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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숙의 수필세계
- 모정의 바다에 생명 한 줄기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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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숙의 수필은 바다다. ‘바다는 온갖 난관을 해결해준다. 바다는 거부하는 것이 없이 다 받아주는 포용의 그릇이다. 그 자체로서는 별로 문제를 제시하지 않는다. 바다는 우리를 많이 닳았다고나 할까. 바다는 맥박을 갖지 못한 대지처럼 잔인한 심장을 갖지 않았다. 또한 바다는 항상 범람할 수 있는 유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얌전한 그것이 가져올 우발성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서 바다가 우리의 친구가 되고 동료가 되어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해 주길 기다리면 된다.’ H. 미쇼의 <여행일기> ‘바다’ 관련 어록을 읽으면서 지향숙론의 물꼬를 튼다. 지향숙 수필에 있어서 생명성이 매력적 요소라면, 모성성은 절대적 요소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할 때, 지향숙의 수필을 읽으면 가을날 섬과 섬 사이의 이름을 외며 이 바다 한가운데로 헤쳐나가는 것처럼 황홀한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결코 넘치는 일이 없듯이 지향숙 수필도 역시 읽는 사람을 압도하면서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지향숙은 방송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십여 년 전 문학신문사 선정 우수잡지인 <에세이문예>로 등단하여, 모지 출신 작가들의 모임체인 한국본격문학가협회 등에서 활동하며, 좋은 수필을 발표하고 있어 미래 수필가로 주목받고 있다.
지향숙은 1) 무지개의 빛으로 피어나는 봄의 작가다. 2) 생명체의 키워내는 모정의 숨결이 느껴지는 어머니의 손길을 가진 작가다. 3) 삶의 아름다움을 찾아 길을 나서는 사람이다. 4) 앎을 통해서 세상의 밝은 빛을 향해 나아가는 작가다. 그녀는 이런 네 가지 지향성을 갖고 있다. 작품의 특성은 수필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지향숙의 수필은 한마디로 그리움이 있고, 인정이 있고, 구원이 있는 체험 공간에서 출발한다.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의 내면에 머문다. 주로 자신의 심중에서 여울치는 물결의 무늬를 그려내는 일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문학적 그림자 형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봄’이다. 이 봄의 기다림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문학적 향기를 발한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관점에서 지향숙의 <심장에 봄을 달고>는 이런 준거를 충족시키고 있는 글들이라고 하겠다. 그녀의 글은 자신이 살아가면서 남긴 흔적과 체온이며, 그것이 정서화되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리얼하게 펼쳐진 삶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인간적인 감동을 주며,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을 여운을 남긴다. 삶의 문제를 마주한 자아 성찰적 작가가 시간의 길에서 아름답고 영롱한 진실 그것을 어떻게 깨닫고, 뜨거운 인생의 열기를 부둥켜안고 수필의 화초를 어떻게 가꾸어나가는지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살펴보자.
1. 봄과의 사랑에서 소생한 기다림의 꽃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하겠지만 문학가가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좋은 글을 쓰고자 하는 소망이 아니겠는가. 지향숙은 국어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국어 선생님은 되지 못했지만 작가의 꿈을 이루었다. 이제는 수필집을 들고 중학교때 담임 선생님이었던 국어 선생님을 찾아가고픈 생각을 숨기지 않는다. 작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문학관’이다. 수필가도 문학인이기 때문에 뚜렷한 자신의 문학관을 가져야 한다. 수필이 생활인의 애환만을 크게 받아들인다면, 작품세계를 스스로 좁히게 된다. 그녀는 ‘수필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체험하고 체험을 통해서 수채화로 그려내기도 하고 철학적 사유로 그려내는 체험의 최고 결정체’라고 적고 있다. 지향숙 수필이 이처럼 수준 높은 문학적 향취를 띠는 것은 앎의 힘이 곧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라는 작가의 인식 때문이다. 공부하는 작가에 대한 확고한 자세가 오늘의 지향숙 수필가를 낳았다고 하겠다.
작가는 글로 말하고 인간성으로 평가받는다. 작가에게 문학관과 작가정신이 없으면, 일반 작가는 될 수 있을런지는 모르지만 훌륭한 작가는 될 수가 없다. 유대인의 정신문화 원천으로 일컬어지는 탈무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나온다. 그것은 즉 ‘만일 사람들이 모두 한 가지 방향으로만 향하고 있다면 세계는 어느새 기울어지고 말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지향숙 수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리움보다 기다림에 방점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지향숙은 <봄바람 난 아줌마>에서 ‘사람과의 사랑에는 속된 언어가 남발되면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꽃과의 사랑은 만발한 꽃들과 함께 탱고 춤만 추면 된다.’고 적고 있다. 포근하고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찬 의식의 산실이었던 봄과의 사랑 속에서 그녀는 사람과 화초의 사랑을 대비하면서 그리움보다 기다림의 미학을 촉촉한 모습으로 구체화한다. 자연의 법칙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그리움을 슬픈 그림자로, 기다림을 가슴 떨리는 시간으로 의미화한다. 봄바람 난 아줌마의 거침없는 질주를 지켜보는 것도 감상의 포인트라 하겠다.
