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딜방아
청담 정연원
반질반질 닳은 발을 딛는 다리 부분이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다. 디딤돌을 딛고 줄을 잡으며 오른발로 올라선다. 기다란 채의 끝에 달린 공이가 올라간다. 왼발을 내려선다. 공이가 확에 쿵하고 떨어진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 디딜방아는 잃어버렸던 추억의 소리를 드러낸다. 찾는 이 없는 방앗간에서 디딜방아 고개를 넘던 방아꾼들의 나지막한 소리를 더듬는다.
디딜방아는 발로 디뎌서 먹을 양식을 얻는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생활 기구이다. 고구려 안악 제3호의 벽화에는 지금의 디딜방앗간과 비슷한 장면이 잘 표현되어 있다. 새총 모양의 굵은 나무의 끝에 공이를 끼우고, 중간에는 방아채에 구멍을 뚫어 단단한 가로 기둥인 쌀개를 양쪽에서 받혀주는 볼씨가 자리한다. 공이가 닿는 곳에는 돌로 만든 '방아확'이 곡식을 담는다. 갈라진 다리 양 끝을 사람이 발로 디뎌 곡식을 찧거나 빻는다.
아시 방아를 찧고 나면 공이를 들어 올려 확 밖에 내려놓고 확에 들어 있는 곡식을 끄집어내어 키에 담아 왕겨를 날려낸다. 이런 과정을 몇 번 거쳐 알곡을 얻는다. 우리 집에서는 추수가 끝나면 농사일을 하듯 세 집이 어울려 며칠씩 양식 방아를 찧었다. 방아 찧는 일은 세 명이 한 조가 되고 팀워크가 매우 중요하다. 그 일은 한자리에서 험한 산을 몇 개나 오르내리는 고된 일이었다. 방아꾼은 한나절이나 하루씩 교대하였다. 그들은 힘이 들면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가 방아 고개를 넘기면서 부르는 방아타령이다. 다른 농요와 달리 선소리와 제창이 아니다. 기다란 사설조의 구전 가사와 즉흥 가사들이다. 공이가 들려주는 반주로 그만의 독특한 가사와 노래 솜씨를 뽐내며 부르는 돌림노래로 이어진다. 개인의 가사와 목청이 달라 언제나 새로웠다. 나는 작은 누나의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었지만, 즉흥 가사를 짓는 일이 어려웠다. 노래가 끝나면 말솜씨 좋은 사람이 옛날이야기나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것도 지루하면 참새가 방앗간을 지날 수 없듯 '방앗간 수다'도 한몫을 한다.
선종禪宗의 6조 혜능 대사는 몸이 가벼워 방아를 찧을 수가 없었다. 돌을 지고 무게를 맞춰서 열 달이나 방아를 찧으면서 수행을 하였다. 선승의 수행이나 방아타령도 이야기와 수다도 디딜방아와 한 몸을 이룬 동행자였다.
디딜방아의 속도는 느린 진양조는 아니다. 중모리를 지나 중중모리를 벗어날 수도 없다. 빠르기를 나타내는 메트로놈의 정확한 속도도 아니다. 공이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그 속도에 맞춰 일어나는 쿵 덕의 묘한 빠르기다.
디딜방아를 찧는 일은 지금의 시간 개념이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와 누나 셋이서 할머니 생신을 앞두고 찹쌀 방아를 찧을 때다. 누나와 내가 방아다리를 디뎠고 어머니가 확 옆에 앉아 튀어나오는 곡식을 밀어 넣고 골고루 섞으며 키질까지 하였다. 내가 빠지면 어머니와 누나가 힘이 들고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은 끝까지 버티겠다고 다짐을 했다. '천천히 꾸준히'라는 말이 몸에 박힌 날이다. 점점 힘이 들자 내가 좋아하던 누나의 노래와 옛날이야기도 소용이 없었다. '방아는 시간이 익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날 나는 한나절을 참아내어 어머니의 '장군 아들'이 되었다.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의 5세에게 한 '만족 미루기'의 마시멜로의 실험의 참는 시간은 15분이었다. 그것을 참아낸 아이들이 후에 긍정적인 삶을 이루었다는 연구 결과다. 여기에 비하면 디딜방아는 이보다 몇 배의 시간과 고통이 들어갔다. 이런 참을성과 끈기가 '한강의 기적'을 이룬 디딜방아의 저력이었으리라.
농부가 씨를 뿌려 쌀을 얻기까지 여든여덟 번의 손이 간다고 하여 쌀 '미(米)'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쌀을 얻는 과정은 88번째 마지막 단계가 방아를 찧는 일이다. 연습을 아무리 잘 하여 무대에 오른 연주자라도 잠시 집중력을 잃어 음이 틀리거나 악보를 잊어버리면 그 연주를 망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삶의 과정은 디딜방아로 알곡을 얻듯 매순간마다 조심과 정성을 다하는 것이었다.
곡식을 얻는 방아는 디딜방아, 연자방아, 물레방아 순서로 발전되었다. 이는 힘의 세기와 속도, 편리를 위한 변화를 불러오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용감하고 힘이 세고 날래도 디딜방아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 어머니처럼 부드럽게 천천히 참아내는 겸손과 협동심이 없으면 알곡을 얻지 못한다. 그렇게 어머니들을 힘들게 했던 디딜방아가 없어지고, 청송군의 송소고택과 구미시 구평동의 디딜방아 공원, 군위군 우보면 미성5길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등 몇 밖에 남아 있지 않다.
협동과 겸손, 소통, 인내의 디딜방아 정신은 대물림되어 왔다. 지금은 디딜방아 일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어머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래하는 일인다역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우리의 판소리에서 소리꾼이 '창'과 사설조의 노래 '아니리'와 동작의 '발림'을 혼자 하지만, 고수와 귀명창의 추임새가 없으면 소리를 이어갈 수 없듯 어머니 일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역할이 분명한 개성의 시대이다. 집안일도 디딜방아처럼 자기의 몫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 가족이 두 사람이면 듀엣을 하거나 연주자와 반주자의 역할을 맡는다. 가족이 셋이면 피아노 3중주를, 넷이면 현악 4중주를, 다섯 명이면 피아노 5중주단으로 만든다. 디딜방아꾼들 팀워크처럼 가족이나 사회생활을 이런 연주 형태로 만들어 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식구들의 자기 몫은 물론이고 배려, 겸손, 참을성까지 무르익어 숨어 있던 디딜방아 하모니가 나타날 것이다.
가난한 시절, 명절에도 찧을 곡식이 없어 애태우는 아내를 위해 거문고를 꺼내 들었다. 콩떡 쿵떡 떡방아 소리를 연주하여 위로한 백결선생의 가족 사랑과 애환이 오늘은 넉넉한 마음으로 다가온다.
얼씨구 방아로세~~.
디딜방아를 벗어난 방아타령이 빨라졌다. 중모리를 지나 중중모리를 거쳐 자진모리, 휘몰이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