생긴 강 너머 시내 중심부에 있는 류저우박물관, 유후사, 유후공원 등을 먼저 둘러보면 좋을 듯 싶었다. 그 도시의 중심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따처(打车; 앱으로 택시 호출)를 하니 금새 도착한다. 기사분은 좡족 여성으로 이런저런 말을 사근사근 먼저 건네는 모습이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와 보인다.
2.
류강대교(柳江大桥)를 건너고 롱청로(龙城路)를 거쳐 인민공원 옆 오른편에 자리한 류저우박물관 입구에 도착했다. 주말 오전이라 박물관에는 학생들과 어린 아이를 동반한 가족 등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아무런 입장 절차도 없이 입구로 들어선 류저우박물관 1층은 '중화민족공동체의식' 이란 글귀가 적힌 대형 영상홀, 백화점 특별전처럼 넓은 기념품점과 함께 '다공능 전시실'이 자리하는 특이한 구조다.
다공능 전시실(多功能展厅)로 들어서니 오른쪽 벽면에 "당에 충성, 종신토록 공산주의 투쟁, 당과 인민을 위한 희생, 영원히 당을 배반 않겠다"는 내용의 '공산당 입당선서문(入党誓词)'이 채우고 있다. 전시실 다른 벽면엔 "중조 인민의 위대한 우의(中朝人民伟大的友谊)"라는 글귀가 적힌 사진으로 시작해서 참전과 휴전에 이르는 6.25 전쟁의 역사를 사진에 설명을 곁들여 시나리오처럼 전시하고 있다.
안쪽 홀로 들어서자 "사랑하는 사람을 강건너 보내다(我送亲人过大江)" 제하의 항전 기록사진, "영웅찬가(英雄)" 제하의 6.25 참전 내용의 조선족 처녀 출연 영화("英雄儿女") 등 관련 사진과 설명 자료도 눈에 띈다. 다른 지역의 발물관이나 기념관들이 항일투쟁 위주의 역사와 기록을 전시라고 있는데 비해 이곳에는 6.25 전쟁을 소수 민족들을 중화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유화하고 끌어안기 위한 한족 동화정책의 소재로 삼고 있는 듯하여 모골이 송연하다.
그밖에 류저우 공업화 기록, 공작기계 전시물, 항전 70주년 노병들의 류삼강(游三江) 방문, 인민군 소방대원의 활동, 인민해방군인의 방역활동 등 사진자료와, '군민단결여일인(军民团结如一人)' 등 글귀가 담긴 서예작품 등 선전 선동 자료들로 채워져 있다. 옛 군용 전화기, 탄약 상자, 석유 등잔, 알미늄제 군용 물통, 인민해방군 계급장과 공작증(公作证) 등 옛 물품들도 귀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유리창 전시대 속에 하나씩 놓여 있다.
최근 중국은 TV 등 공중매체를 통해 그들이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 칭하는 6.25 휴전 7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애국주의 고취 기록물을 방영 보도하고 있다. 이 전시실도 그 일환으로 기획된 특별전시관이 아닐까 짐작된다. 다기능 전시실 출구 쪽 벽면에 걸린 정치색이 없는 산수 풍경화 몇 점으로는 무거운워진 마음이 개운해질 기미를 보이질 않는다.
3.
중앙 영상홀 건너편 '고생물 화석관'으로 들어서니 서늘한 냉기가 맞아 준다. 이 전시실은 주로 광시성과 인접한 구이저우(贵州) 지역에서 발견된 어룡 화석을 비롯해서 고대 동물들의 뼛조각, 삼엽충 화석 등을 전시하고 있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역사관과 민족관이 자리한다. 역사관은 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원인(原人)의 유골 모형, 주요 유적지 발굴 관련 사진, 진한 시대로부터 근대 중화민국까지 류저우의 연혁 등을 차례로 보여준다. 이어서 서주, 전국(战国), 한, 남조, 당, 송, 명, 청 등 시기별 동종, 창, 칼, 동전, 장신구, 동제 용기, 도기, 청자, 백자, 철제 종, 향로, 청화백자, 석재 건물 초석 등 그리 크지 않은 소품들이 벽면을 따라 전시되어 있다.
