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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0 창세기 특강 1 (토후 바 보후)
오늘부터 창세기 1장 특강이 시작됩니다. 제자들의 창세기 1장 특강이 2주간에 걸쳐서 하나씩 진행될 예정인데 이 기회를 놓치시면 안 될 것입니다. 절호의 찬스를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제자, 한 새사람, 그리고 일곱 메시지가 바로 예슈아비전교회의 3대 비전입니다. 그중 일곱 메시지는 필수이니 반드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 교회를 다녀야 하는 이유, 목사님은 동그라미와 사다리 그림을 왜 그토록 무수히 그리셔야만 하는지가 창세기 1장 특장 때 다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모든 것, 지고한 뜻이 다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책 좋아하시나요? 바야흐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아직 산에는 나무들이 가을 옷을 갈아입지는 않았지만 뚝 떨어진 기온에서 가을 냄새가 납니다. 책은 가장 좋은 멘토이며 친구이며 안식처라고 합니다. 마음에 드는 책 한, 중간쯤 읽어온 책을 가지고 가서 향기로운 커피와 함께 시간을 유유자적하게 보내고 싶지는 않으신지요?
책을 읽을 때 여러분들은 어디를 먼저 보시나요? 책표지? 뒷면? 띠지? 아니면 거두절미하고 바로 내용부터? 저는 주로 목차 혹은 머리말이라는 부분을 보게 됩니다. 머리말은 작가가 이 책에 대해서 담으려고 했던 마음을 적어놓은 부분입니다. 그래서 책 맨 앞에 써 있는 것이지요.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66권의 목적과 하나님께서 담으려고 하시는 마음이 다 요약, 정리가 되어있는 것이 바로 창세기 1장입니다.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의 제일 앞에 써 놓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땅에서 자기 자신을, 자기 생명을 완성하며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을 위해 삽니다.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데, 이것을 히브리어로 ‘רָץ 라쯔’ 라고 합니다. 이것을 욕망이라고 하죠. 사실 아시겠지만 이것을 이룰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은 없습니다. 늘 부족함에 허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실까요? 그것 또한 ‘רָץ 라쯔’인데 이것은 뜻, 갈망, 원함이라고 하는데 바로 ‘아들’ 대한 뜻, 갈망, 원함입니다. 아들이란 아버지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구원되었다는 것을 하나님 아들이 되었다고도 표현합니다.
하나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 집의 모든 기업, 재산, 만물이 내 것이다 하는 물질적인 개념이 아닌 그분의 Desire, 그분의 갈망이 나의 갈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를 이루고 완성하려는 것이 아닌 아버지가 나의 갈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제화 하는 것을 רָצוֹן 라쫀, 비전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닮아가는 분을 아버지라고 합니다. 아들은 정말 놀라운 존재입니다. 아버지가 나의 뜻이 되는 것, 아버지의 갈망이 나의 갈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갈망은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봤자 그것으로 내가 아버지가 되어버리니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거 우리가 아들 되기를 원하십니다.
창세기 1장 1절 첫 단어는 בראשית ‘베레쉬트’입니다. 그리고 맨 앞에 두 글자가 바르, 아들입니다. 도대체 이 아들이 누구길래 이렇게 방대한 양의 말씀을 써내려가는 것일까요? 우리에게는 아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들입니다. 창세기 1장은 이 아들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아들이 되기 위해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런 시스템을 알려주는 것이 창세기 1장입니다.
창1:1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베레쉬트(בראשית) 바라(ברא) 엘로힘(אלהים) 엩(את) 하샤마임(השמים) 베엩(ואת) 하아레츠(הארץ)
인간은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창세기 베레쉬트에서 모든 출발을 새롭게 합니다. 요1:1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베레쉬트는 다바르입니다. 다바르는 히브리어로 말씀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아들에게 종속되고 접속되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말씀은 내가 이 땅에서 육신을 사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은 씨앗과 같습니다. 처음, 시작과 같습니다. 그 아들이라는 씨앗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자라나게 되면 영적인 삶, 영적인 Transformation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그 아들이라는 씨앗에게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당신의 뜻을 씨앗 속에 감추어 두셨을까요? 우리는 하나의 그릇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담고 싶지만 그러면 사실 우리는 그분의 경이롭고, 완전하고, 무한하고, 영원함을 다 받을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다 알려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이는 도통 알아듣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것이 비단 사랑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태양이 온 지구를 살리지만 그렇다고 조금 더 가까이, 끌어오게 되면 다 죽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뜻을 감추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살게 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위대한 빛과 지혜는 우리에게 드러나야 합니다. 감추어진 이유는 드러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감추어진 뜻이 어떻게 드러나야 할까요? 그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신약성경입니다.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 신약성경이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의 육신의 라쯔, 욕망을 죽음에 넘기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빛과 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티슈리월 9일이고 내일은 티슈리월 10일 대속죄일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테트’의 영적 의미는 ‘선, 비밀’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토브(Good), 선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은 착한 행실을 하는구나 라고 생각할까요? 착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항상 착하십니까? ‘테트’ 전에 나오는 알파벳은 ‘헤트’입니다. 생명이 있어야 선함이 옵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이 곧 선함(토브)이라는 것입니다.
