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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선지식 및 명찰순례 53차 충남 논산 쌍계사,관촉사를 다녀와서(2006.10.8.)
이날은 특별한 날 이다.
53차까지 순례행사를 마무리하는 날이므로 회향법회를 하는 날이다.
햇수로는 약7-8년 걸쳐서 53차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2000년까지 15차까지 진행해 오다가 중간에 약2-3년간 중단한 것을 다시2003년12월부터 매월 진행하여 2006.10.8.자로 53차까지 진행한 것이다.
많은 굴곡과 사연을 지나서 이날 회향법회를 하는 날이므로 더욱 뜻 깊다.
이 행사를 처음부터 현재까지 기나긴 세월동안 같이 해 온 분이 김상수 집행위원장님 이다.
본 행사를 처음부터 주관하고, 계획하고, 53차까지 무사히 회향법회를 하도록 물심양면으로 수고하신 분이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때로는 전면에 나서서, 이러다 보니 본의 아닌 비난과 오해를 감수하면서 묵묵히 걸어가는 분이 있기에 느리지만 마지막까지 회향 할 수 있었다고 본다.
2006.10.8.07:10경 보현사 옆에서 법우46명을 태우고 차량은 충남 논산 관촉사로 출발한다.
차량내에서는 류적명님,신군자님,서지현,최득영님,박만택님등이 사찰안내유인물, 일정표, 아침대용인 떡, 생수, 바나나등을 나누어주고 인원파악을 한다.
차량은 서대구IC-경부고속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차량 내에서,
차량이 고속도로 진입하자마자, 법우들 사이에 간단한 인사를 나누는 의식을 갖고, 장주일님 집전에 따라 천수경,예불문,이산혜연선사발원문,관세음보살 릴레이 정근, 반야심경을 경건하게 독송한다.
08:20경 추풍령 휴게소에 도착했다.
휴게소에서 이대원님, 김상수님과 같이 사찰내에서 회향법회 식순을 확정하고, 발원문은 43학번 이춘생님, 축시낭송은 서지현 재무님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차량 내 에서 1부 차중 법회를 마치고 53선지식 단장 이대원님 인사, 류적명님 관촉사,쌍계사에 대한 사찰안내를 한다.
참석 법우들 1분 스피치를 겸한 자기 소개를 하도록 하여, 소속감을 심어준다.
황금색 들판이다.
황금색으로 물결치는 벼가 좋다.
그 사이로 스쳐 지나는 바람소리가 쏴아 소리를 내며 들리는 듯 하다.
고향으로, 고향으로 달려갔던 차량 행렬들은
각자 보금자리로 돌아간 모양이다.
고속도로 어디에도 막힘이 없다.
하늘은 맑고 푸르다.
행사 때마다 좋은 날씨를 내려주는 부처님께 감사하다.
중생들은 늘 받기만 하니 부끄럽다.
류적명님 관촉사에 연락하니 대웅전에서 49제를 지내고 있어서 법당을 사용할 수 없다. 고 한다.
인근 쌍계사에서 회향법회 하기로 결정했다.
10:10경 쌍계사에 도착했다.
쌍계사는,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可也谷面) 중산리(中山里) 불명산(佛明山)에 위치 해 있다.
고려 초기에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218)을 건조한 혜명(慧明)이 창건하였다 한다. 경내에는 보물 제408호로 지정된 쌍계사 대웅전이 있고, 그 밖에 쌍계사 중건비(重建碑)와 9기(基)의 부도(浮屠) 등이 있다.
쌍계사대웅전(雙溪寺大雄殿)은 -보물 제408호, 조선시대
절의 중심 법당이라 할 수 있는 대웅전은 건축 형식으로 보면 조선 후기 건물로 1972년 보수공사가 있었고 1973년에 단청을 다시 하였다.
건물 안쪽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으며,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신 불단 위쪽으로 불상마다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엄숙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다.
