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미디안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나와서 왜 우리는 안불렀느냐고 한다. 기드온이 겸손했던 것 같다(그는 므낫세 출신이다). 그렇게 겸손하니까 무마가 된다. 이것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그 때까지는 이스라엘의 주도적인 역할을 에브라임지파가 맡아 왔던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하는데 왜 내 허락없이 함부로 그런 일을 했느냐고 한다. 이것은 지도자의 허세다.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지도 못하면서(하나님께서 자기를 지도자로 세운 것을 알았다면 나서서 일을 해야지 가만히 있다가) 남이 다 해 놓고 나니까 그 때서야 나와서 큰소리다. 이것은 영적 능력을 상실한 지도자의 허세다. 이러한 능력 상실한 지도자의 허세가 입다 때 가서는 이스라엘을 동서로 완전히 갈라놓는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갈수록 이스라엘의 타락이 심화되는 만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돋보이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암시를 준다.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셔서 교회를 다스리도록 하신 만큼 일반 단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도자가 공동체에 끼치는 영향이 대단하다. 그런 만큼 책임도 크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영적 지도자, 그 영적지도자들을 거론하면서 그들의 타락을 얘기할 때 단순히 그 지도자 한 사람의 죄악을 얘기하기 보다는 지도자란 것은 또한 백성을 대변하는 자이기도 하니까 이스라엘의 전체적 상황을 암시하기 위해서 지도자의 영적 상태를 말씀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 사사기에서도 지도자의 영적 능력 상실 즉 도저히 사명을 감당하기가 역부족인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은 지도자의 부족한 모습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당시 이스라엘의 전체적인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앞에서 이스라엘의 전체에 대해 말씀한 이야기들이 지도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없이 백성과 지도자 모두 전쟁을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공존의 길을 택하였고 다른 신을 섬기는데 지도자가 앞장 섰든지 아니면 백성들이 부추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도자가 공동체에 차지하는 비중, 끼치는 영향력, 직분상의 권위 등을 생각할 때 특히 사사시대 때 형편과 관련해서 생각할 것은 그들이 분명 앞장 서야 할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더 큰 책임이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지도자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책망 한 가지가 덧붙여지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왜 타락일로를 걷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앞에서 몇 가지 이야기했다. 즉 전쟁의사 포기, 신앙의 변질 이것이 그대로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 한 가지가 덧붙여져야 한다.
기드온시대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는가? 기드온의 반문을 통해서 짐작 해 보면 옛날에 우리 조상들을 놀라운 능력으로 구원하셨던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영적 무지와 그들이 당하는 상황의 진정한 원인이 어디 있는지에 대한 무지를 나타내지만 동시에 이전에 그들의 교회를 놀랍게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능력이 지금은 과연 사라지고 없는가?하는 심각한 반문이 가능할 정도로 은혜가 핍절한 정도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영적으로 매우 곤고한 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긍휼이 여기셔서 연약한 기드온을 세우시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그의 믿음을 준비시켜서,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교회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케 하셨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전혀 무력하였고 그들에게 있어서 볼 수 있는 것은 실패와 타락되고 변질된 교회의 모습 밖에 없었기 때문에 전혀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않은 미디안 군대에 대한 승리는 곧 하나님의 승리는 더욱 돋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기드온을 통해서 베푸신 구원 이 구원은 사사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구원으로 꼽힌다. 히 11장에 사사들의 인물이 언급이 되지만 특히 이사야서 같은 부분을 보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놀라운 구원을 말씀하면서 무엇에 비교하고 있는가 하면 ‘출애굽과 미디안의 날에’라고 비교하고 있다. 출애굽의 중요성은 새삼 언급치 않아도 잘아는 것이고 미디안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기드온을 통한 구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출애굽의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에 비견되는 구원이다. 사사시대의 하나님의 구원의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사사시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기드온시대 곧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이 가장 돋보인 이 시대는 또한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구원체험이 이스라엘을 패괴케하는 계기가 되고만다. 여기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에게 당신 집안이 이스라엘을 대대로 다스려 달라고 이야기한다. 그와 같은 요청에 대해서 기드온은 일언지하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린다는 말로 일축하고 만다. 나와 내 아들도 결코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시요 그가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왕제도를 부정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 통치자를 통한 간접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바람직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많이 얘기를 하지만 그러나 직접적인 통치냐 간접적인 통치냐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기드온 자신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고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다스린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분명히 백성들의 요구 속에 적어도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는 요소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사사시대 서두에서 여호수아가 명백한 후계자를 남겨놓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물었다는 것을 가지고 이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모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백성들이 공식적으로 하나님께 물은 것인데 거기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어떻게 물었겠는가? 