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회 전라도 라주 벌 명당을 찾아서 (2009년 9월 13일)|
회원들의 아침인사가 바쁘다.
아침 7시 쾌청한 날씨다. 88고속도로를 이용 11시 반경 東光州 나들목을 통과 羅州로 벌 명당을 찾아 달렸다.
나주는 금성산(錦城山)의 정기가 영산강 가에다 광활하고 비옥한 나주평야를 일구었다.
이곳은 금성산과 서울의 북악산, 한강과 영산강 등 그 지형과 지세가 서울과 똑같아 예로부터 `작은 서울`이라
불렀는데, 나주 도심의 중앙을 관통하는 영산강이 지역을 江南. 北으로 갈라 놓아 지금의 서울과도 흡사하다.
그리고 全羅道라는 명칭도 羅州와 全州에서 비롯되어 나주란 이미지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대호동 기동마을 나주의 진산(鎭山)인 금성산(錦城山)의 줄기에 자리를 잡은 동신대
학교 내부에 있는 金海金氏 김수연(金壽延)의 음택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나주 동신대학 전경)
조선 단종 때 제주목사로 부임해 가던 金壽延이 이 마을을 지나면서 明堂으로 점지해놓은 후 제주에서 임기
중에 죽자 시신을 서울로 운반하던 중 이 마을에서 상여가 움직이지 않자 목사의 수행원이었던 通人 金九龍이
이곳에 음택을 정하니 그 후 이 마을은 김구용 마을로 부르다 歲月이 흐르면서 진구렁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金壽延은 시중(侍中) 탁(琢)의 증손(曾孫)으로 號는 용강(龍岡)이시 다.
무과에 급제하여 왕이 친히 홍패를 내렸고, 七 道 兵馬使를 역임하였다.
왕이 백 칸의 집을 하사하였으며 그가 죽자 조정에서 葬禮를 치렀다고 傳 한다.
1986년 당시 동신대학교를 건립하려고 토목공사 중에 碑石을 발견함으로써 5백여 년 전부터 전해오던 이야기
가 사실로 확인된 자리로 金壽延의 큰아들인 金好仁이 교도(敎導)를 지냈고,
손자 世楨이 판관을 증손자 金孝良이 군수를 지냈다 .
(龍崗 金壽延 묘역)
동신 大學校 內 김수연의 음택은 主山에서 龍脈으로 들어오는 入首龍은 斷脈되어 대학연구실의 건물터가
되었고, 안산마저 거대한 건물이 앞을 막고 있으니 歲月의 흐름을 원망해야 하는 건지 그 옛날 生氣 발랄한
龍脈과 사방을 감싸주던 靑龍 白虎는 갈기갈기 찢어져 상쳐 투성 이요. 齋室은 잡초에 쌓였으니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되어 굴러온 돌의 눈치를 보는 더부살이 신세로 변했다.
乾坐巽向으로 덩그러니 자리를 잡은 장방형 묘는 그 옛날 강한 龍脈에 入首와 蟬翼이 잘 형성되었고, 청룡
백호가 감싸준 명당으로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묘 앞엔 "증자헌대부병조판서행칠도병마사
용강김해김공지묘, 배정부인진위이씨합장" (贈資憲大夫兵曹判書 行七道兵馬使龍崗金海金公之墓 配貞夫人
振威李氏 함장) 비석과 상석, 무인석, 동자석 그 옆엔 무개 실은 神道碑가 위안을 주는 듯 지키고 섰을 뿐.
知性의 상징인 大學이 先人의 陰宅을 내버려두고 있으니. 어디 조용하고 양지바른 곳으로 모시면 얼마나 좋을까.
애잔한 마음이 떠나야 하는 나그네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구나.
(碑石) ㅡ 贈資憲大夫兵曹判書 行七道兵馬使龍崗金海金公之墓 配貞夫人振威李氏 함폄)
看山을 마친 회원들은 다음 간산지 벌 명당을 향해 떠난다.
동신 대학교 중앙 분수대가 가을의 운치를 돋구려는 듯 치솟고 있다.
그 옛날 분수대 자리엔 연꽃단지가 있었다면 龍崗선생의 묘역은 분명히 蓮花浮水形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사이에 羅州邑을 돌아 13번 국도를 통해 西南 쪽을 향해 달리니 멀리 紫微山城이 보인다.
羅州 들판을 가로 지려 潘南 땅에 들어서자 곳곳에 누워있는 성숙한 女人의 봉곳한 젖가슴 같기도 하고,
어머니의 따사로운 품속 같기도 한 대형 古墳들이 도로변 곳곳에서 우리를 반긴다. 자미산(紫微山:98.3m)
자락에 등을 댄 古墳群 들은 자미산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그 옛날 羅州地域을 지배했던 勢力들이
오랜 시기를 걸쳐오면서 강력한 政治位相과 고도의 문화수준을 누린 것으로 생각된다
(潘南朴氏始祖墓域入口)
벌 명당!,
潘南朴氏 시조인 호장공(戶長公) 박응주(朴應珠)가 잠든 묘소는 반남면 소재지를 지척에 두고 자미산 龍脈이
뻗어나간 나지막한 자락에 묘역을 정했는데, 앞쪽은 훤히 트이고, 뒤로는 산자락에 등을 댄 전형적인
背山臨水의 四神砂를 잘 살린 장법(葬法)으로 아래쪽이 호장의 墓이고, 위쪽이 孫子가 되는 진사공 吏曹參議
박윤무(朴允茂)의 墓로 이곳을 벌 명당이라 부른다.
