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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26) - 2024 .08. 09(금)-11(일) |
성지순례 26차의 최대의 적은 더위이다. 유례가 없는 금년의 폭염은 특히 노년층에게는 거의 매일 주의보를 발령한다. 더욱이 경주지역은 비도 내리지 않아 시내 전체를 달구어 열대야는 새벽까지 이어져 잠을 설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성지순례라니 그것도 2박3일이라니 우선 가족의 걱정부터 달래야 했다. 또한 강원도 북쪽으로 국토를 종단하다시피 하여 다시 수원교구 북쪽으로 국토를 횡단하니 이름 그대로 종횡무진인 셈이다.
먼저 춘천교구 시내에 인접해 있는 곰실공소, 춘천교구 주교관과 교육원, 죽림동 순교성지(죽림동 주교좌 성당), 소양로 성당에 이어 인제의 겟세마니 피정의 집, 홍천의 홍천성당, 그리고 원주교구의 풍수원 성당이 계획에 들어있다. 그 다음 수원교구로 가서 지난해에 갔다가 시간이 넘어 못 들어간 양근 성지를 거쳐 서쪽으로 가서 수리산 성지, 손골 성지, 수원 성지까지를 계획으로 한다.
07:00 승용차로 성당 출발. 서울 친구 신 모세는 11시 30분에 곰실 공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중간에 두 번이나 쉬고도 11시에 도착을 하니 모세도 거의 11시 조금 지난 시간에 앞당겨 도착하였다. .
곰실 공소 - 춘천 교구의 출발 및 모태 |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고은리 439-1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동내로 220
춘천 교구의 첫 성당
춘천시 동내면 고은리(古隱里)의 토속 지명은 ‘곰실’이다. 곰실은 ‘뒤쪽에 있는 마을’ 또는 ‘신성한 산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곰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대룡산은 옛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던 정말 신성한 산이었다. 또 일제 강점기에는 곰실을 후상리(後上里), 후중리, 후하리라는 행정지명으로 고쳐 불렀다. 따라서 곰실은 옛날 신성한 산으로 여긴 ‘대룡산 뒤편에 숨어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신유박해(1801) 전후로 수도권 천주교도들이 산간벽지 강원도에 처음 들어온 곳은 횡성군의 풍수원이었다. 특히 순교 복자 신태보 베드로가 40여 명의 교우를 대동하고 풍수원으로 피난을 온 것이 강원도 천주교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선교사도 신부도 없이 가난한 평신도들만으로 큰 교우촌을 이루었다.
이후 박해시대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이 되자 교우촌 신자들은 교구에 꾸준히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여 드디어 1888년 풍수원 성당이 설립되었다. 이후에도 교세가 점점 늘어 1896년 원주 본당이 분할되었고, 1920년에는 춘천지역에 첫 공소를 분할했으니 바로 곰실 공소였던 것이다. 1948년에는 홍천 물굽이 본당(현 양덕원 성당) 을 분할 독립시켰다.
당시 곰실 공소는 본당이 설립되기 전에는 공소의 원본당인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 신부가 해마다 서너 번씩 찾아가 가정집과 공소 강당을 중심으로 사목을 하였으나 교우 수가 늘어나자 본당 설립과 상주 사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엄주언 마르티노 회장 - 춘천지역 가톨릭 전교의 대부
이때 혜성처럼 나타나서 곰실 공소 신앙공동체를 이끈 사람이 있으니 바로 엄주언(嚴柱彦, 마르티노(1872~1955)이었다.
그는 춘천시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태어났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자기 집에 세 들어 살던 체반 장수의 권유로 가톨릭교회 교리서인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곧바로 회심하여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가톨릭 교리를 제대로 배우고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큰 형과 함께 광주(廣州) 천진암 인근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3년간의 광주 생활을 마칠 무렵인 1896년에 나머지 가족도 다 영세한 후 굳은 전교 사명감을 품고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엄 회장은 동네 사람들에게 ‘천주학쟁이’라고 냉대를 받게 된다. 그는 외가 친척의 도움으로 대룡산 자락에 있는 동내면 고은리 윗너부랭이 마을에 폐가를 사서 이주해 그곳에서 화전을 일구며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낮에는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밤에는 사람들을 모아 성경과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남에겐 겸손하고 친절했으나 자신에겐 늘 엄격했다. 장티푸스가 유행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자 그는 가족들조차 손을 대지 않고 방치해 놓은 시신들을 거두어 정성스럽게 염을 하고 홀로시신을 어깨에 메고 뒷산에 매장해 주곤 했다. 이러한 행동에 많은 주민이 감동을 하고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엄주언 회장은 가족과 교우들에게 늘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며, 남의 말을 하지 말고, 진리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며, 죽은 사람 장사를 잘 지내 영혼을 구해주라”고 권면했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의 영혼 구제는 천하의 어떤 복보다 위에 있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엄 회장의 지도로 신앙을 키워간 곰실공소 교우들은 무엇보다 신앙생활에 열심했다. 주일 공소 예절은 물론 매주 수ㆍ금요일에는 단식재와 금육재를 철저히 지켰다. 엄주언 회장은 곰실의 교우수가 300명 넘게 늘어나자 성직자 영입을 추진한다. 그는 신부를 모시기 위해 직접 사제관을 짓고 우물도 팠다. 그리고 서울 주교좌 명동대성당과 강원도의 유일한 본당이던 풍수원 성당을 여러 차례 방문해 뮈텔 주교와 정규하 신부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했다. 이들의 꿈의 결실이 맺어져 1920년 9월 사제품을 받고 풍수원 본당 보좌로 임명된 김유용(金裕龍, 필립보) 신부가 곧바로 춘천 지역으로 파견되면서 곰실 공소는 춘천교구 본당의 모태가 된다.