그중 '려자비(荔子碑; 리즈 비)'라는 가로세로 1.2×2미터 크기의 비석이 바닥에 놓여 있어 눈길을 잡는다. 유후사(柳侯祠)에 있던 이 비석은 한유(韩愈, 768-824)가 지은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묘비문을 북송 때의 문학가요 서예가이기도 했던 소동파(蘇東波, 1037-1101)의 글씨로 새긴 것으로 비석 내용의 주인공, 작자, 각자(刻者)가 모두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까닭에 '삼절비(三绝碑)'로도 불린다. 유종원은 한유, 소동파, 구양수(欧阳修, 1107-1072)와 함께 '천고문장 사대가(千古文章四大家)'로도 칭송받고 있어 명나라 때의 사학자인 왕세정(王世贞)은 이 비석을 "천하제일비(天下第一碑)”라 칭하기도 했다.
유종원 실물 크기 모형과 함께 그의 소개에 이어 남송 때인 1132년 왕안중(王安中) 등 3인이 가학산(驾鹤山; 지아허산)에 광시지역 첫 서원인 가학서원을 창건한 사실도 소개하고 있다. 유종원은 당시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과는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던 이곳으로 좌천되어 자사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그의 사후까지 이곳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특이한 뉴(纽)의 철제 종(鍾) 네 점과 명나라 시기 제작된 청화백자 화병의 그림을 평면에 펼쳐 재현한 시의도, 청나라 시기의 세밀한 필치의 꽃무늬가 돋보이는 청화전지화 문양 항아리('青花缠枝花纹罐')와 백매 문양 자기('白梅纹瓷罐')가 특히 눈길을 잡는다. 청나라 시기 약재, 차, 기름, 술, 죽제품 등을 파는 가게와 대장간 등 거리를 재현해 놓은 전시실을 끝으로 역사관을 빠져나왔다.
민족관으로 들어서니 바닥에 평면 시의도(示意图)가 좡족 마을(壮乡), 동족 마을(侗寨) 묘족 마을(苗岭), 야오족 마을(瑶族), 종합전시구 등 순서별 전시실의 구조를 친절히 알려준다. 좡족 코너에는 우마차로 배우자를 태워오는 결혼풍속, 특유의 자수와 복식, 음력 3월3일 '꺼지에(歌节)' 풍속, 각종 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동채(侗寨; 동자이) 구역에서는 온갖 종류의 음식이 올려진 밥상, 바닥을 지상 1미터 높이 초석 기둥 위에 치켜올려 지은 목재 가옥, 특유의 전통 창틀 문양, 삼강동족(三江侗族) 자치현에 178좌가 남아있다는 다층 지붕 양식의 고루, 동족 복식 등을 둘러보았다.
묘족 마을 소개 전시실에는 어구와 농기구, 줄다리기, 라구제(拉鼓节)와 말싸움(斗马; 터우마) 풍속, 대나무 악기 등 전시 내용이 간단하다. 그 중 산록의 너들바위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집채를 올린 주거지 사진이 독특해 보인다.
야오족(瑶族) 마을 전시실에서는 성년식 의례, 의복, 반왕제(盘王节) 등 풍속, 길쭉한 장구처럼 생긴 악기, 전통 음식, 탈과 해학스런 탈놀이 풍속('芒蒿节; 망하오제'), 징처럼 생긴 걸이식 대형 종, 주방용구, 고유의 몸치장 장신구 등 제법 다양한 전시물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종합전시실을 지나며 허리장식, 반지, 귀걸이, 목걸이, 팔찌, 비녀, 모자, 자수, 신발, 등 장신구들을 훑어보았다.
맞은편에 '천만고독(千万孤独)' 표제 아래 유종원의 족적을 소개하는 그림을 곁들인 설명 자료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전시실 안에 놓인 대나무 의자에 잠시 앉아 다리를 쉬게 했다.
