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 1,1-22 욥의 시련
히브리 경전에서 욥기라는 명칭은 ‘욥’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제시되었다. 그리스어 번역본에서도 그의 이름이 책의 제목으로 되어 있고, 우리말 성경 역시 이러한 전통을 따른다.
욥기 1장 1절을 보면 욥은 우츠 출신이다. “우츠라는 땅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욥이었다. 그 사람은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1).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욥기의 내용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고 매우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욥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간과 장소가 ‘오래전 먼 곳’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독자가 객관적 거리감을 갖게 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욥이라는 이름 역시 유다인 이름이 아니기에, 그리고 어원과 의미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이름에 대한 여러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우선 히브리어에서 파생된 이름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욥은 ‘미워하다’ ‘증오하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 ‘아야브’에서 파생되었다고 본다. 하느님과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 저항하는 욥의 모습이 이러한 어원과 잘 어울린다는 견해이다. 또 다른 입장에서는 ‘돌아오다’라는 뜻의 아랍어 동사 ‘아바’에서 파생하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욥이 ‘(하느님께) 돌아온 자’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욥이라는 인물은 욥기에서만 등장하지 않고 에제키엘서 14장에도 언급된다. “비록 그곳에 노아와 다니엘과 욥, 이 세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으로 제 목숨만 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에제 14,14).
“거기에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들은 아들도 딸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으로 제 목숨만 구할 수 있을 따름이다”(에제 14,20).
에제키엘서 본문에는 노아, 다니엘, 욥이 전형적인 의인이며 경건한 이의 표본으로 제시되어 있다. 욥이 고대로부터 전통적으로 전해오던 의(義)와 경건함의 대명사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에제키엘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욥이 욥기의 주인공과 동일한 인물이라고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국 욥기의 저자가 이미 의로움과 경건함의 표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을, 자신의 작품 주요 인물로 설정하여 이야기를 구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장1절에서 나오는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욥은 또한 엄청난 재산가이다. 그는 유다 민족의 일원은 아니라 예돔의 일부엿따고 생각되는 ‘우츠’라는 곳의 원주민이었다. 이러한 지형적 위치는 욥의 친구들에게 붙여진 이름들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그 이름들은 테만 사람 엘리파즈,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초파르로 에돔 지역 출신을 말한다. 욥기 저자는 욥의 이야기에다 국가적 경계선을 초월하는 보편적 호소력을 부여하고자 한다. 실제로 이 책은 선택된 백성이나 계약 어느 것도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욥기의 전개 과정에서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언급은 독자로 하여금 욥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올바로 평가하는데에 도움을 준다. 욥은 하느님에게서 넘치도록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이다. 전통적으로 셈족에게 자녀가 많은 것은 하느님께서 내리신 복으로 여겨졌다. 또한 욥은 목축과 농경으로 큰 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1장 5절은 욥 가정의 행복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욥은 고대의 관습대로 가장으로서 제관 직분을 수행하였다. 혹시 자녀들이 죄를 짓고 하느님을 모독하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날마다 제사를 지내곤 했던 것이다.
“이런 잔칫날들이 한차례 돌고 나면, 욥은 그들을 불러다가 정결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그들 하나하나를 위하여 번제물을 바쳤다. 욥은 '혹시나 내 아들들이 죄를 짓고, 마음속으로 하느님을 저주하였는지도 모르지.' 하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욥은 늘 이렇게 하였다”(5).
욥기의 저자가 의도적으로 초(招) 이스라엘적 보편성을 부각시키고 있음을 암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욥을 소개하면서 그가 소요하고 있던 재산이나 가족보다 도덕성을 먼저 강조하였다는 점인데(1,1 참조), 이는 욥기 전체의 이야기가 도덕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드러낸다.
1장 6-12절은 주 하느님과 사탄의 대화를 소개한다. 하늘의 법정 장면이다. 특이하게도 하느님이 정좌해 계시는 곳에 사탄이 동석하는데, 이는 사탄의 발언이 ‘부정적’이라는 것을 경고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이에 사탄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8-9). 곧 사탄은 욥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향유하기 위해 계산적으로(혹은 기본적으로) 하느님을 경외했다고 주장하는데, 이처럼 보상을 기대하는 ‘기복 신앙’과 이를 뒷받침하는 ‘인과보상적 사상’이 사탄적임을 복선으로 깔아 놓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욥의 의로움을 칭찬하시자, 사탄은 욥이 자신의 선한 행위의 결과로 다가올 좋은 것들 때문에 계산적으로 하느님을 공경한 것이지 하느님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면서, 이를 시험하기 위해 욥에게서 좋은 것들을 빼앗아 볼 것을 하느님께 제안한다. 만일 재산을 빼앗김으로써 하느님을 저주하게 된다면, 그것은 욥이 선한 일과 그로 인해 주어질 좋은 결과들(good)을 사랑한 것이지 하느님(God) 자체를 사랑한 것은 아님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을 시험할 권한을 주신다. 하지만 사탄에게 욥을 직접 해칠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다. 사탄은 주님께 말한다. “‘그렇지만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이에 사탄은 주님 앞에서 물러갔다”(11-12).
욥의 자녀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던 어느 날, 사람에 의한 재앙과 천재지변이 욥의 집안을 동시다발적으로 내리친다. 욥의 소 떼와 암나귀들이 약탈을 당하고 양 떼와 머슴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불에 타 죽는다. 또한 칼데아인들이 낙타들을 덮쳐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인다. 그리고 사막 건너편에서 불어온 큰 바람에 욥의 자녀들이 모여 있던 집이 무너져 내려 모두 죽고 만다. 욥은 순식간에 자녀들과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사탄의 주장대로라면 욥은 이제 하느님을 저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욥의 반응은 전혀 반대다. 그는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는다. 이러한 행동은 고대 근동 사람들이 장례에서 곡을 할 때 취하는 행동이었다. 욥은 하느님의 뜻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인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주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1,21) 욥은 자기 집안에 내린 재앙에서 하느님의 손길만 본다. 그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내맡긴다. 결국 욥은 사탄의 주장과는 달리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곧 욥이 의롭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가 받은 복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욥 2,1-6 천상어전
2장 1-6절은 1장에서의 천상 어전회의와 거의 같은 반복으로 기술된다. 3절에 “너는 까닭없이 그를 파멸시키도록 나를 부추기는 것이”이라고 말한다. 이는 욥에게 내린 재앙이 하느님의 본 뜻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암시해 준다. 즉, 그것은 사탄의 부추김과 충동질에 의해 주도된 것이며 하느님은 다만 그것을 허용하신 것이다(2-6절). 실제로 의인을 시험하시고 그에게 고난을 내리는 것은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서는 사탄의 주장(참소)의 거짓됨을 폭로하고 욥의 궁극적 신앙 증진을 위해 시험을 허락하신 것뿐이다. 요컨대 하느님의 이러한 섭리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로마 8,28)는 측면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4이에 사탄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가죽은 가죽으로! 사람이란 제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소유를 내놓기 마련입니다. 5그렇지만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뼈와 그의 살을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 6그러자 주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그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의 목숨만은 남겨 두어라”(4-6). ‘가죽은 가죽으로’라는 말은 ‘살갗은 살갗으로!’로 옮길 수도 있다. 법적인 교환 개념을 배경으로 한 격언이다. 이 격언의 뜻으로 여러 가지가 제안되지만, ‘급부와 반대급부’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탄의 다음과 관련해서 이 격언은, 사람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그 목숨에 상응하는 반대 급부, 곧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사탄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격언을 하느님 앞에서 직접 인용함으로써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5절에서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뼈와 살을 쳐 보십시오’라는 말은 사탄의 2단계 시험이 암시된다. 그런데 1장에서 첫째 시련의 1단계 시험이 외형적 물질적 측면에 집중된 것이라면 2단계 시험은 내면적 영적 측면에 주안점이 주어져 있다. 즉, 첫 단계시험이 가축(양, 낙타, 소, 나귀, 1,15-17), 자녀(1,19), 종(1,15-17), 재물(집, 1,19)등에 내린 반면, 둘째 단계 시험은 욥 자신의 육체(7,8절), 그로인한 가정적 파탄(9절)과 욥의 정신적 갈등에 맞추어져 감을 주목해야 한다.
사탄은 욥이 육체적 고통인 뼈와 살이 찢어질 듯한 고통에 빠지면 결국 하느님을 저주하는 반신앙의 상태에 빠질 것으로 예상했다. 즉, 어떤 사람이 그 생명에 위협을 받으면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그것을 보전하기 위해 몸부림치듯 육체적 시련을 통해 생명의 위협을 욥이 받는다면 그 역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며 종국에는 신앙마저 내팽개치고 목숨의 부지를 위해 전전긍긍(戰戰兢兢)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사탄은 욥을 시험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허락을 받는다. 즉, 그는 욥의 생명을 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욥을 시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욥 2,7-10 새로운 시련
7절에서 욥의 육체적 고통이 시작된다. ‘발바닥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고약한 부스럼’이란 악성 피부병 즉 나병의 일종일 것이다. 그런데 가족으로부터 격리되지 않아 나병은 아닌 듯하다. 추측컨대 이는 부스럼 또는 온몸 전체에 진물과 고름이나는 궤양성 피부병인 듯하다. 이 병에 대한 증상은 본서에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은 욥의 정신적 고뇌에 대한 시문학적 표현일 수도 있으므로(예를 들면 '불면')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욥은 질그릇의 날까로운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은다. 이는 그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욥은 잿더미에 앉아 있다. 병에 걸려 만신 창이가 된 자신의 현상태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표시로 쓰레기 더미에 앉았을 수 있다. 즉 그는 이미 재앙을 받아 쓰레기 같은 육체를 가졌으며 사회로부터도 냉대와 거절을 받는 신세가 되었는 바, 이제 쓰레기 더미 위에 앉음으로써 자신의 비참한 사황을 쓰레기 더미와 일체화시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비참한 현 상황에 대한 애통함을 암묵적으로 나타내려 했을 것이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그 흠 없는 마음을 굳게 지키려 하나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 그러자 욥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미련한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9-10). 여기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욥의 완전무결성이다. 욥의 아니가 도전하고 있는 것은 그가 끄떡하지 않고 간직하는 내적 일관성과 규범적인 행실이다.