꽃이 눈꽃이 되어 앙증맞은 춤을 추면서 허공에서 대지를 향해 떨어진다. 낙하의 이별이 아프지 않다. 내년이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자연의 법칙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별을 꿈꾸면서 시작하는 사랑은 없다. 사람과의 사랑은 뜨거운 열병이었고 숨 막히는 질주일 때도 있었다. 나와 너라는 분리가 우리가 될 때도 있었지만 이별은 영원한 결별이 되기도 했다. 꽃은 아이의 천사 같은 눈빛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 다시 살아나게 해 준다. 아이가 엄마 품을 떠나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도 모정의 사랑은 영원하다. 꽃이 대지를 향해 떨어져도 사랑했던 마음은 잠시 휴식할 뿐 기다림에 익숙해져 간다.
<봄바람 난 아줌마>에서 -
그녀는 늘 글을 쓰면서도 좋은 글을 생각하는 대단한 작가다. 고독한 세월의 그늘에서 작가는 문학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면서 그것을 전이의 미학으로 나타내고자 한다. 지향숙의 작가의식이 지향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중층위를 활용해서 문학적 성취를 이루겠다는 강한 욕망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하겠다. 모든 작가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소망이기도 하지만 유독 그녀에게는 강하다. 그러기에 그녀는 창작과정에서도 늘 변용의 기법을 생각한다. 문학성이란 우회적 표현을 통해서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고, 표현 자체의 가치와 효과를 드러낼 수 있는 법이다. 그녀의 상당수 작품들은 이런 의도 하에서 창작되고 있다. 그녀는 주제의 간접적 제시를 수필시학으로 인식한다. 수필을 씀에 있어서, 지향숙은 수필이 실존적 불안을 표현하든, 소시민적 생활의 애환을 그리든, 병든 사회에의 저항과 분노를 나타내든 간에, ‘문학성’ 속에 그 대상을 용해하고 싶어 한다. ‘봄바람 난 아줌마’라는 제목도 사실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그런 일상적 의미의 봄바람이 아니다. 봄에 피어나는 꽃과 대지에 대한 믿음이며 가슴으로 느끼는 사랑이다.
문학성이란 말이 상당히 막연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주제와 구성 그리고 표현의 공감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꽃이 눈꽃이 되어 앙증맞은 춤을 추면서 허공에서 대지를 향해 떨어진다. 그래도 낙하의 이별이 아프지 않다. 내년이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자연의 법칙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은 그녀의 수필가적 자세를 보여주는 멘트로 공감을 자아낸다. 어떻든 수필은 공감의 문학이기 때문에 맛과 멋을 반드시 지녀야 한다. 그 멋은 비유에서 나오지 않는가. 또한 작품과 작가는 일치해야 한다. 수필적 삶의 진실이 그대로 자신의 수필 속에 투영될 때, 향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꽃’과 ‘나무’와 이별하는 순간, 다시 ‘대지’와 사랑에 빠지지만, 꽃은 자신을 버린 나무를 원망하지 않는다. 둘 사이에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자연의 법칙’으로 건재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지향숙에게 있어서 삶의 진실과 수필의 진실이 같음을 증명한다. 일상을 조탁하는 정서의 힘이 멋을 한껏 우려낸 결과라 하겠다. 수필 <봄바람 난 아줌마>에는 사람과 사람과의 사랑이 주는 장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너와 나의 분리가 우리가 되기도 하는 장점이 있지만, 영원한 이별이라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는 점을 들어 그 아픔을 다시 확인한다.
