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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공 임회 산소 합분(배위: 성산이씨)
광주목사증 이조참판 관해 임공 묘갈명 병서
廣州牧使贈吏曹參 觀海林公墓碣銘幷序
금호 임형수 선생에게 어진 조카가 계셨으니 휘(諱)는 회(檜)요 자(字)는 공직(公直)이며 관해(觀海)는 그 호이다. 평택임씨가 영삼사사 회에서 비롯하여 충정공 언수와 충간공 성미가 계셨고, 조선조에 들어와 예빈시 첨정 중이조참판 만근과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준과 예조좌랑 길수가 계셨으니, 이분들이 공의 증조부님, 조부님 그리고 아버님이시다. 좌랑공의 부인 노씨께 소생이 없어서 셋째 형님이신 청양현감 정수의 아드님을 양자로 삼으시니, 이분이 곧 공(公)이시다. 생가의 어머님은 전의(全義)이씨, 현감 진남의 따님이신데, 명종 임술년(1562) 9월에 공을 낳으시니, 용모가 뛰어나시고 겨우 말을 할 수 있으시자 문득 문자를 해득하시고, 6세에 취학하시어 총명함과 지혜로움이 출중하시고, 장성하시면서 시문의 재주가 뛰어나고 빛나서 과거장에 이름이 파다하였다.
선조 임오년(1582)에 진사(進士)에 오르셨는데, 익년 계미년에 연이어 생가의 내외분의 상(喪)을 당하시고, 탈상(脫喪) 전에 또 좌랑공이 별세하시니, 공이 7년간의 복제를 하루같이 하셨다. 탈상 후에 정철(鄭澈) 송강(松江)공의 따님과 혼례를 올리시니, 일찍이 좌랑공이 송강과 더불어 혼약을 하셨다가 8년 만인 이해에 이르러 성혼하게 된 것이다.
계사년(1593)에 노부인의 상을 당하시고, 곧 해주 땅 수양산 아래로 피난하셨으니, 이 때는 송강은 이미 별세하고 시론이 크게 변한 지라, 공이 과거(科擧)출사(出仕)의 일을 그만두시고 시골에서 기거하시면서 글과 술로써 스스로 즐기셨다.
광해군 계해년(1611)에 비로소 대과에 급제하셨는데, 춘추 50이 되 셨는 바, 예에 따라 성균관 전적(典籍)에 제수되셨다. 나주 땅에 김우성이란 자가 있어 같은 마을에서 서로 친하게 지내시다가, 후에 사당 관계로 결연히 단교하셨는데, 공이 급제하고 돌아오는 날에 우성이 와서 경하하거늘 공이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아니하시니, 우성이 원한을 품고 정인홍이이에게 모함하여 장차 배제하려한바, 공이 또한 세상에 뜻이 없어서 다시 시골로 들어가셨다.
계축년(1613)에 다시 전적에 제수되시어 치제관으로 장연(長淵)에 나아 가셨는데, 이 때에 옥사가 크게 일어나 그 중에 임호란 자가 있어 이첨이 공의 이름과 음이 근사한 것으로써 억지로 죄안을 올리고, 공 의 부인과 어린 아들 득붕을 붙잡아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으나 끝내 굴복하지 아니하였다. 공이 장연에서 구류되시어 또한 고문과 태형을 당하시었으나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붓을 끌어당겨 똑바로 대답하시기를 "임호의 호자는 호호기천浩浩其天)의 호자이고 임회의 회(檜)자는 만산송회(萬山松檜)의 회(檜)자"라 하셨다. 이에 공은 양산에 유배되고 득붕은 곤양에 유배되었다. 10년 간 적소(謫所)에 계시다 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공이 예조정랑(禮曹正郎)에 제수(除授)되고 군기시 첨정(僉正)에 전보되셨는데, 조정에서 장차 남한산성을 수축하려고 의논하는데 성주(城主)를 고르기 어려운지라,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맨 먼저 공을 천거하여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시니, 공이 성심을 다하여 계획하시고 조치하신 바에 규모와 법도가 있었다.