본당 설립과 춘천 시내로의 진출
김 신부와 엄 회장은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선 춘천 시내에 성당을 지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에 엄 회장의 주도로 곰실 신자들이 성전 건립 기금을 조성한다. 엄 회장은 연령회(煉靈會, 오늘날의 위령회)를 조직해 15세 이상의 모든 교우를 가입시켰다. 회원은 종신토록 1인당 50전씩 거두었고,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짚신 삼기로 성전건립 기금을 모았다. 엄 회장은 1928년 연령회 기금과 자신의 논 다섯 마지기를 팔아춘천 약사리 418번지 김영식의 목조 함석집을 사서 고쳐 성당으로 사용하고 본당을 이전한다. 이때 교우수가 600여 명을 헤아렸다. 엄 회장은 이후 춘천지목구장으로 부임한 퀸란 신부와 함께 춘천 약사리 고개 도토리밭을 사서 성당을 짓는다. 바로 오늘날 춘천교구 주교좌 죽림동성당이다.
본당이 춘천으로 옮겨간 후 곰실 본당은 다시 공소로 격하되었고, 1969년 11월 20일 죽림동 본당에서 효자동 본당이 분가한 후에는 효자동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평신도 지도자의 역할과 사명의 모범
엄주언 회장은 춘천 지역 가톨릭 전교의 대부로서, 죽림동 주교좌 본당의 창설 공로자로서, 그리고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춘천교구민들에게 지금까지 존경받고 있다. 춘천교구는 죽림동 성당의 창설을, 곰실 공소의 지역적 한계에서 벗어나 춘천의 전지역을 공동체로 묶는 본격적인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평가했다.
춘천교구는 1998년 11월 11일 성 마르티노 축일에 엄주언 마르티노 회장을 비롯해 평신도 사도직을 모범적으로 수행하며 춘천지역 선교의 초석이 된 평신도들을 기리기 위해 평신도 추념의 날을 제정하여 매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6년 9월 15일, 춘천 교구는 곰실 공소가 죽림동 주교좌 성당과 춘천 교구의 발상지라는 의미를 살려 효자동 본당 관할에서 죽림동 주교좌본당 관할로 옮겼다. 현재 곰실 공소는 거두리 본당 관할이다.
뭉게구름이 떠가는 파란 하늘에 색조를 맞추듯 파란색 대문이 활짝 열린 문간에는 공소 표지석이 옛날을 증거하듯 서 있다. 맨 먼저 맞이해 주시는 성모님. 그 뒤로 성당 건물이 보인다. 건물은 오직 두 동인데 성당과 사제관.
곰실 공소의 원래의 건물은 6 25때 소실되어 전하지 않고 납북되었다가 생환한 퀸란 신부가 교구를 맡아 새로 건물을 지었는데 이 또한 낡아서 2009년 11월 11일 중창하여 교구장 장익 주교의 주례로 축복을 받았다. 건물은 당시 엄주언 회장과 초기 교우들처럼 소박하고 단촐하다.
성당 내부 또한 이와 같다. 흰색 벽면 아래 · 위로 천장과 마루바닥은 수수한 나무색이다. 제단에는 제대와 독서대가 가지런히 위치하고 제대 뒷벽에는 약간은 특징적인 십자고상이 달려 있다. 그리고 제대 좌우에는 성모상과 예수 성심상이 서 있다. 그리고 벽에는 창문 사이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안배되어 있다.
독특한 제단 중앙 십자고상은 김혜림(베아타) 작가의 작품이다. 제단과 독서대는 김겸순(마리 테레시타, 노틀담수녀회) 수녀가 디자인했다. 성당 바닥은 원목이라고 한다.
사방 흰 벽의 좌우편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돼 있다. 춘천교구 공동체의 발상지이며 효시의 품위에 맞게 성미술 작품들이 잘 갖춰져 있다.
곰실 공소에는 많은 순례자가 끊임없이 찾아오는 곳이다. 침묵 가득한 공소 안에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평생을 봉헌하며 복음을 선포했던 엄주언 회장과 옛 신앙 선조들을 기억하고 그 신앙을 본받고자 기도한다. 꽃이 지닌 가치는 아름다움과 향기이다. 곰실 공소는 신앙의 향기를 지닌 춘천교구의 아름다운 꽃 같은 존재이다.