창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은 왜 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어서 이 사단이 나게 하셨을까요? 하지만 사실 히브리어로 보면 우리가 아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쯔 하하임, 베토크 하간’ 하면 생명나무는 동산 가운데 안에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베에쯔 하다아트 토브 베라아’ 는 뒤에 어디에 있다는 말이 없습니다. 뒤에 ‘베토크 하간’을 붙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선악의 지식나무는 어디 있는 것이 밝혀지지 않은 우리의 허상, 나의 욕망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동산 중앙에는 오직 생명만이 있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아무리 채워도 만족할 수 없는 나의 잣대를 들이대는 선악의 지식에 빠져버린 것은 하나님의 선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아닌 선악의 지식에 빠져버린 것은 삶의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The Man,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아닌 내 자신의 육체를 완성하려는 목적으로 사는 것, 이 땅에서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리면 오로지 보이는 것은 선악의 지식나무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쁘고, 마음에 들고 안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선악의 지식나무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악의 지식나무, 선과 악, 항상 착한가 아니면 어떨 때는 착하다가 어떨 때는 악하다가 하는 것인가? 하지만 선악의 지식나무란 것은 항상 착한 것, 항상 선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 아내는 이스라엘에 도착해서 한참 자고 있을 시간인데요, 제 아내는 항상 선할까요? 아닐까요? 어떨 때는 좋고, 어떨 때는 나쁩니다. 친절하고 상냥하다가도 어떨 땐 화내고 성질내고 마녀가 따로 없습니다. 보고 싶다가도 어떨 땐 제 속에서 쾌재를 부릅니다. 지금은 보고 싶습니다. 정말입니다. 하지만 언제 바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선악의 지식나무로 나에게 좋고 나쁨을 계속 가리는데 이것은 언제 배신할지 모릅니다.
이것을 토후 바보후(Panic disorder, 공황장애)라고 한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패닉에 빠지는 것입니다. 모든 시스템이 무너져버립니다. 스스로가 나의 동산 중앙에 선악의 지식나무를 짊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정보들을 접하고 받아들이는 이유도 나한테 좋은 것, 나쁜 것을 가리기 위함입니다. 회사에 대해서도 나에게 좋은 회사인지, 나쁜 회사인지를 가리고, 교회에 대해서도 나에게 좋은 교회인지, 나쁜 교회인지를 가립니다. 좋은 나라, 나쁜 나라, 좋은 정부, 나쁜 정부, 문제가 있는가? 없는가를 따집니다. 이것이 다 사람 가운데 선악의 지식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테트’의 영적 의미는 또한 ‘지혜’ 라는 것이 있습니다. 담겨진 것 속에 숨겨져 있는 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라고 하는 것은 숨겨진 것이 드러났을 때를 말합니다. 모든 자연적인 것이 이 그릇 속에 담겨지고 이 그릇 속에 담겨진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테트’ 다음에 나오는 알파벳은 ‘요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야훼, 야(יה)라는 것은 ‘요드를 보라’ 인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커다란 것을 보기 원하지만 그것이 아닌 요드를 보라는 것입니다. 작은 씨앗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씨앗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자연적인 것이 다 영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자연적인 것 속에 다 숨겨 놓으신 것은 다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 그것을 발견할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혈과 육으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혈과 육의 개념, 육신적이고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개념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죽노라 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개념을 벗고 영의 개념을 알게 되는 것이며 그것을 알아서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합니다. 육이 아닌 영의 관점,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다시 말씀을 보겠습니다.
