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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안의 민족주의 비판
1. 민족주의의 정체
민족주의는 아주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지만, 이것저것 다 걷어내고 가장 중요한 것을 추리면 '우리민족우월주의'의 준말이다. 세계의 많은 민족 가운데 우리 민족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른 민족이 이루지 못한 성과를 주욱 나열한다. 그러한 자료를 근거로 해서 우리 민족이 가장 뛰어나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어렵지 않게 반론에 부딪힌다. 어느 민족이든 논리상 모든 면에서 뛰어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리상 아프리카의 민족이 에스키모보다 썰매를 더 잘 탈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뛰어나다는 것은 어떤 특정 분야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것을 말한다. 특정 분야 몇 군데에서 뛰어나다는 것만으로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무런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민족주의가 갖는 논리의 맹점이다.
이렇게 민족주의라는 말은 그 말속에 이미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을 갖고 있는데도 자꾸 그것이 옳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렇게 할 때 생기는 이득 때문이다.
출발선의 모순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면 나중에 큰 문제로 발전한다. 처음 출발한 각도가 아무리 작아도 한 참 벗어나면 서로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로 갈라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우리 민족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이면에는 다른 민족을 지배하고자 하는 야욕이 숨어있다. 다른 민족을 지배하고자 하는 야욕은 결국 정신을 강조하여 물질을 취하겠다는 음흉한 생각이다. 그래서 자신의 민족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힘을 강조하고, 그 힘을 강조하는 것은 군비 증강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되면 군국주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안으로 힘을 비축한 군국주의는 반드시 힘이 약한 바깥 나라를 삼킬 수밖에 없다. 내부의 군국주의를 바탕으로 이렇게 밖으로 팽창해나간 것을 제국주의라고 한다. 규모만 다를 뿐 민족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는 동일한 개념이다.
그러나 군국주의가 반드시 초래하는 제국주의의 폐해는 벌써 반세기 전에 전 세계가 경험했다.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나찌즘이 현대 세계에 끼친 악영향은 민족주의를 적당히 이용하면서 군국주의로 발전하여 결국은 전세계를 불바다로 만든 다음에서 그 엔진이 꺼졌다.
민족주의는 이와 같이 위험하다. 그 논리는 더욱 위험하다.
우리민족이 뛰어나다는 것이 남의 민족을 공격한다는 것과 상관없는 일이 아니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없는 것이다. 우리 동네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 강으로 가서 바다로 흐른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다. 그 물길이 동네를 벗어나서 산으로 다시 올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민족주의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순소박하게 우리 민족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런 생각을 하나로 모아서 논의하고 세력을 만들자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
일단 논리화하면 그것은 흐르는 물과 같은 생리를 갖는다. 그것이 민족주의의 위험성이다. 자기네 동네에서 잔치를 하면서 우리가 최고야 라고 생각하고 떠는 것을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그것은 자부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자부심이 어떤 논리를 바탕으로 어떤 욕심에 얹혀서 바깥으로 나가면 그것은 틀림없이 군국주의와 제국주의화로 치닫는다. 요즘 우리 곁에 떠도는 민족주의는 그런 것들이다.
우리 나라는 1900년대 초반부터 일본제국주의의 약탈 대상이었고, 해방과 한국전쟁 뒤에는 군국주의까지 발전한 박정희 정권의 지배하에 있어서 다른 그 어느 나라나 민족보다 더 혹독한 피해를 본 민족이다. 그런 민족이 이제 살기가 좀 나아졌다고 다른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그들과 동일한 논리로 이웃에 대해 군침을 흘린다면 누가 그것을 옳은 일이라고 용납하겠는가?
2. 민족이 과연 있는가?