초기 교우들의 소박한 신앙의 꿈이 담겨있는 곰실 공소를 떠나 다음 일정인 춘천교구 주교관으로 출발했다.
춘천교구 주교관 · 교육원 - 선교활동의 중심이 된 아일랜드 풍의 건축물 |
곰실 공소에서 교구청까지는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11시 반이 조금 지나 교구청 에 도착. 주교관과 교육원을 갈려면 교구청 건물 로비를 통과해야 한다. 교구청 로비에는 궁핍함이 느껴지는 성모자상이 서 있고 옆에 가난과 성체라는 구절이 씌어져있어 순례자에게 방문 화두를 던져 주고 있다.
교구청 로비를 통과하자 건물 하나가 나타나는데 교구 청소년국이다. 입구에 성지 순례 스탬프가 있어 찍으려는데 수녀님 한 분이 땀으로 범벅이 된 우리들을 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시고 “이 더운데...”하시며 건물 안에 들어가더니 과즙 음료수를 가져와서 마시라고 권하신다. 친절과 배려에 힘을 얻는다.
춘천교구 주교관
춘천교구청 안쪽에는 넓은 정원이 있다. 정원에는 느티나무 쉼터도 있고 한쪽에는 성모상도 자리하고 있다. 주교관은 정원 위쪽 계단 위 언덕이 있다.
주교관은 주교의 거처이자 선교사들이 교구 일을 돕거나 기거하는 거점으로 강원도 지역을 담당하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가 1958년에 건립하였다.
이 건물은 당시의 전형적인 외국인 선교회풍으로 지었는데, 유별나게 서향으로 세운 것은 햇빛이 아쉬운 아일랜드 풍습의 영향으로 보인다. 6.25 전쟁이 끝난 뒤, 포격으로 피해가 많았던 춘천에 아일랜드 풍으로 세워진 건물로서, 현재까지 보존이 잘 되어 건축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주교관 옆에 효자동 성당이 있다. 일단 성전 참배를 한 후에 춘천교구 교육원으로 향했다. 교육원은 교구청 바로 뒤 길 건너에 있었다.
춘천교구 교육원 (구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춘천수련소)
춘천교구 신앙교육의 요람인 춘천교구 교육관의 설립 당시의 이름은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춘천수련소였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춘천수련소는 1959년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에서 강원도 지역에 선교를 담당할 수녀를 양성할 목적으로 지었다.
1969년까지 이런 목적으로 사용되다가 그 이후 1976년까지는 예수의 카리타스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여자 대학생 기숙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77년부터 가톨릭 교육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춘천교구 신앙교육의 산실이 되었으며, 가톨릭농민회와 야간학교인 청솔학원 운영 등 사회교육의 역할도 하였다. 1979년부터 1985년까지는 착한 목자 수녀회에서 미혼모 보호소인 마리아의 집으로 사용하였다.
이 건물은 1959년에 처음 짓고 1962년에 늘려지었다. 지어진 시기가 다른 두개의 건물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인 가치가 있다. 이런 이유로 2019년 2월 등록문화재 743호로 지정되었으며, 장소 면에서도 강원도 지역 선교활동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금은 정비 작업 중이라서 공사 차량도 있고 잔디나 수목이 손질을 기다리고 있는 형펀이다. 비록 하찮은 건물 한 동이라도 역사를 가치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그야말로 관람 수준에서 바깥에서 둘러 본 뒤 죽림동 성당으로 향했다.
죽림동 주교좌성당 · 순교성지 - 6 · 25 전쟁 순교 성직자들의 안식처 |
강원도 춘천시 죽림동 38
강원도 춘천시 약사고개길 21
곰실 본당의 춘천 진출
곰실 본당이 풍수원 성당에서 분리 설립된 것은 1920년에 이르러서였다. 그해 9월18일 서품된 김유룡(金裕龍, 필립보, 1892-1972) 신부는 풍수원 본당의 보좌로 임명됨과 동시에 새로 설립될 곰실 본당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20) 본당 설립 직후의 관할구역은 춘천 · 홍천 · 화천 · 양구 · 인제와 경기도 가평이었고, 관할 공소는 14개였다. 신자는 본당이 138명이었고, 공소 신자를 포함하여 총 1,016명이었다.하지만 신자들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임시 성당도 짓지 못했다. 대신 초가집 한 채를 구입해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였다.
김유룡 신부는 헌신적인 엄주언 회장을 비롯한 신자들과 함께 본당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하였다. 그러나 곰실이 춘천 읍내에서 떨어진 외곽에 위치했기 때문에 선교 활동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김 신부와 신자들은 춘천읍내로 본당을 이전할 것을 계획하였다.