갑자년(1634) 봄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도성을 치니 왕이 남쪽으로 파천(播遷)하는지라, 공이 멀리 바라보시며 통곡하시고 빨리 따라가서 호종하려 하시다가 다시 돌이켜 생각하시기를, 지금 시급히 얕은 여울을 막지 않고 저들이 몰려오도록 버려둔다면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다 하시고, 마침내 경내로 돌아와 군졸을 정돈하여 강의 여울을 차단하려 하셨는데, 이날에 이괄의 군사가 안령(鞍嶺)에서 패하여 다만 백 여 명과 더불어 여울을 건너 남으로 내려올 적에 공과 더불어 경안역(慶安驛)에서 서로 만나게 되니 외로운 군병에 오합지졸인지라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져 드디어 잡힌바 되셨다.
이괄의 장수 한명련(韓明璉)이 이괄에게 공을 죽이라 청하고 이괄이 위협하여 굴복시키려 하였으니 공(公)이 꾸짖어 이르되, "나라에서 너에게 훈록을 주고 너에게 작위(爵位)를 높여주었거늘 네가 어찌 감히 반란을 하느냐?" 하시니 이괄이 칼 로 찔러서 공의 몸이 온전한 곳이 없으셨으나 꾸짖음이 끝이지 아니 한지라, 이괄이 그 혀를 끊어 마침내 돌아가셨는데, 때는 갑자년 2월 12일이었다. 급보가 행재소(行在所)에 당도하니 왕이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증직(贈職)과 정려(旌閭)를 명하시고 연로(沿路)에 영구(靈柩)를 호종케 하여 이해 5월에 순천(順天) 고을 북변 모후산(母后山) 건좌(乾坐)에 장사지내고 부인 정씨(鄭氏)를 부장하였다.
아! 공이 가정에서 독실하고 어버이를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며 형제간에 우애하고 은혜가 극곤(極困)한 사람에게 미치게 하며, 사악한 것을 미워하기를 원수와 같이 하심으로 사람들의 시기와 미움을 사게된바, 벼슬길에 오르신지 14년에 조정에 계시기는 겨우 3년이었다. 일찍이 어두운 조정을 만나 또 앞길이 막혀서 훌륭한 재주를 펴지 못하셨으나 문장이 뛰어나고 이름이 문사들 사이에 떨치니 월사(月沙) 이정귀 같은 이가 두 아들에게 명하여 나아가 수업하게 하였고, 저술하 신 바는 거의 계축사화(癸丑士禍)에 유실되고 남은 것은 적소(謫所)에서 음영 한 것과 흘러 전하여 온 바를 베끼고 새겨서 금호집(錦湖集)에 부록으로 실었다.
두 아들이 계셨는데, 장남 득열得悅은 문과로 사간원 헌납이요, 차남은 곧 득붕(得朋)이시니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후배(後配) 이씨에게 삼남삼녀가 계셨으니 아들은 득이(得怡), 득재得材), 득무(得舞)이시다. 득열의 아들은 시이시니 통사랑(通仕郎)이요, 치(峙)는 통덕랑(通德郞)이며 교(嶠)는 출계(出系)하시었다. 득이(得怡)의 아들은 휘(徽), 징(徵), 엄(嚴), 순(峋)이요, 득재(得材)의 아들은 희, 돈이요, 시(峕)의 아들은 구년(舊年), 용년(龍年)이다.
후에 나주 정렬사와 광주 등림사에 배향하고, 모후산 주위가 본래 사패지(賜牌地)였는데 근자에 주암댐 수리의 역사로 큰 호 수를 이루어 공과 정씨 부인의 묘소를 영구 보존할 수 없게 되어서 향선재대종회 발의하여 나주 송월동 선영 아래 건좌(乾坐)의 벌에 천장하게 되니 경오년(1990) 4월 6일의 일이다. 이에 큰 비를 후손 동수가 단독으로 부담하여 세우는데, 공의 유집과 가사를 받들고 와서 나에게 명을 청하니 명에 이르되,
金湖公之姪 금호공소의 조카요
松江之賢壻也송강의 어진 사위로다.
世承令族휼륭한 가문을 바탕으로
仕路亨通관로가 형통하도다.