역경은 욥에게 자신의 무죄성을 상실하도록 만들지 못한다. 욥이 자신의 종교관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그의 사욕없음을 보여주는 장면을 10절에서 드러난다. 욥이 단순히 그 아내의 무분별함이나 지적 우매성을 질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 '네발라'는 주로 도덕적 종교적 요구들을 무시하는 불경스러움, 또는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무분별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욥은 아내의 말이 윤리 도덕적 측면에서 죄가 될 뿐 아니라 종교적 측면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신성 모독적 언사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10). 이로써 사탄의 2단계 시험도 무위로 돌아가고 욥의 신앙의 진정성(眞正性)이 재확인되었다. 혹자는 본문에 나타난 '입술'이라는 용어를 예로 들어 욥이 말로는 하느님께 범죄하지 않았으나 마음으로는 이미 범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은 말로나 행동으로 표현되기 일반이다. 더욱이 생명의 위협에 처하는 극한 상황에 처하면 마음의 심층적 생각까지도 은연중 말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계 상황에 직면한 욥이 말로써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간접적인 반증이 된다. 또한 욥은 마음으로 범죄하는 것 못지않게 두려워하였다. 이는 욥이 그의 자녀들이 마음으로 하느님을 배반할까 두려워하여 매일 번제물을 바치고 기도하였다. 이렇게 볼 때 욥은 외적 범죄 행위와 동일하게 내적 범죄 행위도 하느님 앞에서 죄악된 것임을 인식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욥이 마음으로라도 하느님을 저주했더라면 사탄의 계획은 성공으로 끝났을 것이다. 두 차례나 욥을 의인으로 인정한 하느님의 칭찬(2,3; 1,8) 역시 무위로 돌아갔을 것이다. 한편 욥은 친구들과의 변론 과정에서 자기 의로움를 내세우는 등의 잘못을 범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견지함으로써 신약 성경의 저자에 의해 인내하는 자의 전형으로 기술 되었다(야고 5,11).
2,11-13 세 친구의 방문
두 단계에 걸친 사탄의 시험과 그에 대한 욥의 반응으로서 본서 도입부는 종결되고 본문에서부터 본론부가 시작된다. 그 가운데서도 11-13절까지는 본론부의 시작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욥의 세 친구가 등장하여 향후 전개될 변론을 예시해 준다. 모든 것을 상실한 태 잿더미 속에 앉아 있는 욥에게 세 친구(엘리파즈, 빌닷, 초파르)가 방문한다.
“욥의 세 친구가 그에게 닥친 이 모든 불행에 대하여 듣고, 저마다 제고장을 떠나왔다. 그들은 테만 사람 엘리파즈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초파르였다. 그들은 욥에게 가서 그를 위안하고 위로하기로 서로 약속하였다”(11).
친구 세 사람이 욥을 찾아온다. 이들에 대한 자세한 인적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욥기와 성경의 다른 자료를 근거하여 볼 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들 모두는 욥보다 연장자였다(15,10). 둘째, 이들은 욥을 조문하러 오기 이전부터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셋째, 이들 모두는 당시 상당한 수준의 학식과 재물을 겸비한 자로 추정된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정확한 논리 전개와 풍부한 지식을 동원하여 욥과 변론을 펼치는 바(4,1;5,27) 이는 그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학식과 지혜를 소유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욥을 방문하러 올 정도의 신분이라면 각기 그 지방의 유지이거나 풍부한 재물을 소유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는 대부분 같은 계층의 사람끼리 교제하였기 때문이다. 즉, 당시 막대한 재물과 명예를 지닌 자(1,3)였던 욥과 교제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것과 비견될 만한 수준의 재물과 명예를 가졌을 것이다. 넷째, 이들 모두는 히브리 신앙을 가진 자였다. 즉, 그들은 비록 욥의 신앙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할지라도(1,1, 8; 2,3) 하느님의 의로움, 성품 등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신앙 지식을 소유했다.
테만은 종종 성경에서 에돔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쓰이기도 한다(예레 49,7). 이 지역은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해서 볼 때 사해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엘리파즈는 에돔족의 한 족장의 이름이다. 본래 '수아'(Sua)는 아브라함과 그두라 사이에 출생한 아들을 가리킨다(창세 25,2).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 인명(人名)이 지명(地名)으로 변천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추측컨대 수아의 후손들이 사는 중부 우프라테스 지역을 '수아'라는 지명으로 부른 것 같다. 나아마 이 지명이 언급되는 것은 욥기 11,1;20,1 이외에 여호 15,41 딱 한 군데뿐이다. 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12절에서 “그들이 멀리서 눈을 들었을 때 그를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욥의 형체가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변형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욥의 세 친구들은 '멀리서'(12a절)도 욥을 알아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욥의 질병과 그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과장 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물론 전신에 퍼진 피부병으로 인해 욥의 형체가 많이 변형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된다.
그를 알아 볼 수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친구들은 목 놓아 울며, 겉옷을 찢고 먼지를 날려 머리에 뿌렸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1,20에 나타난 욥의 행위와 비슷한 것으로서 예루살렘의 파괴를 목도한 이스라엘 장로들이 보인 바 있다(애가 2,10). 한편 당대의 석학(碩學)이요, 재력가(財力家)로 알려진 이들이 이러한 행위를 취했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당시의 통례적인 관습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참된 우정의 발로임에는 틀림없다. 즉, 그들은 주변의 이목이나 자신의 체면에 연연해하지 않고 고통당하는 욥에 대한 진실한 연민의 정과 비탄의 감정을 표했던 것이다.이렇듯 욥의 친구들은 순수한 동기에서 욥을 방문하였으며, 욥을 위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한다. 물론 앞으로 전개될 변론 가운데에서 친구들의 욥에 대한 비난과 정죄의 말이 종종 나오기는 하나 이것 역시 우리는 그들의 신앙 수준의 한계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지 악의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지나치게 과신하지만 그래도 진지한 학자들이다. 앞으로 그들은 욥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이유를 설명해 주려고 노력하게 된다. 재난을 이해하게 되면 견디기가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세 친구는 욥이 처한 곤경에 나무 마음이 아파 말을 못하고 울기부터 한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이레 동안 밤낮으로 그와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한마다 하지 않았다. 그의 고통이 너무도 큰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13). 칠일이란 이 기간은 죽은 자를 위한 애곡 기간과 동일하다(창세 50,10). 따라서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최상의 애통의 표시를 했다고 볼 수 있다. 탈무드의 전승에서 보면 죽은 자의 집을 방문한 조문객들은 상주가 먼저 말을 열기 전까지는 한마디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비참한 상황에 대해 말을 잃었으며,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네기 보다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도리어 효과적이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고통당하는 자와 같이 말없이 있어줌으로써 그들은 나름대로 깊은 우정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욥 3,1-26 생일을 저주하는 욥
3장부터 31장까지 욥의 독백과 엘리파즈, 빌닷 그리고 초파르 세 친구와의 담화를 시적으로 기술하였다. 3장 1-10절에서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고통을 당할 일도 없으리라는 것이다. 욥은 자기 어머니가 자기를 이 세상에 내놓은 사실을 한탄한다. “마침내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1-3).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였으되,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하느님께 원망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생일(삶)에 대해 탄식을 발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욥이 하느님을 저주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왜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그러한 재앙을 가져다주셨는지 묻지 않는다. 아직은 하느님께 자기 고통의 이유를 밝혀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3잘에서 “차라리 업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베었네!’ 하고 말하던 밤” 형식상 '날'(day)과 '밤'(the night)이 대구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내용상 이 두 단어는 모두 욥의 출생(일)을 가리킨다. 엄밀히 말하자면 '날'은 출생일(出生日)을 가리키고 '그 밤'은 잉태된 날을 가리킨다. 욥은 자신이 잉태된 밤과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그날이 바로 자신에게 불행이 시작된 날이기 때문이다. 빛은 생명을 상징한다. 그래서 욥은 위에서 하느님께서 찾지 않으시고, 빛이 밝혀 주지도 않았더라면 자신의 생명이 시작되지 않았으리라고 한탄한다.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이유를 밝힌다. “그 밤이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않아 내 눈에서 고통을 감추지 못하였구나”(10).
3장 11-19절에서 욥은 의문에 찬 탄식을 쏟아 낸다. 만일 자기가 잉태되고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모태에서 나올 때 죽었더라면 바로 무덤으로 갔으리라고 탄식한다(11-12절).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13). 13절에서 욥은 ‘눕다’ ‘쉬다’ ‘잠들다’ ‘안식을 누리다.’라는 말들로 태어날 때 즉시 죽었더라면 지금처럼 고통을 당하지 않고 편히 쉬고 있으리라는 염원을 표현한다. 그는 저승(셔올)이 제공하는 안식을 갈망한다. “임금들과 나라의 고관들, 폐허를 제집으로 지은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또 금을 소유한 제후들, 제집을 은으로 가득 채운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14-15). 이미 그곳에 있는 임금들과 고관들, 제후들과 부자들의 상태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긴다(14-15절). 이승에서 시끄럽게 굴던 사람들도 저승에서는 모두 조용하게 머물고, 모든 이가 힘없이 똑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포로들을 부리던 감독관들도, 노예살이하던 사람들도 모두 같은 안식을 누린다. 낮은 이나 높은 이나 똑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3장 20-26절에서 욥은 자신의 현 상태에 대하여 불평 어린 탄식을 한다.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20) 빛은 고생하는 이에게 자신들의 비참함을 더욱 인식하고 죽음을 갈망하게 할 뿐이다. 그러나 죽음을 원할수록 생명이 더 주어질 뿐이다. 고생하는 이들은 보물을 찾는 사람들처럼 죽음을 갈망하다가 무덤을 만나면 기쁨에 차 환호를 지를 것이다(21-22절).
욥의 이 의문에 찬 탄식은 하느님에 대한 강한 불만의 표현이다. 생명을 주고 고통을 당하게 하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동정심이 있으시다면 그들의 슬픈 상태를 이해하시어 빨리 죽게 해주셔야 할 것이다.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23절)은 20절의 불평을 이어간다. 여기서 욥은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불평을 자신의 상태에 적용시킨다. 애초부터 가망이 없는 사람에게 왜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주셨는가 하는 한탄이다. 현 상태에서는 자신의 인생에 아무런 목적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의 큰 선물인 빛과 생명이 욥에게는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실망과 고통을 줄 뿐이다. 그래서 욥은 “두려워 떨던 것이 나에게 닥치고 무서워하던 것이 나에게 들이쳤구나”(25절)라고 탄식한다. 이는 욥이 자신에게 시련이 닥치기 전에 이미 자기 집안에 불행한 일이 닥칠까 봐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제사를 드리곤 했던 것이다(1,5). 불행에 대한 욥의 예감이 현실이 되었다.
오히려 욥은 “나는 편치 않고 쉬지도 못하며 안식을 누리지도 못하고 혼란하기만 하구나”(26) 것을 깨닫고 있다. 그래서 그는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스스로 생명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 있기 이전 시간에다, 즉 태어나기 이전 시간에다 옮겨 놓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의 고통이 그를 그 정도까지 멀리 돌아가 있는 것이다.