본당의 이전은 1928년에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현재의 죽림동 주교좌 성당이다. 성당 이전은 신자 단체인 연령회(煉靈會)의 역할이 컸다. 연령회는 연령(煉靈)을 위한 단체로, 15세 이상의 모든 신자가 가입하였다. 본당에서는 이 회원들로부터 1인당 50전씩을 거두었다. 회원들은 기금을 마련하여 농토를 구입하였고, 여기에서 수확한 쌀을 필요한 사람에게 장리로 주어 기금을 늘렸다. 그 밖에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등을 통해서도 기금을 마련하였다. 엄주언 회장도 자신의 논 다섯 마지기를 팔아 새 성당 터를 사는데 보탰다. 이러한 신자들의 노력으로 현 죽림동 주교좌 본당 아래쪽의 골롬반 병원 터와 수녀원 터를 매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그곳에 있는 구식 목조 함석집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사용함으로써 춘천의 전지역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선교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곰실에서의 전교가 국지적이고 한정적이었다면 죽림동에서의 사목활동은 춘천의 전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본격적인 전교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새 성당 건립과 6 25 전쟁의 참화
현재의 죽림동(竹林洞) 주교좌성당은 김유룡 신부와 엄주언 회장이 이끈 곰실 교우들이 애써 마련한 아래 터에 퀸란(具仁蘭) 토마스 신부가 추가로 매입한 언덕 위에 서게 되었는데, 그 기공식은 성당 벽에 라틴어로 붙어있는 초석이 말하듯이 1949년 4월 5일에 있었다.
실제 건축 작업은 두 사람의 기술자가 맡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은 전남 광주에서 온 ‘자’씨 성의 한 화교 기술자였다. 석재는 멀리 홍천 발산리 강가에서 날라다 썼다. 그러나 거의 한 해 동안 돌로 외벽을 훌륭하게 다 쌓고 동판 지붕까지 덮고 나서 내부 공사에 들어갈 때 6.25 전쟁이 터졌다.
전란이 터지자 춘천에서는 그 이튿날인 6월 26일 아침부터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남침이 시작된 바로 다음 주일인 7월 2일, 퀸란 토마스 신부가 본당 미사를 드리는데 인민군이 들이닥쳐 성당 안에서 공포를 쏜 후 20여 명의 교우가 지켜보는 앞에서 손(孫) 프란치스코 캐나반(Francis Canavan) 보좌신부와 함께 체포 연행해 갔다. 그후 소위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어 교황사절 번(J. Patrick Byrne, 方溢恩) 주교를 비롯한 외국인 사제, 수녀, 개신교 목사 등 수백 명이 평안북도 어느 험한 산비탈로 끌려가 강제 수용되었는데, 번 주교와 손 프란치스코 신부는 모진 고생과 추위를 못 이겨 선종하였다. 그래도 1953년 4월까지 34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기적같이 살아서 돌아온 사람 중에는 죽림동 성당 퀸란 토마스 신부와 홍천 본당의 크로스비 필립보(Philip Crosbie, 趙) 신부도 있었다. 반면에 묵호 본당의 라 파트리치오 신부, 소양로 본당의 콜리어(Anthony Collier, 高) 안토니오 신부, 삼척 성내동 본당의 진 야고보 신부 등 아일랜드 출신 신부들은 1950년 남한에서 피살되었다.
이밖에도 춘천 지목구에서는 6.25 전쟁을 전후로 평강 본당의 백응만(白應萬, 다마소) 신부가 연행되어 옥사했고, 의주 본당의 김교명(金敎明, 베네딕토) 신부가 행방불명되었으며, 연길 · 함흥 · 원산 지역의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의 남하를 헌신적으로 돕던 양양 본당의 이광재 티모테오(李光在, 1909-1950년) 신부 또한 1950년 6월 24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갇혔다가 10월 9일 총살당하였다.
이처럼 춘천 지역은 천주교 신앙이 늦게 전파되어 다른 지방처럼 피로 얼룩진 박해가 없었지만, 6·25 때는 공산당에 의해 성직자와 신자들을 잃는 불운을 겪어야 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순교자는 모두 동족상잔의 아픔 속에 배출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3일부터 중공군이 밀물처럼 쳐들어오자 국군은 이른바 1.4 후퇴라는 패배를 당했고, 5월에는 유엔군의 반격이 있었는데 그 작전 중의 공습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짓다가 만 죽림동 새 성당의 한쪽 벽이 무너지고 사제관 등 부속 건물이 대파되었다. 이 와중에서도 1951년 8월에 제13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커머포드(Comerford, 孔) 신부는 마당에 천막을 치고 미사를 드리면서 서서히 복구 준비를 했다. 복구 준비는 한창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교황청의 지원으로 비교적 잘 진전되어 1953년에는 대부분 완료되었다.
한편 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퀸란 신부는 그곳에서 순교한 번 주교의 뒤를 이어 한동안(1953-1957년) 교황사절 서리를 겸하였다. 그는 1955년 9월 20일 춘천이 지목구에서 대목구로 승격되자 초대 춘천 대목구장으로 부임하면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성당 건립에도 노력하여 부임 이듬해인 1956년 6월 8일, 춘천교구와 죽림동 성당 주보 축일인 예수성심 대축일에 새로운 모습을 갖춘 주교좌성당의 봉헌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죽림동 주교좌 성당은, 우리나라 1950년대 석조 성당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인정되어 2003년 6월 25일 등록문화재 제54호로 등록되었다.
