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누나(13)
2015년 우리 누나는 텃밭에서 키웠던 고구마 고추
들깨등을 가을 겆이를 해서 고추 가루와 들깨로는
들 기름을 만드셨고 그리고 나에게 전화를 하셔서
밭에 배추를 뽑자고 했다.
금요일 오후에 일을 일찍 끝내고 배추를 뽑아 놓고
다음날 토요일 그 배추를 집으로 날라서 다듬어서
소금에 저려서 내일 김치 담글 준를 다 해놓았다.
우리는 다음날 누나네 집에 가서 김칫속을 만들어
김장을 하기 시작했다.
김치 통을 몇개를 준비해서 누나는 동생들에게
보내줄 것들을 다 담아 놓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늦게까지 일을 마치고 동생들에게
전화를 해서 시간이 나는 대로 김치를 가져 가라고 했다.
그렇게 동생들에게 김치등,등을 동생들에게 나누어
준 누나는 겨울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누나에게 난방용 기름을 사라고 돈을 얼마 내어 놓고...
다른 형제들도 마찬 가지였지만 그 한 사람만
항상 어머니와 누나에게 돈을 뜯어갔다.
12월 초 어느 일요일 아침에 누나네 집엘 갔었는데
얼굴이 아주 좋지 않아 보였다.
나는 누나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 물었더니 속이 않좋아서
동네 의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먹었는데도
속이 영 좋지 않다고 말을 했었다.
그러면 좀 큰 병원엘 가자고 했더니 내일 동네
한의원에 가보아야 하겠다해서 다른 말은 하질 않았다.
그리고 또 한 주가 지나가고 주일 아침에
누나 집에 가서 아침을 먹었는데 얼굴 안색이
너무 않좋아서 다시 물었더니 한의원에서도
침을 맞고 그렇는데도 좋아 질 것질 않다고 했다.
다시 큰 병원에 내일 같이 가보자고 했지만
내일 경과를 보자고만 했다.
그리고 그다음날 월요일 새벽 5시 경에 전화가 왔다.
속이 너무 아프니까 병원엘 가보자고...
부랴 부랴 준비를 하고 새벽같이 누나집에 가서
어머니께는 누나가 병원엘 가야 하니까 잠간 기다리시라 하고
누나와 나는 내 용달차를 타고
이천 의료원엘 가서 접수를 하고 기다려서
순번대로 의사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위 내시경을 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내시경 결과를 보는데 위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질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누나를 잠깐 밖으로 나가 계시라 하니까
누나는 괜찮다고 하시면서 결과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셨다.
의사는 왜 이렇게 될 때까지 몰랐느냐면서 가족
관계를 물으면서 보호자께 연락을 하라고 했다.
내가 보호자이니까 나에게 말을 하면 된다고 했더니
자식도 없냐고 해서 결혼을 안했다 하니까
누나와 나에게 말을 하는데 위암 말기라 했다.
그 말을 들은 후에 나는 너무 놀랐지만 누나는 담담했다.
당장 입원 수속을 하고 입원을 해서 환자 옷으로
갈아 입은 후에 작은 형에게 전화를 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가라고 하셨다.
나는 병원을 나와서 누나 옷을 챙기려 어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가서 옷가지를 챙기고
어머니께는 누나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했으니
작은 형이 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갈 것이라 말씀드렸다.
누나가 어디쯤에 스치로폴 박스가 있으니 그것을
니가 챙겨서 잘 보관하라고 하셨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았지만 그 박스를 차에 싣고
병원에 가 있으니까 두어시간이 지난 후에 형이라는
사람과 형수라는 사람이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왔다.
누나는 어머니께 당분간 둘째네 집에 가 있으라고 하시면서
둘째에게는 어머니를 잘 모시라고 당부를 하셨다.
그것이 약 30년간 서로 의지하며 살던 누나와 어머니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마침 나와 같이 살던 사람이 배가 너무 아파서 병원을
몇군데 다녔는데 ct도 찍고 했는데 병명을 알 수가 없었다.
집사람은 맹장이라고 가는 병원마다 말을 했지만
그 말을 듣는 의사는 없었다.
분당 차병원 산부인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중국에 가서 수술을 받는다고 중국에 가고 없었다.
나는 갑자기 닥친 일이라 어찌 할 바를 몰라서 결국
일하는 것을 포기하고 거의 누나 병실에서 있었다.
며칠 지난 후 마침 그날이 성탄절이었는데
그 목사라는 사람이 누나께 전화를 해서 어머니께서
맏아들 집에 가신다고 하니까 형한테 연락을 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가라고 했다.
누나는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큰 아들 집에가면 엄마는
얼마 살지 못한다고 하면서 둘째가 가져간 돈이
얼마인데 가져간 돈으로 엄마는 그집에서 큰 소리 치면서
살수 있다고 말을 해도 어머니는 여기서는 못산다고
맏아들 집에 간다고 우기셨다.
그때 까지만 해도 다른 형제는 누나가 그렇게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을 몰랐다.
그때 어머니는 치매기가 조금 있었다.
누나는 큰 동생(교수)에게 전화를 해서 사정 설명을 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가라고 하면서 나는 죽더라도
병철이 집에서 죽을란다고 말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큰 아들 집으로 가셨다.