어린 시절에는 서점이었다면 지금은 책방을 갖고 싶다. 나이가 많아서 책방은 포기해야겠다는 나에게 딸이 희망의 메시지를 남겨 주었다. ‘할매 책방’이라는 간판을 걸고 시작하면 된다는 신선한 답변에 책방은 가슴에서 결이 고운 수채화로 남겨져 있다. 딸은 나의 인생에 정답만 이야기했다. 가장 힘들 때도 나를 살려준 건 딸이 전해 준 인생의 정답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건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의 확실한 정답이다. ‘할매 책방’이 꿈꾸는 세상은 사람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을 사랑하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 <할매 책방>에서 -
존재의 사유를 하는 사람과 되기의 사유를 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자신이 수필가이기 때문에 수필을 쓰는 사람과 수필을 씀으로써 수필가가 되는 사람은 다르다. 들뢰즈의 이론에 따르면, 지향숙은 수필가이기 때문에 수필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필을 씀으로써 수필가가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제도적 기호체계를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응하는 수필가는 본격수필가의 세계관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수필이 문학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수필이 예술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향숙은 생산자로서의 작가가 되기를 기대한다. 중요한 것은 지향숙의 ‘수필가-되기’는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으로 연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되기의 정신은 ‘사람과의 소통에서 고립되지 않는 공간을 꿈꾼다.’에서도 읽어낼 수 있듯이, 그녀가 ‘할매 책방’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데서 우리는 지향숙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으리라는 걸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할매 책방>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변은 그녀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시간을 말해주고, 또 그때 자신을 살려준 것은 딸이었다는 고백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하는 것 같다. ‘가장 힘들 때도 나를 살려준 건 딸이 전해준 인생의 정답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건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의 확실한 정답이다.’는 진술은 다시 자신이 책방을 꿈꾸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할매 책방’이 꿈꾸는 세상은 사람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을 사랑하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수필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은 수필가의 마음 풍경을 읽는 데 있다.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는 거와 같다. 수필 <할매 책방>은 ‘사람의 마음을 사랑하는 공간’에 방점이 찍혀 있다. ‘할매’라는 말에서 그녀가 느끼는 건 나이가 아니라 ‘영혼의 쉼터’다. 책방의 한 모퉁이에 여행자의 피곤한 다리가 휴식할 수 있는 푹신한 의자 하나, 하루 동안 굶고 걸었을지도 모르는 여행자의 배고픔을 위하여 토스트와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서 무료로 제공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그녀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다.
불꽃이 사라진 틈 사이로 불빛이 자리 잡았다. 불꽃은 나를 태우고 너도 태웠다면 불빛은 주위를 환하게 비추는 생명의 빛으로 다가왔다. 은은하게 비추는 불빛은 고요한 마음의 빛깔이다. 회오리바람은 멈추고 따뜻한 봄날의 햇살이 마음을 밝힌다. 꽃이 보이고 하늘이 보이고 새소리가 들리고 계곡의 물소리도 들리고 길가에 핀 한 송이의 꽃에 발걸음을 멈추기도 한다. 세상은 맑고 고요하게 흘러가고 마음은 파문이 일어나지 않는다. 젊은 날에는 보이지 않던 세상의 빛깔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린다. 유유히 흘러가는 뗏목에 누워 흐름의 순리에 순응하며 낮잠을 즐기기도 한다. 일상의 평온함에 나른함이 몰려오기도 한다. 50대는 무언의 반란도 사라지고 이유 없는 아픔과 힘듦도 사라졌다.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감에서 갈등하는 마음의 파편도 주워 담아 공기 속으로 날려 보낼 수 있다. 살기 위해 아등바등 거리던 종종걸음을 반납하고 느긋하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세상사를 둘러 볼 수 있다. 솜털처럼 가벼운 여유에 미소짓기도 한다.
- <마음이 걸어온 길> -
작가는 이 수필에서도 좋은 수필 쓰기에 대한 소망과 자신의 삶을 하나의 끈으로 묶는다. ‘불꽃’과 ‘불빛’의 대비로 시작되는 문장의 의미가 변용의 시학에 익숙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녀는 어떻게 문학성이 생성되는지 알고 있는 작가다. 자기 자신의 의식변화를 통해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작가가 아름답지 않는가. ‘불꽃은 나를 태우고 너도 태웠다면 불빛은 주위를 환하게 비추는 생명의 빛으로 다가왔다.’는 대목에서 이중층위는 입자에서 파동으로 이중성의 의미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불꽃’과 ‘불빛’의 의미가 주는 멋의 음미를 통해 우리는 그녀가 드러내고자 하는 삶의 아픔과 위안을 짐작할 수 있다. 작가는 어휘 하나하나에 인간사를 투영하고, 자신의 삶까지도 포갠다. 이런 대조와 비유는 이미지를 통해 작가의 의도와 의미를 감각화한다.
수필가가 된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작가이기에 마음이 거쳐온 공간의 비교를 통해 평화의 근원을 발견한다. 그리고 치열하게 살았던 젊은 날의 고통을 통해 성장하는 자신의 내면을 투영한다.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세상사를 둘러볼 수 있는 그녀는 솜털처럼 가벼운 여유에 미소짓기도 한다.’ 불꽃 하나가 심장에 떨어져 온몸이 잿더미가 되었던 시간도 겪었던 그녀가 발악으로 살았던 시간들을 전쟁터로 의미화하면서 마음으로 걸어온 길을 자기 응시로 표백하면서 수필가적 삶은 향취를 풍긴다고 하겠다. 작가가 흔들림 없이 지켜왔던 자신의 삶에 불꽃을 반납하고 불빛을 받아들이면서 고요한 마음의 빛깔을 찾았다는 그녀는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연다. ‘불빛이 스며든 지금의 고요함은 마음이 도착한 고향이다’는 의미화가 깊은 울림을 주면서 신선감을 제시한다.
