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3일, 전쟁이 터졌다. 히데요시 16만 대군 중심에는 규슈지역
기리시탄 다이묘를 병력 3만이 있었다. 히데요시 군단 명부에 편성된 다이
40명 중 25명이 기리시탄 장군이었다.
1992년 4월 14일, 경상도 동래에 상륙한 일본군은 상주와 문경과 충주를 거쳐
한정으로 입성했다. 20일 걸렸다. 그보다 이를 전 선조는 의주를 향해 도주했다.
마음속 목적지는 명나라 요동이었다. 피란이 아니라 내부(內附)였다.
황제국가로 들어가서 붙어 살겠다는 뜻이다.
류성룡을 비롯한 몇몇 관료의 만류에 발걸음은 압록강 남쪽 의주에서 맺었지만
이후에도 선조는 명나라로 건너가 황제의 은총 속에 목숨을 부지하려는 꿈을
지우지 않았다.
개전 직후 예수회 순찰사 발리냐노는 “히데요시가 이미 조선국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다.
1593년 6월 오사카에서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이 벌어졌다.
명나라 사절 심유경에게 일본은 “진주성을 공격할 예정"이라고 알려줬다.
심유경은 급히 조선 주둔 명군에 진주 철수를 요청했다.
고립된 진주성에서는 직립해 있는 모든 생명이 전멸했다.
이미 개전 1년 만에 평안도 감찰사 이원익은 “명군이 나아가 싸울 뜻이 전혀
없으니 통탄스럽다”고 보고했다.
믿었던 사대(事大) 본국이 제후국을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선조는 명나라가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외쳤다. 믿을 수 없다.
- 박종인 저, ‘대한민국 징비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