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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뽕나무 뽑을 믿음이 아직 없는 이유>의 줄거리: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기대가 되고 신나기보다는 오히려 부담되고 걱정스러운 말씀입니다. 아직도 내게는 뽕나무를 뿌리째 뽑아 바다에 옮겨 심을 겨자씨 크기의 믿음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또 여기서는 믿음이 뭘까요?
뽕나무 뽑을 믿음이 아직 없는 이유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뽕나무 뽑을 믿음이 아직 없는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뽕나무 뽑을 믿음이 아직 없는 이유’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맥락과 측면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물론 믿음의 궁극적 의미는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라는 말을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관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믿게 되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내용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는 믿음을 무익한 종의 비유와 연결시켜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만 무익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시기에 앞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데 6절을 보면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연관성을 염두에 놓고 볼 때 어떻게 믿음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실 수 있는지 정말 경이롭습니다. 오늘은 이 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5절을 보면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요청을 한데에는 앞부분에 나타난 사건과 연관이 있습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2절에서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있으면서 사람들을 실족하게 할 바에는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다행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기회가 없어지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3절에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실족하게 됨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실족하지 않는 방법으로 4절에서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러한 말씀을 도무지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실족하게 하지도 않고 스스로 실족하지 않도록 믿음을 더해 주십사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요청에 대해 믿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이라고 말씀하심은 제자들이 믿음이 있기는 하지만 작아서 힘이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애초에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믿음이 전혀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작게라도 믿음이 있었다면 증거가 나타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 자라는 뽕나무는 위로는 10~15미터나 크게 자라고 그만큼 뿌리도 튼튼합니다. 바다에 심겨진다는 것은 바다에 심겨져서도 잎이 푸르고 무성하게 자라는 것과 같은 특별한 일들이 증거로 나타났으리라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작게 여겨지는 겨자씨만큼도 믿음이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공생애를 사시는 예수님과 육체적으로 함께 하고 있었기에 작지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조금도 없었고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보면 기대감보다는 부담과 걱정이 앞섭니다. 70~80년대에 부흥회가 한창 유행하던 때에는 이러한 말씀에 “아멘! 아멘!”하고 신바람이 나서 기대감에 충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뽕나무 뽑았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아도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기에 차츰 이 말씀은 기대와 기쁨이 아닌 부담스럽고 걱정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믿음이라면 죽기 전까지 과연 그런 믿음이 생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지리라는 말씀에 “아멘! 믿습니다!”라고 소리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은 경험상 체감하실 것입니다. 뽕나무더러 바다에 심겨지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정말로 믿음이라면 그 증거를 보이면 될 뿐입니다. 믿는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자랑으로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말만 하지 말고 뽕나무에게 명령해서 바다에 빠뜨리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작은 믿음으로도 가능한 일을 해낸 사람이 없다는 것은 결국 믿음에 대한 생각이 애초에 잘못되어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제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익한 종의 비유를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해주고 계십니다. 9~10절을 보면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명령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얼핏 이 무익한 종의 비유는 앞서 말씀하신 뽕나무 비유의 말씀과는 단절이 이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명령이라는 표현으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한 마디로 믿음이란 명령을 따르는 상태입니다. 뽕나무가 바다에 빠지는 것도 명령을 따르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란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지시나 명령을 받을 수 있는 마음상태를 말합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받은 명령이라면 뽕나무더러 바다에 심기라는 내용일지라도 그대로 말하게 되고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기에 일이 다 마쳐진 뒤에 나타나는 성과나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도 내가 했다고 말할 것이 없게 됩니다. 이를 우리의 일상에 적용해보자면 배우자나 자녀 앞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지시를 따를 수 있는 상태가 겨자씨만큼도 준비되지 못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실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는 말씀과 연관하여 실족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믿음이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과 의식이 이 세상 것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그것은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 것들이 올무와 함정이 되어 덫에 걸려서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길로 갈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실족에 대해 말씀하신 뒤에 믿음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음은 마음이 이 세상의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하늘길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만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 마음이 하나님과 만나는 상태에서 뽕나무의 비유와 명령이라는 말이 연관을 가지고 등장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존재하는 상태는 하나님과 세상 것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실 때에 제자들은 아직도 세상 것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바라고 있었고,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 장관 자리를 얻기를 기대했습니다. 이처럼 출세와 형통을 소원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믿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믿음이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하늘길을 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제자들은 아예 믿음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마음이 하늘길을 올라가 하나님과 만난다는 것은 최종적인 도달지점을 하나님과 하나 됨에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모습을 겨자씨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이 비유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도식화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원을 상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한 원은 나의 마음이고, 다른 한 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겨자씨의 상태란 두 원이 가까워져서 접점을 이루는 상태입니다. 그 점이 바로 겨자씨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커진다는 것은 접점이 점점 커져서 교집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윽고 교집합이 점점 커져서 두 원이 온전히 겹쳐지게 되면 하나가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가는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백부장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해서는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헬라어 메갈레(μεγαλη)는 크고 거대하다는 뜻으로써 실로 메가톤급의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예수님께서 만났던 어떤 유대인들보다도 하나님과 큰 교집합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 이들이 그러한 믿음의 상태에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교집합을 이루는 믿음 자체는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교집합은커녕 원과 원이 겨자씨만큼 접하는 상태만 되어도 뽕나무 뽑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마음이 하늘길을 가지 못하고 실족하여 하나님과 조금도 접점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해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눈앞의 뽕나무를 뽑아서 바다에 던지고자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뽕나무의 크기가 10~15미터나 되고 가지는 얼마나 무성할 것이며 뿌리는 또 얼마나 될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책을 보면 이러한 모습을 묘사하며 가지가 40미터까지 뻗은 뽕나무를 언급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21절에서는 이 부분의 말씀을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산과 비견될 수 있는 나무를 생각해보면 그 규모가 대단할 것이고,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자라는 뽕나무를 아셨기에 굳이 이러한 예를 드신 것입니다.