박물관 3층엔 '고청동 예술관'과 '부채 회화관'이 양쪽으로 나란히 자리한다. 청동관은 약 2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하상주 춘추전국 시기까지 대략 1500년 기간동안의 중국 청동기 유물 약 15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제기와 생산 도구 위주의 초기 청동기는 춘추시기를 거치며 한나라 때에는 청동 공예가 예술적 세련미를 갖추기에 이른다.
서주(西周) 시대 뿔모양 운뢰문양 청동기, 전국시기 식기, 한대의 청동제 솥과 호랑이 손잡이 뚜껑의 대형 용기, 청동 거울, 전국 시기 청동제 칼 등 각종 병기, 춘추 시기 변형문 동종(变形纹铜甬钟), 수당 및 청대의 동제 북 등 전시물이 그리 많지 않고 적당해서 좋았다.
오른편 '부채 회화관' 전시품은 주로 청나라 시기 작품으로 반지름 20cm 크기의 화선지에 화조도, 산수화, 사군자, 과실도, 신선도, 미인도 등의 그림과 서예 작품들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다.
맞은편 고대비각예술 진열관으로 들어섰다. 중국 최초의 비각은 진나라 때의 '진석고(秦石鼓)'로 알려져 있는데, 각석(刻石), 비갈(碑碍), 마애(摩崖), 석궐(石阙), 석경(石经), 묘지(墓志), 조상기(造像记), 잡류(杂类)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2000여 년의 발전 변화를 거치면서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제작된 비각들은 그 시대의 역사 지리 경제 정치 군사 문화 예술 교육 과학 기술 등 광범위한 분야의 내용을 담고 있어 역사연구의 귀중한 사료이기도 하다. 비각들은 각 시대별 전예해행초(篆隶楷行草) 등 각종 서체를 담고 있어 예술적 가치 또한 높게 평가되고 있다.
전시품 가운데 '리즈 비(荔子碑)' 비각문의 실물 크기 붉은색 바탕 선명한 탁본을 보니, 분명치 않은 내용은 두고서라도 그 미려한 글씨와 균형잡힌 구도 등에서 이 비각이 '삼절비(三绝碑)'나 '천하제일비'로 불리는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을 듯 하다.
다공능 전시실, 화석관, 역사관, 민족관, 고대 비각관 등 다양한 주제의 전시실을 둘러보고 오후 2시경 박물관을 나섰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박물관 관람을 통해 이 지역에서 발굴된 희귀한 고대 유물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이 지역 한족과 소수민족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역사와 문화에 대해 조금 더 이해를 넓히게 되었다. 더불어 공산당과 공산주의 이념의 짙은 그늘 아래 놓인 이곳 류저우의 현실은 중국 내 다른 지역과 조금도 다름 없음을 목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4.
류저우박물관에서 지에팡북로(解放北路)를 건너면 유후공원(柳侯公园)이 나온다. 이 공원은 유종원(柳宗元; 773-819)을 기념하여 청나라 때인 1906년에 조성된 공원으로 그 안에는 유후사(柳侯祠), 유종원 의관묘, 나지(罗池), 감향정(柑香亭) 등의 고적이 자리한다.
여러 출입구 중 공원 서북변 류호(柳湖)가 내려다보이는 북 2문(北二门)으로 들어서서 초목이 어우러진 호젓한 산책길을 따라 남쪽 류후사 쪽으로 향했다. 그 중간에 유종원 시문의 정수와 선정의 공적 그리고 굴곡진 삶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자연석, 조각, 돌 장식물 등을 조합하여 조경해 놓은 공원 안의 작은 정원 유문우경(柳文寓景)이 자리한다. 여기저기 놓인 석재 탁자와 벤치에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패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공원 남서쪽에 의관묘(衣冠墓), 나지, 유후사가 서로 인접하여 자리한다. 의관묘는 류저우 백성들이 유종원을 기리기 위해 세운 지름 4~5미터 화강으로 둘러쌓은 의관총으로 그에 대한 애정과 흠모의 정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케 한다. 청나라 때 중건되고 문화혁명 때 훼손되었다가 1974년 복구되었으며, 제명 '당대 유종원 의관묘(唐代柳宗元衣冠墓)'는 궈모뤄(郭沫若; 1892-1978)가 지은 것이라 한다.