黨議乖離당파의 어긋남으로
榮枯倏變영화쇠락이 잠깐 사이에 바뀌었는가!
湖畔悲號호반에서 슬피 울고
江津獨支강의 진터에서 홀로 지탱하였도다.
惟其壯烈오직 그 장렬함이
殉國成仁나라 위해 순절하였도다.
文章亦美문장 또한 훌륭하며
才華卓然뛰어나고 아름답도다.
伉儷同隱내외분이 빛을 감추듯 세상을 하직하여
終於昇州저 승주 땅에 묻히었도다.
洪流驟至큰 물이 이르니
移葬羅州나주 땅에 옮겼도다.
先塋在此선영이 여기 계시고
幽宅維吉유택 또한 길하도다.
乃立一碑이에 한 비를 마련하여
巍然永傳높고 높게 세우노라.
경오년(1990) 사월 초순 문학박사 진성 이가원삼가 짓다
錦湖 林先生亭秀,有賢從子,諱日檜,字公直,觀海其號也、平澤之氏,昉 於高麗顉三司事禧,歷忠貞公彦脩,忠簡公成味,入例朝,有禮賓寺僉正贈 吏曹參判萬根,咸鏡北道兵馬節度使畯,禮曹佐郎吉秀,寔於公為會祖大 考若皇考也,佐郎配魯夫人,无育以第三兄青陽縣監貞秀之子子之,乃公 也,本生妣全義 李氏縣令震男之女,以明宗壬戌九月生,生而儁偉,自能 言便解文字,六歲始學,聰慧絶人,稍長詞藻煥發,有聲場屋間,宣祖壬午 陞上庠,癸未連遭本生内外憂,喪未除,而佐郎公又見背,公七年持制如一日,服闋,委禽于鄭松江·澈之門,先是佐郎公,與松江約婚,至是八年而 竟得成親,癸巳遭魯夫人喪,俄避地海西之首陽山下,時松江旣沒,時論大 變,公謝公車業,栖遑海曲,唯以文酒自娛,光海君辛亥始登第,年滿五十, 例授成均館典籍,羅州有金佑成者,同開相摯,後以黨異痛絕之,暨公榮 歸之日,佑成來賀,公不交一語,佑成銜之,慫恿仁弘·爾瞻,欲將擠之謀, 公亦無意於也,復歸海寓.癸丑復除典籍,以致祭官,赴長淵,會獄大起, 中有林浩者,爾瞻以其與公聲相近,勒成罪案,逮公夫人及弱子得朋,苟被 淫刑而終不服,公拘於長淵,備更拷掠,猶不少撓,援筆直對曰:“林浩之浩 字,浩浩其天之浩也,林檜之檜字,滿山松檜之檜也”於是,公配于梁山, 得朋于昆陽,在謫十年而癸亥,仁祖改玉,公乃拜禮曹正郎,轉軍器寺僉 正,朝議將修南漢山城而牧守難其人,申象村,首薦公為廣州牧使,公 盡心規畫,措置有方,甲子春,李适起兵直搗王城,王播于南,公遙望痛哭, 亟欲往從,旋復思之曰:“今不急防淺灘,任被長驅,禍將不測”,逐還州境, 整頓卒伍,以為遮斷江灘之計,是日,适軍敗於鞍嶺,獨與百餘人,渡灘而 南,公與遇於慶安驛,孤旅烏合,不戰而潰,還被執,將韓明璉請适斬公, 适脅之使屈,公罵曰:“國家祿汝勳勞,崇汝爵秩,汝何敢反,汝何敢叛?” 适手劍以刺之,公體無完膚,罵不絕口,适斷其舌途死,二月十二日也,赴 聞行在,上驚悼,命他爵旌間,沿路護櫬以送之,是歲五月,葬于順天治北 母后山枕乾之原,夫人鄭氏附焉,嗚呼,公竺於內行,事親盡忱,友於兄妹, 惠沁窮骨而疾惡如讐,超人猜憎,釋褐十四年,立朝僅三載,即昏朝,復 枳當路,不得不展後才,為文辭,雋逸婉麗,名噪藝苑,李月沙廷龜,命二 子,就而受業,所著述,幾逸於癸丑之禍,遺有謫中吟咏,得於流傳者, 鈔刻以於錦湖集中,有二子,長得悅文科司諫院獻納,次郎得朋天,後配 李氏有三男三女,男得怡,得材,得懋,得悅男置通仕郎,峙通德郎,嶠出, 得怡男徽·徵·嚴·峋,得材男·峘,岩男龜年·龍年,後享羅之烈祠 及光州之登臨,母后山周圍,本賜牌之地而近以住岩水利之役,渰爲大 瀦,公暨鄭夫人幽宅,不得永安,於是,自享先齋大宗會發議,遷葬于羅之 松月洞先兆之下枕乾而封,今庚午載四月六日也,乃琢穹碑,后孫秀, 獨擔其更,復奉公遺集及家史,丐銘於余,銘曰,錦湖猶子,松翁賢甥.席 此美,雲路方亨朝黨之乖,轉眄枯榮澤畔悲吟,江壘孤樽,其壯烈, 為國殉兵,亦有文章,雋逸麗清,雙劒韜彩,嫩昇平水大至矣,遷于錦 城.肆有先兆,神龜亦貞,乃治一碣,樹之崢嶸.
