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11. 북경을 떠나며 - 중국불교의 旅路 ②
13종파 전성기 거쳐 부침…새 활기 꿈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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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막고굴과 명사산> |
사진설명: 막고굴 맞은 편에서 본 석굴 전경. 힌두쿠쉬 산맥을 배경으로 서있는 바미얀석굴과 명사산을 병풍 삼아 서있는 막고굴이 비슷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
후한 명제 영평 10년(67) 중국대륙에 공식적으로 전래된 중국불교는 위진남북조시대(220~589) 양자강 남북에 골고루 확산.정착되더니, 수(581~618).당(618~907)대 사상적.문화적으로 대륙을 완전 석권하며, 최전성기에 도달했다. 특히 당나라 땐 제왕들의 후원 아래 미증유의 성장을 이룩했으며, 왕족.귀족.대부호.평민 등 모든 사회계층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산속의 사원이나 도시의 사찰, 어느 곳에서도 지적인 열정에 넘친 스님들이 각 종파의 소의경전에 대해 토론하던 시기가 당나라 때였다. 게다가 당대의 사찰들은 다양한 종교적.사회적 활동을 통해 대중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사원의 드넓은 경내는 도시인들에게 쾌적한 휴식을 주는 공간으로 활용됐고, 불교행사는 시골과 도시의 대중들에게 오락과 즐거움을 제공했다. 법회와 재(齋)엔 많은 신도들이 참여했다. 당나라 승단(僧團)의 힘은 사회계층에 봉사할 수 있는 이런 능력 속에 있었다.
唐代 들어 화엄종 등 탄생.불교 발전 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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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난주 병령사 대불. 동서문화 교류가 한창 꽃피던 당나라 초기에 조성된 높이 27m 부처님. 상반신은 절벽에 새기고 하반신은 소조한 것이다. 대불 얼굴 왼쪽 뒤에 보이는 굴이 169굴이다. |
한편 당나라 때 들어, 구마라집스님으로 대표되는 위진남북조시대 수많은 역경승들이 한역한 경전들을 소화한 불교계는 종파불교(宗派佛敎)를 만들어낼 준비가 돼 있었다. 물론 종파들의 기원은 북조(北朝. 양자강 이북에 세워진 왕조)에서 발달된 교학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를 들어 천태종은 〈대반열반경〉의 가르침과 ‘경전을 연대기적으로 분류하는 방식’(이를 교판이라 한다)에서 출발했고, 화엄종은 북제와 북주에서 활동했던 지론종(地論宗)에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동진(東晉) 말 북인도 출신 불타발타라스님이 〈화엄경〉을 한역한 이래, 〈화엄경〉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특히 511년 인도의 논사(論師) 세친(世親)의 저서 〈십지경론(十地經論)〉이 완역된 것을 계기로 지론종이 성립되는데, 이것이 화엄종 성립의 학문적 기초가 됐다.
주지하다시피 종파불교의 성립은 불교가 ‘인도적인 틀’에서 벗어나 완전히 ‘중국적인 것’으로 탈바꿈 했음을 의미한다. 불교교리를 중심으로 한 특수한 집단을 ‘부파’라 한다면, 인물을 중심으로 한 집단을 ‘종파’라 할 수 있다. ‘종파’도 경전을 연구하고 이념을 세워 그에 맞은 생활양식을 수립하지만, 부파보다는 중심인물(宗主)의 영향력이 훨씬 크게 나타난다. ‘어떤 특수한 인물’이 ‘어떤 이념’을 가지고 불교의 전통을 수립할 때, 그 인물 중심으로 종도(宗徒)들이 추종해 새로운 규범을 조성하며, 그 전통을 계속 계승해 나가는 것이 종파불교의 주된 특징. 이런 종파는 중국에서 가장 많이 발달됐는데, 통상 ‘중국불교의 13종파(宗派)’라 부른다. 구사종(俱舍宗), 성실종(成實宗), 삼론종(三論宗), 섭론종(攝論宗), 열반종(涅槃宗), 천태종(天台宗), 법상종(法相宗), 지론종(地論宗), 진언종(眞言宗), 정토종(淨土宗), 계율종(戒律宗), 화엄종(華嚴宗), 선종(禪宗) 등이 그것.