2. 열정으로 채워진 길에서 만난 다양한 이야기
지향숙은 일정한 패턴의 지루함이 고개를 들 때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는 유랑의 세계를 가진 작가다. 이런 노마드 유목민적 특성은 지향숙 수필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다. 낯선 곳을 향한 발걸음은 자유로워지고픈 욕망으로 권태의 반란이다. 그녀의 말대로 정지된 시간을 움직이게 하는 탈출구다. 그 애타는 탈출의 귀착지는 낯선 곳이다. ‘예고없이 찾아오는 신기한 방문객’이라고 한 ‘떠남’은 그녀에게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낯선 곳에서 익숙함에 저항하는 것’이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아내는 것’이요, ‘낯선 곳에서 보헤미안의 가슴을 느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그녀가 지향하는 것은 절절한 탈주의 선이다. 지루함에 대한 저항은 그녀만의 과제가 아니라 모든 여성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수필들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함에 있어서 익숙함에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2부에 실린 전 작품이 입증한다. <권태는 신선한 바람을 꿈꾼다>에는 떠남을 통해서 권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작가의 철학이 묻어 난다. 삶이라는 긴 여정에서 만나는 권태는 떠남을 통해서 박하 향기처럼 상쾌하고 레몬 향기처럼 상큼함을 얻게 한다는 것이 지향숙 작가의 지론이다. 지향숙의 수필에서 가장 빛나는 메시지는 삶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에게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풍겨난다고 하는 것이다. ‘삶은 반복된 일상의 장엄한 파노라마다.’라는 멋진 문장으로 발단부를 여는 <권태는 신선한 바람을 꿈꾼다>를 비롯한 ‘떠남’과 관련이 있는 수필들은 한결같이 권태의 반란이 주는 유쾌함을 다루고 있어 긴장감을 주면서 기대감도 충족시킨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은 몇 시간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른다. 시계의 바늘처럼 똑같은 패턴으로 굳어져 가는 일상이 가슴을 딱딱한 고체로 만들어 갈 때도 있다. 마른 장작이 순식간에 불꽃에 의해 재가 되듯이 건조한 가슴으로 살아갈 때도 있다. 행복이라는 세계를 향해 주문을 외워 주술을 걸기도 한다. 행복에 대한 숱한 정의가 마음을 이해시키려 할 때도 있다. 머리는 이해한다고 인정한다. 가슴은 욕심에 갇혀 지쳐가는 날도 있다. 인생이라는 길은 낭만적인 로맨스만 펼쳐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머리로만 인정하는 세상살이는 산책로를 걸을 때 하나씩 내려놓고 돌아온다. 머리와 가슴의 조화로운 화합을 산책로에서 배웠다. 세상을 살면서 마음의 친구는 따뜻한 인생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동행자이다.
- <마음의 산책로>에서 -
살아가면서 힘이 되는 건 그녀에게 산책로다. 삶은 인간의 잡다한 감정들과 마주하면서 마음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풀기가 힘들 때도 있다. 힘들 때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읽고 쓰다듬어주는 산책로가 있어 작가는 일상을 새털처럼 가볍게 느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대견스러운 나무, 둑길도 전부 엄숙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대견한 것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삶을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산책길은 인생이라는 무거운 숙제를 푸는 곳이다. 어떻게든 따뜻한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눈물겹게 읽힌다. 일상사의 사소함에서 출발된 인간사가 노정된 이 글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임을 잘 보여준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끈끈한 공존의 힘이다. 이 수필은 이런 작은 가치들을 조합해서 잘 정리해 놓았다. 이 글이 주는 힘은 우리가 느끼는 인생은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는 머리로 이해하는 세상살이고, 다른 하나는 가슴으로 느끼는 세상살이다. 작가가 중요시하는 건 머리와 가슴의 조화로운 공존이다. 그래서 그녀는 산책로를 걸어면서 머리로만 인정하는 세상살이는 산책로를 걸으면서 하나씩 내려놓고 돌아온다. ‘머리와 가슴의 조화로운 화합을 산책로에서 배웠다. 세상을 살면서 마음의 친구는 따뜻한 인생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동행자이다.’라는 멘트가 살짝 가슴을 찌르면서, 여운의 맛을 준다. 얼마나 살아가면서 사람에 치이고, 사람으로 인해 힘들어했기에, ‘마음의 친구’를 수없이 내세우고 있을까. 이런 산책길에서의 깨달음이 행복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립해 보게 한다.