▲춘천교구 발전의 대부 퀸란(Quinlan, Thomas) 주교
퀸란(1896∼1970) 주교는 아일랜드 출신이다. 1917년 사제로 서품된 뒤 중국에서 10여 년을 활동한 후, 1933년 성 골롬반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6년간 전라도 일대에서 사목하였다. 1939년 춘천 성당으로 전임된 이후 32년간 강원도 지역의 교세 신장에 주력하였다.
광복 후 6·25전쟁 때 죽림동 성당에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교황 사절 번(Byrne) 주교와 함께 서울, 평양을 거쳐 만포에서 중강진까지 250리의 산길을 도보로 걷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겪기도 하였다.
1953년 3월 중강진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잠시 고국인 아일랜드에 머무르다가 다시 교황 사절 겸 춘천교구장으로 한국에 돌아와 1955년 12월 주교로 성성되었다. 1966년 노령으로 은퇴, 삼척 성 요셉 병원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사목하면서 만년을 보내던 중 1970년 12월 31일 선종하였다. 유해는 춘천교구 삼척 성내리 성당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춘천 죽림동 성당 구내의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성당 구내 성직자 · 순교자 묘역 조성
죽림동 주교좌 예수성심 성당의 뒤뜰에는 교구 성직자 · 순교자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춘천 교구에서 활동하다가 선종한 사제들이 잠든 곳인 동시에, 신앙을 증거하고 목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애쓰다가 희생된 6·25전쟁 순교자들이 함께모셔진 곳이다.
이 묘역에는 ‘죽음의 행진’ 속에서 살아남아 교황사절을 지내며 춘천교구의 첫 교구장을 맡아 교구의 초석을 놓으신 퀸란 토마스(Thomas F. Quinlan) 주교의 묘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희생당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소양로 본당의 고 안토니오 콜리어 (Antony Collier) 신부, 묵호 본당의 羅 파트리치오(Patrick Reilly) 신부, 삼척 성내동 본당의 진 야고보(James Maginn) 신부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고, 북한지역에서 순교하여 유해를 모실 수 없었던 평강 본당의 백응만 다마소 신부, 의주 본당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 유해를 찾지 못한 양양 본당의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 퀸란 주교와 함께 납북되어 순교한 묵호 본당의 孫 프란치스코(Francis Canavan) 신부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이 묘역은 하느님의 종으로서 충실히 살다가 생을 마친 순교자들과 성직자들이 잠들어 부활을 기다리는 영원한 안식처로 자리 잡았으며, 2017년 9월 17일, 순교자 대축일에 교령에 의하여 교구의 성지로 선포된 신앙의 터전이다.
현재 이들 중 이광재(티모테오, 1909~1950) 신부를 비롯한 7인의 순교자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에 포함되어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
춘천교구 시복 추진 6.25 순교자 7명
▲ 이광재(李光在 티모테오) 신부(1909.06.09.∼1950.10.09)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는1909년 6월 9일 강원도 이천군 낙 양면 냉골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난하지만 열심한 가정 에서 신앙생활하며 자란 그는, 1923년 9월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의 길 을 준비하게 되었다.
1936년 3월 28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강원도 횡성군 소재 풍수원 본당 보좌로 임명되어 열성적이면서도 헌신적 사목에 임했고, 1939년 양양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이광재 신부는 강원도 산골 마을 교우들의 영혼을 돌보며 양양성당을 건축하는 등 교회와 양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목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해방 후 38선 이북인 양양이 공산화가 되자 종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고, 이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무사히 넘어가도록 도와 주었으나 정작 본인 은 “양들을 두고 갈 수 없다.” 며 월남하지 않았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끝까지 남아 교우들을 돌보고 성사를 집전하던 이광재 신부는 공산당에게 체포되었 고, 1950년 9일 새벽, 원산 방공호에 인민군의 총탄으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가 되었다.
▲김교명(金敎明 베네딕토) 신부(1912.07.15∼1950.06.26)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는 1912년 7월 15일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명지리에서 태어났다.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난 그의 어린 시절이나 신학교를 가게 된 경위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1939년 6월 24일, 김교명 신부는 그해 4월 25일에 설립된 춘천교구의 첫 번째 방인사제로 서품되었고, 풍수원 본당 이광재 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사제생활을 시작하였다.
1942년 5월, 일제 당국에 의해 미국인 신부들이 추방되자, 사제가 부족해진 평양교구는 타 교구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이때 김교명 신부도 평양교구로 파견되었다. 1944년 말 평양교구에 파견되었던 타 교구소속 신부들이 본 교구로 돌아갈 때에도 목자없는 양들을 위해 의주본당에 남아 사목활동을 계속하였다.
해방 후 공산정권 수립으로 종교 생활이 여의치 못하고 신변에 위협도 다가왔으나 김교명 신부는 단호히 월남을 거절하고 임지를 지키며 목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였다. 1950년 6월 26일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의주 보안서에 일주일간 억류된 이후 그의 행적을 알지 못한다.
