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봉의 대표곡 '그때 그 사람'만큼 화제를 뿌린 대중가요도 흔치 않을 것이다. 청승스러울 만큼 애절한 가사와 멜로디로 무장해 청자의 마음에 거침없이 파고드는 이 노래는 그녀의 데뷔곡이자 출세곡이면서 힘겨운 활동금지의 좌절까지 안겨준 영욕의 노래다. 또한 대통령 시해 현장이란 격동의 시대상과 맞물려 대중가요 사상 유례가 없는 온 국민의 무한관심을 이끌어냈다.
1975년 가요정화운동이후 볼거리, 들을거리에 목말랐던 대중에게 MBC대학가요제는 청량제와도 같았다. 화제가 반발했던 1회 대회에 이어 더욱 큰 관심 속에 열렸던 1978년 제2회 대학가요제의 주인공은 당시 명지대 경영학과 3학년생이었던 심민경(심수봉의 본명)의 창작 트로트곡 '그때 그 사람'이었다.
우선 록과 포크가 대세였던 대학가요제에서 트로트를 부르는 여대생 가수의 등장은 파격을 넘어 관객과 시청자 모두를 당황시켰다. 하지만 경쾌한 자신의 피아노 반주에 맞물린 구슬픈 그녀의 노래는 끝내 모두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전혀 다른 감각의 창작 트로트였다.
엄청난 관객의 반응에 흥분한 그녀는 내심 대상 수상을 기대했다지만 '가창력은 돋보였지만 곡의 리듬이 대학가요제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상에는 실패했다. 비록 입상에는 실패했지만 심수봉은 대상 수상곡인 보컬그룹 <썰물>의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보다 오히려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 바람에 제2회 대학가요제 음반은 여러 가지 버전을 양산했다. 가요제 이후 단숨에 '대학가요제의 이단아'로 떠오른 심민경의 '그때 그 사람' 때문이었다. 매일 같이 TV, 라디오의 음악프로그램과 각종 언론의 지면에는 심수봉 일색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트로트만이 갖는 멋과 맛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가수', '천부적으로 한국적인 한이 담겨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 노래로 인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10.26 시해 사건의 현장에 연루된 '그 때 그 여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비련의 주인공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여하튼 엄청난 반응은 '그때 그 사람은 가수 나훈아'라는 소문을 동반시켰다. 사연은 이렇다. 1975년 초여름 밤 남산 도큐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노래를 하던 심수봉은 선배가수 나훈아가 찾아온 것을 보고 그의 히트곡을 부르는 재치를 발휘했다. 그녀의 노래를 듣고 단숨에 탁월한 재능을 감지한 나훈아는 1976년 신세기 레코드에 데뷔음반 제작을 주선했다.
당시 녹음했던 노래는 후에 빅히트를 터트린 '여자이니까'다. 심수봉은 나훈아와 혼성듀엣으로 노래를 취입했다. 하지만 흥행에 확신이 서지 않았던 음반사가 음반을 제작하지 않자 오아시스로 옮겨 재취입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녀의 데뷔음반이 정상적으로 발표되었다면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까? 역사에 있어 만약이란 추론은 무의미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정상적으로 데뷔음반이 나왔다 해도 대학가요제 이후 이끌어낸 즉각적이고 엄청난 반응을 획득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흥미로운 점은 데뷔음반 발표가 무위로 돌아간 후 그녀는 뒤늦게 명지대에 입학했고 때마침 큰 화제를 몰고 온 대학가요제에 참가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운명적으로 미리 정해진 수순처럼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심수봉은 대학가요제 출전 5년 전인 1973년 여고를 졸업하면서 이미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 '라 칸티나'에서 아르바이트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하얀색 그랜드 피아노를 치며 라틴 계열의 외국 곡을 주요 레퍼토리로 불러 나름 잘나가는 밤무대 가수였다. 1975년 어느 날, 밴드 마스터 엄토미가 서울 보광동의 한 개인 파티에서 피아노 반주를 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 파티는 청와대 박종규 경호실장이 주최한 연회였다. 이후 그녀는 경호실장이 여는 비밀 사교 파티에 자주 불려 나가며 박정희 대통령과 운명적인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1979년 지구레코드와 전속계약을 맺은 심수봉은 대학가요제 본선에 함께 출전했지만 입상하지 못했던 '백팔번뇌'의 최현군과 함께 스필릿 음반을 발표했다. 타이틀 곡 '그때 그 사람' 외에도 2회 대학가요제 본선 진출곡인 한양대 혼성듀엣 박광주, 최혜경의 '젊은 태양', 기성곡인 전영록의 '애심', 송창식의 '날이 갈수록', 윤연선의 '얼굴'을 리메이크해 총 5곡을 수록했다. 앨범이 나오자마자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들불처럼 일어난 심수봉 열풍은 전국을 강타했다. 모든 TV, 리디오의 가요프로그램은 심수봉 노래 일색이었다.