나는 중국에 전화를 해서 집사람이 맹장 수술을 받고
치료 받고 있는 사람에게 빨리 귀국을 하라고
성화를 부렸으며 다 낫지도 않은 사람이 귀국을 하고
누나 병수발을 돕기 위해 병원에 있기로 했다.
그와중에도 그 어떤 사람은 누나가 병원에서 닝거를
맞고 있는데도 그 닝거를 빼고 누나를 주소지 면사무소로
대리고 가서 어떤 용도에 쓸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인감 한통을 배부 받아 갔다고 했다.
집 사람이 오기전 내가 잠간 일 때문에 집에간
사이에 벌어진 일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목사 일을 하는지...
어떻든 다음해 1월 초에 누나는 퇴원을 하고 우리 집으로
내가 모시고 왔다.
그 사이에 큰 형과 동생이 누나를 찾아 이천 병원으로
몇 번 왔다 갔으며 큰 형이 다른 동생들은 어머니와
누나를 모실 동생들이 없으니 네가 누나를 책임지고
내가 어머니를 모실 테니까 지금 누나 있던 집을 팔아서
네가 가지고 있으면서 누나 병원비를 내고 돌아가실 때 까지
네가 잘 모시라고 했다.
누나가 병원에서 우리집으로 오면서 집사람이 회사를
그만 두고 집에서 누나 수발을 들면서 그렇게 지냈다.
누나는 나에게 지난번에 집에서 가지고 온 스치로플
박스를 달라고 했다.
그 박스를 주니까 거기에 통장과 달력 중이에
어떤 사람의 필적으로 2002년 4월 30일 삼천만원
2005년 1월 10일 이천만원 차용증을 쓰고 누나에게서
돈을 빌려간 차용증이 있었으며 집에서 쓰던 농협 통장과
이천만원이 들어 있는 통장, 그 통장을 주면서
이때까지 철이 너가 엄마와 나에게 용돈 주었던 돈과
내가 필요해서 일당 사람을 쓰느니 너에게 일을 도와
달라고 해서 일 했던 일당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네가 구입한 것을 다 돈으로 계산해서 이 통장에 넣었으니
이 돈은 네것이다 하면서 통장을 주셨다.
누나는 무슨 돈이 있어서 오천만원이라는 돈을 그 사람에게
주었느냐 했더니 준 것이 아니라 투자를 했다고 하면서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과연 그 돈을 어디에 썼을까????
2002년 삼천만원이면 땅을 샀으면 지금 삼십억은 넘지 않을까???
한 20일 정도 지나니까 아파서 도저히 집에 못있겠다며
자꾸 병원에 대려 달라고 했다.
우리집 근처 요양병원에 모시고 나와 집사람은 수시로
드나 들었다.
날이 갈수록 더욱 나빠져가고 ...
결국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병원 수 간호사라는 분이 아직은 의식이 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다 하라고 했다.
말은 할 수 없지만 다 알아 듣는다고 했다.
나는 옛날 소사 신앙촌에 와서 부터 나를 그렇게 사랑해
주었던 이야기와 내가 누나 속을 썩인 이야기를 하면서
무슨 말인줄 알아 듣겠느냐 물으면 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서는 산소 마스크를 씌우고 오늘이 고비 입니다.
오늘이 고비 입니다. 이렇게 몇번을 말했다.
그 주 월요일부터 계속 그런 이야기였다.
그때 마다 우리는 밤을 세우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우리 누나 천국에서 하나님과 살기를 바란다고...
그 주 토요일 새벽 1월 29일 새벽 4시 누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형제들에게 다 연락은 했지만 큰 형이라는 사람은
오질 않고, 동생 내외가 와서 내가 들어 놓았던
상조 회사에 연락을 해서 사람들이 오고 해서 의논을
한 끝에 삼일 장을 할 필요없이 이일장으로 하기로 했다.
대구에 사시는 막내 삼촌도 오셨다.
밤에 목사 그 사람이 왔다 갔고 다음날 아침 내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발인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과 성도님들은 마침 그 날이 주일이라서 예배를
드린다며 다 갔으며 나와 동생 내외 그리고 목사집 큰 딸내외
이렇게 화장터로 향했다.
상조회사 사람이 자기도 이 일을 한지가 십년이 넘었지만
누나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며 이런 사람이 천국을
않가면 누가 가겠냐고 말을 했다.
옷 입히는데 하나도 힘이 않들었다는 것이었다.
박 아무게 말처럼 하면 활짝 피어서 갔다는 것이지...
입관식 전에 마지막으로 누나 얼굴을 볼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화장터에서 한 줌의 가루로 나왔을 때
그 나무 상자를 붙잡고 그렇게 울었다.
동생과 조카와 조카 사위를 보내고 집에 와서
뒷 산으로 올라가 누나 뼈를 뿌리고 지에 와서 창문을
열어보니까 산 정상에 남쪽 방향에 소나무 밑에
누나가 잠들었다.
지금도 누나 생각이 나면 뒷 창문을 열어 보지만
동생들을 위해 그렇게 헌신을 했었는데
누나 동생들은 나에게 누나를 어디다 모셨는지
물어 보는 놈 한놈도 없더라니까....
대학교 교수는 학교에서 인성 교육을 시키는지,
목사는 교회에서 무슨 설교를 하는지.....
며칠 전에도 나와 집사람이 누나 있는 곳에 가 보았는데
진달래 꽃망울이 올라와서 얼마 있지 않으면
꽃이 피겠다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