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1991년 8월 소련 쿠데타
고르비에 군부 반발… 3일 만에 진압됐지만 소련 해체로
입력 : 2023.07.05 03:30 조선일보
1991년 8월 쿠데타
▲ 1991년 8월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의 모습. /미국 하버드대도서관
러시아 용병 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지난달 24일(현지 시각) 반란을 일으켰어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중재에 나섰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프리고진과 그의 병사들을 처벌하지 않기로 했어요. 대신 프리고진이 벨라루스로 망명하는 조건으로 철군하며 사태가 일단락됐지요.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이 1991년 '8월 쿠데타'와 비슷하다는 평가가 나왔어요. 미국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1991년 8월 쿠데타 때처럼 프리고진의 반란이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푸틴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약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고 분석했어요.
8월 쿠데타는 어떤 사건일까요? 1991년 8월 19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개혁 정책에 반대해 공산당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3일 만에 실패한 사건을 말해요. 그 여파로 소련 체제 아래 있던 나라들이 잇달아 독립을 선언하면서 결국 그해 12월 소련이 해체됐고, 고르바초프도 퇴임했답니다.
고르바초프 개혁·개방 정책에 반발
1980년대 들어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벨벳 혁명'이 일어나 공산 정권이 붕괴했고, 폴란드 선거에서는 비(非)공산주의자들이 의석 99%를 차지했어요. 소련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과도한 국방비와 관료들의 부정부패, 생산력 저하 등으로 국가 경제가 점차 궁핍해지고 있었어요.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하면서 급격한 변화가 시작됐답니다.
당시 소련은 노멘클라투라(특권적 지배 계층)가 모든 정보와 부를 독점했어요. 정부 통계도 원하는 대로 조작해 국가에 정말 필요한 정책이 나오기 어려웠죠. 문제점을 파악한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펼치며 언론 검열과 사상 탄압을 완화하고, 점진적으로 자유주의 시장 요소를 받아들였어요. 정치적으로는 대통령제를 도입해 스스로 소비에트 연방의 초대 대통령이 됩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궁극적 목표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체제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작동하게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당시 그의 개혁·개방 정책에 반발하는 세력이 많았어요. 인플레이션과 대규모 실업 등으로 소련의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했고, 대중의 불만도 높아갔어요. 개혁이 느리다며 더욱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도 나왔죠. 급진파였던 러시아 공화국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더 많은 자치권을 달라"고 요구하며 결국 공산당에서 탈당했죠. 1990년에는 개혁·개방 정책에 자극받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이 소련에서 독립한다고 선언했어요. 소련을 유지하고 싶었던 보수파는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느슨하게 만들었다며 강하게 반발했어요. 고르바초프는 급진파와 보수파 모두에게 공격받았고, 소련은 정치적·경제적 혼란으로 무너지고 있었죠.
옐친, 쿠데타 규탄하며 실세로 떠올라
보수파는 소련 해체를 막고 체제를 복구하기 위해 반란 날짜를 정했어요. 국방부 제1부위원장 올렉 바클라노프, 비서실장 발레리 볼딘 등 고위급 관료 4명은 1991년 8월 18일 고르바초프가 휴가 중이던 크림반도의 별장으로 들이닥쳤어요. 그들은 고르바초프에게 부통령 겐나디 야나예프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어요. 고르바초프는 이를 거절하며 그들을 반역자라고 질책했지요.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감금당해 별장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신세가 됐고, 외부와도 연락이 끊겼어요.
다음 날 쿠데타 주동자들이 결성한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고르바초프가 건강 악화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것이며, 야나예프가 임시 대통령직을 맡는다고 선포했어요. 이들은 파업과 시위를 금지했고 언론도 검열했지요.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급진파였던 옐친 역시 구금하려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어요. 이는 쿠데타 실패 요인 중 하나가 됩니다. 왜냐하면 옐친이 쿠데타를 막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거든요.
옐친은 쿠데타가 일어난 후 사태 파악에 나섰어요. 모든 군대가 쿠데타에 동조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해 총파업을 결정합니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러시아 의회 건물 주변에 집결해 바리케이드를 세우기 시작했어요. 옐친을 지지하기로 한 탱크와 병력 수송차도 러시아 의회에 도착했어요. 시위대 수만 명이 러시아 의회 주변에 '인간 사슬'을 형성했고, 옐친과 동맹을 맺은 소련군이 끌고 온 탱크와 장갑차 수십 대가 함께 방어에 나섰습니다. 옐친은 전차에 올라가 쿠데타를 규탄하고 총파업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어요. 그의 연설은 저녁 뉴스에 방송돼 널리 퍼졌고, 시위는 8월 20일에도 이어집니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 앞당겨
야나예프 부통령은 기자 회견을 통해 세계 각국 정부에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조치를 이해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국제 여론은 옐친과 시위대 쪽으로 기울었어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는 전화로 보리스 옐친을 지지하며 힘을 실어 줬어요. 소련 연방에 속하던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도 반란 세력을 비난했어요. 옐친은 군권까지 장악합니다. 옐친 쪽으로 이탈하는 병사들까지 생기자 8월 21일 쿠데타 세력은 결국 무너졌고 주도자들은 도망치려다 체포됐어요. 고르바초프는 복직했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만든 모든 법령은 무효가 됐어요. 8월 22일 고르바초프와 그의 가족이 모스크바로 돌아왔지만,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았어요. 대신 쿠데타 진압에 가장 큰 공이 있는 옐친이 소련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인으로 떠오릅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개혁·개방 정책은 러시아 국민에게 전체주의 체제를 비판할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 줬어요. 쿠데타 실패는 소비에트 연방 해체를 앞당겼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대통령 직무를 재개했지만, 이미 권력이 매우 약해진 상태였어요. 실권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 옐친에게 넘어갔죠. 옐친은 더는 소련을 유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어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대통령이 옐친의 지도 아래 새로운 연방을 만들기로 합의하면서 소련은 1991년 12월 8일 벨라베자 조약으로 사라집니다. 대신 독립국가연합(CIS)이 결성됐지요.
▲ 1991년 8월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의 모습. /미국 하버드대도서관
▲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브리태니커
▲ 1991년 8월 19일 러시아 모스크바 의회 건물 앞에서 연설하는 보리스 옐친(앞줄 가운데). /브리태니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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