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종교와 항일독립운동의 거목을 만나다 , 홍암 나철 기념관 방랑가족 ・ 2018. 8. 21. 1:32
오랜만이다. 보성으로 발걸음을 돌린 것은..한동안 뜸했었다. 진주 문산IC에서 남해고속도로에 진입해서 하동을 지나 섬진강을 건너면 전남 광양에 진입하는 것이고, 그렇게 더 나아가 서순천IC에서 내렸다. 서순천IC에서 시가지를 지나 순천에서 보성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그대로 나아가면 보성 벌교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순천에서부터 보성 관내에 진입해서 까지..아니 진입해서도 한참동안 그 국도 양편엔 자주빛 백일홍이 만발한 가로수가 도열해서 보기 좋았다. 벌교읍내에 도착하니 마침 찾은 날이 또 장날이다. 날이 더워서..그런지 아니면 불경기인 탓인지 제법 크고 볼 것 많은 벌교장날인데도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벌교읍내에서 맛조개 정식으로 식사를 하고, 곧바로..다시 보성읍내 방향으로 가는 국도에 진입해서 약 5km내외를 더가면 내가 찾으려 마음 먹었던 곳에 이른다. 바로 국도변에 인접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보성의 '홍암 나철 기념관'이다. 보성 벌교 금곡마을 홍암 나철 선생의 생가지에 그의 순명(殉名) 100주년을 맞아 2016년 11월 2일 개관했다고 한다. 몇해전에 이곳을 지나면서 홍암 나철 선생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란 것을 알았고, 이 기념관이 공사 중인 것도 봤었다. 언제 완공되면 한번 봐야겠다 생각했는데 이번에 보성 쪽으로 발걸음하기로 마음 먹었을때 여길 볼 생각을 했다. 홍암 나철(弘巖 羅喆,1863~1916)선생. 혹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한번 들어본 이름이 아니던가? 그때 어떻게 배웠던가.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를 창시하였다고 배웠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배웠다.
홍암 나철 기념관에서는 그를 어떻게 소개하는가 하면... 독립운동의 아버지, 국학(國學)의 선구자, 대종교(大倧敎)의 중광자(重光者), 겨레의 큰 스승이라 한다. 왜 그러한가, 그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무엇을 했는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했고.. 그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이곳은 그에 대한 답을 줄 것이다.
우리가 찾은 이날, 이 시각에 다른 이는 없었다. 2년도 안된 새 건물답게 상당히 외관이 깔끔하고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단을 오르면 양편에 큰 기와집 한옥으로 된 기념관 건물이 있고 정면에는 홍암사라는 사당이 있으며, 뒤를 돌아보면 우리가 따라 온 국도가 있고 넓은 들판과 남해고속도로, 보성 벌교의 야산이 탁트인 정경과 함께 한눈에 들어온다. 홍암 나철 기념관은 크게 홍암관, 자료관, 대종교 독립운동관 그리고 사당인 홍암사.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가장 먼저 홍암관(弘巖館)은 홍암 나철 선생의 생애와 활동상을 알 수 있는 곳이다. 마침 기념관에서 기념관의 해설사 선생님 나오셔서 간단한 안내와 함께 설명을 해주셨다. 홍암관에서는 해설사 선생님의 설명과 함께 한바퀴 둘러보았다. 해설사 선생님과 문답이 오가던 중 아들은 따로 이렇게 돌아보고 사진 촬영도 하며 나름 잘 들여다보고 있었다.
홍암 나철 선생은 1863년 전남 벌교 금곡마을에서 부친 나용집, 모친 송씨의 3형제 중 둘째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익혀 29세 되던해 과거를 보아 장원급제를 하여 관료생활을 시작했는데.. 일제를 비롯해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되며 나라가 기울어 가는 현실에 울분을 느끼다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과 친일매국노들이 고종황제를 겁박하여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내정간섭이 본격화되자 징세서장(徵稅署長)의 자리를 던져 사임하였다.