벌 명당은 여러 곳에 있는데 공통점은 묘터를 잡아준 지관이 한결같이 벌에 쏘여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로
"서울 사당동 동래정씨". " 완주 벌 명당'. "서오릉 벌 명당 "천안 벌 명당". 등등........
요시히도 벌초길에 벌에 쏘여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많다하니 벌 명당의 發福은 歲歲年年 계속되겠구나.
(入口에서 본 墓域 全景)
潘南박씨 朴應珠의 묘소를 이곳으로 정하기까지는 `천기누설로 지관이 벌에게 화를 당했다` 라는 사연이
傳하고 있다.
이런 사연으로 그 명당은 벌 명당이라 불리고, 潘南朴氏로 일컬어지는 그의 후손들은 發福하기 시작 하였으나
지관의 말을 엿들어 그의 아버지 묘를 쓰게 된 朴宜는 그의 성급한 욕심 때문에 지관을 죽였다고 생각하여
지관을 성대하게 장사 지내주고 그의 가족들을 보살펴주었으며, 지관이 자기 집으로 가려고 넘었던 고갯마루에
봉현(蜂峴)이라 는 표지석을 세워 매년 10월 보름날에는 제사를 지내 주었는데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潘南朴氏始祖墓域紀事碑)
이곳 紫微山의 龍脈에 호장공의 墓所는 아담하고 예쁘게 솟은 멍덕봉(벌통의 지붕형상)을 主山으로 나직한
마을을 案山으로 삼고, 墓域의 국세(局勢)는 한 폭의 그림처럼 정답고 유순한 모습으로 明堂을 빙 두르고 있는데,
앞쪽의 내명당(內明堂)이 평탄 원만(平坦圓滿)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靑龍과 白虎가 길게 뻗어나가 둥그렇게 관쇄(關鎖)를 이른 모습은 혈장에 응기된 生氣가 차고 瑞氣가 밖으로
漏泄 못하도록 하는 保局처럼, 그 형상을 벌들이 꿀을 찾아 날아드는 紫微山의 紫微花形局(백일홍=배롱나무)
명당이라 부르고 싶다.
(벌 명당 묘역 전경)
山書에 서는 산본정(山本靜) 묘재동처(妙在動處), 수본동(水本動) 기재정처(奇在靜處)라 하여 혈을 찾으려면
역(逆)을 취하라는 말이 있다.
장사 지낼 때에 혈을 찾는 방법으로 자연을 거스르는 반대쪽에서 찾아보라는 뜻이다.
즉, 산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정지한 陰에 해당하므로, 역(逆)을 취하여 변화가 활발한 곳을 살피라는 뜻이고,
水는 陽으로, 움직이는 動에 해당하기 때문에 반대로 조용히 머무는 곳을 찾으라는 뜻이니 明堂 찾기란 자연의
순리를 최선에 두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곳 벌 명당은 평탄하고 기울지 않았고, 요석(瑤石)이 띠를 두르듯 둥그렇게 다져진 넓은 龍脈의 朴應珠 묘의
入首龍은 卯坐酉向으로 물은 좌우 龍虎자락에서 나오는 內堂水인 骨肉水와 子孫水로, 封墳 좌측 자락에서
發源 되어 묘역으로 진입하는 길을 따라 우측으로 흘러나가는 內破로, 辛戌方으로 去水되면서 八十八向法의
木局의 自旺向이라면 子孫이 興旺하고, 男女 모두 총명 수려하다는 합당한 向法이다.
(前 ㅡ 高麗戶長 朴公應珠之墓)
(禮를 표하시는 회원님들ㅡ 그래도 우산은?)
사방을 둘러보니 白虎보다 靑龍의 기세가 더 강하게 生動하니, 家門을 보존하고, 오랫동안 子孫을 이어가려는
어떤 힘을 표출하는 상징으로 보인다.
또한, 案山 넘어 멀리 나지막한 朝山은 墓域의 안정감을 나타내고, 특히 亥方의 太彌垣 貴峯은 後孫들의 성품이
어떤 권력 추구보다는 愛民에 더 치중하지 않았나 판단된다.
그리고 좌측 묘역 아래로 眞應水가 맑은 물을 솟구치고 있어 더더욱 吉地에 들어맞는 穴場으로 보여진다.
(後 ㅡ 贈吏曹參議朴公允茂之墓ㅡ孫子)
아무튼, 이곳에 墓域을 정하고 난 다음부터 潘南朴氏들의 子孫이 벌떼처럼 일어나기 시작하여,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걸쳐오는 동안 潘南의 名家로써 큰 세도를 누리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왕후(王后)
2명과 빈(嬪) 1명이 나왔고, 정승 7명과 판서 25명, 대제학 2명, 공신 5명 등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潘南朴氏
門中에서는 最高의 明堂으로 여기고 있다.