구사종은 소승불교의 논서(論書)를 체계있게 연구하는 종파며, 성실종.삼론종.섭론종.지론종은 대승불교의 논서를 연구하는 종파. 반면 열반종은 대승경전 가운데 〈대반열반경〉을 중심교리로 세워진 종파며, 천태종은 〈법화경〉을 기반으로 세워진 종파. 〈화엄경〉을 중심으로 성립된 것이 화엄종이며, 법상종은 불교를 인식론적인 학문으로 체계화한 종파라 할 수 있다. 계율을 크게 강조한 종파가 계율종이며, 진언종은 비밀불교 의식을 계승한 종파. 정토종은 극락세계를 염원하여 아미타불을 신앙하는 종파고, 선종은 선 수련을 근본으로 하는 종파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천태종.정토종.화엄종.선종은 가장 중국적인 종파로 평가된다. 13종을 중심으로 발달한 불교는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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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천제산 석굴 부처님. 무위 동남쪽 60km 지점에 위치한 천제산 석굴에 있는 높이 28m 부처님. 천제산 석굴엔 13개의 굴이 있었으나, 황양호 공사로 수몰되고 대불만 남아있다. |
‘종파적 견지’가 아닌, 인도불교가 풍속과 사상이 다른 중국 민중에 흡수되는 과정 등 ‘사회적 입장’에서 중국불교를 본다면, 크게 5기(期)로 분류할 수 있다. 제1기는 전한(前漢)~동진(東晋) 초(初)까지의 ‘역경(譯經)시대’. 이 시기 불교는 중국에 들어왔고, 후한(後漢)의 안세고(安世高).지루가참(支婁迦懺)스님 등을 필두로 한 많은 역경승(譯經僧)들이 경전을 전래역출(傳來譯出)해, 교학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번역(飜譯)에 진력한 시기로 불교가 일반에 그다지 널리 보급되지 못한 때였다. 제2기는 동진(東晋) 초(初)~남북조(南北朝)에 이르는 연구시대. 교의(敎義)연구에 정진한 시대이며, 사회일반에 불교가 무엇인가를 알린 시대였다. 구마라집.도안(道安).혜원(慧遠).담무참(曇無讖)스님 등을 필두로 한 남북조시대의 고승들은 ‘이 시대 불교의 중심인물’이었으며, 불교연구에 다대한 공적을 남겼다. 제2기엔 구마라집.담무참.진제스님 등 중국역경사를 빛낸 인물들도 많았다. 특히 구마라집스님 이후의 한역(漢譯)은 종래와 같은 단순한 역경이 아닌, 번역 그 자체가 불교를 강술하는 성격을 띤, “중국불교의 일대 전환기를 형성한 역경”으로 평가된다.
제3기는 수.당 제국의 시대. 전대(前代)이래 활발해진 연구를 토대로 불교가 더욱더 일반 사회에 보급되고, 각 종파가 독립 혹은 대성한 시기다. 천태지의의 천태종(天台宗), 가상길장(嘉祥吉藏)의 삼론종(三論宗), 신행(信行)스님의 삼계교(三階敎) 등은 수나라 때 등장한 종파. 반면 도작(道綽).선도(善道)스님의 정토종(淨土宗), 도선(道宣)의 남산율종(南山律宗), 신수(神秀).혜능(慧能)스님의 선종(禪宗), 현장.자은스님의 법상유식종(法相唯識宗), 법장(法藏)스님의 화엄종(華嚴宗), 선무외(善無畏).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스님의 밀교(密敎) 등은 당나라 시절 풍미한 종파다. 수.당대는 불교의 황금시대였다.