욥 4,1-5,27 엘리파즈의 첫 번째 발언
엘리파즈의 말은 다른 두 친구의 말보다 길고 내용도 훨씬 짜임새 있으며 격언, 비유, 교훈, 설교, 찬미가, 환시 등 여러 문학 유형이 사용된다. 엘리파즈가 펼치는 논거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있으며, 어느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그러면서 그는 두 가지 논점을 제시한다. 하나는 인과보상의 원칙(4,7-21)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고 자기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청하는 사람을 도와주신다는 것이다(5,8-27)
엘리파즈는 욥이 언짢아하리라는 것을 예견하면서도 욥의 탄식에 답변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4장 2-6절에서 엘리파즈는 먼저 네 가지 예를 들며 욥의 의로운 행위를 인정한다. “여보게, 자네는 많은 이를 타이르고 맥 풀린 손들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자네의 말은 비틀거리는 이를 일으켜 세웠고 또 자네는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 주기도 하였지.”(3-4). 그는 지난날 욥의 행동에 지금 욥이 취하고 있는 자세를 비교한다. 그러면서 그는 역설적 물음으로 욥을 나무란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자네가 믿는 바 아닌가? 흠 없는 삶이야말로 자네가 바라는 바 아닌가?”(6절) 엘리파즈는 욥의 불평이 그의 경건함을 파괴시키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참된 믿음이란 모든 장애물에 당당하게 맞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4장 7-11절에서 엘리파즈는 욥에게 인과보상의 원칙에 대해 생각하라고 권유한다. 그는 이를 강조하고자 두 가지 역설적 물음을 제기한다. “죄 없는 이 누가 멸망하였는가? 올곧은 이들이 근절된 적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본 바로는 밭을 갈아 불의를 심은 자와 재앙을 뿌린 자는 그것을 거두기 마련이라네”(7-8) 이 물음으로 엘리파즈는 욥의 믿음을 회복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인과보상의 원칙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을 자연 법칙에 비교하여 설명한다. 윤리적으로 악한 일은 한 사람의 결말은 결국 불행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악인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직접 하느님에게 벌을 받게 된다. 마치 동물의 왕이라는 사자도 이빨이 부러지고 죽어가듯, 악인들 역시 아무리 힘이 세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시면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4장 12-21절에서 엘리파즈는 밤에 체험한 환시로 자기 주장의 핵심을 표현한다. 그가 환시에서 받은 메시지에 따르면 어느 인간도, 천사도 하느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다. “인간이 하느님보다 의로울 수 있으랴? 사람이 제 창조주보다 결백할 수 있으랴? 그분께서는 당신 종들도 믿지 않으시고 당신 천사들의 잘못조차 꾸짖으시는데,”(17-18) 하느님만이 정의와 도덕적 결백의 절대적 기준이시기에 이 세상 어느 인간이 제 아무리 의롭다하더라도 하느님에 비하면 죄가 있기 마련이다. 엘리파즈는 이 점을 되풀이하여 강조한다(15,15-16; 22,2). 구약 성경은 인간의 이러한 부당함의 근거를 주로 인간의 죄에서 찾지만 엘리파즈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부족함, 열등함에 그 근거를 둔다. 그래서 그는 욥이 무죄하다는 주장을 배척한다. 하느님과 비교할 때 그분 앞에서 어느 누구도 죄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엘리파즈는 욥이 자신의 무죄를 변호할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잘못하고 계시다는 점을 주장할 때 더 더욱 이 사실을 강조한다. 하느님 곁에서 그분을 섬기는 천사들조차도 잘못이 없을 수 없거늘 인간이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욥 5,1-27 불행의 근원
5장 1-7절에서 엘리파즈는 욥에게 투덜거림과 화냄이 가져다줄 결과에 대하여 경고한다. 욥이 지금의 마음 상태를 가라앉히지 않으면 어리석은 자와 같이 죽게 되리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정녕 미련한 자는 역정 내다가 죽고 우둔한 자는 흥분하다가 숨진다네”(2). 엘리파즈가 직접 목격한 바에 따르면, 미련한 자가 번성하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곧 순식간에 멸망하고 말았으며 그 결과가 자손들에게까지 미쳤다는 것이다(3-5절). “그가 거둔 것은 배고픈 자가 먹어 치우고 심지어 가시나무 울타리 친 것조차 빼앗기며 그들의 재산은 덫이 채어 가 버렸다네”(5).
엘리파즈는 이러한 재앙이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기가 심은 바를 거두듯, 고통과 불행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환난이 흙에서 나올 리 없고 재앙이 땅에서 솟을 리 없다네. 무릇 사람이란 재앙을 위해 태어나니 불꽃이 위로 치솟는 것과 같다네”(6-7). 여기에서 주장하는 엘리파즈의 논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엘리파즈는 인간의 고난이 외부적인 원인이 아닌 인간 내부의 원인에 의해 발생되는 것으로 보았다. 즉, 그것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나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문제(죄성, 부패성)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철저히 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창세 3,17.19에서 분명히 보듯 인간은 범죄함으로 인해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적대적인 자연 환경과 부단히 투쟁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엘리파즈는 7절 상반부에서 '무릇 사람이란 재앙을 위해 태어나니'라는 논리를 통해 고난이 모든 인간들에게 임함을 역설하고 있다. 즉, 인간 모두는 이 고난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7절 하반절의 ‘불꽃이 위로 치솟는 것과 같다네’라는 표현 역시 인생의 고난이 변경될 수 없는 자명한 이치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엘리파즈의 논리는 다분히 일반론적 측면에 기울어진 감이 농후하다. 즉, 4,17-21에서 인간의 보편적 유한성과 부패성을 주장한 그는 본문에서도 인생의 고난을 보편적 원리에 의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이론은 원칙론적 측면에서 지극히 타당하다. 따라서 욥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이것을 부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도식적이고 원론적인 차원에서만 현실 상황(욥의 고난도 포함)을 파악하여 그것을 단순화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즉, 그는 욥(의인, 1,1;2,3)이라는 특수한 한 개인을 인생 일반(죄인)의 범주에 포함시켜 그의 고난을 정당화시키고 따라서 욥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난에 아무런 불평없이 무조건 순응하기만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엘리파즈는 5장 8-16절에서 욥에게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하소연하라고 권유한다. 엘리파즈는 자신이 욥의 처지에 있다면 하느님을 찾을 것이라 말한다(8절). “그렇지만 나라면 하느님께 호소하고 내 일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겠네”(8). 여기에서 엘리파즈는 지금껏 전개된 교조적(敎條的;dogmatic)태도에서 다소 물러나서 욥에게 권면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17-27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한편 8절의 권면 속에는 욥에 대한 은근한 질책이 내포되어 있다. 즉, '자네는 쓸모없는 불평을 터뜨림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네. 만일 나 같으면 그러한 일을 집어 치우고 하느님께 기도하겠네'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여기에서 보듯 엘리파즈는 욥의 한탄과 변론(3장)을 무익한 것으로는 생각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도에 지나친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우리는 여기서 엘리파즈가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소위 '신적 섭리의 불가해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굳이 볼 필요는 없다(시편 40,5).
다만 그는 10-16절에 나타난 이유를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에 대한 찬미가 형식으로 표현한다. 하느님은 “땅에 비를 내리시고 들에 물을 보내시는 분”(10)으로 묘사된다. 대부분 건조한 사막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팔레스틴 지방에 있어서 비는 식수(食水)로, 농부의 식물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으로, 그리고 초장의 풀을 자라게 하여 육축을 기르게 하는 것으로서 매우 긴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기후는 우기(雨期)와 건기(乾期)가 뚜렷이 구분되며, 건기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으며, 우기라고 해서 다량의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팔레스티나인들에게 있어서 비는 간절한 희구의 대상이었다. 성경이 비를 하느님의 축복, 또는 은총으로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그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여기서도 엘리파즈는 '비'('물')를 하느님의 축복(섭리)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메마른 땅과 밭이 비를 받아 소성하듯 인간 역시 하느님의 은혜를 통해 살아간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셀 수 없는 기적을 이루시는 분이기에 마치 자연을 지배하시듯, 고통을 당하는 당신 종들에게 똑같은 기적을 보여 주실 수도 있고 사회에서 부당한 취급을 받는 이들의 운명도 바꾸어 주실 수 있다(9-11절). “비천한 이들을 높은 곳에 올려놓으시니 슬퍼하는 이들이 큰 행복을 얻는다네”(11). ‘슬퍼하는 이들’이라는 말에서 '슬퍼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다르'는 단순히 슬퍼하거나 애통해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말은 '재투성이가 되다', '(상심으로 얼굴 표정이) 어두운 색깔이 되다','(삼베 옷, 또는 더러운 옷을 입고) 극심히 애도하다'를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1절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앉아 극심한 슬픔을 나타내는 자를 가리킨다.
또한 그분께서는 자신의 권력을 약한 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데 사용하는 자들을 단죄하신다. 교활한 자들은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일을 성공시키려고 계략을 꾸미지만 그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계략을 혼란스럽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낮인지 밤인지 구별도 못할 만큼 어리석고 판단력도 흐려지게 된다(12-14절). “그분께서 슬기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시니 간사한 자들의 의도가 좌절된다네”(13).
또한 하느님께서는 불행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구해 주시고 그들이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지게 하신다. 그리하여 불의한 자들이 입을 다물면 약한 이들은 폭력의 위협에서 해방되어 평화로이 살게 될 것이다(15-17절). 그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는 재난 가운데서도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욥의 생각을 바꾸고자 한다. “여보게, 하느님께서 꾸짖으시는 이는 얼마나 행복한가! 전능하신 분의 훈계를 물리치지 말게나.”(17절) 그래서 엘리파즈는 욥에게 하느님의 꾸짖음과 훈계에 대하여 불평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전능하신 분’은 히브리 말로 샤따이로서 야훼의 옛 칭호이지만, 그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구약성경에서 대략 48번 쓰이는 데 욥기에서만 31번 나온다. 칠십인역은 ‘만물의 지배자’, 또는 ‘전능자’로 옮긴다.
5장 18-27절에서 엘리파즈는 하느님의 구원 능력과 그분께서 베풀어 주실 은혜를 열거한다.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교육자이시며 치유자이시므로 아프게도 하시지만 치유해 주기도 하신다. “분께서는 아프게 하시지만 상처를 싸매 주시고 때리시지만 손수 치유해 주신다네”(18). 이는 욥의 질병인 피부병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즉, 욥의 질병이 하느님의 징계의 일환이나 욥이 그것을 인내하면 하느님께서 고쳐 주신다는 것이다. 한편 18절은 앞절과 뒷절이 동의(同意)대구로 구성되어 있다. 즉, '아프게 하시지만'- '때리시지만', '싸매 주시고'-'치유해 주신다네'는 각각 동일한 의미이다. 이렇듯 하느님을 치료자로 그 백성을 병자(病者)로 묘사하는 것은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분께서는 욥을 곤경에서 건져 주시고 악이 건드리지 못하게 하시며 온갖 재앙에서 보호해 주실 것이다(18-23절). 또한 그분께서는 욥에게 복을 내리시어 목축이든 농사든 모두 풍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고, 많은 후손을 보게 해 주시며, 마침내 수를 다하고 무덤에 들어가게 해 주실 것이다(24-26절).
