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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하산길에 사릉에 들렸다.
사적 제209호. 정순왕후는 수양대군(首陽大君 : 뒤에 세조)이 왕위를 찬탈한 뒤 단종을 상왕으로 모시면서 의덕대비(懿德大妃)가 되었고,
단종이 다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면서 역시 부인(夫人)으로 강봉되었다.
평생을 평범한 서민으로 보내다가 죽은 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 정씨가(鄭氏家) 묘역에 묻혔다가, 1698년(숙종 24)단종의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추상(追上)되고, 묘를 높여 사릉이라고 하였다. 석물제도(石物制度)는 장릉(莊陵 : 단종릉)과 마찬가지로 난간(欄干)과
무석(武石)을 생략하였고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令) 1원과 참봉 1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이 거의 훼손 없이 남아 있는 예는 세계적으로 조선 왕릉이 유일하다. 조선 왕릉은 무려 42기나 된다.
태조 이래 왕위를 공식적으로 이어받은 사람은 27명에 불과하지만, 왕후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사망했어도 사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도 왕릉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42기의 왕릉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을 제외한 40기를 2008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했고
단 1년 만에 유네스코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했다.
2009년 9월, 중요성을 인정받은 조선 왕릉 40기가 일괄적으로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2009년 6월 동구릉, 광릉, 태릉 등 왕릉 40기가 일괄적으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조선 왕릉이 얼마나 세계적으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는지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왕릉 40기 전체를 실사한 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야 할
가치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ㆍ유교 사상과 토착 신앙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반영된 장묘 문화 공간이다.
ㆍ자연 경관을 적절하게 융합한 공간 배치와 빼어난 석물 등 조형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ㆍ제례 의식 등 무형 유산을 통해 역사의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다.
ㆍ왕릉 조성이나 관리, 의례 방법 등을 담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의궤(儀軌)』 등 고문서가 풍부하다.
ㆍ전체가 통합적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홍살문 앞에서 정면의 정자각까지 얇은 돌을 깔아 만든 긴 돌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참도라고 한다.
참도는 혼령이 이용하는 신도(향도)와 참배자(왕 또는 제관)가 이용하는 어도로 구분된다.
좌측의 신도가 능의 주인인 신이 다니는 길로 우측의 어도보다 약 10센티미터 정도 높고 넓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90미터이나 능마다 차이가 있다.
조선 시대 모든 능역에는 사가의 무덤을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사릉에는 사가의 무덤이 몇 기 남아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중종은 정순왕후가 사망하자 단종 때부터 7대의 왕을 거친 그녀를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돌아갈 당시 왕후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장을 치렀다. 능을 조성할 처지가 아니므로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출가한 집안에서 장례를 주도했다. 해주 정씨 가족 묘역 안에 정순왕후를 안장하고 제사를 지내 아직도 사가의 무덤이
남아 있는 것이다. 1698년 숙종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자 강 씨도 정순왕후로 복위되었으며,
신위는 창경궁에 모셔져 있다가 종묘의 영녕전에 안치되었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바르다'는 뜻으로 능호를 사릉이라 붙였다.
조선 왕릉의 능침은 기본적으로 도래솔 각주로 둘러싸고 있는데 사신사의 현무를 나타낸다.
현무는 소나무의 수피가 오래되면 검은색으로 변하고 두껍게 갈라져 거북 등 같은 모습이 되는 것에서 연유한다.
지금도 봉분을 중심으로 한 능침 공간에는 소나무가 절대적 우세를 나타내며 잘 보존되고 있다.
이 소나무들이 단종의 능인 장릉 쪽을 향해 고개 숙여 자란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사릉은 왕릉보다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 사업소 묘포장으로 유명하다.
과거에 일반인들에게 공개한 적이 있으나 방문객이 적어 비공개 왕릉으로 분리되었다가 2013년 1월 1일부터
태강릉의 강릉, 동구릉의 숭릉과 함께 공개하고 있다.
조선 왕릉의 세계 문화유산 등재 당시 묘포장에 있는 종자 은행과 소나무 등 각종 유전자원이 궁궐과 능원의
생태 문화 자원 보존에 의미가 있다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알려진다.
이곳에 있는 소나무 묘목은 태백산맥 능선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소인 준경묘와 영경묘의 낙락장송 후손으로,
숭례문 복원에 사용될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소나무로 평가받고 있다. 1999년에는 사릉에서 재배된 묘목을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에 옮겨 심어 단종과 정순왕후가 그간의 아쉬움을 풀고 애틋한 정을 나누도록 했다.
이때 사용된 소나무를 '정령송(精靈松)'이라 부르므로 사릉을 답사할 때 유심히 보기 바란다.
사릉 정자각 ↑
배위청이 짧아서 전체 건물의 모습이 정사각형이라는 느낌을 준다.