예술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을 볼 수 있고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쌍계사부도(雙溪寺浮屠)-문화재자료 제80호 (논산시), 9기
쌍계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마련된 이 부도밭에는 모두 9기의 부도가 자리잡고 있다. 이 절에서 돌아가신 아홉 승려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는데, 6기는 종모양을 하고 있고, 나머지 3기는 지붕돌을 갖춘 4각 부도이다.
모두 조선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어 당시의 부도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쌍계사중건비(雙溪寺重建碑) : 쌍계사에 중건비가 있다. 자연석 기단위에 장방형의 비신이 있으며 정상에 가첨석이 올려져 있다. 비신에는 「雙溪寺 重建碑銘 (쌍계사 중건비명) 」이라 전각(篆刻)되어 있고 김락중이 찬(撰)하고, 이화중이 글씨를 썼으며 김락조가 전(篆)을 하였다. 이 중비는 1739년 (조선영조 15년)에 세웠다.
쌍계사의 전설-쌍계사(雙溪寺)와 하마비(下馬碑)
아주 옛날 하늘나라의 상제는 산수가 수려한 이땅에 절을 하나 짓기로 하고 그의 아들을 이땅에 내려 보냈다. 상제의 아들은 지금의 쌍계사 부근에 내려와서 절을 지을 장소를 한참 물색하다가 맑은 물이 계곡을 따라 흐르는 것이 마치 신선지 같기도 한 지금의 장소를 선택했다.
그리고 상제의 아들은 절을 짓기 위하여 사람들을 시켜 진귀한 나무를 선택해 오도록 했다.
그래서 각처에서 옮겨온 진귀한 나무들로 절을 짓기 시작했다. 처음 건물은 기둥과 주춧돌, 문짝 그리고 건물안의 벽화, 건물 장식 하나하나를 하늘나라에 물어보고 지었다. 이곳에 절이 세워지자 이땅의 불교신자들은 누구나 한번쯤 여기에 다녀가는 것이 큰 소원이었다고 하니 쌍계사의 우아함을 짐작할만 하다.
그후 세월은 흘러 고려말 이곳 쌍계사의 주지스님이 잠을 자고 있는데 꿈속에서 한 스님이 나타나서
「스님 요즈음 세상사가 어지러워 민심이 참으로 흉흉하외다. 하기야 불도를 어긴 스님들이 이땅에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또한 민심이 흉흉한 책임이 불문에 있는지 없는지도 참어려운 이야기옵니다마는 앞으로 쌍계사에는 쫓기는 스님이 숨어올것도 같으니 각별히 유의하셔아 합니다. 그러나 스님이 아닌 "임금왕"자의 성을 가진 사람이 말을 타고 여기에 들어오면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고 조용히 물러갔다.
그후 나라에는 큰화가 일어나 각지에서 스님들이나 도망 다니는 듯한 사람들이 쌍계사를 찾아와 몸을 숨기기도 했다. 쌍계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왔고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들이 여기에 온지 며칠 후 불명산을 뒤덮는 듯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군사들이 쌍계사를 향햐여 오고 있었다. 여기에 숨어있던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이때 쌍계사의 주지스님은 그들 앞에 나와 목탁을 치며 불경을 외우기 시작하였고 외우는 독경소리는 더욱 크게 퍼져 나갔다.
그런데 이런 기변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쏜살같이 달려오던 그 많은 말들이 앞다리를 번쩍 들며 기성을 지르면서 쓰러지는 것이었다. 한발자욱도 나오지 못하고 한 장소에서 말을 몰던 군사들도 말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래서 여기를 찾아와 숨어있던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구했다.
그후에도 말이 쓰러진 그 자리에서는 말을 타고 지나가려면 똑같은 일들이 생겼다. 아무리 지체높은 사람도 상제의 아들이 지은 절간인만큼 말을타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후로 말이 절간쪽으로 더가지 못한 장소에 하마비를 세워 말에서 내려 절간으로 걸어가게 되었고 여기서 불공드리면 죄가 물려진다 해서 쌍계사는 신성시하는 사찰로 유명하다.
