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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말발굽 소리 요란한 경마장과 군용지로!] 한반도에서의 경마는 주로 1920년대부터 근대적 스포츠의 형식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전국적인 경마 대회 열기에 부응하여 부산에서도 1921년 4월, 부산진 매축지에서 최초의 경마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약 10여 년 간 주로 매립지나 개발 직전의 대규모 공터 등을 전전하며 경마 대회가 개최되곤 하였다. 그러던 중 1926년에 조직되어 경마 대회를 주관하던 부산경마구락부가 이듬해인 1927년 7월 13일, 동래군 연산리에 전용 경마장을 설치하기로 하고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상설 경마장이 개설된 곳은 범전리 일대의 서면 경마장이었다. 바로 옛 하야리아 부대 터이다. 이 일대를 상설 경마장 부지로 선정한 이유는 첫째 교통의 편리성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미처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서면 일대가 경마장과 같은 대규모 부지를 확보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는 당시 일본인들의 생활 거점이었던 부산부의 영역 확장 필요성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이 주로 자리를 잡았던 부산부와 한국인들의 생활 거점인 동래군의 경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던 서면 일대가 부산부의 도시 공간 확장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일방적인 경마장 입지 선정과 조성 과정에서 한국 농민들이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서면공립보통학교[현 성지초등학교]와의 마찰도 있었다. 경마장이 개장한 다음 해인 1931년 1월 2일자 『동아 일보』 기사를 보면 지역의 한국인 유지와 학부형들이 허가권자인 경상남도, 시행 단체인 부산경마구락부, 학교 감독자인 동래군수에게 경마장 운영으로 인한 교육 여건 저해와 사행심 조장 등의 폐해를 강력하게 항의한 사실이 나타난다. 대대로 한국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던 곳에, 그것도 학교 담장 바로 너머에 경마장을 조성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과 폐단도 뒤로하고 경마장은 부산, 그리고 멀리는 경상남도 일원의 지역민들에게 흥행과 관심의 대상으로 자리 잡아갔다. 지금도 옛 하야리아 부대 주변에는 ‘경마장로’와 같은 도로명을 통해 경마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경마의 흥행과 경마장 조성은 조선총독부의 세수 확보와 더불어 마필 자원의 확보라는 군사적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경마장은 경마 대회의 흥행을 통해 세금을 확보하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전쟁에 필요한 군마를 관리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전쟁 중에는 대규모 군사 훈련 등의 군용지로도 사용되었다. 실제로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서면 경마장의 경마 대회 기능은 축소된 반면 부산항의 배후 군용지로서의 기능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전쟁 중에 서면 경마장에는 일본군 10288 기마 부대가 설치되었으며, 군사용 마필을 훈련하고 지원하는 시설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1941년 태평양 전쟁 시에는 이곳에 제72병참경비대가 설치되었으며, 1942년에 이르러서는 임시 군속 훈련소가 설치되어 포로 감시원을 양성·배출하는 기능도 하였다. 부산 시민 공원 역사 문화관 구술 자료 수집 연구 최종 보고서에 기록된 당시 일본군 군수품 운반을 책임지는 노무자로 일했던 이문규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 군수품의 유통은 주로 부두-부전역-옛 하야리아 부대 물류 라인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한반도나 만주 등에서 사용될 군수품이 부두의 창고 시설만으로 부족해서 옛 하야리아 부대로 옮겨서 보관하였던 것이다. 반대로 만주 등에서 들어오는 물건들도 하야리아 부대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다. 현재 공사가 한창인 북항 재개발지 주변의 3, 4부두도 1941~1943년경 전시 체제에 따라 군수품이 증가하면서 설치된 시설이라고 한다.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일제는 한반도 전체를 병참 기지화하고자 하였다. 그 교두보가 되는 부산의 도시 공간 전체를 전시 체제로 전환하고 철도, 도로 등의 교통망도 모두 군수품과 군대 이동에 편리한 형식으로 바꾸었다. 1941년 11월, 화물선인 적기선이 부전 지구와 연결된 것이나 가야선, 부전선, 문현선 등이 1944년에 집중적으로 개통된 것도 이러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특히 부전역과 적기 부두 사이의 철도도 이 즈음인 1945년 5월에 개통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 말에 들면서 군수 창고와 군용지로 전용된 서면 경마장을 중심으로 군수품 수송과 군대 이송을 위한 많은 철도 시설과 군부대가 집중하게 되었고, 이러한 군사적 성격이 광복 이후 미군 점령지로 연결되면서 하야리아 부대가 정착하게 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