정순왕후의 처음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세종 22년(1440)에 태어나 15세 때 한 살 어린 단종과
가례를 치러 왕비로 책봉되었다. 사실 이 결혼은 단종이 즉위한 지 만 1년이 되는 날 수양대군과 양녕대군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왕비를 고른 후 단종에게 거의 반 강제로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한 것이다. 결혼한 이듬해인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자 정순왕후는 의덕왕대비가 되면서 역경의 시련이 몰아친다.
세조의 왕위 찬탈은 과거 세종, 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의 일부 학사 출신들에게 심한 저항을 받았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의 유신들은 무관인 유응부, 성승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할 것을 모의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조 1년(1455) 명의 책명사(冊命使)가 조선에 온다는 통보를 계기로 창덕궁에서 연회를 베풀 때 거사할 것을
계획했는데, 마침 이날 세조 제거의 행동책을 맡은 별운검이 갑자기 폐해져 실행하지 못했다.
그러자 계획이 탄로되었음을 두려워한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내용을 누설하고, 다시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고변해 주동자인 사육신과
연루자 70여 명에게 그야말로 피바람이 몰아친다. 이들 모두가 처형되면서 단종 복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상왕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된 후 죽임을 당한다. 단종이 유배되자 정순왕후는 부인으로 강봉되고 나중에는
관비로까지 곤두박질친다.
이 당시 놀라운 기록은 신숙주가 정순왕후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은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하던 왕비이지만 관비가 되었으므로 신숙주의 요청이 법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료들은 절개를 지키다가 처절하게 죽어 사육신이 된 상황에 왕비를 종으로 달라는 신숙주의 처신이 어처구니없지
않을 수 없다. 세조도 신숙주의 행동이 놀라웠는지 "신분은 노비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라는 명을 내려 정업원으로
보냈다. 정업원은 조선 초기 슬하에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결혼 후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야 했던 왕실의 여인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정업원 바로 옆에는 비구니들이 있는 청룡사가 있는데 고려 말 공민왕의 비인 혜비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스님이 되어 머물던 곳이다.
태조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도 이곳에서 비구니로 살았고, 정순왕후 역시 이곳에서 스님으로 머물렀다는 설도 있다.
청룡사 안에는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각이 있는데, 정순왕후를 애석하게 여겼던 영조가
직접 비와 현판을 내렸다. 현판의 '눈물을 머금고 쓴다. 앞 봉우리와 뒷산 바위 천만년 가라(前峯後巖於千萬年)'는 글은 영조의 글씨다.
정순왕후는 정업원에서 시녀들과 함께 살면서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 생계를 부담하기 위해 제용감에서 심부름하던 시녀의 염색 기술을 도와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다.
당시에는 지치라는 식물의 뿌리를 이용해 비단에 물을 들였다.
정순왕후가 염색업을 하던 골짜기를 자줏골이라 불렀는데, 현재 한성대학교 후문 부근에 있으며 지봉 이수광 선생이
『지봉유설』을 저술한 초가삼간 비우당(庇雨堂)에 당시의 흔적이 있다. 정순왕후가 염색하던 곳을
자주동샘(紫芝洞泉)이라고 하는데 정순왕후가 이곳에 와서 단종이 억울하게 죽은 영월 쪽을 향해 명복을 빌며
비단 빨래를 하면 저절로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고 한다.
비우당 옆에는 원각사가 있는데 단종의 넋을 천도하는 도량이다.
-2013년 청계천 등 축제, 단종과 정순왕후-↑
봉문 뒤의 곡장과 봉분을 둘러싼 병풍석과 난간석, 봉분 앞의 혼유석과 장명등, 봉분 양옆의 망주석과 문인석
망주석은 자손이 번창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일반인의 묘소에도 세운다.
왕릉의 좌향을 동, 서, 남, 북으로 구분해볼 때 북향으로 쓴 능은 전혀 없으며 동향 10기, 서향 10기, 남향 33기 등 모두 53기다.
중국 황릉의 경우 능원의 문에서 정전까지 이르는 신도 양측에 석수를 마주보게 일렬로 세우는데,
조선에서는 석수를 능침 공간에 수호하는 형태로 외향해 놓았다. 이는 중국의 묘제 중 제후의 제도를 따르면서도 조선만의 독창성이
가미 된 것이다. 또한 고종과 순종은 대한제국 황제라 칭했으므로 석수가 중국 황제의 능제에 따라 신도 양측에 배치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당의 풍습이 그대로 들어와 능묘비(陵墓碑)나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에 걸쳐 유행된 승려들의 탑비에만
격식이 적용되었을 뿐 귀족들에 대한 규정은 없었으므로 주로 묘지석(墓誌石)을 사용하다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정3품 이상은 신도비를 세우고
그 이하는 묘갈(작은 묘비)을 세우게 한 것이 조선시대에는 비갈(비와 갈)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의 종류는 비문의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즉 묘비·탑비·능묘비·신도비·사적비·유허비·기공비(紀功碑)·송덕비·효자비·열녀비·사비(祠碑) 등.