- 이상은 류적명님 작성한 53선지식 사찰안내 자료에서 인용한 내용 임 -
일반 관광객은 거의 없는 호젓한 산골 사찰이다.
오랜 세월동안 보수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오래된 다듬지 않은 돌계단이다.
법당을 관리하는 보살 한 분이 나와서 대웅전 문살조각, 법당 안에서 임금님을 모시고 있는 신중탱화,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세 번째 기둥은 칡 기둥이라 한다. 한번 만지고 나면 평생 건강해 진단다. 자신감이 넘치는 설명이 이어진다. 몇 번 박수까지 유도하면서..........
11:00경 쌍계사 대웅전에서 53차 대구불교대학 53선지식 및 명찰순례 회향법회 개회를 하고 법회를 시작했다.
이석정님 집전으로,
삼귀의례,반야심경, 이춘생님 발원문, 서지현님 53선지식 회향 축시 낭송, 이대원 단장님 인사말씀, 오성자 직전단장님 축사 순서로 회향법회를 마쳤다.
회향축시를 그대로 옮겨 본다.
나무는 달려 왔다
성기조
나무는 달려 왔다.
멀고 먼 바다
푸른 파도의 숲들을 지나서
스스로 무거워진 겨울 산들을 지나서
매서운 바람과 저녁 벌판을 지나서
나무는 달려 왔다.
광야와 풀밭과
신기루 같은 능선을 지나서
어둡고 시린 날들의 벼랑을 지나서
나무는 달려 왔다
푸르고 질긴 가지로 꿈꾸던
시간의 강가
실낱같은 사랑으로 기대섰던 사람들도 떠나고
발 밑으로 스멀스멀 어둠이 와서
등을 치고 갈 때도
나무는 가지를 내려 대지의 가슴에 입 맞추며
바르게 서는 법을 지켜 왔다.
굽이치는 산들과 춤추며
사랑을 나누며.
이어서 김상수님 집전으로 참석법우 전원 108배 대참회의식에 들어갔다.
나머지 시간을 이용하여 금강경 1회 독송을 했다.
12:30경,
인근 관촉사로 출발했다.
전형적인 가을이다. 햇살이 따갑고 눈부시다.
기사 아저씨는 점심 공양할 수 있는 맛나고, 깨끗한 식당을 찾는다고 관광협회등 많은 곳을 수소문하여 관촉사 부근 돌체식당을 찾았다고 자랑한다.
수고하신 기사님께 격려 박수를 보낸다.
12:50경,
법우들은 돌체식당에서 비빔밥으로 점심공양을 마치고,
식당앞 관촉사에서 관리하고 있는 백련, 홍련 연밭안으로 들어가니 연꽃은 시들어가고, 연밥만 여기저기 보인다.
관촉사는,
충남 논산시 관촉동 반야산(般若山) 기슭에 있는 절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968년(광종 19)에 혜명(慧明)이 창건하였고, 법당은 1386년(우왕 12)에 건립하였으며, 1581년(선조 14) 백지(白只)가 1674년(현종 15)에는 지능(知能)이 중수(重修)하였다. 옛날 중국의 지안(智安)이라는 명승(名僧)이 이 절에 세워진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은진미륵)을 보고 "아아, 마치 촛불을 보는 것같이 미륵이 빛난다" 하면서 예배하였다 하여 관촉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보물 제218호, 고려시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으로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며 높이가 18m에 이르는데, 당시 충청도에서 유행하던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광종 19년(968)에 만든 관음보살상이라 전해지는데, 연대 고찰을 위해 참고할 만하다. 이 보살상은 경기 충청일대에서 특징적으로 조성되었던 토착성이 강한 불상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어 크게 주목된다.