통성으로 기도를 했겠는가? 나중에 사사시대 여러 경우를 보면 대개 어떤 식으로 물었는가 추측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제사장을 통해서 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사시대 때 여호수아와 같은 그런 사역을 감당할 지도자는 없었지만 제사장이라는 또 다른 하나님의 통치의 중보자(그런 영적지도자)는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 공백기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하던 그런 성격의 지도자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지도자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 하시느냐 아니 하시느냐 그것이 관건인 것이다. 이런 것이 전제가 된다고 한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통해서 구원을 베푸셨는데도, 당신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으니 당신과 당신 아들이 대대로 이스라엘을 다스려 달라고 하는 백성들의 질문에 대해 그냥 못하겠다고 하지 않고 왜 여호와께서 다스린다고 말을 했을까? 그말이 있고 난 다음에 나와 내 아들도 결코 다스리지 않겠다고 말을 했는가? 이 말에 대한 배경에 대해 잘 생각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백성들의 요구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요구 속에는 적어도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참통치자이시라는 것을 부정하는 요소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나중에 사울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즉 다윗을 세우기로 하셨다. 그것은 이미 창세기 때 이미 다 예언을 하신 것이고 그리고 구약에서 세워진 다윗 왕 이라는 것도 그 자신이 궁극적인 왕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왕 제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백성들이 요구한 왕상, 왕권의 본질과 성격이 무엇인가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열방처럼 우리도 왕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이들이 교회 밖의 대적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한계를 느꼈던 것 같다. 여호수아 같이 일사불란하게 백성을 이끌어 줄 지도자는 없고 그리고 시대가 진행될수록 백성들의 마음은 자꾸 갈라진다. 적과 싸우는 전쟁에 있어서 의욕을 상실하고 어떤 한 지파에서 큰 위기가 있어도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식으로, 말하자면 교회 내부의 긴밀한 결속감이 점점 붕괴되어 가고 느슨해져 가는 그런 과정이 시작되고 있음은 드보라 사건에서도 이미 살펴 보았다.
이런 때에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쑥밭을 만드는 이방나라들을 보니 그 나라에는 왕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 전쟁은 지금과 달라서 전쟁이 거의 백병전이다. 그래서 전쟁을 좌우하는 것은 사기다. 심리적으로 지기 시작하면 그 전쟁은 불문가지다. 그래서 대개 보면 전열선두에 누가 서는가 하면 제일 강한 용사가 서거나 왕 자신이 앞장을 선다. 영웅적인 모습으로 군대 앞에 서서 호령을 하면 군사들이 나아가서 전쟁을 하는 그런 양상인데 열방들은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효율적으로 이스라엘을 몰아붙여 초토화시키니 아무래도 우리도 저런 조직을 갖추어야 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요즘도 그렇지만 국가 안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정권이양 곧 승계문제다. 사사들은 어떤가? 하나님이 세우고 죽고 나면 그걸로 끝이다. 그러면 그 다음은 또 무정부 상태다. 그러니 또 야단법석이 나고 그래서 안되겠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나라를 보니까 세습제다. 그러니 정국이 안정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우리도 저러한 지도자 즉 왕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드온에게 청을 한 것인데 기드온이 그 요청의 성격을 알았기 때문에(그들의 요구의 성격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교회)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이다’라는 것을 분명히 지적한 것이다.
기드온이 300명을 뽑은 것을 가리켜 전쟁을 수행할 믿음이 준비된 사람을 뽑은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별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여기 이스라엘 백성의 기드온에게 한 요구에 대해 그 속에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성경에는 뚜렷이 그렇다고 말씀하고 있지도 않은데 너무 지나친 추측이 아닌가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글의 흐름을 보면 바로 이어 지는데 아비멜렉 정권으로 이어진다. 거기서 전체적인 흐름이 나타난다. 백성들의 잘못된 요구에 대해서 기드온이 교회는 어떠한 곳이다라고 분명히 하고 있고 또한 그 교회를 다스리는 분이 누구시라는 것까지는 참 좋았다. 적어도 기드온에게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한 가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암시 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백성들 편에서 그들이 원하는 교회 지도자상이 이미 상당히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인(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하는 지도자상 즉 교회는 이런 사람이 지도해야 된다는 생각에 많은 변화, 변질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그 다음 그들의 잘못된 요구에 대해서 교회의 성격과 본질을 기드온은 분명히 했다. 교회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다해놓고서는 곧이어 기드온의 실수가 시작된다. 기드온이 가장 돋보이는 시점에서부터 또한 나락의 길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나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선 그가 전리품을 가지고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힘들지만 하나님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에봇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교회 지도자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암시가 되었듯이 이미 백성들 자체 속에서 믿음의 변질이 오기 시작했는데 기드온이 세운 에봇과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결합이 되어서 우상숭배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기드온의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는 차치하고) 그가 행한 일이 계기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오도하는 불상사가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