장례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동안 어머니를 향한 마음은 죄송함이었다. 어머니는 맏며느리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나를 샘에 가득한 햇살로 품어주었다. 명절에도 어머니는 새벽에 일을 나가셨다. 멀리서 온 며느리를 위해서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아침 제사상을 준비해 놓고 나가셨다. 어머니의 움직임을 이불 속에서만 듣고 있었던 며느리였다. 먼 훗날 명절날 왜 깨우지 않으셨냐고 물었다. 멀리서 온다고 피곤할 것인데 깨울 수가 없었다고 하셨던 어머니. 눈시울이 젖었다. 어머니는 며느리를 향해 자신의 권리보다는 이해와 수용 사랑이 우선이었다. 이타적인 사랑의 모습이란 눈시울을 붉게 하는 눈물방울이었다. 사람의 도리를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나도 어머니의 삶을 나의 삶에서 이루어 냈을지도 모른다. 후회는 현실을 살아내는 가치가 되고 미래를 향해 길을 열어 놓아야겠다.
-<죽어야 끝난다>에서 -
이 수필의 읽는 묘미는 시어머니에 대한 추모를 통해 작가가 어머니의 영혼을 달랠 해법을 찾아가는 곳으로 따라가는 데 있다. 시어머니가 돌아갔다는 부고를 받는 것으로 시작되는 수필이다. 자신에게는 남편이고, 시어머니에게는 아들이 되는 자식을 보낸 시어머니의 아픈 심정을 그녀는 ‘밤이 가시가 되어 식도를 찌르고, 위를 찔렀을 것이다.’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견뎌낸다는 것은 지독한 감정과의 전쟁’이라는 진술은 지향숙 작가의 문학가적 역량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며느리라는 것을 모르고 자신을 며느리로 인정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녀는 장례식을 끝내고 돌아오는 동안 어머니에 대한 죄송함뿐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어머니는 며느리를 향해 자신의 권리보다는 이해와 관용 사랑이 우선이었다는 시어머니에 대한 사후 평가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책망하는 뒤늦은 후회가 가득차 있다. 사려깊은 시어니님 살아 생전에는 고마웠다고 말도 제대로 못했는데, 그런 어머니를 그리워할 때는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없다. 눈물보다 끈적한 사모의 향기와 그리움의 미학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사모의 미학을 주제로 하는 수필은 질곡의 현대사를 겪은 세대 수필에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어머니에 대한 작가의 후회는 문맥의 곳곳에 묻어난다. 자식의 존재는 어머니의 존재이유다.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모성성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에서 어머니라는 위치가 이 수필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가정의 임무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사회적 통념을 의미한다. 작가는 어머니에 대한 회고를 통해서 시어머니의 인품을 드높이고자 한다. ‘사람의 도리를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나도 어머니의 삶을 나의 삶에서 이루어 냈을지도 모른다.’는 표현에는 지향숙의 시어머니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녹아 있다. 시어머니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자식을 먼저 가슴에 묻고 절망했을 시간들 속에서 겪어야했던 모진 아픔의 깊이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그녀는 시어머니가 한 말, ‘죽어야 끝난다’는 표현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어머니는 끝났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마지막 멘트로 자신도 아직 아픔을 안고 살고 있다는 말도 놓치지 않는다.
여행은 쉼표에서 도돌이표가 되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한다. 낯선 곳에서 낯선 자아와의 만남은 마음의 정원에 비를 내리게 하고 햇볕을 비추게 하여 따사로운 생명력을 키우게 한다. 남해의 바다에서 담아온 생명력은 원죄의 고통을 알지 못했던 아담과 이브의 알몸이었다. 익숙함을 버리고 낯선 곳을 향해 간다는 것은 신선한 도전이다. 묵은 질서가 무너지고 무질서한 세계에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질서는 세속의 욕심을 내려놓게 한다. 세상은 느끼는 사람의 몫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걸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세상을 향해 걸어갈 때 세상은 오롯이 우리의 삶이 되어 다가온다. 남해와의 만남에서 신선한 생명력을 담고 돌아왔다.