관촉사석등(灌燭寺石燈)-보물 제232호, 고려시대
관촉사 앞뜰의 큰 석불 앞에 놓여있는 4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과 함께 고려 광종 19년(968)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남한에서는 화엄사각황전 앞석등(국보 제12호) 다음으로 거대한 규모를 보여준다.
관촉사석문(灌燭寺石門)-문화재자료 제79호 (논산시)
초창기 절내에 들어서려면 이 석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문으로 일명 '해탈문'이라고도 부른다.
관촉사배례석(灌燭寺拜禮石)-시도유형문화재 제53호 (논산시)
관촉사 석등에서 약 10m 동쪽으로 떨어진 화단안에 있는 것으로,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로 사용된다.
조각이 정교하고 장중한 맛이 풍기며,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우수한 작품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관촉사 은진미륵의 전설
1)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보았더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속으로부터 솟아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바위로 불상을 조성할 것을 결정하고 혜명에게 그 일을 맡겼다.
혜명은 100여 명의 공장과 함께 970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006년(목종 9) 불상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불상이 너무 거대하여 세우지 못하고 걱정하던 어느날, 사제총에서 동자 두 명이 삼등분된 진흙 불상을 만들며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먼저 땅을 평평하게 하여 그 아랫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경사지게 쌓아 그 중간과 윗부분을 세운 다음 모래를 파내었다. 혜명은 돌아와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불상을 세웠다.
그런데 그 동자들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화현하여 가르침을 준 것이라고 한다. 불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는 비를 내려 불상의 몸을 씻어 주었고 서기(瑞氣)가 21일 동안 서렸으며, 미간의 옥호(玉毫)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다.
중국의 승려 지안(智眼)이 그 빛을 좇아와 예배하였는데, 그 광명의 빛이 촛불(촉燭)을 보는(관灌)것과 같이 빛난다고 하여 절이름을 관촉사라 하였다.
2)이 밖에도 이 불상에 얽힌 많은 영험담이 전하고 있다. 중국에 난이 있어 적병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이 불상이 노립승(蘆笠僧:삿갓을 쓴 승려)으로 변하여 옷을 걷고 강을 건너니 모두 그 강이 얕은 줄 알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과반수가 빠져 죽었다.
중국의 장수가 칼로 그 삿갓을 치자 쓰고 있던 개관(蓋冠)이 약간 부서졌다고 하며,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떨어진 부분은 상하지 않아 그대로 두었다가 숙종때 다시 달았다 한다.
또한,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서기가 허공에 서리며, 난이 있게 되면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었다는 등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이상은 류적명님 작성한 53선지식 사찰안내 자료에서 인용한 내용 임 -
법우들은 위 사찰안내 유인물을 들고 하나 하나 확인하고, 설명 듣고, 3배의 예를 올리고, 사진촬영하고, 가을향기에 물든 사찰의 정취에 푹 젖어들 수 있었다.
공식적인 행사를 너무 빨리 마친 관계로 법우들은 인근 다른 문화재등을 볼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달란다......
15:00경 대구로 돌아가는 길목에 위치한 개태사에 도착했다.