묘비에 쓰인 석문(石文)은 비·갈·표(表)·지(誌) 등으로 분류되고, 불승의 것은 탑비, 제왕의 것은 능비라 하며, 묘갈·신도비와 같이
묘소 입구에 세워지는 것이 있다.
묘갈은 묘비의 일종으로 조선시대 유학을 숭상하면서 입석이 조상에 대한 효의 한 표현으로 인식되어 크게 성행하였다.
-정순왕후 비갈비-
예전에는 이 비갈비가 있는 쪽이 정문이었으나 정문을 새로 내면서 릉에 들어서면 좌측 끝에 있다. 해설자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수 있으며 6.25때 총탄을 맞은 자국이 비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풍파에 시달려 비문도 낡고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비석 위의 쌍용 모습만 알아볼 수 있다.
세조는 말년에 정순왕후의 실상을 알고 궁핍을 면할 수 있는 집과 식량을 주겠다고 했지만 정순왕후가 그것을 고이 받을
여인은 아니었다. 아무리 생활하기 어렵다고 한들 왕후로서의 자존감을 꺾고 죽은 남편의 억울함과 열여덟에 홀로된
자신의 한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편, 그녀를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은 조정의 눈을 피해 먹을거리를
건네주고자 감시병 몰래 금남의 채소 시장을 열어 정순왕후를 돌봤다. 신설동 동묘의 벼룩시장을 끼고 나오면
도로 한쪽에 숭신초등학교가 보이는데 이곳이 조선 시대에 여인들만 출입한 여인 시장이 있던 곳이다.
채소 시장 옆에 있는 영도교는 귀양 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이다. 당시 청계천에 놓인 다리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던 다리로 정순왕후로서는 자신이 나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까지 귀양 가는 낭군을 배웅한 셈이다.
두 사람은 이후 이승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단종이 끝내 유배지인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영도교를 건너면 더 이상 사랑하는 임을 볼 수 없다는 말이 전해져 사람들은 '영원히 이별하는 다리'라는 뜻의 '영이별
교'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4년간의 짧고 애틋한 결혼 생활을 한 두 사람 사이에는 후손도 없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사사된 후 64년 동안 그를
기리다 82세로 정업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자신을 왕비로 간택했다 결국엔 폐비로 만들고, 남편에게 사약을 내린 시숙부
세조보다 53년을 더 살았다. 또 세조의 후손이며 시사촌인 덕종과 예종, 시조카 성종, 시손 연산군의
죽음까지 지켜보면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서울 동대문 밖 동관왕묘(東關王廟) 남쪽에 있던 돌다리.
청계천7가와 8가 중간, 즉 황학동에서 숭인동 숭신초등학교와 동묘로 나가는 교차로에 있는 다리이다.
조선 초에는 旺尋坪大橋라고도 하였다. 이 다리에는 단종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전한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갈 때 단종비 정순왕후가 이 다리까지 배웅 나와 이별하였는데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영영 이별하였다고 하여 영이별다리,영영건넌다리라고 불렀다.
성종 때 이 다리를 보수하여 한자명으로 永渡橋라고 하였다. 그리고 永尾洞에서 내려오는 하천 끝에 놓인 다리라는 의미와
창신동에 있던 永尾寺 승려들이 다리를 가설하였다고 하여 永尾橋 혹은 영미다리라고도 불렀다.
또한 안암동 永導寺의 승려들이 다리를 놓았다고 하여 永導橋라는 명칭이 붙었다고도 한다.
고종 때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리의 석물을 궁궐에 쓰는 석재로 징발함에 따라 나무다리로 바뀌었다.
이 나무다리들이 장마 때마다 유실되곤 하여 띄엄띄엄 징검다리를 놓아 건너다니면서 한때는 띄엄다리라는 명칭이 붙기도 하였다.
1933년 나무다리를 헐고 콘크리트로 교체공사를 할 때 교각 하부 溝中에서 관음보살목각좌상이 출토되기도 하였으며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새로 영도교가 가설되었다고한다.
첫댓글 사릉을 앉아서 구경하고 많은 역사공부를 하게되네요
단종의 한 많은 역사와 정순왕후의 사연이 가슴을 울리네요.
그렇네욤^^
나도 이렇게 열심히 역사공부를 다시 할 줄 몰랐수...
재미있고 흥미롭고 과거사의 애환을 알아가니 참 즐거운 놀이입니당^^
역사탐구나 등산을 할 때도 안내하시는 분들이 계시면 꼭 참관하고 가야 한다는 걸 새삼 느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