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과 물리학] 10. 유심조와 불확정성 원리
- “입자의 위치·속도 동시에 알수없어”-
- ‘본다’는 생각이 존재를 창조한다 -
색수상행식이 다 공한데도 불구하고 눈앞에 보이는 자연이 이렇게 전개되어 있는 것을 불교에서는 일체즉 유심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공한 가운데서 이렇게 생생하게 나타나 있는 자연을 설명하자면 물리학만으로는 부족하지만 현대물리학에서 설명하는 것도 일체즉 유심조와 비슷한 점이 많다.
물리학에서도 인간이 관측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관측자 자신이 창조하여 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불확정성 원리와 이 원리를 일반화시킨 상보성원리라는 것이 바로 일체즉 유심조를 뒷바침하는데 먼저 불확정성원리를 살펴보기로 하자.
일상적 경험의 세계에서는 사람이 사물을 관찰한다고 해서 사물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는다. 내가 북한산 꼭대기의 백운대를 쳐다본다고 해서 백운대의 모습이 바뀌거나 백운대가 어디 다른데로 옮겨가지 않는다. 누가 쳐다보든 말든 백운대가 항상 거기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다면 백운대는 객관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객관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자연의 본질이라면 이러한 자연에 일체즉 유심조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그러나 일상적 경험의 세계를 포함하여 모든 물질과 자연현상의 기본을 이루는 미시적 세계 즉 원자(原子)이하의 세계에 들어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한때 물리학자들은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알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알려진 고전역학의 입장에서 볼 때 어느 순간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알면 입자에 관한 모든 것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자의 세계에서는 어떤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알아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치를 알아내는 순간 속도가 크게 변해 다음순간 입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고 속도를 알아내면 이번엔 어느 위치에서 그런 속도를 갖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어머니가 밖에서 노는 어린아이가 어떻게 하고 있나를 알기 위해 살펴볼 때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을 보고서 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린아이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사라진 아이를 찾아 여기저기 살피다가 냇가에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또 사라지게 되는 것과 같이 관찰행위는 언제나 관찰대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된다.
관찰대상과 관찰자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기에 관찰자의 관찰행위는 관찰대상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물리적인 양으로 표시한것이 바로 불확정성 원리이다.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라는 것이 바로 불확정성 원리이다. 매우 간단하지만 이 표현속에 바로 일체즉 유심조에 이르는 원리가 있다.
사람이 입자의 위치를 알고자 하면 이 입자에 빛을 쪼여 빛이 입자에 부딪친 후에 나오는 빛을 보아야 하는데 입자에 부딪친 빛이 입자를 때려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마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때려 튕겨나가게 하는 것과 같이 빛이 입자를 때려 튕겨나가게 하는 것이다. 내가 입자의 위치를 아는 순간 입자의 속도가 크게 변하는 속도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속도를 재면 위치가 변하여 어디에 입자가 있는지 모르게 된다.
불확정성 원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입자의 위치를 관찰할 때는 입자와 사람사이를 강한 빛으로 묶어 놓아야 하는데 이 강한 빛이 입자의 속도를 바꾸어 놓는다는 뜻이다. 관찰할 때마다 변화를 주게되니 ‘본다’는 것은 관찰자가 관찰하는 것을 창조해서 보는 것이다.
그러면 관찰하기 전에 입자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가? 있었기에 빛을 쪼여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빛을 쪼여 입자를 보기 전까지는 입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할 확률만이 전 공간에 파동처럼 퍼져 있었을 뿐이다. 빛을 쪼인 순간 확률파는 붕괴되어 버리고 어디선가 입자가 불쑥 튀어나올 뿐이다. 사람이 입자를 창조해서 보는 것이다.
관찰한다는 것은 의식한다는 뜻이다. 존재를 의식한다는 것은 창조하여 의식하는 것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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