▲백응만(白應萬 다마소)신부(1919∼1950.1)
백응만 다마소 신부는 1919년 황해도 신계군 고면 삼차동 에서 태어나 소신학교를 다니던 즈음 강원도 이천으로 이사 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9년 소신학교를 졸업한 후 용 산대신 학교에 진학했고, 1945년 11월 21일 명동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아 신부가 된 후, 서울 혜화동본당 보좌로 임명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공산화된 이북지역의 종교상황이 악화되어 많은 성직자들이 위험을 피해 남하하였고, 이에 당 시 서울교구장 겸 춘천교구장 서리였던 노기남 주교는 백응만 신부를 38선 이북의 평강본당 주임으로 발령을 냈다.
그러자 가면 죽는다는 동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백응만 신부는 교회와 장상에 대한 순명의 정신으로 1947년 7월 초 38선을 넘었다. 온갖 위험과 어려움을 무릎쓰고 평강본당에서 양들을 위해 사목 활동을 하던 백응만 신부는 1949년 4월초 본당 사제 관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공산군은 백응만 신부를 끌어내어 양팔을 뒤로 묶고 눈을 가린 채 밧줄로 묶은 맷돌을 끌고 동네를 돌아다니게 하였다. 이후 백응만 신부는 원산과 평양감옥으로 압송되어 모진 고초를 당하다가 1950년 1월초에 옥사했다. 당시 백응만 신부의 시신은 감옥 근처 밭에 버려져 있었는데, 백응만 신부의 얼굴을 알던 수사가 피난 갔다 돌아오면 처리하기 위해서 큰 돌로 표시를 해 놓고 갔고, 이후 평양 교외에 안장되었다.
▲고 안토니오 콜리오(Anthony Collier) 신부 (1913.6.20.∼1950.6.27.)
고 안토니오 신부는 1913년 6월 20일 아일랜드에서 태어 나 1938년 12월 21일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그 이듬해인 1939년 선교사로 한국에 했다. 일제 말의 혼란기에 말을 배우며 연금과 추방을 경험 한 한 후 강릉과 횡성본당의 보좌를 지낸 고 안토니오 신부는, 1950년 1월 5일 춘천 시내에서 두 번째 본당으로 신설된 소양로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소양로 본당에 부임하여 성당을 지을 준비와 함께 사목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앞마당에까지 포탄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성당에 남아 교우들을 돌보던 고 신부는 6월 27일, 복사였던 김 가브리엘과 함께, 춘천을 점령한 공산군에게 체포되었다. 공산군은 한적한 강변으로 그들을 끌고 가 아무런 예고 없이 총을 쏘았고, 고 안토니오 신부는 복사를 안고 쓰러졌다. 그 자리에서 고 안토니오 신부는 순교했고, 김 가브리엘은 총상은 입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났다. 1951년 10월, 교우들은 살아난 김 가브리엘과 함께 얼굴과 팔에 총상을 입고, 항상 차고 다니던 성패가 있는 고 신부의 유해를 수습하여 죽림동성당 뒤뜰 성직자 묘역에 안장했다.
▲진 야고보(James Maginn) 신부 (1911.11.15.∼1950.07.04.)
진 야고보 신부는 미국 몬타나 (Montana, USA)주에서 1911년 11월 15일에 태어나, 1935년 12월 21일 사제서 품을 받고 이듬해인 1936년 한국에 입국하였다. 말을 배우 며 광주교구에서 선교사제의 삶을 시작한 진 신부는,1939년 신설된 춘천교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8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적국 출신 사제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연금했기에 정상적인 선교활동을 할 수 없었고, 해방 후에야 비로소 홍천 본당 주임으로 부임할 수 있었다.
1949년 휴가를 마치고 입국한 진 야고보 신부는 새로 생 긴 삼척 본당의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신앙의 불모지였던 바닷가에서 진 신부는 친절과 사랑으로 주민들을 대하며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진 야고보 신부가 삼척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한 지 일년도 되지 않아 전쟁이 일어났다. 신자들은 진 신부에게도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피난 가는 신자들에게 지니고 있던 돈을 나누어주며 곤궁에 처할 때 쓰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성당을 지켜야 한다고 하며 떠나지 않았다. 이후 공산군이 삼척을 점령하면서 진 야고보 신부는 체포되었고, 총구 앞에서도 차분하고 의연하게 감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며칠 뒤인 7월 4일 하천변 야산에서 순교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발견하여 가매장하였다. 진 야고보 신부의 유해는 1951년 10월 춘천 죽림동성당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라(羅) 파트리치오(Patrick Reilly) 신부 (1915.10.21.∼1950.08)
라 파트리치오 신부는 1915년 10월 21일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1940년 12월 21일 사제품을 받았다. 1947년 한국에 온 라 신부는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원주에서 사목하였으며, 1949년 묵호 본당 주임으로 부임 하였다. 지역에서 영어도 가르치면서 사목을 하던 중 전쟁 이 발발했다. 이에 교우들이 배를 마련하여 피난할 것을 청했으나, “양들을 버리고 목자가 혼자 도망 갈 수 없다”면서 거절하였다.