“그런 다음 자네는 제철이 되어 곡식 단이 쌓이듯 수명을 다하고 무덤에 들어갈 것이네. 여보게, 이것이 우리가 밝혀낸 것으로 사실이 그러하니 자네도 귀담아듣고 알아 두게나.”(26-27).
26절에 나타난 장수의 축복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상기시킨다. 실제 고대 히브리인들은 '장수'를 '자손의 번성'(25절)과 더불어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겼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전개된 엘리파즈의 변론의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을 거쳐야만 6장부터 전개될 욥의 반론(反論)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엘리파즈의 변화는 고난의 일반화(一般化)라는 이해이다. 거듭 확인하거니와 욥의 고난은 그의 특별한 죄악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탄의 계략와 그에 대한 하느님의 허용으로 주어진 것이었다(1,9-12;2,4-6). 하느님은 1차적으로 사탄의 참소(1,9-11;2,4,5)의 허구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욥에게 시련을 내릴 것을 허용하셨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 의미에서 그것은 욥에게 신앙의 단련과 보다 새로운 차원의 신앙을 주기 위해서였다. 즉, 자기-공의(self-righteousness)와 선행(善行)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에 만족감을 느낀 욥에게 초월자 앞에서 그것은 절대적 구원의 근거가 아닌 단지 상대적 가치밖에 지니지 못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런 측면에서 욥의 고난은 죄악에 대한 형벌이라기 보다는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이 의인의 신앙 굳셈을 위한 일종의 '시련'이었다. 그러나 엘리파즈는 이러한 욥의 고난의 특수성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일반적 고난의 범주에 넣어 해석했다. 그 결과 그는 욥이 범죄로 인해 고난받고 있음을 심증적으로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5,3,4).
두 번째 엘리파즈의 변호는 경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엘리파즈는 자신의 논증을 확신시키기 위해 자신이 목도한 몇가지 사례를 들었다(4,8-11;5,3). 그런데 이 같은 것들은 원론적인 측면에서는 진리이나 현실의 개별적 부분에 있어서는 그대로 적용되기 힘든 측면을 내포하였다. 결국 그는 부분적 경험에 근거하여 자신의 논리를 세우고 그것을 모든 부분에 적용시키는 잘못을 범했다.
세 번째 엘리파즈의 변호는 위로자로서의 자격 결여가 있다. 그의 논증은 거의가 딱딱한 교리 체계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으며 실로 냉정하기조차 하다. 그는 '위로자'(comforter)라기 보다는 '훈계자' 내지는 '교사'로는 욥 앞에 섰던 것이다. 물론 엘리파즈의 고압적이고 냉정한 자세가 5,17-27에서 약간 완화되기는 했다. 그러나 27절에서 보듯 그는 자신을 '지혜자'(wiser)요, 욥을 그 지혜에 복종해야 하는 '학생' 정도로 취급함으로써 욥의 심경을 격발시켰다(6,24-29).
요컨대 엘리파즈는 친구에 대한 참된 우정에서 자신의 변론을 시작했으나 욥의 특수한 상황을 적절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상투적인 논리만을 나열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욥을 정죄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엘리파즈는 이러한 말들로써 욥에게 불평하지 말고 하느님께 온전히 복종하며 신뢰할 것을 권유한다. 엘리파즈는 스스로 현인이라 자처하면서 자신의 말이 모두 진실임을 강조한다(27절).
욥 6,1-7,21 욥의 첫째 담론
욥은 자신의 고통과 죄를 연결시키는 엘리파즈의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못함을 불평하면서(6,1-30) 이제 하느님께 직접 탄원을 드린다(7,1-21). 6장에서부터 7장까지는 엘리파즈의 변론(4,5장)에 대한 욥의 첫번째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6장 1-7절에서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어느 정도이며, 왜 자기가 불평을 하는지를 설명한다. 욥의 고통은 저울질할 수 없을 만큼,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겁다(2-3절). “아, 누가 제발 나의 원통함을 저울질해 보고 나의 불행도 함께 저울판에 달아 보았으면!”(2). 5,2에서 엘리파즈는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인다'고 함으로써 욥을 은근히 질책한바 있는데, 본문은 그것에 대한 욥의 반박이다. 즉 고통에 처한 자가 그 고통을 토로한다고 무조건 질책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참작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2절은 욥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인과보상적인 변론만을 전개한 엘리파즈의 태도에 대한 욥의 반박이라 하겠다. 나아가 이 말속에는 욥의 자기변호의 의도도 내포되어 있다. 즉, 그가 당하는 고통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며, 따라서 죽음을 갈망하는 자신의 행위와 말(3장)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욥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원수 대하듯 공격하신다고 여긴다(4절). “전능하신 분의 화살이 내 몸에 박혀 내 영이 그 독을 마시고 하느님에 대한 공포가 나를 덮치는구려”(4). ‘전능하신 분의 화살이 내 몸에 박혀’라는 말에서 하느님의 징계, 보다 직접적으로는 욥에게 주어진 일련의 재앙을 가리킨다(1,13-19; 2,7,8). 이처럼 하느님을 `용사'(勇士) 또는 `궁수'(弓手)로, 그의 진노(징계)를 그분이 쏘는 화살로 각각 비유하는 것은 성경에서 흔하게 발견된다(신명 32,23). 여기에서 보듯 일단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앙을 하느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왜'(why) 그것을 주셨는가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하기에 그의 갈등은 지속된다.
‘내 영혼이 독을 마시고’ 라는 이 말은 `그 독이 내 영혼을 삼켰다'로 해석하면 쉽게 이해된다. 여기서 `그 독'이라 함은 앞에 나온 `화살의 독’을 가리킨다. 고대인들은 사냥을 할 때 화살의 끝에 독을 묻혀 쏘곤 했는데, 욥은 이러한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마치 독화살을 맞은 짐승이 그 독성이 온몸에 퍼짐으로 인해 차츰 죽어가듯, 하느님의 진노(화살)를 받은 자신이 점점 더 깊은 절망과 회의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화살'이 `몸'에 박혔다고 했으나 그 `화살의 독'이 `그의 영'을 삼킨다고 표현함으로써 `신체'에서 `영혼'으로까지 옮겨 가는 그의 고통을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에 대한 공포가 나를 덮치는구려’ 욥이 당하는 고뇌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해 주는 구절이다. 욥은 자기에게 연속적으로 주어진 일련의 재앙의 주체를 하느님으로 인식하고 있었다(4a절). 그런데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그러한 재앙을 받았다는 것은 그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진노의 대상(형벌의 대상)으로 여겨졌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재산, 자손, 건강을 상실하는 것보다도 하느님의 진노를 받아 그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참을 수 없는 형벌이었다. 점점 가중되는 하느님의 재앙 속에서 그는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전조(前兆)를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욥은 역설적 물음으로 자신의 탄식을 정당화한다(5-6절). 5절에서 욥은 팔레스틴에서 흔히 발견될 수 있는 일상적 소재를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수사 의문문'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축은 먹을 것이 있는 한 울지 않듯, 욥 자신도 이렇게 비참한 처지에 놓이지 않았더라면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귀'와 소는 먹을 풀이 풍족히 있으면 결코 울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욥 자신도 정상적인 환경이라면 결코 비탄과 불평(3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욥이 불평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자기 변호의 말인 것이다. 특히 `나귀'와 `소'의 울음에 자신의 비탄(불평)을 비유한 것은 마치 먹을 것이 없을 때 그것들이 우는 것이 자연적이며 본능적이듯, 그의 현재의 불평도 그와 같은 성질의 것임을 사실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 말 속에는 욥의 불평을 미련한 것이요 시기하는 것(5,2)이라고 은근히 꼬집은 엘리파즈에 대한 책망도 숨어 있다
“간이 맞지 않은 것을 소금 없이 어찌 먹겠으며 달걀 흰자위가 무슨 맛이 있겠는가?”(6). 6절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엘리파즈에 대한 책망이다. 엘리파즈의 변론(4, 5장)은 욥의 고난의 본질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욥이 `왜' 고난받는가 하는 질문에도 해답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도리어 엘리파즈는 자기 변증적인 일반론으로 변론을 일관함으로써 욥의 심중에 고통을 가중시켰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의 변론은 마치 소금을 치지 않아 간이 맞지 않은 음식, 그래서 사람의 입맛에 구역질을 일으키게 하는 음식처럼 욥에게 무미 건조하고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달걀의 흰자위처럼 핵심에서 이탈해 있었다. 둘째, 욥의 자기 변호이다. 일반적으로 간이 맞지 않는 음식은 거부감을 일으킨다. 그것을 먹는 것은 고역스런 일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달걀의 흰자위를 그 노른자 위에 비해 맛없는(영양가 없는)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싱거운 음식, 달걀의 흰자위)을 싫어한다. 욥에게 있어서 그의 고난이 바로 이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즉, 그것은 지극히 싫어하는 음식과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먹어야만 하는, 즉 하느님께서 주신 고난을 인내해야만 하는 데에 그의 고통이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 따라서 간이 맞지 않은 음식이 싫듯, 욥은 고통을 멀리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탄식은 고통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다(7절).
