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시편 90:10]
'죽음'은 인기있는 주제가 아니다.
하지만,
잘 사는 법을 배우려면 죽음을 묵상해야만 한다.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는 것은 중요한 삶의 주제다.
유한성을 가진 인간이 제3자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며,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는 데,
그 '언제가'가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느닷없이 맞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오늘이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면,
오늘이 내가 사랑하는 이와 만나는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안다면 인생은 허무할까?
'인생무상' 혹은 '허무'에 빠질 것 같지만,
죽음, 인간의 유한성을 깊이 묵상하면 오히려 '주어진 날'에 대한 감사와 소중함을 갖게 된다.
삶의 비극은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버린 내면에 있다.
온갖 맘몬의 질서에 따라 소유하는 삶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있음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 비극이다.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삶 전반에 대해 숙고할 수 있다.
죽음과 관련한 유명한 문장이 있다.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어떤 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이었다."
이런 관점에서보면 시편 90편에 등장하는 상징들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티끌(온 우주의 시작),
지나간 어제(오늘이 있게한),
밤의 한 순간(낮과 밤의 순환),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한 포기 풀 속에 들어 있는 섭리),
저녁에 시들어 말라버리는 꽃(꽃이 떨어진 자리에 열매가)...
심지어는 '우리의 숨겨놓은 죄가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나는 것(8)'조차도 긍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고 보고 깨달아야만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있는 삶'인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깊은 통찰 끝에 우리는 모세처럼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17)"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