공산군이 들어오자 라 신부는 전교회장의 집의 작은 골방으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몰래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라 신부는 이미 순교를 각오한 듯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자신으로 인해 교우들이 피해를 당하는 것을 염려하던 라 신부는 결국 공산군에게 체포되었고, 미국의 간첩으로 몰려 매질을 당하며 끌려갔다. 라 파트리치오 신부는 이후 다른 포로들과 함께 묵호에서 강릉으로 이송되던 중, 아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불안해 하던 공산군에 의해 밤재굴에서 총살당해 순교했다. 후일 군종사제와 교우들이 도로변에 묻힌 라 신부의 유해를 찾아내 묵호 경비사령부 앞에 매장하였다가 묵호성당으로 옮겼으며, 이듬해 춘천 죽림동성당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 손(孫) 프란치스코(Francis Canavan) 신부 (1915.2.15.∼1950.12.06)
손 프란치스코 신부는 1915년 2월 15일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1940년 12월 21일 사제품을 받고 1949년 한국에 입국하였다. 이듬해인 1950년, 손 신부가 춘천에서 한국말 을 배우며 사목활동을 준비하고 있을 때 전쟁이 일어났다. 그래서 미군들이 선교사들을 피신시키려하자 당시 교구장인 퀸란(Thomas F.Quinlan)주교는 양들을 지키 기 위해 피난을 거부하면서, 한국말이 익숙하지 않았던 손 신부에게는 떠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손 프란치스코 신부는 떠나지 않고 주교와 함께 남아 있었다. 일주일후 공산군은 성당안까지 들어와 주일미사를 봉헌하던 구주교와 손신부를 체포하여 감옥으로 데려 갔다.
손 프란치스코 신부는 다른 성직자 수도자들 및 수백 명의 전쟁포로들과 함께 북한 깊숙이 압송되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에 내몰렸다. 이 과정에서 많은 선교사들과 포로들이 사살 당하거나 더러는 지쳐 쓰러져 죽었다. 손 프란치스코 신부도 1950년 12월 6일 폐렴으로 병사하여 퀸란 주교와 동료들의 손에 의해 차디찬 압록강변에 묻혔다.
주교좌성당 성역화와 성지 선포
1994년 12월 14일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춘천 교구장에 착좌한 장익 요한 주교는 죽림동 본당 제22대 주임 이정행 요한 신부와 함께 2000년 대희년과 교구 설정 60주년이라는 성숙과 도약의 뜻깊은 해를 앞두고 교구의 상징이자 중심인 죽림동 예수성심 주교좌성당의 모습을 일신하여 새 천년기에 들어서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의 협조와 가톨릭 미술가회 소속 중진 작가들의 적극적 참여로 1998년 4월부터 다섯 달에 걸쳐 성당 안팎 공간의 형태는 역사적인 모습 그대로 보존한 채 전례 거행에 합당하고 예술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성당으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9월 14일 십자가 현양 축일에 중창 축복식을 거행했다. 또한 죽림동 성당 터를 마련하고 주교좌성당의 기초를 놓은 엄주언 마르티노 회장의 공적을 기리고 전교 사업을 목적으로 춘천교구 가톨릭 회관을 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로 건립해 ‘말딩회관’(사제관 포함)이란 이름으로 1999년 4월 24일 축복식을 가졌다.
죽림동 주교좌성당은 2012년 11월 21일 말딩회관 내에 본당 설립 100주년(2020년)을 앞두고 마련한 역사전시실 축복식을 가졌다. 그리고 2013년 6월 14일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는 죽림동 성당 성역화 사업 기공식을 하고 공사를 시작해 그해 12월 1일 축복식을 거행했다.
죽림동 성당 성역화 사업은 성전이 지닌 역사와 아름다움을 살리면서 근현대 신앙 증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하고 현양하기 위해 마련된 사업으로, 성 골롬반 의원 폐원과 성 골롬반 수녀원 이전으로 확보된 성당 앞 부지에 전정 · 중정 · 회랑 등을 지어 새롭게 단장하고 교구 성직자 묘소와 십자가의 길, 성모성심상이 있는 성당 뒤뜰은 '명상의 뜰'로 꾸몄다. 언덕 위에 성당이 자리한 대지의 특성으로 하단에 주차장과엘리베이터 시설을 갖춰 노약자나 장애인을 배려해 건축한 것도 이번 성역화 사업의 특징이다
2014년 6월 1일에는 교구 주보이자 본당 주보인 예수성심상(오광섭 작)을 청동으로 제작하여 시내 중심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성당 입구 언덕 위에 설치하고 축복식을 올렸다.
2017년 9월 17일 춘천교구 교구장 김운회 루카 주교는 6·25전쟁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죽림동 주교좌 예수성심성당 안에 있는 교구 순교자 묘역과 모든 사제의 모범인 이광재 디모테오 순교자가 마지막까지 사목하던 양양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성당 두 곳을 성지로 선포했다.