6장 8-13절에서 욥은 자신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죽음을 갈구한다. 죽음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욥의 소원이다. 자기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으니 하느님께서 죽음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 내 소원이 이루어지고 하느님께서 내 소망을 채워 주신다면! 하느님께서 결심하시어 나를 으스러뜨리시고 당신 손을 내뻗으시어 나를 자르신다면!”(8-9). 본문은 3장에 이미 나타난 욥의 간구를 재확인하고 있다. 즉 3장에서 욥은 자신의 죽음을 갈구하였던 바, 여기서 그것을 다시 반복하여 피력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죽음에 대한 욥의 갈구이다. 3장에서 욥은 자신의 죽음을 강하게 나타낸 바 있다. 즉,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3,3-10), 그리고 탄생하였으되 일찍 죽었음(3,11-19)하고 소망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러한 소망의 연장선상에서 지금이라도 죽었으면 하고 갈구한다. 이처럼 욥은 죽음의 가능성을 여러 가지로 설정하고 그 가능성들이 한 가지씩 실패로 돌아가자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렇듯 집요하게 죽음에 집착하는 1차적 이유는 욥이 당한 고난의 심각성에 있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풀길 없는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욥이 신앙적 혼란에 빠졌으며, 더 이상 살아있음에 대한 소망을 둘 여지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욥은 엘리파즈의 변론에 대한 정면 거부를 하였다. 엘리파즈는 그의 변론에서 죽음은 악인에게 임하는 하느님의 최종적 형벌이요 심판임을 강하게 설파하였다(4,9). 그리고 욥에게 고난 중에 하느님께 기도할 것을 권면하였다(5,1.8). 그러나 여기서 욥은 도리어 죽음을 강하게 염원함으로써 이 같은 엘리파즈의 권면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향후 전개될 욥과 그의 친구들 간의 변론에서 긴장과 반목이 야기되는바, 이 같은 욥의 태도도 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8-9절에서 욥의 신앙이 보여진다. 욥은 여전히 죽음을 갈망하는 가운데에서 그 죽음의 주권자가 하느님이심을 명백히 고백하고 있다. 즉, 인간의 생사(生死)를 좌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심을 그는 철저히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는 인내의 한계에 봉착하여 자살을 도모했을는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는 고난 중에서도 그 고난의 조성자가 하느님이시며(4절), 자신은 그 고난을 회피하기 위해 죽음을 갈구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을 도모할 수는 없다는 것이 욥의 믿음이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욥은 세속적 염세주의자, 또는 현실의 한계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자살을 정당시한 이들과 명백히 대조된다.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거듭 확인하며 하느님께서 자신을 충실한 종으로 알아주시어 빨리 죽음을 허락해 주십사고 청하는 것이다(8-10절). “나는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으니 이것이 내게 위로가 되어 모진 고통 속에서도 기뻐 뛰련마는”(10). 본문은 한편으로, 하느님 앞에서 끝까지 신앙 절개를 지켜 왔다고 하는 욥의 신앙 고백이다. 그러나 이 고백 속에는 자신의 허물을 책망하려 들었던 엘리파즈에 대한 반발과 변호의 심리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욥은 하느님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인정을 받은(1,1.8; 2,3) 거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엘리파즈로부터 직접적이진 않지만 간접적으로 그 자신의 의로움을 의심받고, 죄를 추궁당했다(4,6-11; 5,2-7). 아마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고 있는 듯하며 29절(“생각을 돌리게나. 불의가 있어서는 안 되지! 생각을 돌리게. 나는 아직도 정당하다네.”)에 가서는 그 강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욥은 엘리파즈의 충고를 전적으로 거부한다. 자기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적이 없기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욥은 여러 가지 역설적 물음으로 자신의 육체적 연약함과 다해 가는 힘에 대하여 하소연한다(11-13절). “내게 무슨 힘이 있어 더 견디어 내고 내가 얼마나 산다고 더 참으란 말인가?”(11). 엘리파즈는 욥에게 하느님의 징계를 받는 자가 누릴 축복에 대해 약속한 바 있다(5,17-27). 그러나 욥의 현재 상황은 그 같은 약속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즉, 엘리파즈는 소유(5,24)와 자손(5,25)의 축복을 약속했으나 욥에게 있어서 그것은 한낱 공허한 언설(言說)에 불과했다. 더욱이 잃어버린 건강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욥의 현 상황은 절망의 연속이며, 어떤 측면에서 절망 그 자체였다. 따라서 그는 참고 인내하여 회복될 미래를 소망하기 보다는 차라리 현재에서 죽음을 요청했다. 욥은 힘이 다 빠져 하느님의 대답을 기다릴 여유도 없다.
6장 14-30절에서 욥은 친구들이 자기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탄식하며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따져 묻는다. 친구들은 우정의 계약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비록 욥이 하느님께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친구들은 자기를 도와주어야 마땅하거늘, 오히려 배신하였다고 탄식한다. “그러나 내 형제들은 개울처럼 나를 배신하였다네, 물이 넘쳐흐르던 개울 바닥처럼”(15). 마치 우기에만 물이 흐르고 건기에는 말라버려 광야에서 물을 고대하며 개울을 찾는 사람들을 낙담시키는 개울(와디)처럼 친구들이 욥을 실망시켰다는 것이다(14-20절). 욥이 친구들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때에 그들은 마치 광야의 개울(와디)처럼 욥을 좌절시킬 뿐 아니라 오히려 욥의 고통을 악화시켰다. 그들은 중병으로 괴로워하는 욥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 떨 뿐이다.
“자, 이렇듯 자네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네. 무서운 모습을 보더니 두려워 떠는구려”(21). 여기서 욥은 자신을 위로하려 온 친구들의 이기적인 성향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고 있다. 즉, 그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동정하려는 진정 어린 충정심(衷情心)에서 찾아왔다. 그리고 욥의 고난에 동참하는 행위를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2,12.13). 그러나 욥에게 내려진 재앙의 참혹함과 그것이 조만간 회복되어질 가능성이 희박함을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두려워하며 넌지시 발뺌하고자 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욥의 재앙을 하느님의 형벌로 생각했을 것이다. 즉 욥은 죄인이요, 그 죄값으로 지금의 재앙을 겪고 있는 것으로 그들은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본래의 태도에서 후퇴하여 욥에게 온화한 사랑과 동정의 행동(말)을 나타내 주기를 주저하게 되었다. 만일 이러한 태도를 보였다가는 죄인(욥)과 연대했다는 이유로 그들 자신들도 형벌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들의 신앙은 구약 초기의 `동태(同態)복수법'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탈출21,23-25; 레위 24,17-21; 신명 19,21).
그러나 “절망에 빠진 이는 친구에게서 동정을 받을 권리가 있다네. 그가 전능하신 분에 대한 경외심을 저버린다 하여도 말일세”라는 14절에서 욥이 밝힌 것처럼 그 친구들이 보여야 할 의당한 행위는 고난에 처한 자, 심지어 욥이 하느님을 떠난 죄인었다는 할지라도 그에게 온정과 위로를 보내는 것이었다.
욥은 자신이 친구들에게 짐을 지운 적이 없음을 강조한다. 우정의 계약을 맺은 친구들 사이에는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지만 욥은 친구들에게 그러한 요구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22-23절).
욥은 친구들이 진정한 우정으로 자기를 대해 주기를 바란다. 욥은 친구들에게 법정에서 피고의 죄를 따지는 논고자로서가 아니라 부드러운 가르침을 주는 지혜의 스승처럼 자신이 잘못한 일을 말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욥도 조용히 그들의 말을 들을 것이다. “나를 가르쳐 보게나, 내가 입을 다물겠네.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깨우쳐 보게나”(24). 그러나 친구들의 말은 욥을 위로하거나 깨우치기보다는 오히려 욥의 고통을 더 깊게 할 뿐이다. 그들은 욥의 말을 경청하여 그가 처한 고유한 상황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만을 주장할 뿐이다(25-26절). “자네들은 남의 말을 탓할 생각만 하는가? 절망에 빠진 이의 이야기는 바람에 날려도 좋단 말인가?”(26).
고대 근동에서는 누가 빚을 남기고 죽으면 채권자가 그 사람의 재산이나 자녀들을 두고 제비를 뽑아 무엇을 팔아 빚을 해결할 것인지 정하곤 하였다. 욥은 친구들이 자기를 마치 빚을 청산하기 위하여 뽑는 제비의 대상처럼 취급한다고 생각한다. “자네들은 심지어 고아를 놓고서 제비를 뽑고 친구를 놓고서 흥정하는구려”(27). 앞에서 친구들의 부정직과 이기심을 비난(21, 25절)한 욥은 여기서 그들의 무자비함을 책망하고 있다. 고대 히브리 관습에 비추어 볼 때 고아와 과부는 사회의 최하류 계층으로서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었다(탈출 22,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사악한 자들은 채무 능력이 없는 과부의 자녀를 놓고 제비뽑기를 하였다. 즉, 돈을 지불받지 못한 데 대한 대가로 과부의 자녀들을 제비뽑아 노예로 삼거나 노예 시장에 팔았다(2열왕 4,1). 이러한 무자비한 행위를 예로 들어서 욥은 친구들의 동정없음을 질책한다.
욥은 친구들에게 자기를 쳐다봐 달라고 간청한다. 아마도 친구들이 욥에게 말을 할 때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던 것 같다. 친구들의 이러한 자세는 욥의 말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 자체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욥은 자신이 그들을 보고 말할 때 거짓말을 하지 않았음을 확신시키려 한다(28절). “자, 이제 제발 나를 좀 돌아보게나. 자네들 얼굴에 대고 거짓말은 결코 하지 않겠네”(28). 그러면서 욥은 친구들에게 거듭 자신의 무죄를 알아달라고 간청하면서 두 가지 역설적인 물음을 던진다. “내 입술에 불의가 묻어 있다는 말인가? 내 입속이 파멸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인가?”(30절)
욥 7,1-21 욥의 탄원 기도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1) ‘고욕’이라는 말은 `전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바'이다. 이는 `군대', `전쟁', `부역'(이사 40,2)등의 뜻을 가진다. 본문은 군대에 징용된 자가 무거운 고역을 강제적으로 해야 하듯 인간 역시 고역스러운 삶을 영위해 나가야 되지 않느냐는 의미이다. 한편 여기에서 욥은 인생 일반을 취급함으로써 자신의 현재 고통스런 삶의 정황을 직접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생 일반의 고통이라기 보다는 현재 자신의 고통의 심각성이라 할 수 있다. 즉 그의 현 상황은 군인이 강제적(의무적)으로 힘든 고역을 수행해야 하듯, 자신에게 주어진 재난을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욥의 현재 상황은 주인(하느님)에게 고용되어 하루의 노동량(욥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를 `재난'으로 볼 수 있겠다)을 묵묵히 감당해야만 하는 `날품팔이'(본절 하반부)와 다름없다.
욥의 삶은 마치 그늘을 애타게 그리는 종처럼,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처럼 고달프기만 하다. 일꾼들은 밤에 잠이라도 편히 잘 수 있건만 욥 자신은 육체적 고통 때문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2-4절). 고대 히브리 사회에 있어서 품꾼의 노동 시간은 엄격히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날이 밝거나 해가 뜰 때 일을 시작하여 해질 무렵에 그것을 끝냈다. 따라서 품꾼에게 있어서 해가 저무는 것은 단순히 일의 종결 시간을 뜻하는 것 이외에 고역스러운 노동에서 해방되어 안식과 평화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 욥은 고난의 때가 속히 끝나기를 소망하는 자신의 심경을 노동시간이 속히 끝나기를 염원하는 품꾼의 심경에 비유하고 있다. “내 살은 구더기와 흙먼지로 뒤덮이고 내 살갗은 갈라지고 곪아 흐른다네”(5). 5절의 표현은 욥의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 준다. 열, 구더기, 불면, 피부 종양 등이 욥을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롭힌다. 그러면서도 욥은 자신의 생이 베틀의 북보다 더 빨리 지나감을 느낀다. 베가 다 짜지면 실이 끊어지듯, 욥의 생명도 곧 끊어질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게 될 것이다.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6). ‘희망’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을 ‘실’로 이해하여, “실이 다하면 끝이 나는구려.”로 옮기기도 한다.