창1:1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베레쉬트(בראשית) 바라(ברא) 엘로힘(אלהים) 엩(את) 하샤마임(השמים) 베엩(ואת) 하아레츠(הארץ)
태초에 라는 것은 시작을 말하는데 거듭남의 시작을 말합니다. 새로운 창조의 시작입니다. 베레쉬트, 모든 거듭난 새 창조는 머리에 달려있습니다. 아들의 머리, 그리스도의 머리에서 창조가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로쉬라는 것은 머리를 통해서 신의 형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하늘을 하샤마임인데 하나님께서 최초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속사람을 말합니다. 속사람이란 영에 속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샤마임은 하나님의 어떠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어떠함을 속사람에게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어떠함을 속사람 속에 비밀스럽게 감추어 두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춰진 보화, 땅 속에 묻힌 아무도 모르는 보석이라고 합니다.
하늘은 땅 속에 있습니다. 땅 밑에가 아닙니다. 땅은 하아레쯔라고 하는데 이것은 겉사람을 말합니다. 속사람은 겉사람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결합, 속사람과 겉사람을 통일시키십니다. 이것을 바브(ו), 못으로 연결하십니다.
이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닌 이것을 통일시키십니다. 하늘과 땅이 통일된 존재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하늘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지만 땅에 대한 설명이 많은 이유는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요3:12 내가 땅의 것들을 너희에게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내가 하늘의 것들을 너희에게 말하면 어떻게 너희가 믿겠느냐?
땅의 일을 얘기해도 잘 믿지 않는데 하늘의 일(속사람, 영에 대한 일)을 얘기하면 어떻게 너희가 믿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속에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우리 안에 속사람이 있고 그 속사람이 하샤마임입니다. 우리의 속사람 속에 하나님을 담게 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나의 속사람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고전15:48 땅에 속한 자들은 또한 땅에 속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또한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으니
고전15:44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려지고, 영으로 속한 몸으로 일으켜지나니, 본성에 속한 몸이 있고, 영에 속한 몸이 있느니라
땅은 겉사람, 본성에 속한 몸입니다. 하늘은 속사람, 영에 속한 몸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은 하늘과 땅을 계속 다루시는데 영에 속한 것이 먼저가 아닌 본성에 속한 것이 먼저 다루어집니다.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본성에 속한 것 다음에 영에 속한 것이 오려면 본성에 속한 것이 죽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겉사람과 속사람에 대한 복음의 비밀입니다. 우리의 본성에 속한 것이 죽어지고 다음으로 영에 속한 것이 오도록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더 이상 겉사람으로 살지 말고 속사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하거나 화나게 하면 갈등 상황에 직면합니다. 물론 화부터 내고 성질부터 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공동체 가운데 화 내는 한 사람만 있어도 분위기는 완전 싸늘해집니다. 기운이 엄청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주 인카운터도 했고 이제 내가 화를 내면 악한 영이 들어오는 문을 열어주게 되는 것이니, 그럼 인카운터 또 다시 해야 하고 할렐루야!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시겠습니까? 아니면 지옥의 문을 여시겠습니까? 짐 엘리엇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은 바보가 아니다.’ 반드시 영원한 것을 택하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새 창조,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속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속사람을 닮기 위한 겉사람, 하늘을 닮기 위한 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하샤마임이 아닌 하아레쯔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땅의 상태가 어떠합니까? 혼돈하고 공허하다고 합니다.
창1:2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
베하아레츠(והארץ) 하예타(היתה) 토후(תהו) 바보후(ובהו) 베호쉐크(וחֹשֶׁךְ) 알(על) -프네이(פני) 테홈(תהום)
베루아흐(ורוח) 엘로힘(אלהים) 메라헤페트(מרחפת) 알(על)-프네이(פני) 하마임(המים)
땅은 혼돈하고 공허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거듭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의 진리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상태, 주님의 테트, 주님의 지혜, 주님의 선이 무엇인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혼돈하고 공허합니다.