庚午載孟夏上浣,文學博士,眞城李家源,謹撰
觀海公任公會 碑 序 幷銘
🔶 序文 (서문)
夫人之生也 有本有源 → 사람의 삶에는 근본과 뿌리가 있다.
世系之顯 隨德而彰 → 가문의 드러남은 덕에 따라 빛난다.
觀海公任公會 金湖公之姪 松江之賢壻也
→ 관해공 임회는 금호공의 조카이며 송강의 어진 사위이다.
稟性純篤 器宇端凝, 早承庭訓 學有淵源
→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기품이 단정하였으며, 가르침을 일찍 받아 학문에 근원이 깊었다.
旣而出仕 仕路亨通 聲譽日隆 名播於時
→ 벼슬길에 나아가 관로가 형통하고 명성이 날로 높아 세상에 이름이 퍼졌다.
然世道多艱 黨議紛紜, 進退榮枯 倏忽變易
→ 그러나 세상은 험하고 당쟁이 어지러워 영화와 쇠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乃遭時忤志 抑鬱不伸→ 때를 만나지 못해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
或寓跡湖濱 悲歌自遣 或徘徊江津 獨力支撑
→ 호숫가에 머물며 슬픔을 달래고, 강 나루에서 홀로 버텨냈다.
其志愈堅 其節不屈 → 그 뜻은 더욱 굳고 절개는 꺾이지 않았다.
及至國難之際 奮然挺身 以身殉國 成仁取義
→ 나라의 위기에 이르러 몸을 던져 순국하여 인의를 이루었다.
忠義之氣 凜然不可奪也
→ 그 충의의 기상은 늠연하여 빼앗을 수 없다.
其爲人也 文采斐然 詞章典雅 蓋一代之英也
→ 문장 또한 뛰어나 한 시대의 인물이었다.
伉儷同德 終焉偕隱→ 부부가 뜻을 함께하여 함께 세상을 떠났다.
初葬昇州 以安其魄→ 처음에는 승주에 장사 지냈다.
未幾 洪流暴至 塋域不固 乃遷葬羅州
→ 얼마 후 큰 물이 나 묘를 나주로 옮겼다.
今則先塋在斯, 山川環抱 地勢和平
→ 지금은 선영이 이곳에 있어 산수에 둘러싸인 길지이다.
乃立貞石 以誌其實→ 이에 비를 세워 그 사실을 기록한다.