7장 7-21절에서 욥은 하느님께 자기가 죽기 전 잠시나마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십사고 탄원한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7). `입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 `공기', `영'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짧은 기간을 상징함과 아울러 허무와 덧없음을 의미한다. 아마 욥은 자기 병이 치유 불가능하다고 예견했을 것이며, 따라서 죽음만이 그것을 모면하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7절에서부터 욥의 변론의 분위기가 전환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즉, 6,1-7,6까지의 욥의 변론은 엘리파즈와 그 친구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으나 7절에서 부터는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전자가 대화(dialogue)형식이었다면 후자는 독백(soliloquy) 형식을 띠고 있다.
욥은 하느님께 자기 육체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한계에 다다랐음을 상기시켜 드린다. 만일 하느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신다면 욥은 두 번 다시 인생의 기쁨을 맛보지 못할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자기를 더 이상 찾으실 수 없을 것이다. 저승으로 내려간 이는 올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름이 사라져 가 버리듯 저승으로 내려간 이는 올라오지 못합니다”(9). `저승'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올'은 `비었다', `깊다'를 의미하는 동사 `솨알'에서 유래하였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저승'을 죽은 자의 영혼이 내려가는 어두운 지하 세계로 인식했던 것 같다. 그런데 9절에 기초해 볼 때 욥이 저승 세계에 관해 어떤 관념을 가졌는지 정확히 추측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욥기는 그 분류상 시가 문학(詩歌文學)에 속하며, 따라서 죽음과 저승 세계에 대한 욥의 묘사 역시 교리적 성격보다는 시적이며 비유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자의 영혼은 저승에서 지속, 고정되며 현세로 되돌아오거나 다른 세계로 이동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죽음과 저승 세계에 대한 욥의 이러한 관념은 죽은 이후에도 영혼이 지속된다고 믿은 고대 팔레스틴, 특히 이집트들의 내세관과도 밀접히 연관된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자의 영혼이 현세를 왕래한다고 믿은 반면, 욥은 이 양자(兩者)사이의 단절성을 믿었다는 측면에서 그의 내세관은 이방의 그것과 구별되며, 신약의 내세관의 한 토대를 형성했다 하겠다(마태 18,9).
욥은 자신이 곧 죽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저승으로 내려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거기서는 더 이상 착한 일을 할 수도, 하느님을 찬양할 수도 없다(7-10절). 그래서 욥은 짧은 기간일지라도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지금 당하는 고통을 과감하게 하소연하리라 결심한다(11절). “그래서 이 몸은 입을 다물지 않겠습니다. 제 영의 곤경 속에서 토로하고 제 영혼의 쓰라림 속에서 탄식하겠습니다”(11). 11절은 앞으로 전개될 욥의 변론(불평)에 대한 서론격으로서, 욥이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의 심각성으로 인해 심중(心中)에 있는 불만을 기탄없이 하느님께 털어놓겠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욥의 연설은 얼핏 보기에 매우 경거 망동(輕擧妄動)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11절 이하에서 전개되는 욥의 하느님께 대한 질문에는 이러한 인상이 더욱 짙게 풍긴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욥의 이러한 언사(言辭)의 배후에는 하느님의 주권과 유일성, 그리고 인격성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욥은 자신에게 재난을 주셨던 분이 하느님이었듯이 그것을 거두어 줄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느님 한 분뿐임을 인식했으며(하느님의 주권), 또한 그분을 고난에 처한 인간(욥)의 소리를 들어 주시는 분으로 확신했던 것이다(하느님의 인격성). 만일 이러한 확신이 없었다면 욥은 고난 중에 차라리 영원히 침묵해 버렸거나 아니면 자살 등의 방법으로 고난을 종결시켜 버렸을 런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의 말들을 고통에 대한 불평과 비난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고난에 처한 한 인간의 신앙적 갈등의 토로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부당하게 취급하고 계시기 때문에 욥 자신도 크게 불평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욥이 자유롭게 불평을 토로하면 하느님의 동정심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12-15절에서 욥은 탄원조로 자신의 감정적, 육체적 고통을 토로하면서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원의를 되풀이한다. “제가 바다입니까? 제가 용입니까? 당신께서 저에게 파수꾼을 세우시다니”(12). 욥이 주님께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욥은 자신이 왜 감시를 받는지 묻는다. 그렇게 한 것은 분명히 친구들이 아니라 욥의 판단으로 자신에게 고난을 주는 이가 주님이다. 욥은 바다(얌Yam)도 용(타닌Tannin)도 아니다. 얌은 고대 가나안 신화에서 물의 신이다. 신화에서 얌은 신들을 통치하는 왕권을 주장하고, 바알 신이 자기 포로가 되도록 요구한다. 바알은 동의하지 않고 얌과 전투한다. 바알은 대장장인 신에게서 쇠 몽둥이를 받아 얌을 무찌른다. 타닌 즉 바다괴물이라고 보는 용은 창조 신들에 의해 제압당한다고 말한다. 욥은 하느님이 자신을 얌과 타닌과 같은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런 취급을 한다는 데 한탄한다.
욥은 잠자리에서나마 편안하기를 바라지만 그것 역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꿈으로 욥을 공포에 떨게 하시고 환시로 그를 소스라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욥은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욥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동안만이라도 하느님께서 자기를 편안히 내버려두시기를 간청한다(16절). “저는 싫습니다. 제가 영원히 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제가 살날은 한낱 입김일 뿐입니다”(16). 욥은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자신을 하느님께서 너무나 가혹하게 괴롭히신다고 탄식한다(17-18절; 참조: 시편 8,5-6).
욥은 자신의 분노를 강조하고자 물음으로 하느님께 간청을 드린다. “언제면 제게서 눈을 돌리시렵니까? 침이라도 삼키게 저를 놓아주시렵니까?”(19절)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눈길은 보호, 구원, 복을 의미한다. 그러나 욥에게는 하느님의 눈길이 고통이다. 비록 욥이 잘못한 일이 있다 한들, 하느님께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음에도 하느님께서는 욥을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시고 욥이 당신께 짐이 되게 하셨다.(20절) 21절에서 욥은 계속해서 하느님께 묻는다. “어찌하여 저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저의 죄악을 그냥 넘겨 버리지 않으십니까? 제가 이제 먼지 위에 누우면 당신께서 찾으셔도 저는 이미 없을 것입니다”(21). 욥은 자신이 무죄하지만, 설령 죄가 있다 하더라도 왜 하느님께서 그냥 넘겨 버리지 않으시는지 탄식한다. 그리고 자기가 죽고 난 뒤에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하실 것임을 강조한다.
욥 8,1-22 빌닷의 첫째 발언
빌닷은 욥에게 말하는 세 친구 가운데 두 번째 친구이다. 빌닷의 발언은 짧지만 핵심을 찌른다. 빌닷은 욥이 심지어 자신을 옹호한다고 비난한다. “자네는 언제까지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려나? 자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사나운 바람 같기만 하구려”(2). 빌닷은 ‘이런 것들’을 한다고 공격하는데, 빌닷은 욥의 자기 정당화와 하느님이 부당하다는 고발에서의 시도들을 말한다. 그는 욥에게 사나운 바람과 같이 말한다고 고발한다. 바람은 느낄 수 있지만 보거나 잡지 못한다. 욥의 발언은 사나운 바람이라는 특징짓는 사실은 격정에 넘쳐다는 것이다.
“아무려면 하느님께서 공정을 왜곡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정의를 왜곡하시겠나?”(3). 빌닷은 욥이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받을 정도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욥의 신념에 화가 났다. 빌닷의 신학에서는 이런 관점은 옹호할 수 없다. 정의는 악에 대한 징벌과 선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욥은 보상 신학을 공유하면서도, 자신이 행하지 않은 일에 대해 하느님이 부당하게 자신을 징벌한다고 믿었다.
“자네 아들들이 그분께 죄를 지었다면 그분께서는 그들을 그 죄과의 손에 넘기신 것이네”(4). 빌닷은 자신의 신학을 욥의 자녀들을 경우에 적용한다. 그런데 욥의 독자들은 욥의 자녀들이 그들의 범죄 때문에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 이처럼 우리는 고발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욥보다 훨씬 잘 이해한다.
빌닷은 완전히 무정한 것은 아니다. 빌닷은 욥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에게 곤경에서 빠져나갈 길을 제시하기를 원한다. 그의 충고는 모든 세 친구의 메시지와 일치한다. ‘네가 회복을 원한다면 너는 회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네가 하느님을 찾고 전능하신 분께 자비를 구한다면,”(5) 회복할 수 있다. 문제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지므로 발생했고, 이제 욥은 회복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은총에 대한 간구’는 욥이 자기 죄 때문에 회복될 자격이 없다는 개념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욥의 회복은 말 이상을 포함한다. 욥은 결백과 옳음 즉 정직해야만 한다. “자네가 결백하고 옳다면 이제 그분께서는 자네를 위해 일어나시어 자네 소유를 정당하게 되돌려 주실 것이네”(6). 세 친구 모두 욥이 결백하고 옳다면 하느님께서 그를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결백하고 옳게 살라고 권한다. “자네의 시작은 보잘것없었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7). 어려움은 있지만 하느님의 정의는 반드시 지켜 주신다는 빌닷의 말이다.
8장 8절부터 22절까지는 빌닷이 조상들을 인용하여 자기 주장을 뒷받침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더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이 입장에서 분명한 논리가 있다. 결국 지혜는 관찰과 경험을 통해 얻는다. 사람들이 삶을 살아갈 때, 그들은 어떤 삶의 전략이 다른 것보다 더 성공적인 것을 경험한다. 그들은 좌절을 경험할 때, 자신들의 실수에서 배울 수 있다. 조상들의 지혜는 현재 살아 있는 자들과는 대조를 이룬다(9절). 현재 세대는 경험이 깊이 않다. 오늘날 우리는 무언가가 진부하다고 주장하려고 ‘그것이 과거에는 그랬다’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빌닷이 ‘우리가 과거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이전 세대의 전례가 없는 충고에는 살아오면서 배운 어떤 중요한 경험이 없다고 제안한다.
“그분들이야말로 자네를 가르치고 일러 주며 스스로 깨달은 것에서 말씀을 이끌어 내지 않는가?”(10). 이런 이전 세대들은 욥에게 가르칠 수 있으며(10절), 그들의 관점은 다음과 같은 수사적 질문으로 시작하면서, 12-22절에 제시된다. “습지가 없는데 왕골이 솟아나고 물이 없는데 갈대가 자라겠는가?”(11).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식물들이 자라려면 풍부한 물이 필요하다. 이 식물들이 처음에는 싱싱해 보이지만 왕골(파피루스)과 갈대는 물이 없다면, 빨리 말라버린다. 심지어 갈색으로 변하고 새 싹이 나기 전에 시들어 버린다. 이것은 악인의 운명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빌닷은 식물이 자라는데 물이 필요하듯, 사람이 미덕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의 자신감은 꺾이고 그의 신뢰는 거미집이라네”(14). 미덕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자의 확신은 거미줄만큼 약하다. 거미줄의 장력은 강철만큼 강하겠지만, 너무 얇아 쉽게 끊어진다. 거미줄에 약간의 힘을 가한다고 해도, 끊어질 것이다. 약하고 경건하지 못하는 사람의 확신도 이와 같은 것이다.