개태사는 논산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국도변, 천호산(386m) 기슭에 위치해 있다. 고려 태조19년(936)에 창건된 사찰로 그 내역은 《고려사》와 《여지도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개태사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후백제를 평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약 4년간에 걸쳐 축조했다. 그래서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眞殿)이 있었으며,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곳에서 신탁(神託)을 받는 등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이르러 사운은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즉 고려 말기 잦은 왜구의 침입에 의해 잦은 방화와 약탈을 당하게 되어 조선시대에는 계속 폐사된 채 방치되어 왔는데 1934년에 이르러 오늘날의 사찰이 재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보물제219호)은 경내(境內) 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을 주시하고 있다. 현재는 불상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법당을 조성하여 모셔둔 상태다. 본존불은 높이 4.15m 크기로 복연(伏蓮:아래로 향한 연꽃) 의 방형 기단상에 안치되어 있는데, 중앙부에 만들어진 방형의 불대(佛臺) 후면에 2개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본래는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형태는 크게 돌출된 육계에 둥그런 얼굴을 지니고 있으며, 이마에 백호가 선명하고 이목구비의 형태가 뚜렷하나 얼굴의 규모에 비해 크게 과장된 형상이다. 불상의 규모에 비해 크게 과장된 듯한 양손은 오른손을 들어 가슴에 붙이고, 왼손은 배에 대어 무엇을 잡은 것처럼 만들었는데, 이로 미루어 본존은 아미타불로 추정된다. 좌우의 협시보살은 각각 시무외인, 여원인을 나타내고 있는데, 오른손과 왼손의 위치가 다르게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보살상은 각각 지름 2m 내외의 팔각형 연꽃 대좌에 올려져 있으며, 높이는 3.12m 내외이다. 새로이 만들어진 얼굴은 육계가 크며, 본존불보다 더욱 치졸하다. 머리띠 장식은 귀 뒤로 어깨까지 내려져 있으며, 양팔에는 팔찌를 돌리고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양팔에서 좌·우로 늘어져 있고, 배에서 무릎까지 한줄의 매듭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내용임-
삼존불입상을 모셔둔 법당내에서 이석정님 집전으로 천수경 1회독, 화엄경 약찬게 1회 경건하게 독송했다.
15:40경 개태사에서 대구로 출발했다.
이석정님 집전에 따라 예불문,반야심경,사홍서원 순서로 회향법회를 마치고,.
불교용품5점, 장주일님 보시한 도자기2점을 추첨하여 나누어주고,
옆 사람 어깨, 목, 머리 주물러 주어 피로 풀어주기, 임숙이님 "정말 아름다운 친구랑"제목의 시낭송, 서지현님 "행복한 시간표"제목의 글낭송, 정은환님 무소유의 삶에 대한 글낭송, 전영우님 "가을에 아름다운것들"제목의 시낭송, 한석봉님 육바라밀에 대한 책 읽어 주기,신군자님 유머, 김방자님 가곡, 이춘생님 창, 이영미님 "바람부는 산사"등으로 이어갔다.
특히 돋보인 분은 차량을 운전한 기사님이다.
검은색 양복의 정장차림, 중절모, 검은 선그라스를 낀 검게 탄 듯한 얼굴모습, 균형잡힌 듯한 몸매에 어딘가 모르게 정이 가는 기사 아저씨는 자기 혼자만 반주를 맞추어 낙엽따라 가버린 사람, 우중에 여인을 구성지게 부르면서 하루를 마무리한 그분에게 우리는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18:30경 대구 반월당에 도착했다.
다음달 제2회 1차 53선지식 겸 학교성지순례는 2006.11.12.(둘째 일요일)07:00경 경기 화성 용주사로 떠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2006년10월9일
多禪기록하다
0. 본 순례준비를 위하여 수고하신 기획위원, 집행위원님 수고 했습니다.
0. 보시내역등은 결산보고를 통하여 자세한 내역이 공개될 것입니다.
0. 귀감이 되는 성현의 말씀, 좋은 양식이 되는 글,좋아하는 시등을 준비하여 돌아오는 길에 낭송등으로 회원들에게 즐거움을 주면 좋겠습니다.
0. 2006.10.8. 충남 논산 쌍계사,관촉사 53차 53선지식 및 명찰순례에 참석한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존칭은 생략합니다)
이석정,김상수,정종국,류적명,이대원,장주일,오성자,서지현,성동득,김풍길,
김방자,김숙기,이춘생,정선자,이복희,장춘원,이영미(47야),김갑득,최득영,
신군자,전영우,오동주,임숙이,유정희,정은환,윤석배,이행화,하재옥,박만택,
장옥희,임성조,김애경,이영미(50주),김동훈,추조이,김소순,장순화,서순옥,
송경숙,박경미,정군표,한석봉,나채일,이원주,주정자,유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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