민족의 범주부터가 문제다. 민족은 다분히 혈통과 문화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어느 혈통까지 민족으로 삼아야 하는가? 우리 민족의 몸에는 엄청나게 많은 민족의 피가 흐른다. 우리 역사에서 나타났다 사라져간 민족만 해도 터기족, 몽골족, 퉁구스족, 길략족, 아이누족, 거란족, 한족, 중국의 한족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혈통이 섞였다. 이중에서 어디까지를 우리 민족의 범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피로 따지자면 한 민족이란 존재하기 힘들다. 민족은 피의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면 문화의 개념인데, 문화의 어떤 측면이 민족을 구성할 것인가? 언어, 역사, 습성, 종교…… 어느 하나를 따져도 우리를 하나로 묶을 만한 만만한 요소는 없다. 아직 민족이라는 것을 합의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논의된 민족주의가 무슨 결론에 도달할 것인가?
따라서 민족주의는 의식 수준이 제 각각인 사람들이 막연한 이웃사촌 감정으로 뭉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저녁에 삼겹살 먹자고 모인 모임과 다를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그것은 <주의>나 <주장>의 근거로 작동하기도 힘들다. 주의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논리는 반드시 그 근거를 요구한다. 스스로 모순을 함축한 민족주의는 그 근거조차 대지 못한다. 논리가 박약한 상태의 주장은 주의가 아니라 감정이다.
사람이 감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가장 열등한 단계의 문제 해결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폭력으로 끝을 맺는다. 이렇게 감정에 의존하는 것은 논리로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감정에 기대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인류 공동의 선을 이룰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3.민족주의의 역사와 현실
설령 이러한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역사 이래로 민족주의가 인류의 평화에 기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빌미만 되었을 뿐이다. 유럽에서는 원래 민족이라는 것이 없었다. 다만 중세의 농노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민족이 탄생한 것은 자본의 등장과 함께 한다. 자본은 반드시 시장을 요구하고, 시장이 필요한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물건을 팔 곳을 구획 짓기 위하여 정권과 국가를 만들었다. 그 국가를 만드는 기본요인은 지역과 혈통이었다. 영국은 섬이니 이 점이 힘들지 않았고, 독일은 게르만족을 중심으로 나라를 엮었으며, 이탈리아는 반도의 이탈리아 민족을 등에 업었으며, 이하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구획이 끝나자 팽창한 자본은 더 이상 물건을 팔아먹지 못하게 되었고, 이웃의 구획을 넘보다가 서로 박 터지게 싸움한 것이 바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이다. 이건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우는 상식이다. 그리고 세계는 이후 새롭게 변화된 자본주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기본 모양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는 일본의 침략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지식인들은 그것을 되찾으려면 이쪽의 힘을 뭉쳐야 했고, 그때 가장 쉽고 반가운 방법으로 이쪽과 저쪽을 구별하는 혈통에 기댄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선언하고 비아인 일본을 타도하기 위하여 아인 조선인이 뭉치자는 주장을 했다. 신채호가 그런 사상의 정점에 섰다. 그리고 그것을 국내에서 문명론으로 밀고간 사람이 최남선을 비롯한 지식인들이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으로 요약했다. 백두산을 근거로 한 우리 민족이 동북아를 지배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문제해결의 방법이 못 된다는 것을 그들의 행적이 보여준다. 민족주의의 모순을 간파한 신채호는 무정부주의로 곧 돌아서고, 무정부주의도 근본해결책이 아님을 간파한 뒤에 마침내 사회주의로 돌아선다. 사회주의자로 돌아선 무렵에 체포되어 결국은 옥사한다. 이런 까닭에 신채호는 해방 후 민족주의를 주장한 남한과 사회주의를 주장한 양쪽에서 동시에 추앙 받는 인물로 부각된다.
