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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하나
제목 :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경 : 엡 6:1-6
찬송 : 210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00101 낙양교회 영신예배
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엡 4: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엡 4: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기러기들이 이주할 때 V자로 비행을 합니다. 그 이유는 나는 데 소모하는 에너지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앞서 가는 새가 날갯짓을 하면 양 날개 끝에서 난기류가 형성되는데, 이 난기류가 상승기류로 바뀌는 지점에서 뒤따르는 새가 날갯짓을 하면 추가 양력을 받아 그만큼 쉽게 비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편대 뒤로 갈수록 새들이 힘을 덜 쓰게 됩니다. V자로 비행할 때 리더 역할을 하는 새는 바람의 저항을 가장 많이 받기 때문에 동료 새들 중 가장 힘이 세고 경험이 많은 새가 맡고, 리더 새가 앞서 날다 지치면 뒤에서 날던 새가 자리를 바꾸어서 날아갑니다. 이런 식으로 무리 지어 날면 혼자 날 때보다 71%나 더 먼 거리를 날 수 있다고 합니다. 기러기들은 이렇게 협력함으로써 그 긴 거리를 이동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부르신 방식도 이와 비슷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통해 서로를 세우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우리는 힘써 지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라는 말이 여러 번 강조하여 등장합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에 세콰이어 국립공원이 있습니다. 이곳은 크고 굵은 나무로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무의 키는 보통 112m 정도로 약 25 아파트 높이가 됩니다. 이 나무의 수명은 2,000~3,000년 정도 되는데 큰 숲을 이루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쉼을 얻고 감동을 받습니다. 이렇게 높은 나무가 거센 바닷바람에 넘어지지 않고 잘 버티는 이유가 있습니다. 뿌리와 뿌리가 서로 얽혀서 서로를 지탱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나무가 거친 바람을 이겨낼 수 있는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2020년이라는 거대한 바람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이 거대한 바람을 이기고 넘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로 똘똘 뭉치는데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이 남긴 명언이 있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교회 공동체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성장 과정도 다르고, 사회적 배경도 다르고, 학력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릅니다. 더 큰 우주적 교회를 보면 인종도 다르고, 신학적 배경도 다르고, 교파도 다릅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때로는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고, 용납하기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교회는 다름과 차이를 뛰어 넘어 하나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1.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할 때 하나가 됩니다.
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에베소서 구조를 보면 1~3장까지는 교리 부분이 나옵니다. 그리고 4~6장까지 실천 부분입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온)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었다는 것을 1~3장에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 첫 번째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라는 것입니다. ‘행하여’(페리파테오)는 ‘걷다, 살다, 생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소명에 적합한 방식으로 걸어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은 두 가지로 나타나야 하는데 피해야 할 삶의 방식(소극적 방식-하지 말라)과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삶의 방식(~하라)으로 나타납니다.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것들이 무엇입니까?
1)겸손(타페이노프로쉬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겸손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성품을 품어야 합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2)온유(쉬라위테스)
온유 역시 예수님의 중요한 성품입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경에 보면 모세도 온유의 사람이었습니다.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약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벧전 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3)오래참음(마크로쒸미아)
오래 참음의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오래 참으신 분이십니다.
4)사랑 가운데서 용납(아네코)
우리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원수들까지도 용서하신 분이십니다.