12시 20분쯤 성당 입구에 도착. 성당으로 올라가는 높고 넓은 계단이 가로막는다. 계단 아래에는 좀 독특한 성가정상이 맞이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 완성됩니다’(요한1서, 4,12)라는 성구가 새겨져 있다. 모든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됨을 말한다.
계단 위에는 아치식 삼문이 있고 양쪽에는 커다란 종탑 망루가 배치되고 청동 예수 성심상이 팔을 벌려 순례객을 맞이하신다. 이는 청동 소재로 된 예수성심상 중에서 국내 최대 규모라고 한다.
문 안에 들어가면 잔디 정원이 펼쳐지고 맞은편에 성전이 높이 솟아 있다. 그리고 잔디 정원 좌우에 성전으로 들어가는 통로 회랑이 있고, 회랑에는 십자가의 길이 나누어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 회랑 끝에는 103위 성인화가, 왼쪽에는 124위 복자화가 걸려 있다.
정원 한쪽에는 성모 촛불 봉헌대와 예수성심상이 있고 회랑 안쪽에는 부활하신 예수상도 서 있다.
죽림동 주교좌성당
현재의 죽림동(竹林洞) 주교좌성당은 앞서 말했듯, 초대 김유룡 신부와 엄주언 회장, 그리고 곰실 교우들이 애써 마련한 아래 터에 보태어 퀸란 토마스 신부가 매입한 언덕 위에 서있다. 한국전쟁 직전 기공식은 1949년 4월 5일에 있었으니 실제로는 1939년 퀸란 신부가 주임 신부로 부임한 2년 후인 1941년에 감목 대리직을 맡으면서 계획해 오던 것이었다. 공사 자체가 일제 치하의 외국인 구금 및 연금으로 착공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1946년 다시 복직한 퀸란 신부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로 건립을 미루다가 다행히 미군 부대의 도움을 얻어 1949년 본격적으로 착공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6 · 25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 중 임시 복구가 되었으나 주교좌 성당의 품격을 드러내지 못한 상태였는데 1955년 퀸란 신부가 교구장이 되어서 전면 보수가 이루어져 1956년에 완공되었다.
성당 내부는 여느 성당과 다름이 없다. 제대 후벽에는 대형 십자고상이 있고, 그 좌우에는 길다란 유리화가 있다. 그리고 유리화 옆 좌우에는 성모자상과 십자가상의 성화가 걸렸다. 벽에는 유리화 사이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지난다.
춘천교구 성직자 · 순교자 묘역
한국전쟁의 상처는 한국의 현대사뿐만 아니라 38선으로 도(道)의 소속과 관할이 분리되는 아픔을 겪고 있던 춘천교구에게도 커다란 아픔이었다.
전쟁 시작 직후인 6월 27일 춘천 소양리 본당의 高 안토니오 신부가 피살되고 7월 4일에는 삼척 본당의 진 야고보 신부, 8월 29일에는 묵호 본당의 羅 파트리치오 신부가 인민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10월 9일에는 양양 본당의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가 원산으로 끌려가 순교 했으며 12월 6일에는 손 프란치스코 신부가 압록강변 포로수용소에서 병사했다.
1951년 전쟁 중임에도 가매장 되었던 고 안토니오 신부와 라 파트리치오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여 폐허가 된 죽림동 성당 뒤뜰에 안장하였다. 이듬해 1952년 3월 26일 진 야고보 신부의 유해도 옮겨와 안장했다. 이것이 이 묘역 설정의 시작이다.
이를 계기로 이미 이전 북한지역 평강에서 피랍되어 평양 감옥에서 옥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백웅만 다마소 신부와 북한지역에서 순교하여 유해를 모실 수 없었던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 이교명 베네딕토 신부, 손 프란치스코 신부의 가묘를 조성함으로써 성스러운 순교자 묘역이 조성되었다.
이후로도 사목자의 사명을 마치고 이 세상을 떠난 춘천교구의 주교, 사제들이 안장되면서 이 묘역은 천상의 삶을 기리던 목자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었다.
모원 참배를 마치고 죽림동 성당에서 나오는 길에 쉼터와 말딩 회관, 그리고 성당 아래의 부속 건물을 보며 순례를 마쳤다. 쉼터 앞에 죽림성지의 은인 엄주언 말딩 송덕비가 단정하게 서 있다. 그리고 쉼터는 하절기인 7,8월에는 쉰다고 창문에 적혀 있다.
건물 지붕 아래에는 세 분의 인물상이 나오는데 아무래도 왼쪽은 예수님, 가운데는 퀼란 토마스 주교, 오른쪽은 엄주언 말딩(마르티노)으로 보인다.
말딩 회관은 경사면을 이용하여 지은 엄청 큰 건물인데 1층은 신협, 2층은 카페 등이 안내되어 있고, 소성당, 역사 전시관이 있다고 소개는 되어 있으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이미 오후 1시가 다 되가는 시간. 일단 오전 일과로 소양로 성당을 순례한 후 점심을 먹기로 하고 급히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