최남선이나 이광수 같은 국내의 민족주의 계열은 한 마디로 참혹하다. 1930년대까지 민족주의를 주장하던 사람들은 상황이 어려워지자 모두 친일에 나서 젊은 남자들은 군대에 출전시키고 여자들은 정신대에 동원시킨다. 해방 때까지 민족주의자로 남아 투쟁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대종교 신도들은 일본제국주의의 탄압으로 국내에서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백두산 근처의 깊은 산 속으로 근거지를 옮겨 민족의 정신을 지키고자 하는 눈물겨운 행군을 벌인다. 이들의 피나는 민족 사랑은 국내에 남은 민족주의의 망령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다.
해방 후에는 북한에 들어선 공산주의 정권에 대립하기 위한 방편으로 민족주의가 성립한다. 한국전쟁과 더불어 남한은 공산주의가 궤멸 당하는 바람에 민족주의의 승리로 끝나지만, 이미 한쪽이 사라져버린 상태에서 민족주의는 굳이 강조할 것도 없는 싱거운 물건이 돼버린다. 그래서 박정희가 병영국가를 건설한 1970년대까지 민족주의는 반공주의와 결합한 단순소박한 형태로 유지된다.
그러다가 이 민족주의가 화려하게 부활한 것은 전두환 정권 때이다. 광주를 총칼로 도륙한 전두환 일파는 정권을 잡은 뒤 국민화합을 기치로 잔치마당을 벌였는데, 그때 조용하던 민족주의 세력에게 손을 내밀고 적극 후원했다. 여의도에서 열린 <국풍 81>이 그 잔치였다. 이후 민족주의는 정권의 후원을 받으면서 부도덕한 정권의 정통성을 광고하기 위한 나팔수가 된다.
이상을 보면 민족주의는 늘 음흉한 정권에게 이용당하는 가장 중요한 메뉴이다.
그리고 1980년대 들면 이 민족주의를 이용하려 드는 것이 정치권에 머물지 않고 사회 각 분야로 확산되는 조짐을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역사 왜곡작업을 서슴치 않는다. 있지도 않았던 역사책을 만들어 유포하고, 유치원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상상력으로, 기인들이 산 속에서 나타나서 단군 때의 수련 비법을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위조된 역사책은 특히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많이 나타났다. 그런 책 가운데 가장 뜨겁게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은 규원사화, 환단고기, 부도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려면 좀 정확히 해야 할 것을 책 곳곳에 요즘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말들을 남겨둠으로써 스스로 후대인의 조작임을 드러내고 말았으니, 거짓은 어디에든 흔적을 남기는 법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지적에 대해 모르는 척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말만을 골라서 계속 확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로 쓴 것이 역사의 사실로 둔갑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은 속겠지만, 아는 사람은 그런 말장난에 속을 리가 없을뿐더러 그런 거짓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하거나 무지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해 굳이 무슨 '주의'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도 못 된다는 것을 잘 알 필요가 있다.
4. 활터의 민족주의를 경계한다.
활은 1929년에 <조선의 궁술>로 정리된 후로 거의 70여 년 동안 이론화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부터 활에 관한 책이 몇 권 나오고, 2000년대 들어 인터넷 매체가 활성화되면서 많은 글들이 양산되고 있다.
이 같은 문자화에 힘입어 활이 그 동안의 미지를 걷어내고 이론화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꺼려하거나 경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자화하고 그것을 통해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 아주 우려할 만한 것은 활쏘기를 우리민족우월주의의 증거자료로 이용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우리 활의 장점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우월주의는 규모만 다를 뿐 일본의 파시즘이나 독일의 나치즘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활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 민족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여 그러한 증거자료를 바탕으로 그들만 못한 다른 민족을 침략해도 된다는 논리로 활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런 식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활쏘기가 조명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 민족이 워낙 우월한 민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의 활보다 우리 활이 훨씬 더 성능이 좋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활만 놓고 본다면 이건 그럴 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편협한 민족주의 논리에는 금방 반론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중국의 창, 일본의 칼이 유명한데 그것이 민족성 때문이냐 하는 물음에는 동일한 논리로 답하기가 궁색한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일본의 칼도 우리나라에서 전해준 것이고, 중국도 옛날에는 동이가 다스렸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삼척동자도 다 웃고 넘어질 이 말에 어이없게도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이 민족주의자들이다. 달나라에 우주선이 도착하는 광경이 우리나라 텔레비전에 중계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우리가 쏘아보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이런 궁색한 이론 갖고 무슨 얘기가 되겠는가?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증거는 많이 있다. 세계에서 아무도 만들지 못한 것을 만든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우리 민족이 흉내내지 못한 것들도 세계에는 많다. 만약에 우리가 만든 것을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자료로 쓴다면, 우리가 만들지 못한 다른 민족의 자료들은 모두가 우리의 열등성을 입증하는 자료로 둔갑한다. 이것이 민족주의의 모순이다.