- <남해와의 만남>에서-
도보로 남해 일주를 하겠다는 목표로 섬으로 떠난 작가의 섬 사랑도 눈길을 끈다. 지향숙 작가의 수필에는 유독 만남이 많다. 만남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그녀에게 가장 의미있고 소중한 만남은 낯선 감정과 마주하는 낯선 곳과의 만들어내는 특별한 느낌일 것이다. 특히 부부와 사랑의 연으로 이어진 관계 속의 그 아릿한 만남은 무엇에 비교할 수 없겠지만 지 작가의 글에서 그런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지향숙 수필은 주로 자신이 살아오는 과정에서 자유로운 영혼에 날개를 달게 되면서 쏟아내는 자신만의 현실 타개책이 형상화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홀로 걸어가는 길 위에서 만났던 것은 바다가 품고 있는 생명의 원초적인 빛깔이었다. <남해와의 만남>이 그녀에게 준 감동은 비유의 언어로 잘 표현, 남해를 향한 사랑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여 감동이라는 고지로까지 잘 끌어올리고 있다. ‘아담과 이브가 살던 동산을 남해에서 만났다.’는 진술에서 그녀에게 남해가 어떻게 다가왔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주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낯선 곳에서 낯선 자아와의 만남은 마음의 정원에 비를 내리게 하고 햇볕을 비추게 하여 따사로운 생명력을 키우게 한다.’라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녀는 언어의 연금술사 같은 표현력으로 자신이 받은 사물에 대한 반응을 시적 언어로 잘 그려내고 있다. 남해의 풍경을 ‘모나리자의 미소’ 같다고 하거나, 그 신비로운 미소는 황진이 같다고 표현함으로써 남해에 대한 사랑을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수필미학’의 진수가 빛난다 하겠다. 그녀는 함부로 수필을 쓰지 않는 것 같다. 남해 풍경에 대한 감각적 묘사 뒤에 그녀는 동해와 남해를 비교하여, 동해의 바다가 남성적인 야성의 근육질이라면, 남해 바다는 여인의 가냘픈 몸매에서 만들어진 곡선의 유연함이라 말하고 있다. 이렇게 멋진 비유로 남해가 주는 느낌을 표현하는데 누가 뭐라 하랴. 이처럼 작가는 남해를 여행하면서 얻은 바다의 생명력으로부터 빛나는 삶의 교훈을 얻었다. 여행을 통해 운명적으로 엮어가려는 순수한 만남의 정신적 가치는 ‘신선한 생명역을 담고 돌아왔다’는 데서 높이 평가된다고 하겠다.
3. 영롱한 빛살들로 가득 찬 그리움의 세계
지향숙은 저층에 서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서를 깔고 있는 작가다. 영롱한 빛살들로 가득 찬 그리움의 세계를 가진 여류 수필가다. 지향숙 문학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근원에 대한 본능적 편향성, 휴머니즘이다. 그 그리움의 귀착지는 친구와의 추억이다. 작품 하나하나에 인연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없는 게 없다. 한마디로 절절한 인간애다. 이는 유독 시련이 많았던 그녀만의 독특한 정서라고 본다. 대부분 그녀의 수필들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 지극한 정성, 인간애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친구야 만나서 밥먹자> 가 입증한다. 겉에서 보면 친구간의 소통이 화소가 된 것 같은 인상이 강한 작품이나 주제의식은 인간애에 있다. 사람들은 물질적 변혁만 이루면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허물을 벗고 한 순간에 환한 모습의 꽃으로 피어날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고,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향숙의 수필적 정서는 한 인간으로서 역할을 다 하는 도리와 후회와 반성 그리고 깨우침에서 비롯된 인간적 향기라 하겠다.
나의 잠은 친구가 깨어나게 해주었고 육체를 살리는 음식을 먹게 해주었다. 나는 살아났고 친구는 어느 날 나를 배신하고 떠나버렸다. 너는 나를 살려 주었는데 나는 너를 살려내지 못했다. 친구가 수렁 속에서 잠에 빠져 버렸다. 나는 잠에서 깨어났는데 친구는 영원히 잠들어 버렸다. 어느 날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야 보고 싶다. 만나서 밥 먹자”. 나는 무엇이 바빴을까. “오늘은 바쁘니 다음에 만나자” 며칠 후에 친구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친구야 보고 싶다. 만나서 밥 먹자”. “미안, 오늘도 일이 바빠서 다음에 만나자”. 친구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며칠 후에 친구의 딸이 울면서 연락이 왔다. “이모,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 <친구야 만나서 밥먹자>에서 -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다. 그 반성의 기회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엄숙하게 잘못된 것에 대해 그것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러하지 않으리라는 마음씀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해 순간적으로 잘못 판단할 수가 있는 나약한 존재다. ‘친구는 항아리에서 발효된 세월의 효소이다. 발효의 시간은 산소공급도 되지 않는 항아리 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효소를 만들어낸다. 친구는 오랜 시간을 항아리에서 숙성된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비밀의 화원을 함께 가꾸어 나간다. 사랑이 동반자로 이어진다면 친구는 우리의 삶과 함께 걸어가는 동행자이다.’라는 대목은 이 수필의 발단부 내용이다. 그녀는 기존의 언어 질서를 무느뜨림으로써 새로운 감각과 상상력으로 승부를 걸어보고자 하는 것으로 읽힌다. 이 대목은 그녀를 보통 작가 이상으로 부각시킨다. 삶을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은 동반자와 동행자의 관계 전환 등을 통해 우리 시대 인간상을 다시 반추하게 한다. 생생한 회화체가 자신의 후회를 담고 있어서 큰 공감을 준다.