홍암 나철 선생은 동지인 오기호, 이기 등과 유신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에 나섰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의 여려 정계 실력자들을 대상으로 일제의 침략에 대한 항의를 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을사늑약 체결 후 일제에 부역하여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선 친일매국노 처단활동에 나섰다. 참간장(斬奸狀). 나라를 파는 간신을 베어 처단하라는 허가장이면서, 포고문이다. 이 참간장은 을사오적(乙巳五賊)..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을 대상으로 하였고, 실제 이들을 처단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을사오적 처단시도가 드러나며, 그 죄목으로 신안의 지도(智島)로 10년 유형을 받아 유배되었으나 수개월 후 사면되었다.
1910년 8월 29일, 여러 의사와 열사의 구국운동에도 보람없이 경술국치를 당하여 국권을 잃었다.
홍암 나철 선생은 민족중흥과 새로운 국권회복운동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왜 우리 겨레가 이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가 생각했고, 그분이 얻은 결론은 사대모화사상과 그런 의식에 오래도록 찌들어 있었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큰 나라, 강한 나라에 기대어 자신의 안위와 영달만 추구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중국에 기대어 사대모화 하던 자들이 나중엔 시류에 따라 영국과 미국에 사대하고 러시아에 사대하고 또 일본에 사대하며 그들의 위세를 등에 업고, 오히려 제 나라를 핍박하며 나라를 팔아도 그 잘못을 알지 못하고 교활하게 기회주의적 처신을 하고 정당화하는 인간이 많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이렇게 민족과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되찾으려면 오염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고, 그 시작을...한민족의 근원에서, 우리의 역사와 사상적 시초인 단군과 단군사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그는 본 것이다.
1909년 1월 15일, 서울 재동에서 천제를 올리고 한얼교, 천신교 등 이름으로 불리며 전해온 단군신앙을 모아 체계화하여 도사교(都司敎)에 추대되어 대종교란 새로운 이름으로 통합하여 단군신앙을 새로 열었다. 이러한 사유로 홍암 나철 선생이 대종교를 연 것을 창시가 아니라,중광(重光)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홍암 나철 선생은 성지순례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시원인 백두산 아래..현재 중국땅인 화룡현 청파호에 이르렀고, 이곳을 총본산으로 삼았다. 대종교(大倧敎)는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과 역사교육, 독립투사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특히 무장독립운동 계열의 독립투사 들 상당수가 대종교를 신봉했다.
대종교는 일왕과 그 조상을 신봉하는 일본의 신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우리를 영구 점령하고 식민지화 하려는 정책과 대종교는 양립할 수 없고, 가장 적극적으로 대항해 싸웠으며 우리 독립운동가의 요람이자 사상적 기반이었기에 당연히 일제에게는 눈엣 가시같은 존재였고 그래서 늘 일제의 감시와 탄압대상이었다. 이로 인해 대종교 자체가 존립의 위기에 몰릴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1916년 단군성지를 순례하고,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참배 후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여 일가와 민족에게 유서와 예언시를 남기고 순교 즉 순명(殉名)의 길을 선택하여 그 길을 갔으니 음력 8월 15일의 일이었다. 이후 그의 유지(遺志)는 제2대 도사교 김교헌, 백포 서일 장군 등이 계승하였다.
전해지기를 홍암 나철 선생의 순명은..선도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 스스로 숨을 멈추고 혼을 띄워 행해진 것이라 했다. 그는 도를 이루어 앞날을 보고 예언시를 남겼는데..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鳥鷄七七 日落東天 (조계칠칠 일락동천) 을유년은 닭의 해이므로 조계(鳥鷄), 칠칠은 음력 7월7일, 8월 15일을 말한다. 즉 1945년 8월 15일, 해가 동쪽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것으로 일제의 패망을 예견했다.
黑狼紅猿 分邦南北 (흑랑홍원 분방남북) 흑(黑)은 북방색이고 홍(紅)은 남방색으로 북쪽의 검은 이리는 소련, 남쪽의 붉은 원숭이는 미국을 상징하며, 이들이 남북으로 땅을 가른다. 이는 우리나라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됨을 예견한 것이다.
