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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를 위해서 출장을 떠나기 전날부터 눈이 예보되어 있었습니다. 주일 예배와 기도회를 마치고 출발할 때는 이미 눈이 발목까지 쌓여 있었습니다. 다행히 기차는 예정대로 출발했습니다. 자리를 잡고 밤새 자지 못한 잠을 청했습니다. 새벽쯤 되었을 때 기차가 멈췄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더 이상 운행할 수 없었습니다. 천만 다행으로 기차가 멈춘 역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평소 들러서 쉬어가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뚫고 교회까지 걸어가는 동안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젖은 몸을 씻고 잠시 쉬다 아침을 먹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버스는 없고 택시만 있었습니다. 부르는 게 값이었습니다. 흥정했지만 맞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습니다. 겨우, 택시를 잡고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가는 내내 아슬아슬 했습니다. 저희와 흥정하다 다른 승객을 태우고 먼저 출발했던 택시는 도로 끝으로 미끄러진 상태에서 겨우 매달려 있었습니다. 높지는 않지만 도로 밖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저희가 탄 택시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더 이상 갈 수 없다며 돌아가든지 내리라고 말했습니다. 저희 일행은 걸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눈만 내놓고 온몸을 꽁꽁 싸맸습니다.
눈보라가 얼마나 휘몰아치는지 한걸음 걸으면 반걸음 밀려났습니다.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었습니다. 체온은 점점 떨어졌습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멀리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살았다는 생각과 함께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어떻게 걸어갔는지 모르게 도착해서 겨우 몸을 녹일 수 있었습니다. 이미 걸어온 만큼 더 가야했습니다.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대로 머물러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허벅지는 경직이 되고, 천근만근 되어버린 몸을 이끌고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성경공부를 하기로 한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예상대로, 모인 선생들은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은혜가 넘쳤습니다. 두 번째 날, 몇 명이 더 도착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세 번째 날, 몇 명이 더 도착했습니다.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돌아갈 길이 막막했습니다. 회의 끝에 네 번째 날, 오전까지만 성경 공부를 하고 하루 일찍 끝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네 번째 날, 오전 성경 공부가 끝났습니다. 모두들 돌아갈 채비를 하고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때, 멀리 또 다른 선생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빨갛게 얼어 있었습니다. 손에는 함께 모인 선생들과 나눠먹으려고 준비해온 감자 전병 들려 있었습니다. 얼어 있는 상태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단 하루만이라도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무려 3박 4일 동안이나 포기하지 않고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달려왔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꽁꽁 얼어있는 그들을 부둥켜안았습니다. 한동안 통곡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하루 먼저 끝내기로 결정해서 정말로 미안하다고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선생은 그야말로 깡촌에서 겨우 초등학교만 나왔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전국에 두 개 밖에 없는 정규 신학에 들어가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이 부정기적으로 열고 있는 성경공부에 참여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한 결과 마을을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선생은 일자리를 찾아 상해로 들어왔습니다. 상황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노숙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개인이 운영하는 시설에 들어왔습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성경공부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했습니다. 당장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은혜가 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선교사들이 CD에 구워온 각종 신학 강의를 누구보다 열심히 들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소원이 생겼습니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500여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이렇게 중국 복음화는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소수의 일군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 없는 절대 다수의 일군들의 희생과 헌신과 충성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아니라 묵묵히 순종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Abel는 여호와께 모자람이 없이 아주 넉넉하여 충분히 만족하실 수 있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흡족洽足하게 받아주실 수 있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안타깝게도, 제사를 드린 결과는 오늘의 교회 곧 저와 여러분이 추구하는 부와 명예와 권세와 자랑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이었습니다.
그Enoch는 죄가 만연하여 빈틈없이 빽빽하게 가득 차 있었던 타락한 세상에서 오직 여호와 한 분만 바라보았습니다. 여호와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여호와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여호와의 뜻 하나만 좇았습니다. 여호와와 동행했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몸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하늘로 옮겨주셨습니다. 인생을 절대 절망과 무기력으로 몰아붙이는 죽음을 보지 않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Noah는 여호와께 은혜를 값없이 받았습니다. 여호와로부터 거룩한 신탁神託을 받았습니다.
이제까지 480년을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이후로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인류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붙이시겠다는 경고였습니다. 아직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상할 수 없었지만, 여호와께서 작정하신 일이니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여호와의 경고를 조금도 가감하지 않았습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못 이기거나, 마지못해서 이거나, 억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자발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무려 1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따가운 시선과 함께 비웃음과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쫓는 인류의 새로운 조상으로 거듭났습니다. 진멸Herem이라는 가장 참혹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을 만큼 극도로 타락해 있었던 세상을 정죄했습니다. 그Abraham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즉시 모든 것이 익숙했던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길을 떠났습니다. 나그네처럼 장막에서 생활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2-3)라는 약속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여전히 땅 한 평 소유하지 못했었지만 믿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인내했습니다. 순종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후손을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의 성취 여부가 달려 있는 아들을 희생 제물처럼 각을 뜬 다음에 번제Burnt Offering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받아들이기도 어려웠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이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순종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하늘나라의 도성 곧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았습니다. 여호와의 때가 이르렀을 때, 마침내 여호와의 작정대로 믿음의 조상으로 거듭났습니다. 그Moses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는 엄청난 신분을 내려놓았습니다. 가장 유력하게 바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기회를 내려놓았습니다. 누릴 수 있었던 온갖 부귀와 영화를 포기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능욕을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을 사모했습니다. 그David는 여호와를 조롱하며 성민 이스라엘을 두려움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육척 장수를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정면 대결을 벌였습니다. 이때, 칼과 단창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한 분만 의지했습니다. 연전연승의 장수로 우뚝 섰습니다. 이때부터, 도망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기는 이방인에게 빌붙었습니다. 침을 흘리면서 미친척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 남 왕국 유다의 왕으로 거듭났습니다. 둘로 갈라져 있던 남북을 하나로 통일했습니다. 옆구리의 가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던 블레셋을 제압했습니다. 그 기세를 몰아서 암몬. 모압, 아람, 다메섹, 소바 등 이집트 강으로부터 유프라테스에 이르는 광활한 땅을 완전히 정복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했지만 무려 천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하염없이 미뤄지고 있었던 가나안 땅 완전 정복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냈습니다. 견고한 왕조를 세웠습니다. 가장 이상적으로 통치하는 군왕으로 우뚝 섰습니다.