“보게나, 하느님께서는 흠 없는 이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악을 행하는 자의 손을 잡아 주지 않으신다네”(20). 20절은 부정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보상의 우너리를 가능한 한 단순하게 진술한다. 하느님이 온전한 자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온전한 자와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조적으로 하느님이 악인의 손을 잡지 않는다는 것은 그를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욥의 빌닷의 충고를 따르고 회개한다면, 욥의 운명은 웃음과 기쁨이 가득한 긍정적인 운명이 될 것이다. 반면에 악인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
욥 9,1-35 욥의 두 번째 응답
빌닷의 첫 발언 후에 이제 욥이 대답한다. 이것은 빌닷의 발언을 조목 조목 반박하는 것은 아니지만, 욥은 자신의 상활을 다루면서 자신의 상황이 부당하다고 여긴다. “물론 나도 그런 줄은 알고 있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9,2). 이는 욥이 지금까지 말한 빌닷의 논지 자체를 타당한 것으로 용인한다는 뜻이다. 빌닷의 핵심은 하느님이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징벌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정의를 왜곡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욥은 원리상 빌닷에게 동의할 것이다. 결국 욥이 하느님이 불의하다고 외치려면, 이것은 그가 세 친구와 더불어 보상의 원리를 받아 들일 때만 일리가 있다. 우리가 욥의 시작하는 진술을 빌닷의 신학적 요점에 대한 동의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욥은 하느님이 정당하게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은 아니라고 즉각적으로 항변한다.
이 지점에서 욥은 일반적인 주장을 하고 있지만, 분명히 자신의 상황을 생각하고 있다. 욥은 자신이 현재의 비참한 상황을 당해 마땅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또한 욥은 자신이 하느님에게 상황을 정확하게 알릴 수 있다는 희망을 거의 표현하지 않는다. 욥이 생각하는 문제는 보상이 작용하는가가 아니라 하느님이 욥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라는 의롭다는 것을 아는가 하는 것이다. 욥은 하느님 앞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의로울’ 수 있는지 물을 법적 용어를 사용한다.
욥은 자신이 참으로 의롭고 현재의 고난을 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라고 하느님에게 확신시킬 가능성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 법정의 상황에서(9,3) 자신과 같은 한낱 인간이 하느님에게 대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은 “지혜가 충만하시고 능력이 넘치시는 분, 누가 그분과 겨루어서 무사하리오?”(4)라는 것이다.
욥은 법정의 배경에서 인간이 왜 하느님 앞에 설 수 없는지를 설명하려고 하느님을 묘사한다(3). 욥은 하느님의 지혜와 힘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로 시작하고,그 다음에 연속된 분사구로(5-10절) 자기의 주장을 설명한다. 흥미롭게도 그 목록은 오로지 하느님의 능력에 초점을 둔다. 이 지점에서 욥은 하느님의 힘에 압도됨을 느끼기 때문에 아마도 욥이 이렇게 강조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구약에서 산들은 지리적인 안정의 절정으로 간주됐다. 완전 반대편에는 바다가 있는데,바다는 동요와 대혼란을 대변했다. 바다는 끊임없이 움직이지만,산들은 안정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힘은 너무 강하여 산들을 움직이고 뒤집을 수 있다. 지진이 이 진리에 대한 최소한 하나의 예를 제공할 수 있다. 경고도 없이(“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산들을 옮기시고” 5a절),산들은 흔들릴 수 있다.
다른 본문은 산들이 분노한 하느님 앞에 녹는다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이 산들을 주권적으로 통제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지진 이미지는 6절에서 계속되는데,6절은 땅의 흔들림과 땅의 기둥의 떠는 것을 묘사한다. 하느님은 땅의 기둥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분이지만,분노할 때 땅과 땅의 거주자들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보여 주며,기둥을 흔든다.
하느님은 땅뿐만 아니라,하늘도 통치한다. 하느님은 말씀의 힘으로 해와 별들을 창조했고(창세 1장),동일한 방법으로 해와 별들을 소멸시켜 땅을 어둠에 내던질 수 있다. “해에게 솟지 말라 명령하시고 별들을 봉해 버리시는 분.”(7).
8절은 하느님이 하늘과 바다를 통치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하느님이 하늘을 만든 것을 하늘을 편다는 은유로 표현했다. “당신 혼자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 ”(8). 아마도 여기서 하늘의 은유를 땅을 덮는 장막으로 의도했을 것이다. 하느님은 하늘의 장막을 세울 뿐 만 아니라,바다의 높은 곳도 밟는다.
여기 히브리어 얌(바다yam)은 우가릿 신화의 창조에 저항하는 신 얌(Yam)을 가리킬 수 있는데,우가릿 신화에서는 바알이 우주를 창조하려고 얌을 굴복시켰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바다는 무질서를 나타내며,하느님이 ‘바다의 등’ 즉 바다의 높은 곳(물결)을 건너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하느님이 악을 통제한디는 것을 의미한다.
“큰곰자리와 오리온자리, 묘성과 남녘의 별자리들을 만드신 분”(9). 9절은 별들에 대한 주제로 돌아오는데,여기서 큰곰자리과 오리온자리과 묘성과 남녁의 별자리의 어떤 구역의 구체적인 별자리를 거론한다. 이 천체들은 주변 민족들의 이교 종교에서 숭배되거나 찾은 바 되었다. 욥은 자신에게 강력한 하느님이 이 놀라운 천체를 만들었다고 이해한다.
“측량할 수 없는 위업들과 헤아릴 수 없는 기적들을 이루시는 분”(10). 10절은 평가하는 요약 진술을 제시한다. 여기서 욥은 5,9에서 엘리파즈가 이미 말한 구절을 사용한다. lOa절은 하느님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위업"을 만들었다고 진술한다. 이 평행을 이루는 행의 둘째 절은 이 하느님의 행위가 “헤아릴 수 없는 기적들을"을 창조했다고 말함으로써 표현의 정도를 높이고,기적들이 너무 많아 셀 수 없다고 덧붙인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5-10절에서 발전되지는 않았지만,이와 같이 욥은 하느님의 능력과 아마도 또한 하느님의 지혜에 대해 분명히 인식한다. 흥미롭게도 하느님은 마지막으로 주님의 말씀(38-41장)에서 욥과 대면할 때,마치 욥이 교훈을 다시 배워야 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자신의 힘과 지혜를 강조한다. 하지만 거기서 하느님의 성품으로 말미임아 욥은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침묵한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인간을 구별하는 힘이 부당하다고 불평한다. 결국 “누가 그분과 겨루어서 무사하리오’(4b절). 즉 누가 욥에게 보이는 불의에 대해 법정에서 이렇게 강력한 하느님에게 도전하고 무사히 나올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앞으로 나올 욥의 발언에서 계속 읽어나갈 때,욥이 법정에서 하느님을 대변하려는 더 확고해진 태도에 이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시니 라합의 협조자들이 그분께 굴복한다네 ”(13). 13절에서 욥은 하느님을 약자를 괴롭히며 하느님 자신의 폭력적인 행동을 문제시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분으로 묘사한다. 하느님이 요나 3,10에서 심판을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하느님이 “마음을 바꾼 것”은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때문이었다.
욥은 여기서 다른 무언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욥은 하느님이 부당하게 자신을 고난 당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욥은 자신이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의 불의를 지적할 수 있다고 해도 부당한 하느님은 자신에 대한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느님의 저항할 수 없는 힘은 라합의 “협조자"조차도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에서도 설명된다. “라합”은 구약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된다. 하나는 신화적 바다 괴물(시편 89,10)로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이집트를 가리키는 것으로 시용된다(시편 87,4). 둘 사이의 연관성은 명확하지 않고,현재 맥락에서도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라합이 강력한 바다 괴물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많은 면에서 비슷한 생물인 레비아탄과 달리(시편 74,14; 이사 27,1; 욥 41장) 라합은 성경 밖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창조의 맥락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볼 때,라합은 레비야탄과 얌(우가릿 문헌)과 티아마트(바벨로니아 문헌)와 같이 하느님이 창조 때 굴복시킨 강력한 바다 괴물이다. 이와 같이 라합의 “협조자”는 바다 괴물을 도왔던 악신의 세력들일 것이다.
욥이 하느님을 이해하는 바의 핵심은 법정에서 욥의 도전에 하느님이 반응하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은 하느님이 옳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욥이 자신의 신념을 진술할 때 하느님은 너무나 강력하고 완고해서 자신에게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보겠지만,욥은 자신이 하느님과 만나기를 원하는지에 대해 계속 말할 것이다.
“힘으로 해 보려니 그분은 막강하신 분. 법으로 해 보려니 누가 나를 소환해 주겠나?”(19). 욥은 결코 하느님의 압도하는 힘에 대해 의문시하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의문시한다. 19a절은 하느님의 힘에 동의하지만,19b-21절은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누구도 하느님의 심판에 반대하는 증언을 할 수 없다. 여기서 욥의 언급은 하느님의 심판의 옳음을 의문시하지 않는 자의 경건한 표현이 아니라,하느님이 사건의 진리와 상관없이 심판한다는 것이다. 또한 욥이 생각하기에는 누구도 이에 대해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실제로 하느님은 흠 없는 자가 스스로를 죄가 있다고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다. 20b절은 이를 매우 명백히 표현한다. 욥은 자신의 흠 없음을 주장하지만, 하느님이 결국 죄에 대한 인정을 내가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흠이 없네! 나는 내 목숨에 관심 없고 내 생명을 멸시한다네”(21). 욥은 자신을 흠 없다고 주장하지만, 하느님이 어떤 식이로든 보호한다는 것에 대한 의심으로 욥이 자기의 삶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마찬가지! 그래서 내 말인즉 흠이 없건 탓이 있건 그분께서는 멸하신다네”(22). 욥은 하느님의 불의에 대해 명확히 말한다. 욥은 하느님이 ‘정의를 왜곡하겠는가’(8,3)라고 주장하는 세 친구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드러낸다. 욥은 흠 없는 자와 탓이 있는 자 모두 하느님의 멸하신다는 것이다. 더구나 세상은 악인의 손에 넘겨지고 하느님께서 재판관의 눈을 막아서 그들이 악인에게 보상을 받고 흠없는 자를 징벌한다.