狼道猿敎 滅土破國 (낭도원교 멸토파국) 북쪽 소련의 도와 남쪽 미국의 교가 땅과 나라를 망친다. 북쪽 공산주의와 남쪽 자본주의의 대립을 예언한 것이다.
赤靑兩陽 焚蕩世界 (적청양양 분탕세계) 붉은 태양과 푸른태양이 세계를 불태운다. 즉, 미국과 소련 중심으로 동서냉전이 격화되며 세계를 어지럽힌다는 것을 예언하면서 경고한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극한대립을 말한 것 같다.
天山白陽 旭日昇天 (천산백양 욱일승천) 천산의 밝은 해가 하늘 위로 떠오르니 여기서 천산은 백두산, 백양은 우리의 밝은 도를 말하는 것이며
食飮赤靑 弘益理化 (식음적청 홍익이화) 식음적청은 우리의 밝은 도, 우리의 광명사상이 이런 극한대립을 삼키고 하나로 통합해 냄을 말하며 홍익이화는 그럼으로써 인류에게 복된 이상세계를 이룬다고 예언하였다.
자료관. 홍암 나철 선생의 서찰, 유서, 단군에게 바치는 글.. 기타 독립운동 관련 인물과 서적자료가 전시되고 있으며, 영상자료로도 볼 수 있다.
홍암 나철 기념관의 가장 높은 곳에는..홍암사란 사당이 있다. 사당으로 통하는 삼문의 이름은 개천문(開天門). 단군신앙을 정립하고 중광한 홍암 나철 선생을 모신 사당에 걸맞는 이름이다. 홍암사 안에는 홍암 나철 선생과 그의 두 아들인 나정련, 나정문 선생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으며..이들도 대종교 포교와 독립운동에 매진한 독립투사였다.
나철 홍암 기념관에서의 마지막 장소는 대종교 독립운동관이다. 대종교 주요인물과 보성지역 독립유공자들 자료를 영상으로 볼 수 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이끌었고 일본에 대한 외교적 저항활동을 했으며 무장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중광단(重光團)을 시작으로 대한정의단, 대한군정회와 대한군정부를 거쳐 북로군정서까지 이르는 무장독립운동의 큰 흐름을 이룬 대종교. 이들 무장독립단체에 참여한 이들의 대부분은 대종교도들이었고, 1920년 청산리대첩에서도 크게 활약했다. 길림성 화룡시 대종교 3종사의 묘역. 백포 서일 장군은 북로군정서 총재이면서 청산리대첩을 이끈 대표적인 항일투쟁의 명장이었다. 물론 대종교의 주역이기도 했다. 1930년대 발해농장.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이다. 여기서는 익숙한 백산 안희제 선생의 이름이 나온다. 1942년 일제가 조작한 소위 임오교변이란 사건으로 대종교에 대한 대대적인 일제의 탄압이 가해지고 주요 대종교 인사들이 희생되는 큰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대종교는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1945년 광복을 맞았다. 그리고 1946년 대종교 총본사는 환국하였다. 기념사진 앞줄 중앙에 3대 교주 윤세복 선생이고, 그의 좌측에 있는 분은 성재 이시영 선생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우, 그 6형제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맞선 인물이었다.
기념관을 모두 둘러보고..아들은 태극기 바람개비를 얻었다. 3.1절이 있는 3월, 광복절과 경술국치일이 있는 8월, 그리고 개천절이 있는 10월이면 여기 보성의 홍암 나철 기념관을 찾기 좋을 것 같다.
종교인으로 보고 종교적 관점에서 그를 어떤 편견의 눈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홍암 나철 선생은 대종교 대종사..그런 종교인 이전에 나라를 위하고 민족을 위했던 선열이고,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그 시대의 큰 어른이었던 분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그리고 그가 뿌린 씨앗들 그 자체가 항일 독립운동 역사의 증거다. |
첫댓글 대종교의 독립정신은 겨레의 횃불이 될 것입니다.
2019년, 황금 복돼지의 새해 소망하시는 일 이루시고 부자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