이러한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던져지라는 말을 해야 되고 그래야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음이 답답하고 막막하고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이 나무를 뽑아서 바다에 던질 수도 있겠구나!”라고 신바람이 나기는커녕 “이런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는가?”라는 부담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따라 하늘길로 올라가게 되면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갖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모든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동안에 마음 즉 공백의 영은 하늘로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접점이라도 이루게 된다면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뽕나무를 뽑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뽕나무를 바라본다면 그것이 전혀 어려운 일로 여겨지지 않게 됩니다. 생일케이크에 꽂혀있는 촛대 하나를 뽑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느낌과 확신이 들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겨자씨만한 접점을 이루었을 뿐인데 이러한 변화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지금 하나님이 나를 통해 뽕나무를 뽑고자 하시느냐 마시느냐의 명령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이론으로 백날 설명해봐야 납득이 어렵습니다. 설령 신학박사라고 하여도 실제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접점을 이룬 경험이 없다면 말씀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예수님이 일으키셨던 기적을 통해 상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 위를 걷는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있어서 바다 위를 걷는 것은 기적일 수 없습니다. 겨자씨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더한 일도 일어날 수 있는데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이셨던 예수님께 있어서 그것은 일어나야 할 일이었을 뿐이지 느닷없이 일어난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하나님과 접점을 이룬 상태에서 강릉 앞바다를 걷는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보통 사람의 상태라면 “물에 들어서면 가라앉는다.”는 자동적인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겨자씨만한 접점이라도 이루게 된다면 물은 더 이상 빠지는 것도 아니고 걸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내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느냐 물에 빠지느냐는 하나님의 명령이 결정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물의 성질을 규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내가 올라서도 빠지고 누가 올라서도 빠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명령에 앞서 명령을 내리시는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창조라는 행위 이전에 창조주의 존재와 마음이 닿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과 마음이 닿게 되면 물에 빠질 것인가 물 위를 걸을 것인가는 그때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명령하심을 따라 나타나게 될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하늘길을 따라 올라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접촉을 이루게 된다는 것은 창조세계의 법칙 바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마음과 의식에서 세상의 소유를 버리고 세상을 탈출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다는 증거는 이미 창조세계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지금 규정하고 계시고 명령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접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먼저 밤에 배를 타고 가고 있었고 풍랑 이는 바다 위를 예수님께서 걸어오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바다와 접촉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물의 성질을 규정하시기 전의 하나님 아버지와 접촉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물위를 걷도록 명령하셨고 예수님은 그 말씀에 따라 물 위를 걸으셨던 것입니다. 물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빠지고 안 빠지고를 문제시하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계셨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겨자씨만큼이라도 있는 사람에게는 기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볼 때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이 기적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법칙이나 과학법칙까지도 백지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을 뿐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바를 따라 행동하고 말할 뿐이지 제약이나 법칙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추진력이 없다고 느끼는 아내가 있습니다. 추진력이 없는 상태가 뽕나무 같습니다. 이분이 배우자의 성질을 고쳐보려다가 결국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뽕나무를 뽑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쓰다가 포기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러한 남편의 성질을 받아들이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아내의 마음이 하나님과 닿아서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생기게 되면 마음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평생을 힘써도 변하게 할 수 없었던 남편의 성질이 케이크 위의 촛대를 뽑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만 그것을 뽑거나 마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임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 때문에 남편의 성질이 유지되고 있음을 깨닫고, 또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의 명령만 있다면 이제까지 없었던 추진력도 생기게 됨을 깨닫습니다. 문제는 뽕나무 같은 남편의 성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명령을 하시는 하나님과 마음이 접촉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은 어떤 식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추진력이 전혀 없던 남편이 변화하여 매사에 추진력을 보이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나의 바람이 아닌 하나님의 바람에 달린 일입니다. 