혼돈은 히브리어로 토후(תהו)라고 합니다. 토후는 신32:10을 봐야지 알 수 있습니다. 혼돈, 완성이 비어있는 상태, 형태가 없는 상태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선에 속한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신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우베토후,ובתהו)에서, 짐승의 부르짖는(옐렐,ילל) 광야(예슈몬,ישמן)에서 만나시고 호휘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에레쯔 미드바르, 광야에서 만나십니다. 그리고 베토후, 혼돈 속에서 만나십니다. 하나님과의 첫 만남은 토후에서입니다. 선에 속함이 없는 그곳에서 부르짖게 됩니다. 토후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옐렐,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 선에 속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인식할 때 그것을 부르짖을 때 토후의 상태에서 주님이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먼저 우리를 독수리와 같이 호휘하시고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이번 인카운터에서 여전히 죄를 사랑하는 우리 모습 가운데서 나에게 선한 것 하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옐렐, 부르짖었습니다. 황무지 같은 죽음의 상태에서 우리는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토후입니다.
이 부르짖음은 이후 선지자들에 의해서 애곡이란 단어로 바뀝니다. “애곡하라, 내 백성아, 애곡하라. 너희가 바로 토후의 상태이다. 목자들아, 외쳐 애곡하라” 베레쉬트 다음에 토후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역사가 있게 되면 우리는 모두 토후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렘47: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물이 북방에서 일어나 창일하는 시내를 이루어 그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그 성읍과 거기 거하는 자들을 엄몰시키리니 사람들이 부르짖으며 그 땅 모든 거민이 애곡할 것이라
그 땅 모든 사람들이 애곡합니다. 창1:2에서 물이 덮고 있는 가운데 거기서 애곡하는 것입니다. 인카운터 때 말씀의 홍수, 진리의 홍수 가운데 그곳에서 우리는 부르짖었듯이 토후의 상태, 내게 선한 것이 없다고, 내가 속사람으로 영으로 살지 않는다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1:2에 속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것입니다. 아니 창1:2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베레쉬트를 육신적으로 해석해서 예수만 믿으면 다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선한 것이 하나도 없고 내가 속사람으로 살지 않고 하늘을 창조하셨음에도 영적인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어찌할꼬 하면서 우리는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토후의 상태로 계속 넣으시고 물을 붓고 계십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만나기 위해 진리 가운데 임하십니다. 아멘!
사34:11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 거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혼란(תהו, 토후)의 줄(קב, 카브)과 공허(בהו 보후)의 추(אבן 에벤)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
어려운 말입니다. 혼란의 줄이 무엇일까요? 우리 속에는 야곱도 있고, 에돔도 있습니다. 에돔은 담(דם). 혈과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에돔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할수록 육신적인 개념이 견고해져만 갑니다. 그 에돔에게 혼란의 줄을 베푸십니다. 카브 토후, 혼란의 줄을 통하여 옐렐, 부르짖게 됩니다. 할렐루야!
카브는 소망의 시스템입니다.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버스 라인(line)을 의미하는데 그 라인을 따라가면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완성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줄이 아닌 그 라인을 따라가면 그 끝에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공허는 무엇일까요? 보후는 시스템이 비어있는 상태, 집이 없는 상태, 아들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 에돔에게 에벤 보후, 보후의 추를 주십니다. 에벤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을 말합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토후는 소망을 가지게 되고, 보후는 아버지와 아들을 가지게 됩니다. 토후와 보후 모두 헤이(ה)로 끝납니다. 이제 소망을 바라보고, 완성을 바라보고, 집을 바라보고, 아버지와 아들됨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사랑이 하나도 없는 것이 토후이고, 나에게 진리가 하나도 없는 것이 보후입니다. 그러나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이제 그것을 소망하고 바라보는 것이고 그것이 실제화 되도록 바브(ו), 연결하는 것이 ‘토후 바보후’입니다. 우리의 상태는 이 ‘토후 바보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베호쉐크, 그리고 어둠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둠이란 영적인 실제에 대해서 무지한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이런 무지의 상태에 빛을 비추실 것입니다. 어둠 위에 빛을 비추실 것입니다. 아멘! 우리의 상태가 토후 바보후 베호쉐크 임을 고백하고 부르짖으며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의 애곡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선악의 지식나무를 구하며 사는 것이 아닌 생명나무를 택하며 육신의 삶이 아닌 영의 삶을 택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영의 세계를 활짝 열며 생명의 성령의 토라, 그 감추어진 테트, 비밀을 선포하며 함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주님, 우리가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 가운데서 이제 부르짖습니다. 우리를 안아주십시오. 우리를 감싸주십시오. 자기사랑과 자기욕망으로 살았던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갈망, 비전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조그마한 씨앗, 그 감추어진 씨앗 속에 우주를 넣어두신 주님, 당신의 생명이 가장 선합니다. 더 이상 육신의 개념이 아닌 영의 개념으로 살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통일, 겉사람과 속사람이 결합되어 오직 The Man의 비전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카브 토후 그리고 에벤 보후, 혼돈의 줄과 공허의 추를 바브(ו)로 연결해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5780 창세기 특강 2 (첫째 날)