활은 분명히 다른 민족의 것보다 우수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자료로 쓰여서는 안 된다. 우리의 화살촉이 다른 민족의 가슴을 향하는 순간 그들의 총과 대포와 미사일과 핵폭탄은 우리를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5. 활터의 어설픈 민족주의 논리
앞서 보았듯이 민족주의는 아무리 냉정한 시각으로 주장을 해도 스스로 모순에 부딪히게 되어있다. 그런데 그런 냉정함조차도 잃은 글들이 국궁계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예를 들면 편전이 단군 때 쓰던 것이라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허황한 주장은 민족주의 여부를 떠나서 그 사실의 허황함만으로도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딛고 있는 민족주의에게도 일체 도움이 안 된다. 왜냐하면 편전은 고려 때 생긴 것임을 아는 사람은 알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은 그것이 정확할 때 유용한 것이다. 잘못된 지식은 자신의 무지를 탓하기 전에 이미 남의 건전한 지식을 흔듦으로써 평화로운 세계를 파괴하는 악마의 혀가 된다. 게다가 이런 무지한 지식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자료로 활용된다면 그야말로 그것은 사탄의 마음일 것이다. 사람에게 귀가 둘인데 입은 하나인 것은 다름대로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제대로 된 지식으로도 비밀을 밝히기 어려운 것이 활인데, 잘못된 지식으로 접근해서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도 그런 짓을 서슴치 않고 그릇된 지식을 유포시키는 사람은 반드시 무언가 불손한 의도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의도는 개인의 성취를 이루게 할 수는 있지만 궁극에 가서는 활터 전체를 자멸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결코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6. 활의 세계화와 민족주의
활은 현재 모습 그대로 훌륭하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크기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멀리 나간다. 완벽하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우리의 활쏘기가 세계인 모두 즐길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때를 만나면 온 세계인이 즐길 수 있는 상황이 온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무한한 가능성에 가장 큰 족쇄와 암초가 되는 것이 민족주의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단순하게 생각해도 그렇다. 예를 들어 검도가 일본의 우월한 민족성에서 나온 스포츠라면 누가 검도를 배울 것이며, 태극권이 중국 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무술이라고 주장한다면 중국인 외에 누가 그 무술을 배울 것인가?
활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 활이 한민족의 우수성과 우월성을 입증하는 스포츠이니 한 번 배워보라고 한다면 이 세계 어느 민족이 배울 것인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활은 현재의 모습 그대로 완벽하다. 이미 1928년에 스포츠로 정착했고, 현재도 스포츠이다. 그리고 앞으로 여건만 좋아지면 지구촌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는 세계의 스포츠로 성장할 것이다. 여기에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이 상황에서 민족주의를 활에 도입한다면 우리 활은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자료로 악용되고 그렇게 되면 다른 모든 민족을 배제한 채 우리 민족의 소유물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 활이 세계로 뻗어가는 것을 스스로 막는 것이다. 이것이 민족주의가 우리 활에 접근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우리 활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민족주의를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활은 그 자체로 완벽한 그림이다. 거기에다가 굳이 민족주의라는 부실한 물감으로 개칠할 필요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