제4기는 오대(五代)로부터 명말(明末)에 이르는 계승시대. 당말 무종의 폐불사건(廢佛事件. 845년)과 오대 후주(後周) 세종(世宗. 재위 954~958)의 폐불로 불교의 활력이 전대에 비해 떨어지기 시작한 시기. 교학적으로도 열기가 현저하게 약해졌다. 다만 송나라 때 시작된 대장경 각판사업이 그나마 불교를 지탱시켜 주었고, 불교는 이후 점차 민간종교로 발전됐다. 원대에 본격적으로 전파된 라마교가 번성했으나, 선종을 위시한 다른 종파도 보호돼 그대로 명대에 계승됐다. 교학적 측면에서 불교의 발전은 미미하나, 사회적 면에서 불교의 위상은 수당시대를 그대로 계승할 만큼 거대했다. 원대엔 오히려 불교의 사회적 세력이 수당시대보다 더 강한 것으로 파악된다. 제5기는 청나라(1636~1912) 이후 쇠퇴시대. 이 시기 불교는 교학적인 면에서나 사회적 측면에서 점점 세력을 상실했다. 출가자와 사원의 숫자도 점차 줄어든 시기였다. 중국불교는 그러나 신해혁명(1911) 이후 부흥하기 시작, 1953년 5월30일 북경 광제사에서 거행된 중국불교협회 출범을 계기로, ‘황금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국불교를 종파적 견지에서 보든, 사회적 입장에서 파악하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건이 하나 있다.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이 그것이다. 북위 무제(재위 423~451. 법란은 446~452), 북주 무제(재위 560~578. 법란은 574~577), 당 무종(재위 841~846), 후주 세종(재위 954~958) 때 행해진 불교탄압을 흔히 ‘삼무일종의 법난’이라 하는데, 이 사건은 불교중국화의 길을 연 ‘중요한 역사’였기 때문이다. 삼무일종의 법난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북주 무제에 의한 것과 당 무종이 벌인 훼불(毁佛)이다.
1953년 중국불교협회 발족 … 活路 모색
북주 무제가 574~577년에 단행한 폐불훼석(廢佛毁釋)은 북위 이래 융성일변도를 걷던 불교의 발달을 일시 차단하고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폐불로 인해 불교는 도리어 중국인의 불교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다. 북주 폐불의 이론적 근거가 “사(事)에 즉(卽)하여 말하면 어느 것도 도(道) 아님이 없다”는 ‘즉사이도(卽事而道)’. 여기서 사란 현세에서의 개인생활과 사회생활 일체를 말하는 것이며, 이 현실 이외 도가 있는 곳은 없으며, 이 현실의 모습 그대로가 진리실현의 장이라는 것이다. 폐불의 주도자들은 그래서 “삭발하여 출가할 필요도 없고, 출가자 모임인 교단도 불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즉사이도’는 그러나 대승불교 철학인 ‘즉사이진(卽事而眞)’ 사상의 성숙을 가져왔다. 북위 무제의 칼날은 불교단멸과 불교흥륭의 한 자루 칼의 양날이었다. 무제의 사상은 대승불교의 이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이론적인 무기로 성장했다. 다시 말해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인도불교가 중국의 ‘이곳’에서 ‘우리 자신’의 불교로 탈바꿈하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던 것이다. 불교멸진의 이론적 칼이 오히려 심오하며 깊은 중국불교 종파들을 형성케 하는 사상적 모태가 됐다. 수.당대 장안을 중심으로 여러 종파가 개화한 것도 무제의 ‘즉사이도’ 사상이 현실적으로 발전한 결과였다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북주 무제의 폐불이 새로운 사상적 발전의 씨앗이었다면, 당나라 무종이 845년 일으킨 법난(회창법난)은 불교의 전성기에서 쇠퇴기로의 전환점 구실을 했다. 중국에서 벌어졌던 불교탄압 중 가장 광범위하게 진행됐던 ‘845년의 탄압’은 막상 오래가지 못했다. 탄압이 시작되고 채 일년이 지나기도 전인 846년 3월 무종이 죽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즉위한 선종은 불교탄압을 중지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후 중국불교는 다시는 새로운 활력을 제공하지 못했다. ‘안록산.사사명이 일으킨 난’(755~763) 당시 받은 타격으로 당나라 불교(중국불교)가 서서히 열기를 잃어갔다면, 당 무종의 법난으로 중국불교는 성장기.발전기를 지나 서서히 쇠퇴기로 접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북경에서 지나온 ‘중국불교의 여로’를 찬찬히 되돌아보았다. 앞으로 나아갈 ‘중국불교의 여로’는 어떤 길이 될까. 그것이 궁금하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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