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20)
[에피소드51]
아내는 동대문 의류가게 일을 그만두고 나의 군대후배인 L사장의 인쇄회사의 경리 일을 맡게 되었다. 아내는 야간 일을 하는 동대문과는 달리 낮에 일하고, 밤에 자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어 만족해했다. 회사는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출퇴근도 편리했다.
[에피소드52]
2004년 11월 22일에 어머니가 심근경색으로 86세를 일기로 소천(召天) 하셨다. 소천하시기 하루 전 날 어머니는 큰 형님과 나와 아내에게 “내가 한(恨)이 많은 여자이다”란 말을 남기셨다. 나는 그 말을 하실 때의 어머니의 표정과 말씀이 뇌리에 사진필름처럼 인화되었다. 그것은 일제와 한국전란을 겪으며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한국여성들의 한 맺힌 삶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말년에 한쪽 눈이 잘 안보이고, 귀도 잘 안 들리게 되면서부터는 고통 없이 어느 날 홀연히 하늘나라로 가게 되기를 소원하고 간절히 기도하셨다. 이러한 어머니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는지 어머니는 아무런 고통 없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모든 의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죽음의 형태는 심장마비로 죽는 것이다”라는 글을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 투병의 고통 없이 순간적인 심장마비로 죽는 것은 임종의 축복이라고 한다. 어머니야말로 바로 의사들이 선망하는 형태의 죽음으로 소천하신 것이다.
그러나 어찌 자식 된 도리로써 어머니에 대한 일말의 회한(悔恨)이 없겠는가! 살아생전 어머니를 잘 모시려고 노력을 했지만은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어머니의 속을 상하게 한 적도 많았다.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정성을 다 하여 어머니를 모시지 못한 것이 몹시 후회되었다. 아내도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에 몹시 놀랐고 슬피 울었다. 아내는 평소에 어머니가 오래 사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일찍 친정어머니를 여의고 어머니의 정을 그리며 살아온 아내는 싫던 좋던 18년 세월을 시어머니와 같이 살아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던 것이다.
장례기간동안 교회 세 곳에서 와서 예배를 인도했다. 그 중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의 여전도사가 발인예배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권사님이 평소에 막내아들을 위해서 말할 수 없이 많은 기도를 드렸고, 나에게도 기도를 부탁했다.”고 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큰 충격을 느꼈다. 어머니가 생전에 출세한 형님들 보다 못난 막내아들인 나를 더 생각하고 나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를 많이 하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어머니는 잘난 자식보다 못난 자식이 항상 더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또 비록 못난 자식이지만 어머니를 직접 봉양하는 나에게 아무래도 관심과 사랑을 좀 더 가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어머니의 깊은 사랑에 한없이 감격했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나는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사랑의 손길을 느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는 성공한 형님들 덕분에 사회각계각층에서 백 개도 넘는 조화가 들어왔다. 어머니가 생전에 꽃을 너무나 좋아하시더니 마치 천사들이 어머니가 아름다운 꽃길을 걸어 하늘나라로 오시게 한 것 같았다. 문상객들이 많이 오시는 바람에 널찍한 장소(현대아산병원 특실)에서 장례를 4일장으로 성대하게 치렀다.
조문해온 주요 인사 면면을 보면, 6공의 황태자였던 박철언씨, 당대 최고의 검사로 알려진 이명재 전 검찰총장, 이정재 금융감독원장, 김우석 신용회복위원장, 강재섭 한나라당 원내총무, 윤영관 외교통상부장관, 법무장관을 지낸 김경한씨, 이정우 청와대 정책수석, 한은총재를 지냈던 김중수씨, 허준영 서울 경찰청장, 서울대 총장 정운찬씨를 비롯 서울대 주요보직 교수들과 일반 교수들, 맹형규 의원 전 행안부장관, 경기도 지사 손학규, 박영철 금융연구원장,전 경제수석, 유장희 대외경제연구원장, 박재윤 전 경제수석, 재무장관, 한영석 전 법사수석, 법제처장관, 손진곤변호사 전 안기부1차장, 김영대 금융결제원장, 롯데그룹 기조실 사장외 계열사 사장단, 그 밖의 국회의원, 시중 은행장, 고위공무원들과 많은 저명 인사들이 조문하여 장례식장을 빛내 주었다.
입관할 때 막내 여동생과 내가 가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어머니를 부탁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장례기간 중 내가 다니던 신용회복위원회 상담위원 중에 K라는 위원은 조문과 식사를 끝내고 귀가 하려고 하던 중 신발을 잃어버린 불상사를 겪었다. 일어나기 드문 해프닝이었다. 같은 은행 출신인 S위원이 실내용 슬리퍼를 한 짝 구해와 대신 신게 하고 지하철까지 그를 동행했다고 한다. S위원은 K위원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바람에 L위원이 마련한 강남의 2차 술자리를 놓치게 되어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전북 김제평야의 만석꾼의 아들인 L위원은 장례식장에서 주흥이 오르자 “2차를 내가 좋은 데서 살 테니 원하는 사람은 따라오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장례식을 끝내고 직장에 복귀했을 때 신발을 잃어버린 K위원에게 고급신발을 살 수 있도록 신발값을 넉넉히 드렸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머니의 가시는 길을 조금이나마 축복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장례 마지막 날에는 어머니와 정신적으로 함께 하고 싶어 난방이 들어오지 않는 영정이 있는 추운 빈소(殯所)에 혼자 잤다. 하늘이 축복한 건지 장례기간 중 날씨가 무척 따뜻했고 맑았다. 묘지에 안장한 다음 날은 비가 적당하게 내려 무덤의 흙도 단단해지고 심은 잔디의 뿌리도 뿌리를 잘 내리게끔 하늘이 축복해 주셨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비록 일제하에서 여고를 다녔지만, 영남의 제일가는 여고인 경북고녀 입학 시 전교1등을 한 수재였다. 서울의 경기고녀에 응시했어도 우수한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임종을 1년 앞두고 어머니는 일본 동경대 총장을 한 진짜배기 크리스천인 야나이 하라 다다오 선생의 저서 “예수전”을 유려한 필력으로 번역하여 출간하시고 소천하셨다. 여고 때의 배움이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을 보여 주신 것 같다.
삼우제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나면서 창연(愴然)해졌다. 그리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세상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만큼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는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어머니가 한없이 그리워졌다.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이제 나는 세상에 남겨진 진짜 고아가 된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후 유품을 정리하면서 나는 귀중한 두 개의 유품을 간직하게 되었다. 첫째는 아버님이 폐결핵으로 투병생활을 하면서 생활이 극도로 어려웠던 시절인 50년 전, 하나님께서 우리 집안에 용기와 위로를 주시기 위해 부엌 아궁이에 직접 찍으신 “십자가 모형”이었고, 두 번째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1년 전에 만드신 직계 조상의 역사가 기록된 “가첩(家牒:晋州姜氏 陶隱公派 世系畧)”이었다.
(강광우 자서전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