銘 (명)
源遠流長 → 뿌리는 깊고 흐름은 길며
世德其昌 → 가문의 덕이 번성하도다
觀海任公 → +관해공 임공은
金湖之姪 松江之壻 → 금호공의 조카, 송강의 사위라
仕路方亨 → 벼슬길이 형통하다가
時運忽傾 → 시운이 갑자기 기울었도다
湖畔有淚 → 호반에 눈물 있고
江津孤撐 → 강 나루에서 홀로 버텼도다
志不可奪 → 뜻은 빼앗을 수 없고
節不可傾 → 절개는 꺾이지 않았도다
殉國成仁 → 나라 위해 순절하여 인을 이루니
萬古流聲 → 그 이름 만고에 흐르도다
文章燦然 → 문장 빛나고
名亦永傳 → 이름 또한 길이 전하리라
昇州舊阡 → 승주 옛 무덤에서
羅州新阡 → 나주 새 무덤으로 옮겼도다
刻石表德 → 비석에 덕을 새겨
垂示無窮 → 길이 후세에 전하노라
② 임공 요약
觀海公 任公會 金湖公之姪 松江之壻也 仕路亨通 而遭黨議 榮枯倏變
湖濱江津 困而不屈 及國難 殉國成仁 初葬昇州 後遷羅州 立碑以傳
🔶 해석
관해공 임회는 금호공의 조카이며 송강의 사위이다.
벼슬길이 형통하였으나 당쟁으로 영화와 쇠락을 겪었다.
호반과 나루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절개를 지켰다.
나라의 위기에 순절하여 충의를 이루었다.
처음 승주에 묻혔다가 후에 나주로 이장되었으며 비를 세워 전한다.
觀海林公墓碣銘幷序 요약본
1. 인물 개요
관해공 임회(觀海 林公會)는 금호 임형수의 조카이며 송강 정철의 사위로, 명문가에서 태어나 뛰어난 자질과 학문을 겸비한 인물이다.
2. 가계와 출생
평택임씨 명문으로, 충정공·충간공 등의 후손이며 예조좌랑 임길수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명종 17년(1562)에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에 뛰어나 과거장에 이름이 높았다.
3. 생애와 학문
선조 15년(1582)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고 7년간 지극한 효행을 실천하였다.
이후 송강 정철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당쟁 속에서 벼슬을 단념하고 은거하며 학문과 시문에 전념하였다.
4. 관직과 정치적 시련
광해군 3년(1611) 50세에 대과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정적의 모함과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혹독한 고문과 유배를 겪었다.
유배 중에도 절의를 굽히지 않았으며, 인조반정 이후 복권되어 예조정랑·군기시첨정 등을 역임하였다.
5. 광주목사 재임과 공적
신흠의 천거로 광주목사에 임명되어 남한산성 수축 등 국방 준비에 힘쓰며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였다.
6. 순절 (가장 핵심)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왕을 호종하려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경안역에서 항전하다 붙잡혔다.
반란군을 꾸짖으며 끝까지 굴복하지 않아, 결국 참혹한 형벌 속에서 혀까지 끊긴 채 순절하였다.
👉 충절과 기개를 상징하는 대표적 순국 사례
7. 사후 예우
왕이 크게 애도하여 증직(광주목사·이조참판)과 정려를 내렸으며, 순천 모후산에 장사 지냈다.
이후 나주 정렬사·광주 등림사에 배향되었다.
8. 문학과 인품
문장이 뛰어나 당대 문인들에게 높이 평가되었으며, 이정귀 등이 그의 학문을 배우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많은 저술이 계축사화로 소실되고 일부만 전한다.
9. 이장과 비 건립
주암댐 건설로 묘역이 수몰 위기에 놓이자 1990년 나주 송월동 선영으로 이장하였다.
후손이 비를 세우고 문학박사 이가원이 비문을 지었다.
10. 비문 핵심 정신
👉 명문가 출신
👉 당쟁 속 시련
👉 절개와 충의
👉 순국
👉 후세에 길이 전함
11. 초압축 족보용 (최종 정리본)
觀海公 林會
金湖公之姪 松江之壻也 登進士及第 歷仕廣州牧使 遭黨議陷害 流配十年 不屈其節 仁祖二年 李适之亂 抗賊殉國 贈吏曹參判 配享祠宇 後遷葬羅州
해석
관해공 임회는 금호공의 조카이며 송강의 사위이다.진사 및 문과에 급제하고 광주목사를 역임하였다.
당쟁으로 유배를 당하였으나 절개를 지켰다. 이괄의 난 때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사우에 배향되었으며, 후에 나주로 이장되었다.
12. 정리
“당쟁 속에서도 절개를 지켜 끝내 순국한 조선 충신의 전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