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마 5:6
제목/의에 주린 자의 복
아무리 편견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사심과 편견 없이 일을 처리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가제도 제 편이라는 속담이나 고슴도치도 제새끼는 귀여워한다는 속담은 자기 자식 잘나 보이기는 동물이나 사람이나 같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오만과 편견 속에 살면서도 자신만은 그렇지 않다고 착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경북 대구하면 애향심이 강하고 의리와 뚝심이 있다고 우리들은 생각하는데 타지의 사람들은 대구사람들이 무척 공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말도 축약형이 많고 억양이 억셉니다. 독한 약에 길들여지면 웬만한 약은 듣지 않듯이 보통말은 아예 듣지를 않습니다.
경상도 할머니가 경상도 손자를 데리고 서울 손자네집엘 갔답니다. 자기 딴에는 맛있는 것 해주려고 거실을 왔다갔다하니 서울 손자가 혼란스러워서 아무 것도 못하겠기에 「할머니 자꾸 왔다갔다하지 마세요 아무 것도 못하겠쟎아요」 젊쟎케 말해도 할머니는 들은체만체 계속 왔다갔다하는 겁니다. 그런데 경상도 손자가 딱 한 마디 했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조용해지는 겁니다. 무슨 말을 했을까요? 할매!가 정답입니다.
음식을 만드는 할머니가 숟가락을 입으로 쪽 빨고서 다른 반찬을 만들거든요 서울 손자가 「할머니 그러면 위생적이지 못해요 그러지 마셔요」 충고해도 들은 체도 않더니 경상도 손자가 딱 한마디했는데 할머니가 화들짝 놀라면서 행동이 바뀌었습니다. 무슨 말을 했을까요? 정답은 쫌! 이랍니다. 우수개 소리입니다만 우리들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편견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생각해 보려합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의(義 )"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의를 말하는 원문의 단어는 "디카이오스(δικαιο?)"라는 단어와 "디카이오수네(δικαιοσυνη)"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십시다.
첫째-판단을 의미합니다.
판단의 전제는 편견이 없어야 설득력을 가지게 됩니다. 비록 내가졌다 하더라도 그 판단이 일관성이 있다면 그렇게 속상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의사든 판사든 신이 아니기 때문에 오진할 수도 있고 잘못된 판결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편견이나 오류가 없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란 하나님의 판단이 옳다고 믿는 자를 말합니다.
지금 진행되고있는 독일월드컵축구 아시아지역 예선전의 경우에도 심판들의 판정에 대한 불만들이 높았습니다. 북한과 이란 경기때 이란 문전에서 심판의 애매한 판정이 경기장 난동으로 이어질뻔 했고 급기야는 일본이 경기장을 제3국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판단에 오류와 실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는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이라고 했습니다.
선택한 백성이라는 의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범죄를 하나님은 묵인하지 않고 가차없이 심판했습니다. 또 하나는 아들이라 할지라도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대 전제 앞에 조금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는 "의"로운 판단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객관성을 말합니다.
믿는 자들이 불신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중 하나가 지극히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외치면서도 교회 안과 불신자들에게 적용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자신들끼리는 너무 우호적이지만 불신자들이나 이교도들에게는 적대감과 증오심을 발합니다.
우리 나라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말과 행동은 그 사회의 표준이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고 따랐습니다. 그만큼 보편 타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교회와 지도자들의 위상은 어떠합니까? 표준 이하의 가치관, 윤리관, 지식 등이 개혁의 주체여야 할 교회가 개혁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교육계도 경제계도 스포츠계도 예술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나라 대학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오신 교수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우수합니다. 학생들 가운데서도 우수한 학생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왜 학문이 발전하지 못하고 박사학위를 하려면 외화 낭비하면서 고생스럽게 기를 쓰고 외국에 나가려고 합니까?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곳에서는 혈연, 학연, 지연 때문에 정당한 실력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해서 편견을 가지고 인사를 하고 평가를 하니 세계적인 기준에 맞을 턱이 없습니다.
히딩크 신드롬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업에서는 그의 축구전략을 그대로 기업전략으로 도입하여 체질개선에 시너지 효과를 내고있습니다. 자기철학을 가지고 객관성을 가지고 실력 위주로 선수를 선발하고 집중과 선택을 통하여 한국축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입니다.
셋째-정직입니다.
저는 단언하고 확신합니다. 만일 교회의 성도들과 지도자들이 불신자들로부터 정직하다고 인정만 받는다면 굳이 전도하지 않아도 교회는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지금 우리는 수많은 말 보다 정직을 회복하고 진실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부족해서 국가나 사회가 이렇게 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적은 누룩과 소금이 전체를 변화시키지 않습니까?
요셉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연출해서 무대에 올린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그 유혹을 과감히 물리치려고 하나 보디발의 아내는 끈질긴 실랑이 끝에 요셉의 윗옷을 취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했습니다.
자기의 탐욕이 좌절된 여인은 그 당시 실력자였던 남편 보디발에게 "저가 나를 겁탈하려했다"고 모함합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자 보디발의 아내는 남편에게 이렇게 대 듭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군요. 나를 겁탈하려던 자를 죽이지 않고 옥에 가두다니요" 심한 닦달을 받은 보디발이 "나는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니라고 하면 믿어. 그가 겁탈하려 한 것이 아니고 네가 꼬셨지" 라고 말합니다.
당나라 시인이며 정치가인 白居易(772-846,樂天)가 항주 지사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항주에 덕이 높은 도림(道林)이라는 고승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道의 핵심이 무엇입니까?」물었습니다. 도림은 「악한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행하지 않는 것이오 선한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행하는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너무 평범한 대답을 들은 백거이(락천)은 어이없다는 듯이 「아 그런거야 세 살 먹은 아이들도 아는 소리 아니겠소」 하였습니다. 그 말은 듣고 도림은 정색을 하면서 「그러하오 세 살배기 아니도 아는 것이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것이외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백락천은 옷매무새를 고치고 진심으로 절하여 예를 갖추고 도림을 스승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배부르다"는 의미는 육체적인 배가 부르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만족한다"는 의미입니다.
옳은 일을 했을 때는 죽어도 만족하는 경우가 있고, 불의를 행하면 장수하고 영화를 누려도 불안과 불행 속에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의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 사육신이 살아서 영광과 부귀를 누린 신숙주 보다 더 만족한 삶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불의와 짝하여 이생과 내세에 후회스러운 삶을 사느니 차라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되어서 박해를 받을지언정 영과 육이 만족을 누리는 복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