“친구야 보고 싶다. 만나서 밥 먹자”는 친구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했는데, 친구의 딸로부터 받은 부고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친구의 딸이 작가를 이모라고 불렀다면, 우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인연의 결속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일상사의 사소함에서 돌출되는 불행이 수필적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유대는 인간적 삶의 소중한 관계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관계를 유지시켜낼 수 있는 이 끈끈한 인연의 연대라는 것을 이 수필은 말해준다. 순수하고 향기나는 인간적 연대보다 더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친구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며칠 후에 친구의 딸이 울면서 연락이 왔다. “이모, 엄마가 돌아가셨어요.”라는 멘트가 가슴을 아프게 찌른다. 이런 진솔한 장면이 그대로 노출되어서 인생을 관계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관계를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게 아닐까.
눈물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아픔으로 흘러내리는 눈물보다 더 가슴 아픈 건 짠하게 다가오는 감정의 복잡함이 한계를 벗어날 때이다. 짠하다는 것은 연민이다. 눈물을 삼키고 감정의 복잡함을 꾹꾹 눌러야 할 때 연민의 정은 더 아프다. 아픈 마음에도 고체처럼 단단하게 굳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아픈 꽃잎의 마음에도 비바람과 추위를 견디며 봄을 맞이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꽃이 추운 겨울이 지나고 천지를 아름답게 물들이듯이 아픈 꽃잎의 마음도 우주의 원리 속에서 피어나기를 기도한다. 겨울 속에서도 만물은 움트기 위해 대지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사람들도 웃으면서 하루를 보낸다. 기약 없는 절망의 땅에 희망이라는 꽃을 심고 가꾸며 하루를 보낸다. 아픈 꽃잎의 웃음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 <아픈 꽃잎은 웃음은 슬프지만 아름답다>에서 -
지향숙의 수필은 한마디로 그리움이 있고, 인정이 있고, 구원이 있는 토포필리아의 공간에서 출발한다. 어딘가에 부드러운 곡선의 안식처가 있을 것 같은 작가다. 그래서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의 아픈 경험에 머문다. 과거는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제재로 하는 수필들은 주로 자신의 심중에서 여울치는 물결의 무늬를 그려낸다. 이 수필은 작가의 어머니가 뇌출혈로 병원에 실려가고 병원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병마와 싸우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병원에서는 가족의 아픔에만 슬퍼할 수 없다. 타인의 죽음에도 가슴이 아프다. 병원에서 겪는 환자 관련 일들을 담고 있는 수필이 눈물을 자아낸다. 그녀의 문학적 그림자 형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바이오필리아의 향기’라 할 수 있다. 이들 생명의 존귀함이 짙은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애가 슬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손이 무섭다’는 인술의 위대함으로 승화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라 하겠다.
‘눈물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아픔으로 흘러내리는 눈물보다 더 가슴 아픈 건 짠하게 다가오는 감정의 복잡함이 한계를 벗어날 때이다. 짠하다는 것은 연민이다. 눈물을 삼키고 감정의 복잡함을 꾹꾹 눌러야 할 때 연민의 정은 더 아프다. 아픈 마음에도 고체처럼 단단하게 굳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는 진술에서 우리는 그녀가 작가적 현실 세계가 삶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보편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키를 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 인식이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런 그녀만의 예리한 감정에 대한 평가는 경험자의 진술이라는 지점에서 보편성을 띠며 공감을 줄 뿐만 아니라 작가정신의 고양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고 하겠다. 좋은 수필이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체험과 세련된 정신세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감할 수 있는’의 성질은 문학의 보편성을, 가치 있는 체험은 구체성을, 세련된 정신세계는 날선 인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학적인 형상화는 활어로 디자인된 감각적 표현을 뜻한다. 지향숙의 문장은 이런 기준을 충족시키고 있어 감동을 준다.
언니는 손주를 봐달라는 아들의 부탁으로 대전으로 생활의 터전을 옮겨 갔다. 엄마가 고생했던 시간을 보상해 주려는 아들의 깊은 뜻도 있었다. 언니는 대전으로 떠났고 혼자 남은 시간은 언니의 흔적에 파묻혔다. 종이컵 커피를 들고 밤거리를 돌아다니던 거리를 혼자 걸을 때면 언니는 밤공기가 되어 스며들었다. 언니의 빈자리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공간이 되어 나 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 날 언니와 통화를 했다. “언니는 내 인생에서 최고의 파트너였어” “나도 내 인생에서 향숙이가 최고였다” “언니 여름방학 때 대전으로 올라갈게. 그때 만나서 밤이 새도록 이야기 나누자.” 언니와의 마지막 통화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며칠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삶이란 참 슬픈 아이러니다.