창1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육신의 삶이 시작이 됩니다. 작은 씨앗이 점차 자라서 나무가 되어갑니다. 때로는 조금 변한 육신의 모습에도 굉장히 흥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어떠함은 사실 변하는 것 같아 보여도, 진짜 변하진 않습니다.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나부터 챙기고, 나의 죄, 자기 사랑 이러한 것들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하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변하는 것은 육신의 세상에서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 육의 나무 줄기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생명나무로 옮겨지는 것을 원하십니다. 도은미 사모님께서 말씀하셨듯 고쳐달라 하지 말고 죽여달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고쳐쓰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완전히 끊어지는 사역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끊는 사역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의 육신, 나의 성질,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진정 사랑하는 듯 하지만 사랑할 수 없고 여전히 죄를 사랑하고 나의 정욕으로 살아가는 것을 주님은 완전히 끊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레16
8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9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오늘은 티슈리 10일, 대속죄일입니다. 대속죄일에는 레16장의 말씀을 읽습니다. 두 염소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야훼를 위해서(לַיְהוָה 라야훼),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사셀을 위해서(לַעֲזָאזֵל 라아자젤)입니다. 아잘(אָזַל)은 보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탄의 힘을 보내기 위한 염소를 말합니다. 오늘 대속죄일은 이 사탄의 힘을 보내버리는 날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바로 이 아사셀 염소를 끌어안고, 스스로 음부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동안 사탄의 세력이 우리를 마음대로 했다면, 이것을 주님이 분리시킨 것입니다. 끊어버리다란 것을 히브리어로 가자르(גָזַר)라고 합니다. 완전히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이 완전히 자르는 사역을 주님은 대속죄일, 욤키푸르 때 하십니다. 염소을 안고 가는 절벽, 무인지경을 또한 가자르라고 하는데, 이 광야로 가서 잘라내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사람은 욤키푸르의 비밀을 알아야만 새로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키푸르 라고 하는 것은 '카파르 :고치다, 속죄하다’입니다. 사람이 속죄를 모르면 영의 세계를 살 수 없고, 하나님 나라를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럼 광야는 어떤 곳일까요? 완전히 잘라내는 기름부으심이 있는 곳입니다. 고칠 수 없습니다. 고치려고 했지만 그게 잘 안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욤키푸르 때 완전히 잘라내는 것입니다. 무인지경, 절벽으로 가서 떨어뜨려서 끝내는 것입니다. 구차하게 밧줄을 준비한다던가, 염소에게 낙하산을 준비한다던가 하지 말고 더 이상 그것에 미련을 갖지 않고 육신의 세상에서 완전히 잘라내는 것입니다.
광야는 미드바르 라고 하는데, 다바르(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광야는 자력으로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광야는 머리되신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내 힘과 능력으로는 살 수 없고, 하나님이 필요하구나 라는 것, 광야는 그것을 가르쳐주기 위한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서 종종 광야를 경험케 하시는데, 그 이유는 우리 인생에서도 반드시 광야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제일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빼앗아두시기도 하고, 내가 신뢰하던 것들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나의 산성이 되십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혹시 광야의 삶을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육으로 태어나 철저히 육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면 공부할 수록 광야와 같이 변하게 됩니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곳이 에덴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마법처럼 뭔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삶 속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했던 것에 말씀을 통하여 이제는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에게 고통이 크면 클수록, 주님은 그것을 영의 토라로 바꾸셔서 광야가 아닌, 더 큰 에덴동산이 될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 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가자르가 되신 이유입니다. 주님을 만나서 광야가 에덴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은 사실 어떤 물질적, 공간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물질적이고, 공간적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에서 쫓아냈다고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참으로 재미난 표현이 있습니다.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쫓아냈을까? 아니면 사람이 하나님을 쫓아냈을까? 에덴 동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니까 인간은 하나님이 사람을 쫓아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쫓아내셨다고 하는데 히브리어로 보면 사람이 하나님을 쫓아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혼(גָּרַשׁ 가라쉬)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내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다. 하나님이 안계시니까 모든 고통과 저주와 죽음이 난무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에덴 동산에서 선악의 지식나무를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혼돈과 공허, 토후 바보후를 택하였기 때문에 이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존재가 아닌 그 존재의 Something, 어떤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주 목적이십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다고 합니다. 질서와 시스템이 없는 혼돈과 공허의 상태를 말합니다.