“저의 날들은 파발꾼보다 빨리 지나가고 행복을 보지도 못한 채 달아납니다. 갈대배처럼 흘러가고 먹이를 덮치는 독수리처럼 날아갑니다”(25-26). 욥은 일반적인 용어로 온전한 자와 악인의 공통적인 운명에 대해 말한 후,자신의 상황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돌아온다. 욥은 자신의 날이 얼마나 빠른지를 묘사한다. 그의 시간은 다 되어 간다. 26절은 그의 날이 지나가는 속도를 묘사하려고 25a절의 경주자의 비유에 두 가지 비유,즉 갈대 배와 먹이를 덮치는 독수리의 비유를 추가한다. “먹이를 덮치는 독수리처럼 날아갑니다”라는 표현은 명확하지 않지만,먹이의 죽음은 은유에 어두운 생각을 도입한다.
25b절에서 욥 자신이 말하듯이,날이 빠르게 지나갈지라도 날들이 좋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날들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하다. 명백히 욥은 자신의 삶을 싫어하고 또한 빠르지만 고통스럽게 지나간다고 느낀다. 모두가 고난당하는 자로 보이는,삶에 대한 흔한 반응이다.
세 친구는 욥이 불평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고,이제 욥은 이 요청을 다룬다. 욥은 자신의 고통 때문에 불평을 멈출 수가 없다고 말한다(27-28a). 그러나 욥은 또한 하느님(욥은 이제 2인칭으로 부른다,28b절)이 자신을 죄 없다고 하지 않고 악하다고 선언할 것이기 때문에 그의 불평이 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체념하는 것 같다.
실제로 욥은 자신이 온전하다고 “눈으로 제 몸을 씻고 잿물로 제 손을 깨끗이 한다 해도”(30),하느님이 자신을 악하다고 선언하여 정의를 왜곡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마치 하느님이 욥의 깨끗한 몸을 구덩이에 던져,그의 몸이 너무 더러워져 심지어 그의 옷도 그를 오염시키는 것과 같다. 욥은 다시 하느님이 온전한 사람들을 마치 악한 것처럼 다룬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훨씬 심각한 것은 하느님이 죄 없는 사람들을 악하게 다루고,악한 사람들을 좋게 다룬다는 것이다.
“그분은 나 같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나 그분께 답변할 수 없고 우리는 함께 법정으로 갈 수 없다네”(32). 25-31절에서 욥은 직접적으로 하느님에게 말한 후,다시 한 번 20장에서 하느님에게 직접 말하기 전에 여기서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돌아온다. 욥이 자신의 고난에 대해 접근할 적절한 전략에 대해 생각할 때,억제하려는 생각(27-28절)이나 자신을 하느님 앞에 깨끗하게 보이려는 생각을 이전에 버렸다. 이제 욥은 한 번 더 하느님과 법정에 가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 욥은 자신이 하느님과 법정에서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힘이 평등하지 않다. 욥은 하느님의 적수가 되지 않아서 법정에서 함께 만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욥이 필요한 것은 중재자인데,여기서는 심판자로 묘사된다. 중재자는 “우리 둘 위에 손을 얹을 심판자자 우리 사이에 없다네”(33)라고 할 것이다. 중재자는 편을 들지 않고 경쟁을 공정하게 할 것이다. 하느님의 징계의 막대기가 욥에게 가해졌으므로 욥은 하느님을 두려워했지만,“심판자”는 막대기와 공포를 제거할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욥은 하느님과 적절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욥은 이런 심판자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욥 10,1-22 욥의 두 번째 응답
10장은 빌닷과 친구들에 대한 욥의 대답을 이어간다. 여기서 욥은 하느님에 대한 고발의 긴 발언에 얼마나 자신의 삶이 싫은가에 대해 진술한다.
“나는 내 생명이 메스꺼워 내 위에 탄식을 쏟아 놓으며 내 영혼의 쓰라림 속에서 토로하리라”(1). 결국 욥은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끔찍하게 고난당한다. 욥은 친구들로부터 위로를 받기보다, 친구들의 고발을 듣는다. 욥의 친구들에게 원하는 대답은 위로였다. 더구나 지금까지 하느님은 침묵하고 부재한다. 욥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제약 없이 계속 “내 위에 탄식을 쏟아 놓으며”라고 말한다. 친구들은 욥이 그런 말을 멈추기를 원하지만, 욥은 깊이 느낀 감정으로 말미암아 그만두지 않는다.
욥은 잣긴의 ‘괴로움’을 하느님에게 토로한다. 욥은 자신의 요구로 시작하고, 그 요구들을 법적 용어로 표현된다. 욥은 먼저 자신이 악하다고 하느님이 공식적으로 선언하지 ㅇ낳았다고 주장한다. 욥은 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고난이 죄의 결과라서 자신의 고난은 하느님이 자신을 악하다고 선언한 결과임을 믿으며, 자신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고 느낀다.
욥이 이런 고난을 받을 만큼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욥은 하느님이 협의를 제시하길 원한다. 욥은 자신의 요구를 진술한 후, 이제 연속되는 고발의 질문으로 하느님에게 말하다. 먼저 욥은 하느님에게 자신의 억압을 정당화하라고 묻는다. 욥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학대하시는 것이 당신께는 좋습니까? 악인들의 책략에는 빛을 주시면서 당신 손의 작품을 멸시하시는 것이 좋습니까?”(3). 욥의 질문은 다시 모든 고난이 죄의 결과임이 틀림없이 전제한다. 하느님이 욥을 억압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이런 고난은 하느님이 자기를 싫어하는 것을 전제한다. 욥이 자신을 간접적으로 “당신의 손의 작품”이라고 묘사함으로써 하느님에게 호소한다. 하느님이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욥에게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욥은 하느님이 ‘악인들의 책략에서 빛을 주신다는’ 말을 함으로써 그들을 편애한다고 생각하였다. 욥은 하느님이 의인이 아니라 악인에게 귀를 기울인다고 제안함으로써, 하느님을 자극한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죄가 없음을, 저를 당신 손에서 빼낼 사람이 없음을 아시지 않습니까?”(7). 욥은 자신이 흠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이 자신의 흠 없음을 찾고 보았어야만 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욥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느님의 손에서의 구원이 없으며, 이 하느님의 손이 욥을 치고 있고, 욥이 고난을 당하도록 한다. 누가 욥을 구할 수 있는가? 누구도 하느님의 위대한 힘에 저항할 수 없다.
“당신께서 저를 진흙처럼 빚어 만드셨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이제 저를 먼지로 되돌리려 하십니다”(9). 욥은 일반적으로 인간은 하느님이 손으로 “지은 것”이라고 언급했었다. 하느님은 욥을 만든 분이다. 욥은 하느님의 작품이다. 그러나 욥은 하느님이 자기 피조물을 취하여 멸망시킨다는 사실에 놀란다.
욥은 하느님에게 인간의 나약함을 상기시킨다. 인간은 진흙과 같고,토기장이가 만든 연약한 토기와 같다. 토기는 쉽게 부서지며,인간도 역시 그렇다. 9b절에서 욥은 창조 이야기를 암시하는데,하느님은 땅의 티끌에서 첫 인간을 만들었고(창세 2:7),숨을 불어넣었다. 인간이 티끌로 돌아간다는 것은 티끌과 숨이라는 이 창조의 연합을 되돌리는 것이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생명과 자애를 베푸시고 저를 보살피시어 제 목숨을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이런 것들을 마음에 숨기셨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속셈임을 저는 압니다”(12-13).
12절은 다른 맥락에 있다면,매우 긍정적이고 격려하는 진술로 읽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생명과 자애를 베푸신다. 생명(하이)은 전형적으로 축복이며,자애(헤세드)는 하느님 자신과의 관계에서 한 사람을 향한 헌신된 사랑을 가리킨다. 그다음에 12b절에서 욥은 하느님의 “보살피심"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의 삶에 많이 관여한다면 절대적으로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욥은 하느님이 이처럼 자신의 삶에 관여하는 경험을 통해(또는 최소한 자신의 삶의 경험에 대한 자신의 해석) 하느님이 자신을 축복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를 해하기를 원한다는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13절은 의인과 악인을 계속 언급하고,하느님이 그들을 동일하게 다룬다고 주장한다. 욥은 자신이 의로운 것을 알고,하느님의 증오가 자신을 둘러썼다고 믿는다. 13절에 따르면, 이것이 하느님의 ‘숨겨진 동기’이다. 하느님은 욥이 죄인인 것을 발견하면,그를 용서하지 않고 정벌할 것이다. 하지만 욥이 의롭다 하더라도,하느님은 욥이 결과적으로 굴욕을 당한다는 사실에서 그를 괴롭힐 것이다. 욥이 자기 머리를 들 수 없다는 것은 아마도 육체적인 이유보다는 심리적인 이유에서일 것이다. 욥의 현재 상황이 가리키듯이,비록 욥은 죄인이 아니지만 욥의 고난은 다른 이들에게는(이 시점에서는 세 친구들) 욥이 죄인이라는 점을 전달한다. 그래서 욥은 당혹스럽다. 다른 곳에서 욥은 하느님의 정의가 완전히 뒤집힌 것에 대해 말한다. 즉 죄인이 번성하고 온전한 자는 고난을 당한다(9,20). 욥이 자신의 삶을 생각할 때, 그는 “내가 해도 저주를 받고, 하지 않아도 저주를 받는다”는 접근을 취하게 된다. 그는 어떻게든 고난을 당할 것이다.
“어찌하여 저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습니까? 제가 죽어 버렸다면 어떤 눈도 저를 보지 못했을 것을!”(18). 욥이 시작하는 말은 우리를 다시 그의 한탄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3,11에서 욥은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라고 외쳤다. 여기서 욥은 태중에서 죽었더라면 하고 소망하지만 개념은 동일하다. 삶이 너무나 견딜 수 없게 되어,욥은 욥기의 시작에서 묘사된 오랜 기간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결코 경험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과거의 기쁨으로 현재의 고통을 이기기보다는,현재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가 욥의 여정의 시작에 더 가까워진다면,욥이 첫 고통의 파도에 대한 반응으로 1장 마지막에 한 진술을 기억할 수 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1,21). 욥이 여전히 “하느님을 모욕하고 죽지 않은 것"은 인정한다 하더라도),욥은 l장 이후로,받아들이고 인내하는 것 같은 태도에서 분노하는 항변으로 그의 어조를 바꾸었다.
19절에서 욥은 자기가 태에서 죽었더라면 마치 자신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욥은 어머니 배에서 무덤으로 갔을 것이다. 그는 사생아로 나와 장사됐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욥은 모태에서 죽지 않았다. 그래서 20-21절에서 그는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에게 호소한다. 욥은 하느님이 자신의 고난을 일으킨 것으로 믿으므로,하느님에게 물러나 자기에게 남은 며칠만이라도 자기가 약간의 즐거움을 맛볼 여지를 달라고 간청한다. 욥에게는 죽음이 축복된 내세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 무덤과 망각이 우리가 죽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무덤과 망각은 욥기 10:21-22에서 깊은 어둠을 의미하는 단어들로 잘 묘사된다. 현재 상태의 욥에게는 어둠이 자기가 느끼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