골 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5)평안(에이레네)
에이레네는 평화 조약이나 평화의 타결과 관련이 있습니다. 에이레네는 또한 소란, 소요의 정반대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에이레네는 평화적인(온화한) 태도, 즉 적의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꾼으로 세움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얻은 우리는 이제 그에 합당한 방식으로 인생을 걸어가야 합니다. 바울이 제시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고 성숙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온전한 성품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2.힘쓸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하나 된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바울은 ‘하나 되기 위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 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담을 허무시고, 그들을 한 몸으로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그분 안에서 이미 하나 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이것을 힘써 지켜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소한 일로 다투고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 파당을 만드는 일로 소중한 삶을 허비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피스 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될 수 있습니까?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인데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평안의 매는 줄로’라고 했습니다. 하나가 되는 열쇠는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에이레네)’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평안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힘써 지킬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바다거북은 일생의 대부분을 물속에서 보냅니다. 그러나 그가 산란할 시기가 되면 그는 모래사장으로 올라와 알을 낳습니다. 보통 한 번에 100개 이상의 알을 낳는데 그 알들은 모두가 모래 속에 묻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나오는 장면을 매우 감동적입니다. 그 새끼들은 철저한 협력과 역할 분담을 통해 모래를 뚫고 세상으로 나오게 됩니다. 맨 위쪽 새끼들은 부지런히 머리 위의 모래를 걷어냅니다. 그러면 옆의 새끼들은 끊임없이 그의 발과 머리를 이용하여 벽을 허뭅니다. 그러면 맨 아래 있는 새끼거북은 무너진 모래를 밟아 바닥을 다져가면서 그들 모두가 세상으로 나오게 됩니다. 거북 알 하나를 모래에 묻어놓으면 밖으로 나올 확률이 고작 25%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 개를 함께 묻어 놓으면 거의 모든 새끼가 모래 밖으로 나옵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호협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서로가 밖으로 탈출하기 위해 힘씀 결과로 세상으로 나오게 됩니다.
테이블 위에 곤충의 고치가 있었습니다. 그 고치에서 여러 나비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니다. 나올 때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그 좁은 구멍으로 나비들이 나오는데 구멍이 너무 작아 비벼대면서, 비틀며, 푸드덕거리고, 경련을 일으키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면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구멍이 너무 작아 고치 하나를 가위로 잘라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놈이 나와서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모습이 제일 곱게 보였습니다. 다른 놈들도 나오긴 나왔는데 푸드덕거리고 비틀비틀 거렸습니다. 한참 있으니까 그 많던 나비가 훨훨 공중으로 다 날아갔지만 가위로 잘라 주었던 이 나비만 병신처럼 날개를 푸드덕거리다가 일생 날지 못하는 기형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나비들은 밖으로 나오면서 힘을 쓰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많은 힘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힘써 지킬 때 하나 됨이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분열의 빌미를 만들고 파당을 만드는 일에 힘과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갈라지고 싸움이 일어나려고 할 때 그들이 화해하도록 격려하고 화합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3.하나 됨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엡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엡 4: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엡 4: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성도들은 한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의 아래에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살아가기에 교회에는 다툴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교회들이 다툼과 분쟁이 있습니다. 우리교단의 대표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의 교회가 있습니다. 성탄절 전에 갱신측과 분쟁을 끝내기로 합의 각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성탄에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하는 이유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는 먼저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라는 것을 성도들이 하나 되어야 하는 근거로 제시합니다. 몸은 서로 싸우거나 다투는 안 됩니다. 서로 중요한 지체이기 때문에 서로를 위해 주어야 몸이 건강한 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 됨은 몸, 성령, 소망, 주, 믿음, 세례, 하나님이 각각 하나 뿐인 것으로 더욱 강조됩니다. 4~6절에서 ‘하나’라는 말이 7회나 반복되어 등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도들의 연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라는 존재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4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와 같이’(카쏘스)는 ‘~처럼’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도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이 ‘몸이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시니’라는 것의 결론이 아니라, 그 부르심의 본질이 바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들이 서로 싸울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기 위해서 다투었습니다(눅 22:24). 초대 교회 성도들은 정욕을 위해 싸우고 다투기도 했습니다(약4:1-3).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언급하며 우리가 하나 됨을 힘써 지켜야 한다고 더욱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한국교회가 그리스도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합시다. 제가 다니엘 기도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서 한 가지 기도 제목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갈래갈래 찢어진 한국 교회가 언제 하나 된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다니엘 기도회 때 1만 2천여 교회 40여만 성도가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 여러분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겠습니까? 건축을 하려면 여러 가지 자재들이 필요합니다. 시멘트도 있어야 하고 모래와 자갈과 철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각각 있으면 절대로 아름다운 건물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입니다. 물이 첨가될 때 시멘트, 자갈, 모래, 철근이 어우러져 한 덩어리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바로 그런 역할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 나가는 우리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