시18:9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그분의 강림하시는데 그의 발 아래는 어둡습니다. 어둠(호쉐크)은 빛이 나오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어두운 밤하늘이어야지만 별빛이 잘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베레쉬트 가운데 들어오면 우리에게 혼돈과 공허가 있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상태가 지금 혼돈과 공허라는 것은 이제 제대로 된 질서를 가져오기 위한 절호의 찬스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의 영적 진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하다고 해서 절망만 하시지 마시고 이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이때입니까?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를 운행하시며 우리를 감싸주실 것입니다. 그 혼돈과 공허, 어둠 가운데 빛이 있을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의 상태를 다른 말로 하면 어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둠이란 다 자기 자신의 필요를 위해 사는 것, 개인을 위해 사는 것이며 빛(אוֹר 오르)이란 그 개인을 위해 사는 것을 뛰어넘는 것을 말합니다. 빛은 반드시 어둠 속에서 발생합니다.
마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빛이 없어서 흑암에 앉은 백성들은 자기 자신의 빛으로만 봅니다. 누구를 만나도 다 자기 위주로 생각합니다. 자기를 살리려고 하는 것을 흑암이라고 합니다. 자기 육신을 살리려고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어둠은 흑암입니다. 그리고 흑암은 곧 죽음입니다. 죽음을 향해서 가는데 그것을 보려고 그렇게 집착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끊임없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는 방법이 아닌 빛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주님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빛이십니다. 우리에게 빛이 있게 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어둠이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빛을 통해서만이 보게 됩니다. 누군가는 빛을 담아서 빛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어둠을 담아서 어둠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눈이 어둠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탄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가지고 유혹합니다. 아버지와 같이 되는 것을 가지고 유혹을 합니다. 생명나무가 아닌 선악의 지식나무를 먹으라고 말입니다. 생명나무는 내가 아닌 이웃을 보지만 선악의 지식나무는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 보게 됩니다. 어제 말씀드린 교회의 비전 가운데 7메시지는 알렢부터 자인까지 올라가는 사닥다리 그림입니다. 자인(ז)은 Returning light 라고 합니다. 돌아오는 빛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비추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제자훈련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아인(ע)이 되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인과 자인을 합치면 오즈(עֹז),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고 아버지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선악의 지식나무는 어둠으로 보는 능력을 줄 뿐입니다. 눈이 밝아져서 나 자신을 보게 되고 결국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지 않게 되면 무화과나무 아래에 숨게 됩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나의 미래, 나의 어떠함 뿐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좋으냐, 나쁘냐. 내 마음에 드냐, 안드냐. 그런 것만 보게 됩니다. 제자 훈련 그런거 하면 나한테 도움이 되냐, 안되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보아야 하고 하나님과 같은 것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 이웃에게서 하나님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빛을 생명나무 라고 합니다. 빛은 곧 생명이고 이 빛을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창1:3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바요메르(ויאמר) 엘로힘(אלהים) 예히(יהי) 오르(אור) 바예히(ויהי) 오르(אור)
새롭게 살아가는 거듭난 삶, 우리의 삶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사는 첫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빛입니다. 히브리어로 빛은 ‘오르(אור)’입니다. ‘오르’는 알레프로 시작합니다. ‘알레프’ 라는 것은 히브리 알파벳 가장 처음에 나오는 글자로 신성, 으뜸, 근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신성(알레프)을 배우고 익혀서 훈련해서(라메드) 말해내는(페)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화되어 반드시 머리가 되는데까지 가야합니다. 이것을 빛이라고 합니다. 빛이 있는 상태는 하나님께 속한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것뿐만 아니라 이것이 최고의 상태라는 것을 인식시켜 줍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첫 단어 바요메르(ויאמר)의 순서를 바꾸어 보면 מִי אֹור 미 오르, Who light. 누가 빛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빛은 사람(Person)입니다. 어떤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메시아인 사람, 이 빛을 찾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 빛이십니다.