- <약속>에서-
지향숙의 많은 수필들은 이런 안타까운 사연들이 만들어내는 슬픈 정조가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이 수필의 발단부는, ‘아픈 꽃잎의 웃음은 슬프지만 아름답다.’로 시작한다. 모순 같은 진술, 역설 같기도 반어처럼 들리기도 하는 그녀가 던지는 명제는 전체 수필을 다 읽으면 이해가 훨씬 더 잘 된다. 누구는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고, 누구는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녀가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같이하면서 알게 된 언니가 손주를 봐달라는 아들의 부탁을 받고 대전으로 올라가 뇌출혈로 쓰러져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았다는 마음 아픈 사연이 주이야기로 나온다. 수필이 체험의 이야기로 끝나서 않는다는 데서 지향숙 수필은 문학적 성취가 빛난다 하겠다. 바로 목련꽃으로 이중 층위 구조를 짜서 문학적 효과를 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녀의 글은 살아가면서 남긴 흔적과 체온이며, 그것이 정서화되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리얼하게 펼쳐진 삶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감동을 주며,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을 여운을 남기게 될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지향숙 수필은 인연의 진한 향기가 물결친다고 하겠다.
“언니는 내 인생에서 최고의 파트너였어” “나도 내 인생에서 향숙이가 최고였다” “언니 여름방학 때 대전으로 올라갈게. 그때 만나서 밤이 새도록 이야기 나누자.” 작가는 위와 같이 나눈 대화가 언니와의 마지막 통화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며칠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인용문의 마지막은 ‘삶이란 참 슬픈 아이러니다.’로 맺는다. 이 수필의 압권은 언니와 저 세상에 먼저 간 이유를 목련꽃 사랑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한 대목이다. 목련꽃 사랑이란 상상력에 기대어 정서를 간접화해서, 어떻게든 언니의 인간적 향기를 문학적으로 구체화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인간미는 높이 평가된다. 문학은 어느 의미에서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간 행위의 기록이다. 그 안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삶을 보다 견고히 구축해 나가려는 의지와 그 실천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문학은 단순한 자기애의 표현 수단이 아니다. 수필이 갖추어야 할 요건 중의 하나가 이런 인식이다. 인식은 작가의 사회적 의식이요, 문학적인 힘이다. 문학 속에 내재하는 강력한 에너지다. ‘목련꽃 사랑이 짝사랑이 아닌 완전한 사랑’이 되기를 비는 기원이 애절하다. 운명론적 자세에 깃들어 있는 인간적 정의가 바로 문학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어서 이 수필은 감동을 준다고 하겠다.
II. 로그아웃
수필이 구원의 문학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수필집은 ‘길’ ‘떠남’ ‘만남’ ‘마지막’ ‘언니’ ‘어머니’ 등 호소력 짙은 정서적 환기력이 강한 제재들에 힘입어 감동을 준다. 작가의 삶에 대한 건강한 인식이 녹아 있어 뜨거운 읽혀지기도 한다. 그녀는 인본적 태도를 지향하면서 더불어 사는 자세를 가진 작가다. 긴 인생을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의 향상을 목표로 삼아 자신을 비워내며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려는 정신을 수필에 담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이 수필집을 통해서 지향숙은 세상을 안개처럼 부드럽게 감싸는 어머니의 손길을 가진 작가라는 걸 보여주었다. 지향숙은 무엇이 삶의 논리이며, 우주의 심오한 질서인가를 되짚어보게 하는 물음에 대한 문학적 해답을 찾는 데 목표를 두었다. 진정한 수필적 감동은 ‘따뜻한 인간애’에서 싹을 틔운다. 지향숙 수필은 작가의 인연에 대한 그리움과 생에 대한 뜨거운 감정이 반성적 성찰과 상호 삼투되어 동일시를 이루고, 후회와 반성, 깨달음과 희망 등 미래적 가치의 합일 속에서 생성된 건강한 인식이 작품 속에 용해되어 있어 공감과 감동을 준다. 그녀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가슴 따뜻한 사람들을 기억의 저장창고에 쌓아두고 있어 언제나 영혼의 스파크가 휘황하게 번쩍이는 사람이다.
그녀는 언제나 일상에서 얻은 생각과 느낌을 절제된 정서로 표달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수필은 삶에 있어 중요한 가치인 인연을 문학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지닌다. 이 수필집에는 작가 자신의 순수가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담겨 있다. 수필 쓰기를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고, 자신의 인품과 덕성을 거울에 비치듯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유난히 인간적 향기가 짙게 풍긴다. 현란한 색채로 나타나는 허욕의 삶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색처럼 겸허한 삶을 그려내었다. 이런 따스한 체온을 전해주는 작가이기에 우리는 그녀의 다음 작품에 더 기대를 걸 수가 있는 것이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를 입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정서가 생겨난다. 작가가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보따리는 눈물 범벅인 것이다. 글을 언어연금술사처럼 그려내듯 표현한 수법이 대단해 보인다. 격정의 순간에도 감정의 절제를 통해 품격을 갖추려고 한 것도 좋았다. 지향숙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요, 진한 인간애의 표백에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주리라 믿는다. 더욱 더 향기로운 여인으로 성장해서 더 멋진 수필을 써내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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