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_힘 #정재승 #카이스트 #융합인재학부
서울대 자기소개서 4번은 항상 책 3권을 고르고 그 선정이유를 쓰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이야기합니다. "괴테, 다윈, 볼테르 이런 인류역사를 바꾼 위인들이 평생 연구하고, 생각한 그 모든 것들이 책 한 권에 들어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지 않니? 알면 보이나니 그때부터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아니하리라"
책으로 시작된 지적호기심과, 또 다른 책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과정이 엘리트의 모든 것이요, 대학이 원하는 학업역량입니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의 글입니다.
사람들은 헤드라인만 읽는다 ㅠㅠ
융합인재학부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어제 동아일보에 실렸다. 그런데 다들 헤드라인만 읽더니, 한마디씩 거든다. ‘성적은 안 받고, 책 100권만 읽고 졸업한다고? 잘 될지 우려스럽다’고. ‘학생들이 지원을 안 했다고?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그렇지 않다. 우리 학과는 세인트존스 칼리지를 넘어서야 한다. 그리고 아직 시작하지 않았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다.
(1) 우리 학부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주제를 스스로 정한다. 예를 들어, Brain-inspired AI, 인공지능을 이용한 신약 개발, 스마트도시, 역노화기술 음악신경생리학 등 그 자체로 매우 융합적인 주제로.
그리고 우리 학교 모든 학과가 개설한 수업들 중에서 내가 정한 전공주제에 맞춰 12과목(36학점)의 수업을 골라 듣게 된다. 타과 전공생과 경쟁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성적은 pass or fail로만 부여받는다.
학부생이라 어떤 수업을 들어야 할지에 대해 각별한 지도가 필요하기 때문에, KAIST 융합 어벤져스 교수들이 1:1 개인지도를 해준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2) 기초수학, 기초과학, 통계학 등도 반드시 들어야 한다. 어느 분야로 가든 다 필요하니까.
(3) ‘사회혁신을 위한 만들기 수업’도 매년 8학점씩 들어서 졸업할 때까지 project based learning 을 통해 24학점, 3개의 발명품을 만들어야 하고, 그 포트폴리오가 학생의 이력서에 포함될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머릿 속에 지식을 입력하는 공부만 할 뿐, 실제로는 아무 것도 만들 줄 모른다. 사회문제해결형 인재를 키우고 싶다.
(4) 여기에 더해 100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수업을 매년 6학점씩 3년, 총 18학점을 들어야 한다. 읽을 책의 70%는 학부가 지정하고 30%는 학생 스스로 정한다.
그 결과물로 ‘2시간 짜리 책에 관한 유튜브 동영상’ 100편이나 두툼한 서평집을 자신의 성취로 얻을 것이다. 책을 스스로 정리하는 형식은 자유롭다.
작년에 ‘융합기초학부’라는 이름으로 우리 학과가 출발했었으나, 그때는 지금과는 완전 딴판의 제도였다. 그저 복수전공과 유사한 형태로 분야별 융합을 생각해 만든 커리큘럼이었다.그러니 ‘차라리 복수전공을 하지’ 라고 생각한 학부생들이 우리 학부로 올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학부 이름에 ‘기초’가 붙으니 전문성이 떨어져 보였고, 대학원진학에 어려움이 있을까봐 학생들이 불안해했다. 그래서 지원자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올해 5월, 이 학부에 학부장으로 오게 됐고,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완전히 커리큘럼을 파격적으로 바꾸거나 새롭게 만들게 됐다.
새로운 시도는 늘 우려의 시선으로 쳐다본다. 복잡계 물리학을 뇌에 적용할 때도 그랬고, 물리학과 졸업생이 의대에 연구원으로 갈 때도 그랬고, 10월의하늘을 시작할 때도 그랬고, 뇌공학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학문을 시작할 때도 그랬고, 미래전략대학원을 이끌 때도, 신경건축학회를 만들고 스마트시티를 마스터플래닝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기에, 내가 간다. 내가 융합인재학부를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다.
‘학부때부터 무슨 융합이야. 대학원에서 융합하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 교수들도 많다. 학과 중심으로 대학원에서 융합하는 인재는 각 학과가 배출하면 된다. 우리 학부는 ‘나는 물리학과 출신이니 이렇게 접근해야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문제의 본질에 들어가기 위해 어떤 접근이든 가능한 유연한 사고의 융합인재’를 키우고 싶다.
융합인재학부의 성공은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지원하느냐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졸업생이 우리 사회에 어떤 존재로서 어떻게 기여하느냐로 결정된다. 그들을 남다른, 대체불가능한 인재로 키우고 싶다. 내가 그런 학자가 되고 싶은 것처럼.
-정재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