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신옥순(辛玉淳) - 두 세계에서 살다
5. 탕감과 은사
1 삼각산에서 청파동에 있는 본부교회를 찾아간 날은 1956년 1월 16일이다. 아침 8시에 출발해서 계시에 따라 본부교회에 들어가려니까 영계에서 못 들어 가게 하여 치열한 영적인 싸움을 하고 들어갔다. 처음에는 그곳이 무엇하는 집인지 모르고 계시에 의하여 따라왔는데 박봉애 씨를 만나고서야 통일교회라는 것을 알고 입교하게 되었다.
2 입교 3개월 후에 정신이상자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홍순애 할머니, 김재근 할머니와 같이 감옥에 들어가게 됐다. 그 당시 정신이상자였던 이두영은 춘천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고등학생이었는데, 어느 처녀를 짝사랑하다가 종내는 상사병에 걸려 정신이상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3 그의 집에서는 무당을 데려다가 굿도 해보고 3년 동안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보았으나 차도가 없자 그 아버지가 춘천에서 개척하고 있던 홍순애 할머니에게 데리고 와서 “얘는 통일교회 교인이라야만 살리지 아무도 살릴 수 없다”라고 하면서 살려 달라고 매달리니까 하도 애처로워 살펴볼까 하고 미친 애를 서울교회로 데려왔던 것이다.
4 그러나 교회 사정은 매우 어려워 난처한 입장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데리고 내려가서 기도해 주라고 하셨다. 내가 아이가 너무 발광을 하니 혼자서 할 수가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저녁에 기도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기도를 해보니 큰 식칼이 나타났다. 그런데 날을 우리가 쥐고 있었고 그쪽에서는 자루를 쥐고 있어서 승리할 것 같지 않았다. 선생님께서는 “그래도 인생이 불쌍하니까 가 봐야지” 하셨다.
5 그날 저녁 방을 빌려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트럭을 얻어 홍순애 할머니, 김재근 할머니와 셋이서 미친 애를 태우고 그 애 집으로 갔다. 그 애가 있었던 방에 들어가니 구들장이 빠져있고 엉망진창이었다. 거기는 강원도 홍천의 시골이었다.
6 그 애는 3년 동안이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날뛰어서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그런 상황을 보고 기도에서 본 것을 상기하니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천주교인인 그 삼촌에게 우리는 기도만 해주고 예배만 봐주지 환자까지는 도저히 책임질 수 없으니 보호자를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7 저녁을 먹고 기도하고 나니까 밤 9시가 넘어 버렸다. 그래서 그 방에서 그 애와 삼촌, 우리는 우리끼리 각각 나뉘어서 잤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삼촌은 없고 미친 아이만 죽어 있었다. 그 삼촌은 우리보다 먼저 알았던지 도망가서 나타나지 않으니 우리가 꼼짝없이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말았다.
8 그날 아침에 체포되어 지서에 끌려갔다. 조서를 꾸미면서 순경들은 “당신들 그 동네에서 죽은 애라고 소문이 난 애를 왜 맡아 가지고 바가지를 썼느냐”라고 우리를 위로해 주고 아침 식사하러 나갔다.
9 그러자 피해자의 아버지가 장작을 가지고 와서 장작으로 자기 애를 쳐 죽였다고 장작을 바닥에 깔더니 우리를 엎어 놓고 짓밟아 김재근 할머니는 다리를 다쳐 비틀어졌고, 홍순애 할머니는 머리를 다쳐 눈이 빠질 뻔하고, 나는 갈빗대를 다쳐 창에 찔린 것 같은 부상을 당했다.
10 나는 너무 억울해서 시누이 남편이 서울시장이었던 이기붕 씨였기 때문에 상소하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고 김재근 할머니는 2년, 홍순애 할머니와 나는 22개월의 선고를 받고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런데도 죽은 애의 친척들인 청년들이 면회 와서 우리를 갈가리 찢어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가곤 했다.
11 우리는 형무소 생활을 모범적으로 하여 홍순애 할머니는 총무부장이 되었고, 김재근 할머니는 전도 반장이, 나는 식사 반장이 되어 형무소의 감투는 우리가 다 쓰고 자유롭게 생활하며 예배도 드렸다. 옥중에서 하루는 영적으로 해와 할머니가 와서 “내가 사명을 다 못했기 때문에 너희들을 고생 시킨다”라고 미안해하면서 감옥을 돌아다니며 울었다.
12 1957년에 출감하여 본부교회 부엌에서 3년 동안 일하다가 마포교회와 서대문교회 그리고 전북 오수교회를 개척했다. 오수에서는 7년 동안 한 번도 집에 가지 않고 임지에서 죽으면 뼈를 묻을 각오를 가지고 활동했다.
13 나는 원리 강의도 못했다. 그래도 똑똑한 학생들이 많이 입교하는 것이었다. 먹을 것이 없으면 식구들이 빵과 국수를 사놓고 갔으며, 때로는 돈도 놓고 갔다. 어떤 학생은 3년 동안 줄곧 자기의 점심 도시락을 솔에 넣어두고 가기도 했다.
14 하루는 수련회를 개최하여 수련생 20명을 모아 놓고 식량과 땔감이 없어서 밤새껏 울며 기도했더니 눈이 통통 부어 버렸다. 새벽녘이 되자 계몽 나갔다 돌아오던 학생들이 길에 떨어져 있던 보리쌀 1가마니를 주워왔다면서 보리쌀을 들춰 메고 들어왔다. 낮에는 황송문 학생이 나무를 해가지고 와서 어렵게나마 수련회를 마칠 수가 있었다.
15 남원교회와 합동해서 수련회를 하려고 오수에서 수련생 20명을 데리고 남원교회에 간 적이 있다. 수련생은 모두 30명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려고 보니 수련회비가 2천 원밖에 안 걷혔다고 한다.
16 그 당시 보리쌀 1말에 1,500원 했으니까 그 돈으로 30명이 7일간 생활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아무튼 여자인 내가 식사 문제를 해결해야 할 입장이었으므로 저녁 식사를 차려주고 남원교회에서 나왔다. 기차나 버스는 이미 끊어져서 오수까지 빨리 가려면 기찻길 40리를 걸어가야 했다. 어두운 밤에 철길을 걷는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17 서도라는 강다리에 이르러 손과 발을 사용해 가며 중간쯤 건너왔을까 오수 쪽에서 기적소리가 들렸다. 어디에 피할 곳도 없고 물러설 곳도 없는 진퇴양난의 입장이었다. 붙들 곳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18 하나님 앞에 애절한 기도가 폭포수처럼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나님! 내가 여기서 죽으면 30명의 수련생들은 어떻게 합니까? 나는 그들을 살리기 위하여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니 아버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