남편의 추진력 없음이 나와 남편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유익이 될 일이라면 그 상황을 유지시켜 가실 뿐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독하게도 공부를 하지 않는 자녀가 있습니다. 그럴 때 부모의 마음이 하나님과 접촉하면 그러한 모습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공부할 마음이 없도록 명령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보면 어느 날 돌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전 공부가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살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 돌변해서 죽기 살기로 공부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부 안하는 것은 마냥 견고한 뽕나무가 아닙니다. 케이크 위에 꽂혀진 초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마음이 하나님과 접점을 이루는 것이고 창조주와 접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창조세계를 빠져나오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계속 세상에 머물러 있으면 상식과 각종 법칙과 경험과 지식에 매이게 됩니다. 이것조차 버려야 될 소유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과 접점을 이루게 되면 바닷물은 마냥 빠져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내가 물 위를 걷게 할 이유가 없으셔서 빠지도록 명령하고 계실 뿐이지 무조건 빠지도록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세계에 대해 지시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접촉을 이루게 되면 그로부터 생각이 출발하기 때문에 으레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자연법칙으로부터 시작하여 상식이나 경험이나 지식들에 이르기까지 정해진 것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들이 내 마음과 의식이 따라갈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삶에는 어떤 일도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어려워서 못하고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없을 뿐입니다. 제가 종종 말씀드리지만 남북통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북통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누구에게든지 내려진다면 통일은 될 것입니다. 이 말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냉전시대에 미국과 더불어 지구를 양분하고 있던 소련이 고르바초프가 들어서면서 하루아침에 없어졌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로 인해서 세상에 일어나는 변화를 보시기 바랍니다.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은 새 발의 피와 같습니다.
믿음은 창조세계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창조세계에서 통용되던 자연법칙이나 과학법칙으로부터 상식과 경험과 관습이나 지식에 이르기까지 버려야 될 대상입니다. 이런 것들에 마음이 얽매여 있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과 마음이 접해있다는 것은 삶의 매순간 행동하고 말해야 될 모든 일에 대해서 백지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세상의 법칙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습관에 따라 식사를 하고 회사에 나가 일을 합니다. 자연법칙이나 과학법칙에 따라 살고 상식과 관습이나 풍습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동안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다 소유입니다.
건강이 안 좋은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지시하지 않고 있는데 환자를 고칠 수 있는 의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외과의사가 수술을 하고 상처를 꿰매서 봉합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체의 법칙이기에 붙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상처를 붙도록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침을 허락하시지 않았는데 의사의 힘으로 고쳐지는 일은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고 보면 명의를 찾아다는 것은 망상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의사를 찾아가는 것이 정답입니다. 하나님이 의사를 찾아가지 말라고 명령하시면 의사를 찾아가지 않더라도 낫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건강은 뽕나무입니다. 건강을 자신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없어지는 것이 건강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30년 동안 고질병을 앓고 계신 분에게 있어서 지병은 뽕나무가 아닌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그 병을 필요로 하셔서 날마다 명령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해가 뜨는 것도 자연법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매일 명령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여호수아의 경우처럼 해를 멈추게 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하나님과 접점을 이루고 교집합을 이루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창조 이전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마음이 겨자씨만한 접점이라도 이루게 될 때에 삶의 현장은 백지상태가 됩니다. 말 한 마디를 해도 행동 하나를 해도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스스로를 아무것도 못하는 무익한 종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마음이 하늘길을 따라 올라가 하나님과 만남을 이루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만남의 형태를 겨자씨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겨자씨만한 접점만 이루어지더라도 내가 해야 될 말과 행동과 입장과 태도는 언제나 백지상태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이 엄청난 일은 단지 십자가 생활화를 반복함으로써 주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루에 열 번, 스무 번 십자가를 생활화할 때에 그만큼 하나님께 접근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다가갈 때 어느덧 세상을 바라보는 법칙도 관습도 습관도 지식도 경험도 없어지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명령만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접점이 이루어진 증거입니다.
모두가 다 이 접점을 이루고 접점은 다시 교집합이 되고 교집합에서 다시 온전히 일치되는 상태로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의 자리로 나가기 위해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목숨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을 통하여 우리도 뽕나무를 뽑을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과 접점을 이루게 하시고, 접점이 교집합이 되고, 교집합이 일치를 이루게 되는 놀라운 믿음의 완성을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