유종원은 개혁이 좌절되고 영주를 거쳐 유주로 좌천된 지 14년 동안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의 아픔을 겪다가 47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사후 8개월 만에 고향인 장안으로 관이 옮겨져 묻혔으나 지금은 무덤을 찾을 길이 없다 하고, 이곳에 의관총이 남아 있으니 그로서는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가.
유종원은 류저우에 머무는 동안 100여 편의 시문을 남겼다고 한다. 대부분 지방 치리, 국사에 대한 관심, 예술적 풍격 등 인생 말년의 그가 품고 있던 사상과 활동의 괘적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한다. 그 중 <강설(江雪)>은 유종원이 유배지인 영주(永州)에서 지은 시로 좌천의 아픔 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외로움 삼키는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새삼 느끼는 감흥이 새롭다.
산이란 산에는 새 한마리 날지 않고
길이란 길에는 사람 자취 끊어졌는데
외로이 떠 있는 배 위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홀로 낚시하는데 겨울 강에는 눈만 내리고
千山鳥飛絶 萬逕人踪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_ 유종원 <江雪(강설)>
나지(罗池; 뤄츠)는 연못 가에 풀과 들꽃이 무성하고 나비가 춤추고 새가 지저귀는 매우 아름다운 곳이라 류종원이 좋아하여 자주 찾았던 장소로 유주의 옛 8경 중의 하나라고 한다.
나지 옆에 자리한 유후사(柳侯祠)는 당나라 때인 822년 '나지묘(羅池庙)'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고 한다. 의문(义门)으로 들어서면 중전과 대전 사이 마당 좌우 벽면을 따라 동서 비랑(碑廊)이 자리하고, 좌우에 호위 무인이 시립한 유종원의 동상이 자리한 대전(大殿), 그 옆으로 비각문 탁본이 전시된 현량사(贤良祠)와 그와 관련된 사료를 전시한 강당(讲堂)이 자리한다.
동쪽 비랑과 담벽 사이에는 낙빈왕, 왕발, 최호, 두보, 이백, 한유, 왕유, 고적, 장계, 맹호연 등 당시 한 시대를 주름잡던 문인들의 실물 크기 소상(塑像)이 도열해 있는데, 각기 다른 모습의 세세한 표정과 자세에서 개개 인물의 성격과 삶을 엿볼 수 있을 듯 싶다.
의문(义门) 옆 자료실에는 '유종원 역사평가' 제하에 한유, 구양수, 소식, 주희, 왕세정 등이 유종원을 평한 글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 마오쩌둥은 "사람과 하늘이 교감하여 서로 승한다(人与天交相胜)"는 유종원의 <천설(天说)> 문구가 '천명론'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아 그를 유물주의 철학가로 단정했는데, 지극히 독단적이고 아전인수격인 평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후사 안에 있다는 여자비(荔子碑) 원본을 보지 못하고 복제본으로 보이는 비랑 벽면의 여자비만 대충 훑어본 것은 내 부주의 때문인지 원본을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인지 아직도 의문이다. 의문으로 나서서 유후공원 남문 쪽에 자리한 유종원의 동상 앞에서 사진을 한 장 남겼다.
앱으로 택시를 불러(打车) 류강(柳江)을 건너 호텔로 향하면서 아름다운 산수와 더불어 유종원으로 인해 아름다운 문향(文香)을 더한 도시가 되었으니, 이곳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기리고 칭송하는 것은 당연하다 싶다. 어제 밤에 이어 오늘 점심도 뤄쓰펀(螺蛳粉)으로 드니 류저우를 조금 더 잘 알게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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