성민 이스라엘로 하여금 메시아가 통치하는 시대의 도래를 대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Shadrach, Meshach and Abednego은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달궈진 풀무를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그Daniel는 오랫동안 굶주린 상태에서 자신을 먹으려고 달려드는 사자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그들뿐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무수히 많은 이름 없는 일군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나라들을 이겼습니다. 의를 행했습니다. 약속을 받았습니다. 서슬 퍼런 칼날을 피했습니다. 지극히 연약하게 보였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강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용사가 되었습니다.
수시로 공격해오는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나라와 민족은 물론 자신을 지켜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하나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좋은 부활 곧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일시적인 부활이 아니라 다시는 죽지 않는 영원하고 종말적인 부활을 얻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몽둥이로 때리는 악형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조롱과 멸시와 모욕을 받았습니다. 가혹한 고문과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결박당했습니다. 차꼬에 매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 없는 메마른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옥에 갇혔습니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톱으로 켜져 죽었습니다.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곳에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이곳저곳으로 유리방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야와 산속과 바위 구멍과 토굴로 숨어들었습니다. 마치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구차苟且하게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안락과 평안은 그림자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믿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을 기대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어떤 가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타오르는 그들의 마음과 믿음과 열정을 절대로 돌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부귀와 영화를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다 누리게 해 준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이라면 아예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견디기 힘든, 어떤 때는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요구하는 환난과 핍박 역시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뻐했습니다. 세상은 이름 없는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늘 (구약) 성경에 파묻혀 지내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나무를 보느라고 (정작 중요한) 숲을 놓치고 있다. (구약) 성경 전체가 나에 대한 기록이다!”(요5:39), “너희가 모세의 말을 진실로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룰 (염두念頭에) 두고 기록했기 때문이다.”(요5:46)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지키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던 구약은 단순히 성민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생명의 주 되시는 당신에 대한 기록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주연主演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위대한 조연助演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존재 이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연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조연입니다. 소설가인 그녀Wharton, Edith는 “빛을 퍼뜨리기 위해서는 빛이 되거나, 빛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빛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는 있어도 절대로 빛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가짜입니다.
진짜인 것처럼 교묘하게 흉내를 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은 과연 어떻습니까? 누구를 드러내고 있습니까? 누구를 추구하고 있습니까? 누가 우선순위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누가 주연이고, 누가 조연입니까? 자신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그William Whiting Borden는 고등학교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백만장자인 부모의 졸업 선물로 전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 없이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을 목격했습니다.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 자신을 드리기로 결단했습니다.
성경에 “하나도 남김없이No Reserves”라고 썼습니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세계 선교를 위한 성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백오십 여명이 동참하였습니다. 사년 후에는 천여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일기장에 “늘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께 순종하리라Say no to self and yes to Jesus every time”라고 썼습니다. 졸업 후에는 좋은 직장을 포기했습니다. 백만장자의 권리도 포기했습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중국 간쑤성甘肃省의 모슬렘 복음화를 위한 선교사로 지원하였습니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이집트 카이로로 들어갔습니다.
아랍어를 배웠습니다. 안타깝게도, 척수 뇌막염에 걸렸습니다. 성경에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No retreats.”라고 썼습니다. 그토록 소원했던 선교 활동은 첫걸음도 떼지 못한 채 겨우 스물다섯의 아까운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의 성경책에는 “후회하지 않는다No regrets.”라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남김없이No Reserves 살았습니다. 후퇴 없이No Retreats 살았습니다. 후회 없이No Regrets 살았습니다. 어떤 열매도 없어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의 주연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드러냈습니다.
수없이 많은 후배들의 마음에 중국 선교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중국 선교사로 지원했습니다. 그John the Baptist는 누구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1:23b)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구속의 역사 속에서 유일한 주연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타났던 무수히 많은 조연들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하다고 대답했습니다.
특히, 그는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3:29)라고 고백했습니다. “충만하다πεπληρωται”는 완료 수동태입니다. 물이 컵의 끝까지 곧 넘치기 직전까지 가득 차 있는 완벽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명을 온전히 완수했습니다. 주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조연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완벽한 기쁨이 넘칠 정도로 충만하게 주어졌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존재 이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조연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완벽한 기쁨이 선물로 예비 되어 있습니다. 조연인 저와 여러분은 주연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한 빛을 받아 반사하는 수준의 빛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빛나게 하는 순간 주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광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주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빛나게 하지 않고 조연에 불과한 자신이 빛나려고 하는 것은 자아숭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독하게도 싫어하시며 가증스럽게 여기시고 뱉어버리시는 우상숭배입니다.
자신을 늘 부인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거룩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온전히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남김없이, 후퇴 없이, 후회 없이 투자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유일한 주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는 위대한 조연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는 복된 삶,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한 빛을 어두운 세상에 비추는 사명을 충분히 감당하는 복된 삶, 무엇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완벽한 기쁨으로 충만한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