이곳저곳 來龍 .入首 .穴場 ..선익 .전순 . 청룡 .백호 .안산 조산. 주위의 砂. 三吉六秀. 따지다 보니 아이고
배고파 금강산구경도 食後라 했으니 여러분 갑시다.
(나직한 案山과 아스라히 감싸주는 朝山)
반남면사무소 삼거리 "대성식당"에서 한잔 술에 김치찌개로 배불리 먹고 나니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아줌마 아저씨 요리솜씨 좋고, 아줌마 마음씨 더 좋을 것 같고. 얼굴에 田宅宮과 男女宮이 뚜렷하고,
財福宮이 둥굴게 감싸주니 좋을씨고 健康하겠다.
잘 가고 잘 계시오.
(아저씨 아줌마 차렷 좋아요)
紫微山 북쪽 자락을 돌고 돌아 오늘의 마지막 답산지 나주시 공산면 송죽리 큰 산골 금호재단의 발복 지인
朴仁天의 증조 부모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재실ㅡ 鷗首齋)
墓所는 도로에서 한눈에 확인될 정도로 天穴로 오르는 길을 목조 계단으로 잘 다듬어 놓아 멀리서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묘는 대궐같은 한옥의 기둥머리에 달려있는 등불로 천하의 怪穴이라하겠다.
마을 안쪽 길을 따라 산밑에 도착하여 왼편 齋室 옆 대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면 서서히 가파른 나무 층계 길이
숨을 가쁘게 한다.
마지막 나무층계를 내리니 穴場은 石山으로 토질이 척박한 땅이라 封墳의 잔디가 따가운 여름 햇살에 힘겹게
견디고 있다.
(마지막 나무층계)
主山에서 멋지게 개장한 中出脈 상부 능선에 瑤石으로 氣運이 가득한 좋은 穴場이다.
멀리 좌측으로 영산강이 보이고, 물이 앞으로 들어와 산을 감싸고 가니 富者가 될 形局이다.
그러나 案山이 石山 開發로 파괴되어 아쉬우며, 白虎가 잘 돌아 명국을 빚어 놓았고, 靑龍의 허리가 끊긴 것이
흠이요 아쉬운데 훗날 무슨 일이 ?.
碑石에는「學生密陽朴公之墓. 配儒人平海吳氏(학생밀양박공지묘 배유인평해오씨)의 합장 묘소로 경사진
혈장의 기울기를 그대로 조성하고 돌로 둘래 석을 쌓아 만든 封墳에, 선익이 잘 형성되고 泄氣를 막기 위하여
氈脣에 유석들이 박혀있고 잘 調和를 이루어 아름답다.
또한,乳穴로 좌향은 戌坐辰向으로 右水倒左하여 艮寅破로 金局에 正養向으로 山書에서 丁財兩旺에 功名顯達
하고 發福이 가장 큰 최고의 向이라 하니 얼마나 좋은가.
(學生密陽朴公之墓 配孺人平海吳氏合葬)
좋은 明堂을 求 하기 위해서는 積德을 쌓고, 정성으로 부모님에게 孝道하고, 또한 求山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發福자리를 구할 수 있다 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有效한 風水의 俗說이 아닌가.
이곳 墓所의 積德으로 얻은 명당 이야기를 보면
" 옛날 영산강 건너편에서 작은 농토를 일구며 살던 가난한 농사꾼 朴氏 총각은 어느 날 밭에서 일을 하다가
허기져 몸을 가누지 못하는 스님을 보고 자신이 먹으려고 가지고 간 밥을 내주었다.
스님은 밥을 먹고 기운을 차린 후에도 떠날 기세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집으로
모시고 와서 공양했다. 한동안 머물던 스님이 떠나면서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 ` 라면서 무덤
자리를 점지해 주었다.
朴氏 총각은 이곳에 父親 무덤을 썼는데 바로 이 明堂 자리였다. 뒤에 母親이 별세하자 合葬했다."라고 傳 한다.
"積善해야 명당을 얻는다 "라는 말!.
(멀리 보이는 案山 朝山)
마지막 看山을 마치고 天界에서 下界 하신 우리 太極 회원님들 이러쿵 저러쿵 보신대로 느낀 대로, 좋으니,
아쉬우니. 말 많은 看山이 최고의 하루라 할 것이다.
준비해놓은 술잔에 하로의 피로를 풀면서 만족해하시는 회원님들 진심으로 感謝하고, 오늘도 사무장 수고
많았습니다.
서서히 대구를 향해 출발이다.
달리는 車내서 먹은 나주 배 맛이며, 휴게소에서 잠시 마시는 술은 항상 긴 여음을 남겨주니 그 날이 그리워
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太極 회원님들 항상 健康하시 길*******.
2009. 9. 13. 사진: 중환. 글:淸虛堂
첫댓글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을 등록해 주세요.
읽어주어 고마워요. 전에 댓글을 사용했더니 의견이 분분하여 등록을 취소했으니 내용에 의견이 있어도 그저 참고로 봐주시길 부탁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