요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빛은 참 빛입니다. 어둠은 가짜 빛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욕망만 알고 늘어놓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내가 다 알고, 내가 다 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가 본다고 하면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진짜 빛으로 보는 것은 주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 그분의 라쫀을 보는 것은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이 빛을 필요로 하는 자들은 영접하게 됩니다. “주님 여전히 내 눈으로는 빛이 아닌 어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웃을 보길 원합니다.” 라고 하는 자들에게 참 빛이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빛이 필요합니다. 이 빛을 영접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빛은 그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인도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악이 문제가 아닌 오히려 자신이 선하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모든 출발조차 할 수 없게 합니다. 이전에 우리의 모든 삶은 황무지에서 옐렐, 짐승처럼 부르짖었고 애곡했던 삶이었습니다. 토후 바보후의 상태였던 우리, 깊은 어둠 가운데 거했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빛 밖에 없습니다. 에레쯔는 오르(빛)와 라쯔(갈망)이 합쳐진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은 빛을 갈망함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생명은 모든 살아있는 자들에게 최고의 것입니다. 내게 빛이 비춰질 때 하나님의 선과 진리인 빛이 최고의 생명, 최고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어본 자만이 이 고통을 압니다. 빛 가운데서 살아가는 생명, 이것을 최고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첫째 날의 단계입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 째 날까지 가운데 첫째 날의 단계입니다.
창1: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창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바이크라(ויקרא) 엘로힘(אלהים) 라오르(לאור) 욤(יום) 베라호쉐크(ולחשך) 카라(קרא) 라일라(לילה) 바예히(ויהי) 에레브(ערב) 바예히(ויהי) 보케르(בקר) 욤(יום) 에하드(אחד)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어둠은 거듭나기 전의 삶이고 빛은 거듭난 이후의 삶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악이 선 같고, 거짓이 진리 같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몰아내고 광명의 아침이 밝아옵니다. 선과 진리에 대한 빛이 비추어 집니다. 그래서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것이 아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이제 주님의 빛이 비춰지고 그래야만 다음날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날(day)이라는 것은 단순히 24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단계를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날(day)은 ’욤‘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손(요드)으로 실제화(바브)되는 사역(멤)입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처음 스타트는 어둠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의 첫 단계는 욤 에하드(첫째 날)입니다. 첫째 날은 에하드를 first로 번역하는 것이 아닌 하나됨, 통일됨을 말합니다. 하지만 둘째 날부터는 second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욤 에하드는 모든 단계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가장 기초 단계를 말합니다. 욤 에하드를 통과하지 않고 둘째 날부터 진행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빛이 비춰지지 않으면, 어둠을 몰아내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 사랑, 나의 어둠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는 선함도 진리도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땅이 혼돈과 공허의 상태를 겪습니다. 우리의 마음, 겉사람은 나에게 좋으면 선이고, 나에게 나쁘면 악이라고 인정하는 명확한 육신적이고 감각적으로 살아갑니다. 이제 첫째 날이 반드시 통과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내가 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대속죄일, 이 아침에 첫째 날의 역사가 우리 안에 가득해지길 축복합니다.
많은 교회가족들이 이스라엘 비전트립을 떠났는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하는 기도가 ‘쉐마 이스라엘’(들으라 이스라엘아), ‘야훼 엘로헤이누’(야훼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야훼 에하드(야훼는 한분이시다)’입니다. 여러분, 야훼는 에하드이십니다. 모든 것의 기초가 첫째 날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 기도 -
주님, 먼저는 우리가 토후 바보후의 상태에 있음을 압니다. 주님,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정말 내가 아닌 주님만을 높일 수 있게 하소서. 나에게는 결코 선한 것 하나 없다는 부르짖음이 우리에게 있게 하소서.
육신적이고 감각적으로 살아가려는 어둠 가운데 빛을 보게 하시고,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담는 눈을 갖게 하소서. 빛을 통하여 하나님과 같은 뜻과 비전을 보게 하소서.
주님, 내 속에 사랑이 없었고, 내 속에 생명이 없었습니다. 주님만이 사랑의 빛이시고, 생명의 빛이십니다. 토후 바보후의 상태임을 고백하며 깊은 어둠 가운데 빛 비추실 주님 감사합니다. 빛에 대한 갈망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우리의 영혼이 빛에 대한 갈망으로 깨어날 것입니다.
욤하키푸림, 우리를 위해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잘라버리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참 생명이시며 참 빛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빛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이룰 수 있는 빛을 영접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의 빛을 따르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에하드이신 주님만 따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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