1979년은 심수봉에게 극과 극을 체험시킨 한 해였다. '그때 그사람'은 당대 최고의 인기프로그램이었던 MBC TV 금주의 인기가요와 TBC TV 가요 베스트7의 정상에 등극했다. 당시 한 대중매체의 대중가수 인기조사에서 그녀는 신인가수로는 이례적으로 당당히 4위에 올랐다. 지구레코드는 MBC 10대 가수상, TBC와 KBS 신인가수상을 휩쓸며 정상의 가수로 떠오른 심수봉에게 제미니 승용차를 보너스로 선물했을 정도로 '심수봉 열풍'의 강도는 강력했다.
미완의 대기를 알아보지 못했던 신세기와 오아시스 레코드는 '대어를 놓쳤다'며 땅을 치며 묵혀두었던 '여자이니까' 등을 창고에서 꺼내 발매하는 얄팍한 상혼을 보였다. 하지만 세상을 뒤흔들었던 '10ㆍ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졌다. 당시 현장에 있던 두 여인 중 한 명으로 밝혀진 그녀는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신군부가 들어선 1980년 8월 30일. 3개의 TV와 5개 라디오 방송은 방송윤리위를 열어 심수봉을 위시해 남진, 옥희, 나훈아, 태진아, 정훈희, 이수미 등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거나 시청자에게 혐오감을 주어왔다'는 연예인 20여 명에 대해 방송출연 금지조치를 취했다.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심수봉에 대한 궁금증은 오히려 관심을 증폭시켰다.
심수봉은 1980년 11월에 개봉한 박호태 감독의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에 출연하며 재기를 꿈꿨다. 영화주제가는 물론 직접 가수로 출연한 이 영화는 화제의 중심이었던 심수봉 덕택으로 관객 5만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하고 홍콩으로까지 수출되었다. 하지만 1979년에 이미 만들었던 영화주제가 '순자의 가을'은 그녀의 컴백 의지를 무참히 꺾어버렸다. 노래 제목에 당시 '영부인의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로 금지조치가 내려지면서 그녀는 또다시 좌절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황당한 사건이었지만, 당시엔 대통령의 외모와 비슷한 남자배우도 한동안 방송출연 금지를 당했던 대중문화의 암흑기였다. 이 노래는 1983년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로 제목을 변경해 코미디언 출신 인기가수로 급부상했던 방미의 6집 타이틀곡으로 발표돼 빅히트가 터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984년이 돼서야 그녀의 방송 출연금지 조치는 해지되었다. 그해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를 다시 취입해 한을 푼 심수봉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시작으로 '당신은 누구시길래', '무궁화', '축제 이야기'로 연타석 히트퍼레이드를 펼쳤다. 1987년에 발표했던 불후의 명곡 '사랑밖엔 난 몰라'는 그녀의 음악 정점이라고 평가해도 좋을 불후의 명곡이었다. 이처럼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듯 한의 정서를 사랑으로 승화시킨 그녀의 창작 트로트 곡들은 비로소 '심수봉류 트로트'라는 독창성을 획득했다. 심수봉은 '100년 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트로트 싱오송라이터 아티스트'다. '그때 그 사람'은 문병을 갔다 친구의 남자 친구가 기타를 쳐주는 모습을 스케치한 그녀의 창작곡이다.
지난 2010년 KBS TV '가요무대'는 방송 25주년을 맞아 방송문화연구소에 의뢰, 전국 20대 이상 시청자 7155명을 대상으로 '국민가요 100곡'에 대한 인기도를 설문조사를 했다. 그때 심수봉의 대표곡 '그때 그사람'은 당당히 '최고의 국민가요'로 선정되었다. 또한 70년대 인기곡 순위에서도 부동의 1위를 차지했다. 결핍으로 가득 찼던 자신의 굴곡진 삶을 진솔하게 담은 애절한 그녀의 '그때 그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